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무엇이 내 전공인지 잘 모릅니다. 기인열전에 보면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기술이 좋은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경영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영학에서 내가 아는 것은 사실상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경영에 대하여 많은 책을 보기도 하였고 강단에 오래 동안 서 있었지만, 실제로는 경영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갑니다.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교리도 강의하고, 성경 공부도 인도하고, 공동체에서 특강도 하고, 신앙 강의도 자주 하였지만 내가 정말 내가 전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끝난 다음에 헷갈리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회개와 용서에 대하여도 그렇게 많이 떠들었지만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내 본 모습이랍니다. 어려서부터 한문 공부를 좋아해서 성현들의 얘기를 많이 읽어보고, 묵상도 하였지만 내 삶에서 실천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느끼고 있답니다. 이론과 실제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실제로 경영현장에 들어서야 알아가고 있답니다. 신학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다는 생각이 됩니다. 내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정말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잘못 사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나라는 생각이 많이 납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전공이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생산성의 문제와 부가가치의 문제를 생각하면 나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며, 부가가치를 내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생산성은 산출/투입으로 표시합니다. 그러나 투자하고 노력한 것에 비해서 언제나 소득이나 산출이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경제적으로 표현한다면 전혀 소득이 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부가가치(附加價値, value added)란 "개개의 기업 또는 산업이 생산과정에서 새로이 부가(附加)한(덧붙여진) 가치"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삶에서 어떤 부가가치를 만들어냈는지 생각해봅니다. 요즘 같으면 아무 것도 새롭게 덧붙여 가치를 높인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생산성과 부가가치의 측면에서 나는 언제나 기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회개의 삶을 살라.’고 재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회개의 삶은 내 삶을 새롭게 고쳐 생산성이 높고, 부가가치가 큰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산성과 부가가치의 창출을 세상에만 두지 말고 하느님나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키우며 증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삼년이나 기다린 보람을 찾으시다가 이제는 생산성이나 부가가치를 포기하시고 나무를 베어내고, 불태워버리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끔찍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포도밭 주인은 아주 큰 의외적인 답변을 듣습니다. 사실 나는 포도재배인의 그 가상한 답변은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면서도 바로 우리들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깨닫는 데는 인생을 헛살고 나서야 겨우 깨달은 진리이며 희망이랍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밭과 전혀 다른 환경에 심어진 나무입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완전히 이방인과 같은 모습입니다. 토질도 다르고, 열매를 여는 방식도 다르며, 꽃이 피는 것과 모양도 다릅니다. 우리와 이스라엘 사람이 구별되듯 전혀 다른 환경의 나무입니다. 또한 포도 재배인은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비전공자이거나 전공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는 전공이 다른 포도재배인의 손에 맡겨져 길러졌습니다. 거름을 주는 방법도 다르고, 가지치기도 다르며, 햇볕을 받는 방법도 다르고, 넝쿨을 뻗는 방법도 다릅니다. 포도나무처럼 덩굴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줄을 띄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보목을 대는 방법도 다르고, 토질이나 환경이 다릅니다. 병해충도 다르고 돌봐주는 방법도 전혀 다릅니다. 손을 보는 방법도 전혀 다른 환경의 나무입니다.
포도재배인은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일 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거름을 나무 둘레에 파고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정성을 다하여 길러 내년에 생산성을 높이고, 부가가치를 높이겠다고 맡겨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제발 나무를 베지 마시라고 사정합니다. 전혀 다른 환경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이며, 전공이 다른 우리 평신도들이 주변의 땅을 파고 거름을 주며, 가지치기를 하고, 보목도 대어주고, 병충해도 잡아주며, 토질도 바꿔주어야 합니다. 신부님들도 본당사목의 전공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에는 비전공자일 수 있습니다. 전공자들을 포섭하고 세상의 필요한 전공분야를 평신도와 같이 해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전공자를 선별해서 교회공동체에서도 일을 전개해야 한답니다.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은 모두 없애고, 낮은 자 되어 겸손하게 맡겨진 일을 공동으로 해 나가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내 전공이 다르다고 발뺌만 할 형편이 안 됩니다. 그 일은 바로 우리들의 일입니다. 포도 재배인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답니다. 회개해서 생산성도 높이고, 새로운 삶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포도밭에서도 수확을 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이 바로 우리들의 일이랍니다.
주님, 정말 저는 비전공자이고, 전공이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심어주신 이방인을 잘 길러야 하는 사명을 오늘 깨달았으니 어렵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포도 재배인과 같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 일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혹시 내년에도 수확을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 몇 해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잘 가꾸어보겠나이다. 그래서 아주 맛있는 무화과를 수확하실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아버지!!
<머리이신 그리스도 덕분에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7-16
형제 여러분, 7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8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9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4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16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축일10월 2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1920-2005년
같은 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파울로, 파울루스, 폴, 후안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Wadowice)에서 탄생한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sef Wojtyla)는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la)와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Emilia Kaczorowska)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1929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의사였던 그의 형 에드문트(Edmund)도 1932년에 사망하였다. 폴란드 육군 하사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은 그는 9살 때 첫영성체를 하고 18살 때 견진성사를 받았다. 고향인 바도비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크라쿠프(Krakow)의 야기엘론스키(Jagiellonski)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세력이 대학교를 폐쇄하자 젊은 카롤은 독일군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석회암 채석장과 솔웨이(Solway)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사제 성소를 발견한 카롤은 1942년부터 아담 사피에하(Adam Sapieha) 대주교가 운영하는 크라쿠프의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카롤은 지하 극단인 ‘랩소디 극장’의 연극 활동에 참여하고 후원하기도 하였다. 종전 이후 카롤은 다시 열린 크라쿠프 신학교와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신학부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46년 11월 1일 크라쿠프 교구장인 아담 사피에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아담 사피에하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보내 계속해서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1948년 6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 드러난 신앙을 주제로 쓴 논문(Doctrina de fide apud S. Ioannem a Cruce)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그는 방학이 되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있는 폴란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1948년 여름에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크라쿠프 인근 니에고비치(Niegowice) 마을의 승천 성당과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 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사목하였다. 1951년까지 그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의 교목으로 있으면서 철학과 신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953년 그는 루뱅 대학교에서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윤리 체계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윤리학 성립 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크라쿠프 신학교에서 사회윤리학을 강의하고, 1956년에 가톨릭 루블린 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Lublin)의 윤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 당시 그는 가톨릭 신문에 현대 교회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글을 기고했고, 시와 희곡에도 관심을 두어 여러 작품을 출판했으며, 학생들과의 다양한 야외 활동과 운동 및 토론에도 즐겨 참여하였다.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옴비(Ombi)의 명의 주교 겸 크라쿠프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1958년 9월 28일 크라쿠프의 바벨 주교좌성당(Wawel Cathedral)에서 유게니우스 바지아크(Eugeniusz Baziak) 대주교에게서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38세로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가 되었다.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는 1963년 12월 30일 그를 크라쿠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고, 1967년 6월 26일에는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카롤 보이티와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도 참석하여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과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을 준비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또한 교황직에 오르기 전까지 세계주교대의원회의(Synod of Bishops)의 다섯 번의 회의 중 네 번을 참석하였다.
그는 1978년 10월 16일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 1522~1523년 재위) 이래 455년 만의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 되었다. 1978년 10월 22일에 교황으로 즉위하여 보편 교회의 목자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성 바오로 6세의 선종 이후 교황좌에 오른 교황 요한 바오로 1세(Joannes Paulus I)가 한 달여 만에 갑자기 선종한 후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한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와 공의회를 마무리한 교황 성 바오로 6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 전임자의 뜻을 이어받아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라는 교황명을 선택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7년간 사도좌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탈리아에서 146회의 사목 방문을 하고, 로마 교구장으로서 로마의 332개 본당 중 317개의 본당을 방문하였다. 그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계 129개국을 사목 방문했다.
그가 반포한 주요 문헌으로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가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책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1994년 10월), “은총과 신비 :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이하여”(Gift and Mystery : On the Fiftieth Anniversary of My Priestly Ordination, 1996년 11월), “로마 삼부작 - 명상”(Roman Triptych : Meditations, 2003년 3월), “일어나 가자”(Rise, Let Us Be On Our Way, 2004년 5월), “기억과 신원”(Memory and Identity, 2005년 2월) 등이 포함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47차례의 시복식을 주재하여 1,338명을 복자품에 올렸고, 51차례의 시성식을 주재하여 총 482명을 성인품에 올렸다. 또한 9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231명(1명의 비밀 추기경 제외)의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그는 1978년부터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15회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정기총회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년), 임시총회 1회(1985년), 특별총회 8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2회], 1999년)가 있다.
1981년 5월 1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과 만나는 도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성모님의 자애로운 손길 덕분에 총알이 그의 심장을 살짝 비켜 가서 목숨을 구한 그는 대수술 후 오랜 회복기를 거친 다음 암살 미수범이 있는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새 삶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더욱 영웅적 덕행을 발휘하며 사목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목자로서 신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많은 교구를 설립했고, 라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교회법전도 공표하였다. 또한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구원의 해, 마리아의 해, 성체성사의 해, 2000년 대희년 등을 제정하였다. 그는 또한 신앙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s)를 제정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난 교황은 없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에 있는 일반 알현(1,160회 이상) 때 1천 7백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교황을 만났다. 여기에 특별 알현이나 예식(2000년 대희년에만 800만 명), 이탈리아를 포함 전 세계의 사도 방문에서 만난 수백만의 신자들이 추가된다. 38회의 공식 방문을 통하여 많은 정부 관리도 교황을 알현하였다. 그리고 738차례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국가 원수들을, 246회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총리들을 만났다.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비롯한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하던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교황궁에서 2000년에 그가 제정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 전야인 2005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9시 37분에 선종하였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선종한 그는 4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장례미사 뒤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2011년 5월 1일, 생전에 그가 제정하고 그 전야에 선종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가톨릭 교회 역사상 최단기간에 복자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교황 즉위 기념일인 10월 22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23세 교황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과 시성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1984년 5월 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미사와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을 거행했다. 이는 시복 시성식을 바티칸에서 거행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깬 파격이기도 했다. 1989년 10월 5일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 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두 번에 걸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은 한국 천주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바오로(John Paul)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깨달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보고 미워하는
제자신을 뒤돌아봅니다
자비의주님
사랑으로 포옹치못하는 제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용서치못하는
제자신을
어찌해야는지요
주님, 엘리사벳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엘리사벳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