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으로 자라는 시의 숲
박수빈
1.
문학의 길은 함께 가면, 힘을 얻는다. 이 생각은 ‘애지문학회’의 사화집을 읽으면서 강화되고 있다. 물론 글은 혼자 쓰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의 여러 답답한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글쟁이들일 테니 동병상련이랄 밖에.
여기 10번째 마련한 애지문학회의 열정이 담긴 시작(詩作)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감상하면서 시단(詩壇)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의 징조에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이 함께 한다. 원래 이 말은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산을 옮길 정도의 집념으로 재해석하고 싶다. 운동을 많이 하면 운동이 늘고 요리를 많이 하면 요리가 느는 것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늘게 된다. 예술의 세계 역시 열성으로 한 우물을 파야 비로소 빛나는 성과의 우공(寓公)을 낳는다. 그 길이 작가에게는 험난한 가시밭길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감동의 자리가 될 것이다.
사화집에서 의미 있는 우공(寓公)을 만나는 행운을 얻고 있다. 27명의 주인공들에 나타나는 정서는 대체적으로 음지의 성향을 지닌다. 슬픔, 우울, 고독, 권태, 무기력, 결핍감, 아쉬움, 그리움 등등으로 대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시에서 비극성의 긴장미를 감지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외로움이 있고 이를 발현하는 시는 세상의 많은 욕망에 대한 좌절이며 존재의 이유에 대한 방황으로 읽혔다. 밝은 내용의 시도 있지만 슬픔의 편에 서서 어룽지는 눈물의 무늬와 결을 함유한 시들이 훨씬 많았다. 이렇게 작품의 성향은 개별적이고 다르지만, 거시적으로 어우러지는 모습이 줄기와 뿌리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닮았다. 리좀(Rhyzome)적인 양상으로 군락을 이루는 작품들의 관계에서 옆으로 자라는 시의 숲이 연상된다.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의 언급처럼 이는 상하관계의 경직된 체제가 아니라 유연하며 복수성의 결속을 이루고 있다.
다양성이 모여 전체를 만들어 가는 연대 방식의 측면에서 소중하지 않은 작품이 없다. 이를 귀히 여겨 이 글에서는 강서완, 곽성숙, 권영옥, 김명이, 김성애, 김연종, 김용상, 김인갑, 김정원, 김지요, 김혁분, 김현식, 류현, 박성진, 박종인, 안영민, 유안나, 이명자, 이현채, 이혜민, 이희은, 임덕기, 장효종, 조성례, 조옥엽, 조영심, 황경숙 등 모든 회원의 시 중에서 각 한 편씩을 택해 보고자 한다. 내용을 의미화하는 주제들의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니, 시는 음지에서 탄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 결핍, 상처, 정체성, 환경 파괴 등을 자양분 삼아 감수성으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편들끼리 묶어 본다.
2.
요즘 세상은 불확실성의 시대다. 요동치는 세계 경제, 지위, 사람과의 관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운 등등이 작용해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살이는 결코 쉽지 않은데다가 여러 관념과 편견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더 고되다. 김연종의「좌뇌형 인간 우뇌형 인간」은 이러한 시각과 사회현상을 지적하며 돌이켜보고 있다. “좌측통행이 세상의 진리라고” 따르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척추측만증이 생길 즈음” “세상의 등뼈는 조용히 우측으로 바뀌”고 만다. 그래서 “나는 늘 바른 사나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른 손으로” “밥을 먹고 글씨를 쓰”는 일은 “왼쪽을 능멸하는데 가장 익숙하게 사용”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자각이 있기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사회적 신분에 따른 탈을 쓰고 살았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필요와 위상에 따라 사회생활에 어울리는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이런 고달픔이「선글라스 대소동」을 벌이는 권영옥의 시에 투영되어 있다. 우선 “태양에 지친 그녀가 밤의 동굴로 들어”오는 도입부가 심상치 않다. “제습되지 않는 이곳”은 눅눅하고 먹먹한 화자의 심상을 대변한다. 이어서 “두 다리를 뻗고 가만히 누워/ 태양의 올을 풀어낸다.”고 표현했지만 과연 낮 동안의 “태양의 올”이란 밝고 화사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이 서술되고 있다. “빛은 천장의 거미줄을 녹이고,/ 박쥐들의 눈까지 멀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둠을 덮어쓴 그녀”가 마침내 마주하는 곳은 “산맥도 산도 아닌 원숭이공원”이다. 여기는 사람의 본성으로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 흉내나 내는 원숭이가 사는 공원이라서, 주체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므로 씁쓸하게 읽혀지는 대목이다.
가)
전화벨 소리에 고인 공기가 출렁이고
컴퓨터에서 보고서로 보고서에서 계산기로
그림자를 옮기는 사내
과장된 목소리에서 식솔들이 딸려 나온다
그림자는 유목의 습성이 말라버린 자국일까
떠도는 바람의 종아리 주저앉힌,
파놉티콘의 눈이
사내를 종일 따라간다
- 김성애,「유리족의 하루」부분
나)
우산 밑에 있는 사람은//
우산 위에 일을 모르고//
사방으로 놓인 살 속의 길을 가지//
선택된 어느 길 어느 사유에도 물과 만나//
움푹 깊어진다지// (중략)
어쩌면 우리는//
보고 싶은 면만 보는 법이지//
- 김용상, 「투명우산」부분
위의 시들을 읽으며 현대인과 자유의 상관성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중앙통제시스템과 거대담론과도 상관성이 있다. 거대담론은 각 분야마다 다양한 특성을 갖는 사회를 획일화하여 총체적으로 바라본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이 설계한 원뿔형태의 원형감옥(panopticon)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간수들은 중앙통제탑에서 죄수들을 한 눈에 감시하되, 죄수들은 아래의 여러 작은 방에 가두어져 절대로 감시탑을 보지 못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그래서 죄수들은 각자의 방에서 감시를 받는 줄도 모르고 방안에서나마 자유로이 움직인다.
사회의 각 분야를 적용해 볼 때, 권력은 중앙정부만 가진 것이 아니다. 가령 병원, 감옥, 공장, 학교, 법정, 회사 등에도 적용하는 힘의 관계가 있으며 이 권력이 은밀히 개입되어 있다. 이런 섬뜩한 깨달음이 가)의「유리족의 하루」에 해당한다. 원형감옥은 바로 현대 사회이다. 우리는 법원, 학교, 사무실 등 곳곳에서 감시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사무실에서 펼쳐지는 “사내”의 모습이 유리처럼 여실히 드러난다. “그림자”와 “식솔들이 딸려” 있고 여기저기에 CCTV가 달려 있어 “사내”는 억압되면서 일거수일투족이 발각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나)의「투명우산」도 살펴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보고 싶은 면만” 보는 본인 위주의 맥락에서 살고 있다. 그러느라 “우산 밑에 있는 사람은” “우산 위에 일을 모르”는 것 같다.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며 “물과 만나” “움푹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체제에 길들어지고 뒤섞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
갑갑하고 밋밋한 매장에 갇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된 감옥살이,
속없는 혼은 구천을 떠돈다
머리, 팔, 다리, 몸통을 따로따로 빼내
멀쩡한 전인을 병신으로 만드는
댓글과 토막글 퍼 나르기,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떠돈다
아름답든 더럽든
잊힐 권리가 무참히 짓밟힌 채
개인 신상과 풍문이 떠돈다
- 김정원,「마네킹」부분
라)
툭툭 뱉어지는 토마토의 언어
잘려나간 토씨들 도달하지 못한 조사들
수챗구멍에 굴러가 박히는 비문, 비명들
토마토는 구르네
썩어서도 토마토는 토마토
비문인 채로 열매인 말
뭉클뭉클 터져 쏟아지는
토마토의 심장
- 김지요,「토마토 축제」부분
다)에서 화자는 마네킹이 “매장에 갇혀”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는 인식을 한다. “머리, 팔, 다리, 몸통”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생각은 “댓글과 토막글 퍼나르기”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잊힐 권리”도 찾지 못한 채 “개인 신상과 풍문이 떠”도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요즘 SNS (Social Network Services)는 대세인지라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위와 같은 예시의 병폐는 상처를 낳기도 해서,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점을 언급하고 있다. 라) 역시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 터지는 말들은 상대를 아프게 한다. “수챗구멍에 굴러가 박히는 비문, 비명들”에서 울분에 찬 언어가 한 몫을 하고 있다.
3.
만남으로 존속되는 사람들의 관계는 다양하다. 힘이 되거나 짐이 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 구속이 되기도 한다. 박성진의「비누에 대하여」는 “비누”의 미끄러지는 속성을 포착하여 사랑의 조바심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버리는 너를” “나는 매번 대할 때마다 얼마나 난감해 했는지 모른다.”고 실토한다. “몇 번이나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지만” “중력과 부력의 균형점”을 찾으려면 집착해서는 안 되는 터라 사랑은 참 어렵다.
곽성숙의「어쩌다 나를 만나」에서는 동고동락의 애틋함이 스며있다. 화자는 “헐거워진 논길 위를 더디게 걷다가/ 어처구니 없이 지친 걸음”을 발견하고 “그 더딤과 무너짐 곁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나게 서럽고 고마운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화자는 “그녀의 마음 곁에 서보려고 했으나 우물/ 보다 깊은 마음결을 짐작도 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마음이 우물 보다 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야 이루어질 텐데, 저마다 살기 급급하다 보니 요원한 현실 앞에서 화자는 “오늘도 나는 눈물이 난다”며 회한에 젖는다. “어쩌다 나를 만나,/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뒤태”라는 표현에는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화자의 서러운 심정이 녹아 있다. 이렇게 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인지상정의 세계관 흐르고 있어 주목해 볼만 하다.
이명자의「남한강 나루터에서」에서도 어머니와의 정감이 전해온다. “연둣빛 무늬로 다가”오는 “강물 속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린다”는 대목에서 감지된다. “무의식으로 눈을 떴다 감으며” 왜 “나를 모른 체” 하는 것일까. “어눌해진 어머니의 표정”이며 “물의 방향으로 마음을 풀어놓으신” “어머니”는 “퀭한 기색으로 골짜기를 내려와” “하류로 젖어들고 있”기 때문이라서 쓸쓸한 여운이 남는다.
이런 느낌은 김명이의「그녀들의 동굴」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에서는 모녀지간의 갈등이 전개되고 있다. 화자가 어릴 때 “거울 앞에서 가르마 나누고 옆 꼭지에 넘겨 머리를 묶자/ 엄마는 빗을 빼앗아 가운데로 반듯이 빗겨주”며 엄마의 잣대로 되길 바랐다. 이렇게 “상고머리가 되어 빗질은 멈추어졌”던 기억을 회고하면서 엄마와 딸 사이를 가로막는 “동굴”이 생기고 관계가 차단된 느낌이다. 그러다가 “엄마, 아직도 이 동굴이 끝나려면 멀었나 봐요”라는 마지막 표현에서 애증도 관심에서 비롯하는 사랑의 일종이라는 암시하고 있다.
자고로 떠올리기만 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모정(母情)이 아닐까. 김혁분의「황태찜을 먹다」에서는 딸이 바라보는 연로하신 어머니와의 교감이 살갑게 전해온다. “딸에서 아내이며 며느리로 어미로 할미로/ 얼었다 풀렸다 말려온 엄니의 생”을 돌아보고 있는데 “추스를 틈도 없이 굽이굽이 돌아온 세월”로 표상된다. “튕겨질 듯 둥글게 휜 어머니의 허리”와 “살아 보려 컥컥거리며 목에 박힌 가시”에서 “쓰디 쓴 기억”이 올라와 울컥했을 것 같다.
악기 중에 사람의 목소리로 만든 악기는 “명주바람의 숨결”이며 그렇게 “너”는 화자에게 다가온다는 조영심의「소리의 정원」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강과 공명감을 건너/ 솔 숲길 솔향을 담은 무용선”에서는 소리에서 후각으로 공감각적인 전이가 일어나는 부분이다. 그 만큼 “아카펠라”의 화음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이다.
김현식의「이면도로의 신호등」은 신호가 바뀔 때 상황과 행동에 대한 장애를 언급하고 있다. 거리에는 신호등이라는 “원칙이 걸려 있”다. “머지 않아 또 걸려 있”고 “멀지도 않은 거리에 많이도 걸려 있”어 강박을 낳고 “흐름이 끊”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원칙은 고집스럽게 반짝”이지만 화자에게는 이 상황이 혼돈스러울 따름이다.
류현의「너섬의 까마귀들」은 국회의원을 풍자하고 있는 시이다. 너섬은 여의도(汝矣島)의 한자식 표기를 우리말로 풀어 쓴 경우이다. “까마귀 삼백 마리”는 당연히 국회의원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들이 “우글우글 모여”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패거리로 나누어” “대가리 털 다 빠지도록” 이권다툼을 하니, 이들이 쓰임새 있기란 만무하다.
4.
이번에는 시간의식에 대한 양상의 시들을 모아 읽어본다. 조옥엽의「응급실」에서는 그야말로 사투를 다투는 응급실에서의 위기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속도가 생사를 가르”기도 하며 “하얀 가운들이 바람의 머리칼 잡아타고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 뿐인가. “달아나려는 넋과 그 손 놓지 않으려는 이들의/ 치열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임덕기의「아랫목」은 온돌방의 추억을 떠올리며 과거회상시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전기밥솥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그 시절에는 군불을 때는 방이 따듯해지면 아랫목 이불 속에 밥주발을 묻어두고 따듯하게 유지하곤 했었다. 세월은 흘러 “군불 때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절절 끓던 아랫목도” 없고 “밥주발도 사라”져 화자는 “뼛속까지 시”리다면서 회포를 풀고 있다.
안영민의「절름거리는 무대」에서는 마음의 겨울나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월동을 대비하려고 하나 “잘라야 하는 꼬리”며 “매듭”과 “풀리지 않는 멸시”들 속에서 “상처”는 깊어만 가고 있다. 그러다 홀연 화자는 “싼 것도 비싼 것의 사이에” “끼었”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
이희은의「월식」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발상은 월식 현상이 “생일이면서 기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는 밤”이나 “색이 다른 두 발”의 “스텝이 엉키”는 상상이 가능하다. 이 시에서 보건대, “레퀴엠과 생일송이 교차”하고 “압화처럼 유언”이 있을 뿐 아니라 “케이크에 촛불 대신 향을 꽂아 놓”는 이미지들의 나열은 교차되는 감정을 잘 묘사한 부분이다. 그런데 어쩌랴. “나의 기도는 이미 오래 전에 늙”어 버린“ 상황종료의 시간이니 헛헛하기 그지없다.
황경숙의「빙하 혀」는 환경문제를 다룬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현상을 “누설”로 환기하고 있다. 이는 위기의 시간들이 흘러내리는 것이며 “멀리서 온 시간이 혀끝에서 멈”추는 것이다. “멍든 사과의 귀를 핥으며/ 다른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라거나 “흰 살점을 삼키고 뱉어 내는 빛의 물갈퀴”라는 묘사가 빼어나다. “사라지는 오로라를 부르는 혀를 놓친 목소리”는 또 어떤가. “아직 발견된 적 없는 최초와 최후의 둥근 화석을 물고 있는”는 빙하의 중요성이 새삼 실감난다.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로 박종인의「지구의 이중장부」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 지구는 “70억 밥줄 에너지 저장창고”이다. 이렇게 귀중한 곳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현실이란 “과속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빌딩이 치솟고 도시는 광란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이 시에서는 노골적으로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데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흑자를 가장한 적자를 산출하고, 빙산이 녹고 유빙이 늘어”나는 부분이 그러하다. “적자를 흑자로 자신의 몸을 이중장부로 약 대신 쓰는 지구”는 “결국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기에 경각심을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조성례의「수면무호흡증」은 매미가 우는 것을 코를 고는 내용으로 전환하고 있다. “찌르륵 컥, 찌르륵 컥”이라고 표현한 의성어가 감칠맛이 난다. 호흡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사이는 잠깐일지라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다. 매미의 입장에서 보면 여름 한철 매미가 울부짖기 까지는 오랜 시간을 “어둠의 색깔로 시간을 측정해 보는 밤”이 있었다. 이 시에서 그런 인고의 시간의 소중함을 헤아려 본다.
5.
시인들에게 글쓰기는 정체성을 찾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김인갑의「문신(文身)」에는 글을 쓰는 통증이 배어 있다. “되돌릴 수 없”고 “지울 수 없”어 “다시는 문신하지 않”겠다고 “그 고통 다시는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문신으로 읽히다가 글쓰기와 연동이 되면서 내용이 심화되고 있다. “진피층을 뚫고 몸 속 혈관을 미끄럼틀 삼아/ 거칠게 파도치는 잉크들/ 일초에 백 번을 찍어 만들어지는 글자의 소용돌이/ 몸의 언어”라는 표현이 입증한다. 그래서 “세상 모든 시인들은 문신을 한 사람”인지라 아픈 영혼들이다.
유안나의「북채」는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이다. 회고에서 비롯하는 기억의 재현술이라 할까. 화자인 나는 고창에 간다. “일가친척 한 사람 없지만” “목줄기에 흐르는 강물 소리”에 이끌려 간다. 그만큼 내재된 그리움의 표출이다. “버드나무 가지 꺾어 피리 불면 어린 뱀이 따라오고‘ ”송아지 울음소리 그 뒤를 따라“가는 연상에서 파악이 가능하다. 이때 나는 ”북채 하나를 얻“는 기분으로 ”내 유년의 한때를 흠씬 두들기고 싶“어 하는데 그 대상인 북은 ”구름을 덮고 있는 달“을 은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이현채의「분홍, 분홍, 분홍」에서는 외로운 자아의 심상이 포착이 된다. 일반적으로 분홍색은 화사한 색이라고 느끼지만 화자에게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분홍, 분홍, 분홍”이렇게 세 번씩 호명하는 이유는 “자살한 아이를 강물에 뿌리고 온” “외숙모 같은” 여자가 있고 다음으로 “감옥에 갇힌 남편을 면회 갔다 온” “이웃집 여자 같은” 여자가 있으며 또 한편으로 “저만치 앉아” “국수를 먹”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어 긴 머리칼에서 국수 면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가느다란 흐느낌”이라 했으니 울적한 기분이 든다.
정체성 찾는 의식은 이혜민의「말달리자」에서도 발견이 된다. 적극성을 띄면서 화자는 자신이 “바람처럼 떠돌아 뿌리 찾”는 마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말과 말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넘나들면서”에서는 말(馬)이 말(言)로 전환하여 느껴지기도 한다. “말 발굽 속에 떨어지는 말들을 조심스럽게 밟”았다는 부연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들꽃바람 자지러지듯 일렁이는 초원을 달”릴 때는 호연지기의 순간이었으리라. 읽으며 가슴이 탁 트인다. 그러다 “전생을 한 바퀴 돌고 말매미 껍질 벗듯 생을” 벗어난다. 급기야 “앞 다리를 쳐든 채 초원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서러운 한 쌍의 천마”가 되는 상상력의 전이가 미묘하다.
장효종의「동결선(凍結線)」도 자아와 정체성을 찾는 그룹의 시에 포함된다. “빙점으로부터 서서히 내려오는 그림자를 벗어나야 한다”고 화자는 다짐한다. “차가운 시선이 다가올 때 나의 발은 얼마만큼 내려가야 얼지 않을까”와 “나는 얼마만큼 내려가야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대목에서는 두려움에 맞서는 진지함이 묻어난다.
강서완의「저울 사용법을 들었습니까」는 이미지의 열거와 어우러지는 아우라가 뛰어나다. “내리 깐 속눈썹을 노을빛으로 세어본 적 있나요?” 로 시작하는 질문은 답을 유보한 채 다음의 묘사로 계속된다. “입술에 깃든 온기나 얼굴에 퍼지는 수심은 어떤가요 수평선을 바라보는 옆모습은 또 어떤가요”로 우울하게 이어지며 한층 분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 시는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태양이 사라진다면” 찾아오는 “뜻밖의 북극”은 얼마나 춥고 고통스러울까. 저울의 기능은 본디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한편, 올려놓은 무게에 흔들리며 “망설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아이들은 복화술을 꿈”꾼다거나 “남자의 눈에서는 얼핏 나비”를 보는 장면은 현재 있는 상황과 마음이 바라는 곳이 상이한 경우에 나타나는 엇갈리는 현상이다. “고양이를 안은 바람”, “협곡을 걷는 구름”, “빙하에 흐르는 물결”, “지평선을 높이는 추위” 등등의 여러 이미지는 사뭇 아찔하다.
이런 아스라한 묘사를 하려면 시인은 얼마나 고심했을지. 글을 쓰는 일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고투이다. 이 작업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휘둘리면 불안이 앞서지만, 소신으로 정진하면 고통과 외로움은 마침내 빛난다. 시의 미학은 타인본위가 아닌 자기본위로 살아갈 때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현상을 바라보며 심혈을 기울이는 애지문학회원의 모습이 참으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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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빈 약력 : 광주 출생,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활동, <열린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평론집 『스프링 시학』, 상명대 강사 wing28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