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경제수석비서관 신동식 박사 이야기.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
️신동식 박사: 이 분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부산항에서 거대한 미국의 화물선(貨物船)을 보고 우리도 저런 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漠然)한 생각으로 서울대 조선공학과(造船工學科)에 입학하여 졸업을 했으나, 취직(就職)자리가 없어 전세게(全世界) 유명한 이름을 가진 선박회사(船舶會社)에 편지를 보냈는데
●스웨덴 선박회사에서 연락(連絡)이 와서 거기 갔는데, 견딜 수가 없어
●영국(英國)으로 건너가 "로이드 선급협회(船級會社) 검사관(檢査官)으로 취직이 되어 근무하던 중" 에
■1961년 가을에 미국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와 있던 *박정희(朴正熙) 최고회의(最高會議) 의장(議長)에게 불려가 보니.. "임자! 조국의 조선 발전(造船發展)을 위해 나 하고 함께 일해 봅시다. 그러시면서 그냥 바로 한국(韓國)으로 갑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너무 당황(唐惶)하여 얼른 대답(對答)을 못하고, 영국 회사에서 해결(解決)할 일도 있고 하니, 며칠만 말미를 달라 해서 영국으로 돌아가 고민(苦悶) 끝에 조국 지도자(祖國指導者)가 부르는데 안갈 수도 없고 또 ●1인당 국민소득이(國民所得) 70달러밖에 안 되는 조국의 암담(暗澹)한 현실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가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귀국(歸國) 날짜를 청와대(靑瓦臺)에 보고를 하니, 도착한 날 김포비행장으로 비서실(秘書室)에서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청와대(靑瓦臺) 초대 경제수석비관(經濟首席秘書官)이 되어 경제개발(經濟開發) 5개년계획(五個年計劃)을 기안(起案)하고 조선사업(造船事業) 발전계획(發展計劃)을 기안(起案)하는 등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은 신동식 박사(申東植博士)에게 부산(釜山)에 있는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 에 가서 조선사업(造船事業)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서 내려가보니, 배 한척도 만들지 못하는 황무지(荒蕪地)가 되어 있더라고 합니다.
거기서 제초작업(製造作業)만 실 컷 하다가 그 일을 그만두고 거제도(巨濟島)에 "옥포조선소" 를 건립하자고 건의(建議)하여 지금의 옥포 조선소(造船所)를 탄생(誕生)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울산에 현대조선소(現代造船所)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옥포 대우조선과
*울산 현대조선이라는 쌍두마차(雙頭馬車)를 끌게 된 것입니다.
●박대통령(朴大統領)께서는 원래는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사업(造船事業)을 해보라고 권했는데 겁을 먹고 못하다가
●신동식 박사가 옥포조선소를 만드는걸 보고 마음이 움직인
●정주영 회장이 프로젝트 하나를 울산으로 가져가 현대조선소를 설립한 것입니다.
*신동식 박사는 지금도 현역(現役)입니다. "한국 해사기술(海事技術) 협회장(協會長)과 카본 코리아 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1965년 10월 초, 미국 존슨 대통령이 3주 후에 방한 한다며 한국에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필요한 걸 요청(要請)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무엇을 요구 할까를 토의하였는데, 한강에 "존슨 브릿지(교량)" 를 세우자, 여의도에 "존슨 타워" 를 세우자는 등 여러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 때 ●신동식 경제수석비서관이 박대통령에게 "기초과학연구소(基礎科學硏究所)" 를 세우자고 건의(建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괴학자도 없는데 연구소를 지어서 어느 세월에 본전을 뽑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신동식 박사는 박대통령에게 "백년이 걸려도 연구소를 지어야 합니다. 남의 나라에 돈도 빌려보고 기술도 도입(導入)해 봤지만, 결국은 남의 심부름 꾼 밖에 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기술로 우리 것을 만들어 팔아야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박대통령은 신동식 박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원조금(援助金)을 받아 지금 성북구 하월곡동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를 설립한 것입니다.
아무려면 존슨 대통령이 자기를 기념해 달라고 선물을 준다고 했겠습니까?
●신동식 박사는 이렿게 말합니다.
[ 베에토벤이 불후(不朽)의 명작 "운명의 교향곡" 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후원(後援)한 귀족(貴族)들, 악보(樂譜)를 멋지게 연주(演奏)한 음악가(音樂家)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우리가 오늘날 과학기술(科學技術) 강국(强國)이 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經濟大國) 반열(班列)에 올라 선 것은 박정희라는 탁월(卓越)한 혜안(慧眼)을 가진 지휘자(指揮者)가 있었고, 24시간 연구실(硏究室)에 불을 밝히고 있었던 과학자(科學者)들이 작곡(作曲)을 잘하고
●이병철과
●정주영 같은 사업가(事業家)들이 연주()演奏를 잘해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매달 월간경제동향(月刊經濟動向)보고회의(報告會議)를 주재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직접(直接) 경제지표(經濟指標)를 챙기니, 열심히 안 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과학자(科學者)들이 작품(作品)을 만들어내면 교수평가단(敎授評價團)이 평가하여 대통령 앞에서 강평(講評)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까다롭게 굴었던 분이 남덕우 교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박대통령(朴大統領)께서 남덕우 교수를 재무부장관(財務部長官)에 기용(起用)하고 임명장(任命狀)을 주면서 "남교수! 정부정책(政府政策)에 꼬장꼬장 따지더니, 한번 당해 봐라!" 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박대통령은 과학자들이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도 평가교수단(評價敎授團)에서 반드시 평가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 966년 부터 1969년 KIST(한국과학연구소)가 설립되기 까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 30명을 조국(祖國)의 기술 발전(技術發展)에 동참(同參)하자고 설득(說得)하여 1차로 귀국(歸國)시켰습니다.
그 사람들은 미국에서 안전한 삶이 보장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응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 이태규 박사와 🔹️최형섭 박사가 발 벗고 나섰습니다.
물론 그 작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휘봉(指揮棒)을 잡고 전폭적(全幅的)으로 지원(志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뒤에 다시 100명의 과학자들이 더 귀국하여 연구소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 지금 전세계 바다에 떠 있는 30만톤 급 이상 배의 85%가 "메이드인 코리아" 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현대조선과
*대우조선이 만들어낸 작품들입니다.
️최근에는 대만(臺灣)까지 무인운전(無人運轉) 선박 시험운행(試驗運轉)까지 성공하였습니다.
양철 조각 하나 만들지 못하던 나라가 불과 몇 십 년 만에 세계 최고(最高)의 조선(造船)국가라는 자리에 우뚝 선 것입니다.
*️⃣ 신동식 박사는 2003년도에 *조선 건조량,
*수주량 등 분야에서
세계 1등 국가가 되었을 때 국내외에서 받은 상장(賞狀)을 들고 가 동작동 박대통령 묘지 앞에 올려놓고 "대장님! 그리도 원하시던 미래의 조선기술이 세계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라는 보고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 577년전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創制)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다면, 50년 전에는 과학기술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또....
*K9자주포와 *K2전차,
*T50항공기를 수출하는 방위산업 국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닦아놓은 과학기술 혁명의 결정체들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화이팅!✌️
*************** 받은 글 ****************
첫댓글 초대 경제 수석 신동식 박사의 조선 사업에 관련한 감동적인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의재님의 좋은글 잘공유하고 깁니다
초대 경제수석 신동식 박사 이야기 감명 깊게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역사에 빛날 위인임에도 잊고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