21. 백학봉(白鶴峰)
김지하
멀리서 보는
백학봉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 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 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22. 벼랑
김지하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23. 벽
김지하
벽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벽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벽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님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24. 별
김지하
내일 새벽
나의 죽음 뒤에
아마도
별이 뜰 것이다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 뜰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다
살아서는
내 몸 속에 빛나던,
아름답던,
나를 이제껏
살게 했던
그 별이 처음으로
우주에 뜰 것이다
숨어 있던 별,
아마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위에
비밀을 열 것이다
다시 산다면
나는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로
항상 떠
내내 비췰 것이다.
25.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김지하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 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 밤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26. 不歸
김지하
못 돌아가리
한번 딛어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국소리 밤새워
천장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뽑혀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27. 비
김지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춤추며 하소하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온갖 것 소리지른다
흙도 사금파리도
상추잎도 소리지른다
닫힌 몸 속에서
누군가 소리지른다
외침의 침묵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28. 빈 산
김지하
빈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 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29. 빗소리
김지하
눈감고
빗소리 듣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비 솟는 소리
듣네
귀 열리어
삼라만상
숨쉬는 소리 듣네
추위를 끌고 오는
초겨울의 저 비
산성비에 시드는
먼 숲속 나무들 저 한숨 소리
내 마음속 파초잎에
귀 열리어
모든 생명들
신음 소리 듣네
신음 소리들 모여
하늘로 비 솟는 소리
굿치는 소리 영산 소리 듣네
사람아
사람아
외쳐 부르는 소리
듣네
30. 사람 사이의 틈
김지하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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