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林書堂 生員 中國記 종합 6편 (취람 여상덕 찬술)
士林書堂 生員 中國 오악(五嶽)을 찾아서 (제1신)
형산(衡山)!
중국 오악(五嶽)중 南악이다.
東악은 太山,
西악은 華山,
北악은 恒山,
中악은 崇山으로 신성시하며,
옛 부터 역대제왕이 직접 또는 사절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렸던 산
남악독수형산 (南嶽獨秀衡山)남악(衡山) 홀로 가장 아름답구나....
이천년 전부터 오악의 제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과연 장엄하고 아름다움이 제일이다.
오악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하며 명산 절경이로다.
오색 단풍에 열린 입이 닫히기를 거부한다.
거센 비바람 물안개에 휘감게 돌아 육신이 흔들어도
보일 듯 말듯 한 여인의 속살마냥
감쳤다 드려냈다 하는 감질나는 누드쇼를 보는 것 같았으라.
언제 그랬느냐는 듯
변화무상한 정상의 기상변화는 한국 정치를 닮았느냐.....
포근한 늙은 엄마의 가슴 마냥 불교와 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형산이다.
2013년 11월 24일
취람 여포 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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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林書堂 中國旅行記 (제2신)
격년제로 찾아가는
중국여행 쟁쟁했던
시인들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사림생원
굴원시인 굴자사와
이백시인 악양루를
찾는이는 적지만은
사림서생 긍지안고
오지천리 지척인양
밥을굶고 흔적찾아
한시로써 배채우고
옛시취해 술이깬다
깃대따라 가는여행
천번가도 허사지만
문화권이 다르도다
계사년 11월 23일
취람 여포
士林書生 初志一貫 强行軍 (제3신)
초록은 동색이라
비바람 몰아쳐도
강행군 일사불란
체력은 쇠잔해도
정신은 청춘이다
서른둘 정신무장
형산이 안산이고
백리길 지척이다
지치면 소주충진
졸리면 개그만발
어딘들 못가리오
색깔로 뭉친동료
태산을 못오르리
계사년 11월 24일
취람 여포 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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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下獨酌(월하독작) 이백 4수
月下獨酌1(월하독작)
天若不愛酒 (천약불애주) 만약에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酒星不在天 (주성부재천) 하늘에 酒星(술별)주성이 없을 것이며
地若不愛酒 (지약불애주) 만약에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地應無酒泉 (지응무주천) 땅에는 응당 酒泉(술샘)물이 없어야하리
天地旣愛酒 (천지기애주) 하늘도 땅도 원래가 술을 좋아하였으랴
愛酒不愧天 (애주불괴천) 술꾼이 술을 좋아함이 하늘에 부끄럽나
已聞淸比聖 (이문청비성) 이미 듣기로 청주는 성인에 비할만하고
復道濁如賢 (부도탁여현) 거듭 말하거니와 탁주는 현인과 같아라
聖賢旣已飮 (성현기이음) 성인도 현인도 이미 다 술을 마셨거늘
何必求神仙 (하필구신선) 꼭 신선을 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三盃通大道 (삼배통대도) 석 잔을 마시고 나면 대도에 도통하고
一斗合自然 (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마시고나면 자연과 하나되니
但得醉中趣 (단득취중취) 애오라지 취중의 깊은 뜻을 알수있거늘
勿謂醒者傳 (물위성자전) 술 안마시는 자에겐 말도 하지도 말게나
月下獨酌2(월하독작)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이 만개한 산에 올라 술 한 도가니를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술을 따라주는 친구가 없어 홀로 마시노라
擧盃邀明月 (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마주하고 잔을 채우고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내 그림자를 대하니 벗이 세 사람 되었구나
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이야 본래 술을 마실 줄 모르거늘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부질없이 날 따라 마셔대누나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 벗이 되어 노니나니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모름지기 행락이 봄과 함께한 듯 흥겹도다
我歌月排徊 (아가월배회) 내 노래 소리에 밝은 달 머뭇거리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내 춤 그림자 어지러운듯 흔들리매라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취하기 전 우리 함께 즐거움 나눴지만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연후엔 각기 흩어져 헤어질지니
永結無情遊 (영결무정유) 주고받은 정 없어도 맺은 인연 영원하여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아스라한 미리내에서 상봉 기약할거나.
月下獨酌3(월하독작)
三月咸陽城 (삼월함양성) --- 3월이라 함양성에
千花晝如錦 (천화주여금) --- 온갖 꽃 백주의 비단 같은데
誰能春獨愁 (수능춘독수) --- 무엇이 봄날 홀로 슬프게 하는가
對此徑須飮 (대차경수음) --- 이럴 때 대하기 쉬운게 그저 술이라
窮通與修短 (궁통여수단) --- 수양이 부족하면 궁통이 허락되니
造化夙所稟 (조화숙소품) --- 조화로움이 예로부터의 천품일세
一樽齊死生 (일준제사생) --- 한 통의 술이 생사를 가르거늘
萬事固難審 (만사고난심) --- 세상만사 참으로 알기 어렵네라
醉後失天地 (취후실천지) --- 술에 취해 천지 분간 못하고
兀然就孤枕 (올연취고침) --- 널부러진듯 쓰러져 홀로 자노라면
不知有吾身 (부지유오신) --- 내 몸 있는 것도 모를지나
此樂最爲甚 (차락최위심) --- 이 즐거움이 진실로 으뜸이로다.
月下獨酌4(월하독작)
窮愁千萬端 (궁수천만단) --- 근심 걱정은 천 갈래 만 갈래
美酒三百杯 (미주삼백배) --- 빛 고운 술은 삼백 잔뿐이로다
愁多酒雖少 (수다주수소) --- 근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지만
酒傾愁不來 (주경수불래) --- 술잔 기울이면 근심 오지 않으니
所以知酒聖 (소이지주성) --- 술 좋아하는 이유를 어찌 짐작이나 하리라
酒堪心自開 (주감심자개) --- 술 좋아하면 마음이 절로 열릴진대
辭粟臥首陽 (사속와수양) --- 벼슬도 마다하고 수양산에 은거하며
屢空飢顔回 (누공기안회) --- 처지 곤궁하면서도 굶주린 안회여
當代不樂飮 (당대불락음) --- 살아생전 술 마시기 좋아하지 않고
虛名安用哉 (허명안용재) --- 헛된 이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던가?
蟹敖卽金液 (해오즉금액) --- 게의 집게발이 바로 금액이요
糟丘是蓬萊 (조구시봉래) --- 술지게미 더미 무릇 봉래산이어라
且須飮美酒 (저수음미주) --- 모름지기 빛 고운 술까지 마셨거늘
乘月醉高臺 (승월취고대) --- 높은 대에서 달을 타며 취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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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林書堂 生員 中國旅行記 (제5신)
이태백의 산중문답....
問余何意棲碧山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閑 웃으며 대답하지 않아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물 따라 복사꽃잎 아득히 흘러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 이곳이야말로 딴 세상이지 속세가 아니라오.
이태백과 도연명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간다. 온 세상이 꽃으로 뒤덮고 새들은 노래로 화답한다.
이런 때는 누구라도 시인이 안 될 수 없다. 붓글씨와 관련 없는 사람이라도
봄에는 옛사람들의 멋진 시 한 구절쯤은 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몇 개의 유명한 시를 소개해 본다.
여기 소개하는 시들은 붓글씨 작품의 소재로 많이 활용된다.
桃花紅雨 鳥喃喃 繞屋靑山 間翠嵐 복사꽃 붉은 꽃잎 위에 새들은 지저귀는데,
집 둘레 청산 사이론 푸른 아지랑이 어렸네.
고려시대 정지상의 “醉後”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제목을 보면 봄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술 한 잔 걸치고 나서 읊은 詩이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한자가 꽤 많이 나온다.
사림서당 생원들은 한자 실력이 높을 것으로 알고 한자에 음을 달지 않았다.
다음은 당나라 현종시대 이 태백과 함께 명성을 날렸던 王維의 “竹里館”이라는 시다.
獨座幽篁裡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그윽한 대나무 숲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 뜯고 긴 휘파람 불어보니,
숲이 깊어 아무도 모르는데,
오직 명월만이 찾아와 비춰주네
다음의 시는, 옛사람들이 첫 손가락으로 꼽는 애송시이며,
서예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이다.
제목은 이 태백이 지은 유명한 “山中問答”
問余何事棲碧山하야 笑而不答心自閑이라,
“왜 이런 깊은 산골에서 사느냐고 물으면,
아무대답도 안하고 그저 웃기만 하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하니 別有天地非人間이라”
복사꽃 흐르는 물 따라 아득히 내려 가보니,
인간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가 있네
외워두면 좋은 정신적 재산이 될 것이다.
시를 읽을 때 전체를 다 외울 수는 없다.
다만 그 중에서 유명한 글귀 한 두 개만 외워 두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보면 “笑而不答”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상대방이 짓궂게 묻더라도 입장이 곤란할 경우,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답은 안하고 피할 때” 인용한다. 많이 쓰는 말이다.
“桃花流水”라는 말도 유명하다.
복사꽃 흐르는 물이라는 뜻이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면서
흐르는 계곡물이 얼마나 멋지겠는가?
“別有天地 非人間”이라는 구절은 사람이 살지 않고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
- 경치가 대단히 아름다울 경우 인용하면 좋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하게 보존된 하동 섬진강에 가 보라.
강물은 푸르고 온 천지가 복사꽃으로 뒤덮여 있다.
여기야말로 桃花流水杳然去요 別有天地非人間이다.
이태백은 다시 소개한다.
자연과 관련해서는 도연명의 “歸去來辭” 를 빼 놓을 수 없다.
과거에는 그저 유명한 시라고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읽어보면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최고의 名詩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에 감동을 준다.
열 번, 스무 번 자꾸만 더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405년 東晋시대 41살의 나이에 평택현 시골에서 지사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봉급은 쌀 다섯 말에 불과한 자리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시골 감독관이 파견 나오면서
그에게 의관을 정재하고 영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시골의 소인배에게 허리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청렴과 올바른 義를 앞세우며 바르게 살려는 그의 높은 기개가 넘치는 내용이다.
아, 내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구나.
어찌 슬퍼하며 서러워만 할 것인가? (맹자)
참고로 주역은 "時", 중용은 "誠", 맹자는 "義"가 사상이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이제 바른 길을 찾았네.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임을 알았네
돌아가자 돌아가.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깊은 골짜기 시냇물을 찾아가고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따뜻한 봄날, 나무는 즐거운 듯 생기 있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흐르네
어찌 내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리.
이제 와서 뭣 때문에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 낼 것인가?
돌아가자 돌아가, 고향으로 돌아가자.
이 시는 너무 길어서 전체를 소개할 수 없다.
그리고 한자를 소개하는 일도 역시 양이 너무 많아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그 전체적인 맥락에서 의미와 뜻만을 알아보는 것으로 하자.
요즘 권력을 쥔 사람들을 보자.
권력에다 돈까지 모두 손에 쥐려고 너무 욕심내다가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쇠고랑 차고 병신 육갑에 우사칠갑도 모자라 13갑까지 하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것을 보면서도 “나는 괜찮겠지” 하고 손을 내민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자. 그 대신 자연으로 돌아가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보자.
이태백의 “山中問答”과 도연명의 “歸去來辭”는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충고하는 것 같다.
“인간사 무엇을 욕심내는가? 권력도 좋고 돈도 좋고 명예도 좋지.
그러나 마음을 비우세요.
자연과 벗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 아닌가?”
인생은 一無(禁煙), 二少(小食, 節酒), 三多(運動, 接觸, 休息),
四必(걷고, 배우고, 즐기고, 웃으며) 五友(自然, 親舊, 讀書, 般若湯, 컴퓨터)로
한 번 뿐인 인생을 유명한 시인, 묵객이야 될 수 없지만
스스로 아름다운 그림을 백지위에 그리며 살다가자.
계사년 11월 27일
취람 여포 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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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서당 중국여행 답사기 (제6신)
"天水一色" 하늘과 땅은 일색이다.
시성 두보는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면서 하늘과 땅이 한색이라고 읊었다.
그러나 1245년전의 시공이 흐른 계사년 11월의 동정호는 산천은 의구(예나 지금이 다름이 없었고)
하였으나 동정호의 물색은 흙탕물로 뒤덮였고, 찢어진 부레옥잠화는 지천으로 덮여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모래 채취 바지선이 동정호로 메웠고 하늘은 연무로 가득차 지천을 분간키 어려웠으니 천수일색은 맞으나
하늘과 물은 옛물이 아니었습니다.
동정호의 뱃놀이도 동력선으로 흙탕물을 가로지르며 손쌀같이 달렸으니 멋과 풍류는 간데없고 상술만
남았으니 어찌 옛 정취를 찾으리오.
오호 통재라.......
( 취람 여포 답사 소회)
登岳陽樓(등악양루)
두보(杜甫)일가는 양자강을 중심으로 유랑 중에
악주(岳州)에서 동정호(洞庭湖)로 들어와 1년 수 개월 간 동정호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말로만 듣던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동정호수(洞庭湖水)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지은 詩 "등악양루(登岳陽樓)"는
두보가 57세(768년) 때 지은 詩이다.
동정호를 소문으로만 들어왔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악양루에 올라 보니 그 광대하고 장려한 모습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이 풍광을 마주한 자신은 외로이 떠도는 정처 없는 방랑객(放浪客)에 불과한 몸,
도처에서 반란과 전쟁이 그치질 않고 일어나니 그 근심은 눈물이 되어
두보의 두 눈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오언(五言) 율시(律詩)로 된 "등악양루(登岳陽樓)"는
詩의 웅대하고도 우수어린 멋과 깊이가 실로 두보의 詩 중에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名詩로 평가 받는다.
특히 3~4행은 이 詩의 백미(白眉)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호수 위에서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갈라지고 하늘과 땅이 잠길 만큼 크고 넓다는 동정호의 웅대한 표현은 杜甫가 아니고선 이런 멋진 시적(詩的) 표현을 감히 누가 흉내라도 냈겠는가~
악양루(岳陽樓)에 올라가 바라본 석양(夕陽)빛으로 물드는 동정호(洞庭湖)
"등악양루(登岳陽樓)"는 병마를 안고 떠돌면서
고독과 절망에 빠져 있던 당시 두보의 심정(心情)을 진솔하게 표현한 詩로써
자연(自然)과 人間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선명하게 대비시켜
선경후정(先景後情)의 효과를 잘 살린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향수의 회한과 우국지심(憂國之心)이 스며 든 보기 드믄 詩로,
詩를 사랑하는 분들의 사랑을 폭 넓게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동정호(洞庭湖)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나그네의 처지가 가슴 아프게 녹아 흐른다.
이 작품 중 특히 후미에 보인 두보의 눈물은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굼주림의 고통을 겪은 두보가 관산(關山)의 북쪽,
즉 고향과 황궁이 있는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병든 몸을 이끌고 외로이 떠도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와,
변란과 반란으로 찢기고 깨진 암울한 나라의 상처가 함께 녹아들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로,
우국지정(憂國之情)이 함축 된,
최고의 명작(名作)중에 명작(名作)이라고 보는 이유다.
동정호변의 악양루 풍경: (산업화의 영향으로 옛 멋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시인 묵객과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강남 최고의 호수로 남았다.)
그는 늘 번듯한 벼슬자리를 꿈꾸며 살았다.
조정의 핵심에 들어가 그가 품었던 이상을 펼치고 픈 충정(忠情)을 안고,
평생 기회를 엿보며 살았던 그 였기에
두보가 느끼는 나라 걱정은 그 깊이가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杜甫의 삶과 인생여정(人生旅程)은 "추흥(秋興)"을 소개하면서
풀어놓았던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코자 하며,
두보 최고의 名詩으로 일컬어지는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登岳陽樓(등악양루): 악양루에 오르다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옛부터 동정호에 대해선 말로만 들었는데,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오늘에야 드디어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吳楚東南拍(오초동남박): 오나라와 초나라가 (호수 위에서) 동 남으로 갈라지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하늘과 땅은 밤 낮으로 (호수에) 떠 있도다.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이젠) 친한 벗마저 편지 한 통 없으니,
老去有孤舟(노거유고주): 늘그막에 남은 건 외로운 배 한 척 뿐이로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군마(軍馬)는 (고향) 관산의 북쪽에서 (어지럽고)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누각) 난간에 기대어 눈물 짓노라.
詩는 내 人生의 전부(全部) 시성(詩聖) 두보(杜甫)
두보(杜甫)는 서기 712년 하남성(河南省)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두보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뤼양 즉 낙양(落陽)의 숙모에게서 자랐는데,
일곱 살의 나이에 이미 시를 썼었고, 열다섯 살 때에는
詩人들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봐 아마도 또래들 보다 많이 조숙 했던 것 같다.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나 일찍이 낙양의 名士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지은 시들은 인생의 애환을 녹여내는 시들이 대부분으로,
평론가들로부터 시성(詩聖)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듣는 大 詩人이 되었다.
20살 무렵 처음으로 강남(江南)의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으로 여행을 다녔고,
스물넷에는 낙양으로 올라와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이듬 해 다시 산둥성(山東省)과 허베이성(河北省)을 돌며 유람길에 나서,
많은 명승고적을 찾아다녔으며
서른 살이 되어서야 낙양으로 돌아온다.
이때도 많은 시들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는게 한 편도 없다.
무협(巫峽)
술은 마시고 취하라고 있는 것.
그는 한창 젊은 나이에 십여 년을 유람과 여행으로 보냈는데,
아마도 그때 시심의 폭이 넓어졌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 그것도 한창 일에 열중해야 할 젊은
나이에 이렇게 유람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가정형편을 궁지로 몰아 간 건 뻔 한 이치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詩人들이 그렇듯 그도 주성(酒聖)이라 불릴 만큼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
아마도 평생 입에 달고 살았던 술이 일찍 병을 몰고 왔고,
그로인해 노년은 병마의 고통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싶다.
두보(杜甫)는 명문가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자집 자식도 아닌고로 출세하는 길은
오로지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들어가는 길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한 번 떨어진 경력이 있는 그로서는 과거시험을 통해 조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망이 없다는 걸 그도 알았던 모양이다.
그 후로도 두보는 몇 번 시험을 본 듯 하나 합격은 못했다.
오히려 과거시험 준비보다는
삼대예부(三大禮賦)니 봉서악부(封西嶽賦)니 하는 글을 지어 황제에게 바쳐서,
혹여 황제의 눈에 띄어 작은 벼슬자리라도 얻어 볼까 하여 조정을 기웃거리기도 했었고,
권문세가(權門勢家)를 찾아가 장문(長文)의 詩를 써서 보여주며 아첨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다.
이는 관직에 대한 미련과 궁핍한 생활고에서 오는 고육책이라고 보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내게 관운(官運)은 어찌 이리도 박복(薄福)한가~
그가 잘 하는 것이라고는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시를 쓰는 것이 전부인데.
그것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궁색한 살림살이를 면키 어려운 게 현실의 벽이다.
서른 살 때 산동성에서 부인 양씨를 만나 결혼한 후 평생을 같이 살았는데,
잠시라도 떨어지게 되면 처자의 신상을 염려하여 늘 안부를 전하곤 헤,
그 애틋한 마음이 그의 시에 고스란히 베에 있다.
두보는 살길이 막막하여 처자를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고을인 봉선현(封先縣)까지 데리고 가 친척집에 맡겨 놓고
이듬해 그의 오랜 소원이던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벼슬자리를 어렵게 얻어,
떨어져 있던 가족을 찾으러 가보니,
이미 자식 하나는 배골이에 굶어 죽고 없었다.
그 처참한 심경은 "봉산현을 찾아 가면서"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양에 찰리 없는 미관말직(微官末職)의 관직(官職)이 그를 더욱 목마르게 했고, 얼마 못가 그 직책을 그만두고 만다.
구단(九段)은 구단(九段)과 통(通)하다.
무렵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대 시인 이백(李白)과의 만남이다.
이백(李白)도 한림(翰林)의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장안에서 산동성으로 향하는 길에 낙양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때 두 시인이 만나게 된다.
시에 관해서는 두보도 어느 정도 낙양에서 이름이 난지라
어렵잖게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며, 이백의 천재적인 시 품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의 방문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또 두 명의 詩人 고적(高適)과 장삼(章參)도 그 무렵 만나 사귀게 된다.
장강협곡(長江峽谷)
역마살(驛馬煞)은 유랑(流浪)길로 내몰고...
네 사람은 물 만난 고기처럼 하남성으로가 유람을 했으며,
이듬해에는 산동성까지 긴 유람과 여행을 다녔다.
아마도 짐작컨데 그 경비는 명망 있는 가문과 살림살이가
비교적 넉넉한 고적(高適)이 대지 않았나 추측한다.
이렇게 여행을 다니다가 그해 겨울에 연주에서 이백과 헤어져 따로이 각자 여행길로 갈라지는데,
두보는 양자강 이남땅 강남(江南)으로 향한다.
서로가 다시 만날 것을 간곡하게 기약하고 헤어졌지만
이때 만남과 헤어짐이 두보(杜甫)와 이백(李白) 간의 마지막 인연이 되고 말았다.
이백은 두보보다 열한 살이나 연배였고 시인으로써 이미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백과 헤어지고 나서 두보의 시문에 이백에 관한 애틋한 시가 여려 편 쓰였는데. 꿈속에서도 그와 여러 번 만났다고도 했고,
심지어는 사흘간 연속적으로 꿈에 나타났다는 내용도 있어,
두보는 여행 중에 이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른 듯 하다.
서기 746년에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와 장안으로 갔지만 그 후 십여 년이 지나도록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관직도 얻지 못해 곤궁한 생활을 근근이 이어간 듯하다.
나라는 깨져도 산하(山河)는 남는다.
서기 775년 11월에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綠山)은 한 달도 안 되서 낙양을 점령하고, 이듬 해 정월에는 용상에 앉아 황제를 자처하기도 했으며,
무력을 휘두르며 무서운 기세를 떨쳐 장안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옛 촉 땅으로 몽진(蒙塵)을 떠난다.
이 내용은 백거이의 시 "장한가(長恨歌)"를 소개 하면서 대충 풀어놓았던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두보도 난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섬서성(陝西省)의 백수현(白水縣)까지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들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두고, 자신은 영하성(寧夏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肅宗)":(당 현종이 안록산에 겁을 먹고 촉으로 계속 도망을 치자,
백성들이 보다 못해 길을 막고 반란군에 맞서 같이 싸우자며 못 가게 막는다.
그러자 현종(玄宗)은 황태자에게 급히 황제 직을 이양하며 모든 것을 떠넘기고
자신은 촉(蜀)으로 계속 도망을 친다.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황제에 오른 이가 바로 "숙종"이고,
현종(玄宗)에게는 "상황천제(上皇天帝)"라는 존호(尊呼)를 만들어 높여 주었으며,
이 때 부터 황제 직은 그의 큰 아들 숙종(肅宗)이 맡게 된다.
휘하로 찾아가던 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長安)으로 도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꿈꾸던 관직(官職)을 드디어 얻다.
얼마 후 안록산은 내분으로 그의 맏아들 안경서(顔慶緖)에게 살해 된다.
그 무렵 숙종은 장안에서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겨 왔고,
두보는 지인(知人)의 도움으로 어렵게 장안을 탈출하여
다시 황제가 있은 곳을 향해 길을 떠난다.
어렵게 어렵게 황제를 찾아가 그간의 자초지종을 아뢰고 머리를 조아리니,
숙종(肅宗)이 기특하게 여겨 좌습유(左拾遺)에 그를 임명하였다.
비록 품계는 낮아도 두보는 그제 서야 꿈꾸던 벼슬자리다운 벼슬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안록산의 측근 사사명(史思明)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를 도와 또다시 대적하는 바람에 관군은 크게 패하고
낙양이 또 위험에 처하자 두보는 다시 회주로 돌아오고 만다.
人生 어찌 이토록 고달픈가~
그는 2년 만에 황제가 하사한 번듯한 관직을 내려놓고,
당장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사막과 황무지가 태반인 간쑤성 즉 감숙성(甘肅省)을 떠돌지만 굼주린 곤궁은 헤어날 길이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촉(蜀)땅에 가면 기후도 좋고 식량을 구하기도 쉽다는 소리들 듣고,
그해 10월에 쓰촨(四天)지방 청두(成都)로 가는데...
가족을 데리고 가다보니 얼마 못가 가지고 간 식량마저 바닥 나고
굶주림과 싸워야 하는 고통은 그야말로 고행의 나날이었다.
촉(蜀)으로 가는 길은 목숨을 건 길
촉으로 가는 길은 이백의 시에서의 표현처럼 "청천(靑天)에 가는 것보다도 험난한 길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험하디 험했다. 끝없는 낭떨어지기 잔도길을 수도 없이 지나가야 했고,
엄청난 협곡의 격랑을 몸으로 겪어야 했던 목숨을 건 길이었다.
어렵사리 촉도(蜀道)을 지나 성도(成都)에 도착했지만 고통은 달라진게 없었다.
여기서도 고난의 길은 계속 이어졌고 그 고난은 한계에 달한다.
급기야 살기 위해 도토리를 주워 먹고, 둥글레를 케서 먹으며 목숨만 부지한 체 근근이 살아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그는 그 와중에도 詩 만큼은 늘 가까이 했으니...
"비가"라는 시에 그 고달픈 현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때가 두보 나이 48세로 두보 인생 중 가장 창작욕에 불타올랐던 화려한 꽃이 피는 때이기도 했으니...
극에 달한 고난은 또 다른 탈출구를 만들었고,
굶주림에 악이 오른 그는 "북정(北征)"을 비롯해 주옥같은 명시들을 그 무렵 대거 쏟아낸다.
무후사(武侯祠):촉 황제 유비와 제갈 량 그리고 관우, 장비를 모신 사당으로 백제성(白帝城)에 있다.
세상에 죽으란 법(法)은 없다.
몸뚱이 하나 누이고 살 곳이 없어서 급기야는 오래전 친분이 있던
어느 스님의 도움으로 절간 방을 빌려 기거했는데,
마침 그 절에 와 있던 먼 친척 두제(杜濟)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훗날 "두보초당(杜甫草堂)"이라 불리는 완화계(浣花溪)부근에 초당(草堂)을 급히 지었으며,
옛 친구 엄무(嚴武)가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로 이곳에 와 있는 것도 그 무렵에 알게 된다.
친구 엄무와 두보는 오랜만에 반가운 벗을 만나 부둥켜 안고 눈물 범벅으로 회한에 젖은 우정을 나누었고,
엄무(嚴武)의 도움은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두보에게,
타들어가는 들녘에 퍼붓는 단비와도 같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엄무(嚴武)와의 만남은 두보 인생을 회상해 볼 때 가장 넉넉하고 풍요롭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쓴 그의 詩 강촌(羌村), 낙일(落日), 봄비 오는 날 등에서는 넉넉하고 온유한 정경이 풍요롭게 녹아든 시들이 주류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벗은 떠나고 병(病)이 찾아들다.
그것도 2년 밖에 가지 못했다. 얼마 못가 엄무(嚴武)가 진급하여 조정으로 떠나가자. 두보는 친구를 배웅하러 멀리 면주까지 따라 갔었는데.
때맞추어 서천병마사(西川兵馬使)로 있던 서지도(徐知道)가 반란을 일으켜,
두보는 성도에 지은 초당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2년간이나 방랑으로 제주, 면주, 한주 등을 떠도는 고단한 몸이 된다.
그러던 차 중앙으로 복귀했던 엄무(嚴武)가 반란을 평정코자
다시 성도로 부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초당으로 황급히 돌아간다.
다시 돌아 온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절도참모(節度參謨)의 관직을 얻었으나,
엄무(嚴武)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결코 즐겁지 아니했고,
동료들과도 마음이 맞지 않은데다가 관청생활의 불편함도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두보는 이전부터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즈음에는 중풍 기운까지 나타나서 팔다리가 저려왔다.
이미 초라하게 늙어버린 나이에 남 밑에서 막료 노릇이 달가울 리 없던 두보는,
엄무에게 호소하여 서기 765년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로 한 달 뒤 4월에 엄무가 갑자기 병으로 죽는 날벼락같은 일이 벌어지자,멀고 먼 사천땅에서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더 이상 초당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5월에 처자를 데리고 양자강에서 배에 올라 고향을 향한 정처없은 유랑길로 들어선다.
강물 위의 유랑(流浪)
추석이 지난 후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雲陽)으로 내려왔고,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 반 년 동안 운양에서 요양생활로 지낸다. 이때 사천지방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이 이어져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지니
두보의 귀향길은 더욱 어렵고 멀어저만 갔다.
다음 해인 서기 766년 이미 55세가 된 두보는 늦은 봄에 병이 얼마 간 호전을 보이자,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
기주(夔州) 즉 사천성 봉절현(奉節縣)으로 들어간다.
늦봄부터 약 2년 간을 이곳에서 지낸다.
두보(杜甫)는 기주에 온 이래로 2년 동안에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는 전체 두보 詩의 1/3가까이 해당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무렵 지은 "추흥팔수(秋興八首)"는 칠언율시로 된 8수의 연작으로,
늙고 병든 두보의 절절한 우수(憂愁)가 흐르는 詩는 하나같이 명시들이다.
이 시기에 지은 시들은 침통한 우수가 어느 때 보다도 더 짙게 깔려 있다.
따라서 어떤 비평가는 두보가 기주에서 지은 시는 이미 힘이 다한 시들이라고 주장도 하지만, 늙고 병든 두보(杜甫)가 황혼녁에 가슴을 쥐어짜며 토해낸 詩 "추흥(秋興)"은,
가을날의 황홀한 낙조(落照)같은 찬란한 보석(寶石)이라고 나는 생각 한다.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본 동정호(洞庭湖)
秋興(추흥): 가을날의 감흥
玉露凋傷楓樹林 (옥로조상풍수림 ): 찬 이슬 내려 단풍숲 물드는데,
巫山巫峽氣蕭森 (무산무협기소삼): 무산무협은 쓸쓸하기만 하구나.
江間波浪兼天湧 (강간파랑겸천용): 강물결 일어 하늘에 치솟고.
塞上風雲接地陰 (새상풍운접지음 ): 성채의 구름 땅을 뒤덮었도다.
叢菊兩開他日淚 (총국양개타일루): 또 다시 국화는 피어 눈물짓게 하고
孤舟一繫故園心 (고주일계고원심): 배는 매인체라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갈꼬
寒衣處處催刀尺 (한의처처최도척 ): 곳곳에서 겨울옷을 짓느라
白帝城高急暮砧 (백제성고급모침): 백제성을 울리는 다듬이 소리... 다름이 소리...
추흥(秋興)에 붉어진 눈시울
"추흥"을 비롯해, "백제성 최고루","강상","반조",등이 이때 지은 대표적 명시들이다.
"추흥(秋興)"은 총 여덜 편이나 지었는데 첫 번 째 지은
윗글에 소개한 이 詩가 명작 중에 명작(名作)으로 꼽는데 나는 주저함이 없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그때 마다 병들고 늙은 노(老) 시인이
정처 없는 타향살이와 인생의 회한에서 오는 고뇌찬 심성(心性)을 쏟아부은 詩 "추흥(秋興)"은
내 눈시울을 늘 붉게 물들여 놓곤 했었다.
병마를 안고 떠도는 人生
서기 767년 봄에 두보는 생활근거지를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다시 양서의 초당으로 옮겨간다.
이 무렵의 생활은 두보의 시를 좋아하는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서 폐병, 중풍에, 학질이며 당뇨병까지 겹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으니...
두보는 그런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시작(詩作)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늘어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높고 깊은 산골짜기의 수시로 변모하는 열악한 기후와 험한 환경이 더욱 병든 몸을 짖 눌렀다, 또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적막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정월 중순 경 또 다시 배에 올라 삼협(三峽)을 내려가 강릉(江陵)으로 향한다.
내 몸이 천덕꾸러기로 변했구나~
강릉(江陵)에 와 보니...
남들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도 어려웠다.
생활은 날로 궁벽해지자 늦가을에는 다시 병든 몸을 이끌고 가족과 배에 올라 강릉을 떠난다. 이때는 이미 발도 부자유스럽고 귀도 반쯤 먹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모멸을 당하는 일도 점점 많아졌으며,
어디를 가든 병든 두보(杜甫)가 안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몇 달을 공안(公安)에서 머물다가 연말에 다시 강배에 올라 악주(岳州)로 내려간다.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황혼(黃昏)에 눈물짓다.
악주에 도착한 두보는 다시 이듬해 1월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간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 간 두보 일가는 동정호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오언 율시로 된 "등악양루(登岳陽樓)"는 그때 지은 詩인데,
시의 웅대하고도 우수어린 멋과 깊이는 실로 두보의 詩 중에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名詩로 평가 받는다.
그 후 두보는 택주(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배를 가리고 집삼아 지내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약초를 캐 시장에서 팔기도 하면서 근근히 질긴 목슴을 이어간다.
그의 궁핍한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궁핍(窮乏)한 가난은 평생을 따라붙고...
그해 4월 택주에서 난(亂)이 또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난을 피해 상강(湘江)을 거슬러올라가 천주(遷州)애 있다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위양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이란 곳에 배를 정박했는데,
5일 간은 먹을 것이 떨어져 거의 굼다시피 보내야 했다.
그래도 안식처(安息處)는 고향(故鄕)뿐이로다. 위양의 현령이 이 딱한 소식을 전해 듣고 술과 고기를 보내주자,
두보는 감격해서 답례로 감사의 시를 지어 보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쇄악해질 때로 쇄악해져 건강이 회복 될 기미는 거의 없었고,
강추위가 뼛속을 파고드는 늦가을부터 겨울이 다 갈 때 까지 강가를 떠돌아다니며 산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사이의 일들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한(恨) 많은 삶 강물 위에 눕다.이듬해 겨울, 택주(澤州)에서 낙양(洛陽)의 고향으로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중 익주와 담주 사이 배위에서 두보(杜甫)는 한 많은 생을 마감하며 숨을 거두고 만다.
그 때가 서기 770년이고 그의 나이 향년 59세 였다.
두보의 가족들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서 오랫동안 악주(岳州)에 두었는데,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낙양의 고향으로 운구하여 수양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옆에 묻었다.
결국 타향에서 죽어 4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백골만이 고향에 돌아와 영면에 들은 셈이다.
- 주(註) -
삶마저도 한 편의 詩로 남은 두보(杜甫).
평생을 떠돌면서 나그네로 궁핍하게 살다 간 詩人 杜甫.
번듯한 벼슬자리를 늘 꿈꾸고 살았지만 그에게는 관운(官運)이 없는 듯.
어렵게 얻은 벼슬자리마저 얼마 못가 그만두고 만 것이 몇 번이었던가~
몸은 늘 고단한 현실에 두고 머릿속엔 이상을 꿈꿨지만,
역마살이 낀 그를 현실은 고통스런 방랑길로 내몰았다.
타향에서 유랑으로 보낸 고달픈 일생은 죽고 나서 40여 년이 흐른 뒤에서야 고향땅으로
돌아 올 수 있었으니...
이 무슨 운명의 고달픔인가~
우수(憂愁)에 젖은 詩 "추흥(秋興)"
병든 몸을 이끌고 백제성(白帝城)에 올라 지은 詩 "추흥(秋興)"은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번뜩이는 기상은 아직도 날카롭게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화(菊花)앞에서
고향을 그리며 흘리는 눈물은 어쩔 수 없는 회한에 젖은 나약한 나그네의 심성(心性)이다.
겨울옷을 짓느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병들고 늙어 우수(憂愁)에 젖은 두보의 마음을 더욱 헤집어 놓는다.
세종대왕(世宗大王)도 존경했던 시인(詩人) 두보(杜甫)
영원한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고 애정을 보내는 詩人이다.
아마도 그것은 고단했던 지난 세월들이 그의 삶과 시속에 녹아들어,
깊은 공감과 정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곧이어 반포를 하며, 그 글을 널리 알리고자 했을 때도 두보(杜甫)의 詩를 택했다.
그것은 그 시절 그만큼 두보의 시가 유림(儒林)을 비롯한 학자층에 널리 알려진 면도 있지만, 두보의 시를 언문 즉 한글로 풀어서 책에 실어,
남녀노소 누구든지 한글을 익히면 양반들의 전유물이던 당(唐)나라 때 大 시인의 詩까지도 거리낌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서,
한글의 편리성을 널리 알리고자 택한 책이 바로
새종 때 출간한 "두시언해(杜詩諺解)"라는 주석 달린 여러 편의 두보시집이었다.
그후 조선 중기로 가면서도 두보(杜甫)의 시들은 한글로 많이 변역을 했었다.
어찌 파란만장한 두보의 생을 이 짧은 글로 다 옴길 수 있으랴만,
수박 겉핥기식의 몇 줄 글로써 大 詩人의 발자취를 이 시간 더듬어 봤다.
발자취를 찾아서 떠난 여행(旅行)
이백(李白)과 쌍벽을 이루면서도 호방하고 자유분방했던 이백(李白)에 비해서,
늘 고단하고 빈궁했던 인생살이...
그의 응어리진 가슴에서 토해내는 피맺힌 절규는,
내 마음속에 흐르는 영혼에 투영되어
가슴속에 맺힌 서러움까지도 녹여내는 마력은,
어찌 나만이 느끼는 감정만이겠는가~!
몇 년 전 장강(長江)의 거센 물길을 타고 오르면서 삼국지(三國志)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 백제성(白帝城)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백제성(白帝城)에서 감회(感懷)에 젖다.
기주(夔州)의 백제성(白帝城)은 양자강의 협곡 사이에 있는 성으로,
옛부터 전략적인 중요 요충지로 격랑의 세월을 품고 있는, 역사가 아주 깊은 성(城)이기도 하다.
일찌기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오나라 손권에게 관우를 잃고
울분을 토하며 원수를 갚고자 대군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결국은 크게 패하고,
이곳 백제성(白帝城)까지 쫓겨 와 통한의 한을 안고 숨을 거둔 성이기도 하다.
본시에 나오는 무산무협(巫山巫峽)은 그 산세가 웅대하고 깎아지른 절벽이 장강의 협곡을 끼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주 험하고 위험천만한 양쯔강(揚子江)의 대협곡 중 한곳이다.
세상은 변하고 역사(歷史)는 흘러가는 것.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은 다 어디로 가고
산하(山河)만 남았는가~
나는 배를 타고 장강대협(長江大峽)을 거슬러올라 가면서
고개가 아프도록 웅장한 산수경치(山水景致)를 바라보며 감탄도 했지만,
수 천 년에 걸쳐 절벽에 매달려 구멍을 파고 어렵게 만들어 놓은,
끝도 없이 이어진 절벽의 잔도길과
격동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들이 물속으로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매우 컸었다.
서초패왕 항우(項羽)에 밀려 사천땅으로 향하는 유방((劉邦)의 마음도 생각해 봤고,
삼국지의 유비가 유장이 세력을 키우고 저항하는 서천을 평정하러
재갈 량과 함께 길을 나서는 원정길도 그려 보았다.
또 술에 취한 당나라 대시인 이백(李白)이 뱃길에 올라 시를 읊으며 지나가기도 했었고,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두보와 그 가족들이 살길을 찾아 촉(蜀)으로 떠나가던 고난의 길이기도 했던 협곡이 아니던가~
그외 수도 없이 많은 민초들과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탄성 속에 시상(詩想)을 남기며 지나갔을 대협곡이다.
나는 장강대협(長江大峽)의 웅장한 멋과 운치에 감동어린 감탄을 수도 없이 반복 했고,
또 한편으론 물속에 수장 된 역사의 흔적을 아쉬워하며
풍류(風流)에 깊숙이 젖어들기도 했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
그의 고단한 삶마저도 한 편의 길 다란 장시(長詩)가 되어
내 가슴속에 또 하나의 명시(名詩)로 오래오래 남겨두고 싶다.
登高(등고): 높은 곳에 오르다
風急天高猿嘯哀 (풍급천고원소애): 센바람 높은 하늘 잔나비 슬피 울고
渚淸沙白鳥飛? (저청사백조비회): 맑은 물가 흰 백사장 휘도는 저 새.
無邊落木蕭蕭下 (무변낙목소소하): 끝없이 끝없이 낙엽은 지는데...
不盡長江滾滾來 (부진장강곤곤래): 어느 때나 다하랴 저 장강의 흐름은.
萬里悲秋常作客 (만리비추상작객): 가을마다 만리 밖 나그네 되어
白年多病獨登臺 (백년다병독등대): 한 평생 병 많은 몸 누대(樓臺)에 올라라.
艱難苦恨繁霜? (간난고한번상빈): 고통속에 구렛나루 날로 희어 가노니
?倒新停濁酒杯 (요도신정탁주배): 노쇠한 몸 탁주마저 끊어야 겠구나.
등고(登高)는
너무도 유명한 詩라서 그리 설명이 필요치 않다.
중국 교과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 국어 고문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유명세를 타는 명시(名詩)이기 때문이다.
내 정확한 기억은 잊었지만 중학교 때 인지~ 고등학교 때 인지~
등고(登高)는 두보(杜甫)의 말년 작품으로
음녁 9월9일 중양절(重陽節)에
높은 누각에 올라가 장강(양쯔강)의 가을 경치를 바라보며 읊은 詩다.
옛부터 중양절(重陽節)에는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나서,
벗들과 어울려 높은 산이나 정자(亭子)에 올라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며
시도 짓고 풍류도 즐기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던 풍습이 있었다.
지금도 중랑절은 중국의 명절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詩 내용을 보면 가을날의 낙엽지는 정경과 강가의 쓸쓸한 풍경속에
외로운 나그네의 슬픔과 노년의 처량한 탄식이 주류를 이룬다.
싸늘한 늦가을 풍경 묘사를 배경으로 늙고 병들어 타향에서 떠도는 처량한 신세를 한하고 있는데.
두보 생을 더듬어 보면 그가 그래도 걱정없이 살았던 시절은 결혼 전
스무 살 무렵 강남(江南)의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으로 여행을 다닐 때 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늘 고달팠던 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말년엔 지친 유랑생활로 병을 앓고부터는 거의 눈물 반 한숨 반으로 생을 보냈던 게 대부분임을 그의 시는 일러주고 있다.
추흥(秋興)이 그렇고 등악양루(登岳陽樓)가 그렇고 지금 소개하는 등고(登高)가 그렇다.
등고(登高)는 서기 767년 가을
두보(杜甫) 나이 56세 때, 그러니까 몇 일 전에 소개한 등악양루(登岳陽樓)보다 1년 빠른 詩로,
악주(岳州)에서 동정호(洞庭湖)로 들어오기 전
사천성(四川省) 기주(夔州) 서각(西閣)에 살 때,
채소를 심고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며 폐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무렵에 썼다.
따라서 추흥(秋興)보다도 1년 늦게 지은 詩다.
본 詩까지 두보의 시를 3편 소개 했는데 나이별로 보면,
추흥(秋興)이 가장 빠른 55세 때, 그리고 등고(登高) 56세, 등악양루(登岳陽樓) 57세로 이어진다. 이 시를 지을 무렵 그는 가을로 접어들자 귀까지 먹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이 무렵부터는 향수(鄕愁)와 우수(憂愁)에 젖어 늘 눈물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허나 그런 고통의 상황임에도 그의 시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 갔고,
시의 정점을 이룬 시기가 바로 이 무렵 2~3년 정도로
고난과 고통은 오히러 내면에 쌓인 열정을 쏟아붓게 만들어 그를 시성(詩聖)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등고(登高)는 두보의 일생을 통털어 지었던 詩 가운데 가장 완숙도(完熟度)가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두보(杜甫)의 詩는 대략 1,470여 수 정도 인데,
청년기에 지은 시들은 전하는게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몇 백여 수 정도는 넘지 않나 싶다.
이백(李白)의 시는 "육조(六朝)부터 안사(安史)의 난(亂)" 전(前)까지
낭만정신(浪漫精神)이 최고로 발휘 된 시풍(詩風)을 선도했다고 보며,
두보(杜甫)는 안사의 난 이후부터 현실주의(現實主義) 시풍을 선도한 시인이라고 보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고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시풍(詩風)이 확연히 달라,
한시(漢詩)의 양 세계를 나눈 쌍벽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보의 시들을 읽으면 늘 느끼는 바이지만,
철저하게 사실(事實)을 묘사하고 세상사와 인간의 심리를 미세하게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와 원진(元?)등이 두보의 시를 존중한 것도 철저하리만큼 현실에 바탕을 둔 풍류정신(風流精神)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두보평문(杜甫評文)에서 밝히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적(現實的) 시풍(詩風)이 다음 시대인 북송(北宋)대(代)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즉 소동파, 황정견(黃庭堅) 등이 높이 평가했으며,
오늘날까지 두보는 민중(民衆)을 위한 위대한 詩人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인물인 것이다.
계사년 11월 28일
취람 여포 찬술
첫댓글 글 어렵습니다.
몇 신 몇 신으로봐서는 중국 여행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내용을 보면 아닌 거 같기도 하네요.
두보와 이백의 발자취와 글을 쓴 배경을 알고자
현장에 갔을 뿐입니다, 이해되는 것 만큼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풋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배려에 감사합니다.
많은 애를 쓰고 계심이 역력해 보입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동행했던 동료가 아니면 이해되기 힘든 어설픈 글입니다.
단지 이백과 두보가 읊은 현장을 갔을 뿐입니다.
32명 모두가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고 보람찬 여행이셨겠습니다.
성의가 대단해 보이십니다.
과찬입니다. 그져 따라가서 보고 느낀 풋글을 엮었을 뿐입니다.
남의 글을 뜻도 모른채 장황하게 올려놔서 송구하고 죄송합니다.
여행 중에서 많은 시상이 떠오르시는가 봅니다.
만사에는 목적이 있듯이 저는 늘상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생각나면 차를 세우고, 하던 일 멈추고 메모를 합니다.
그리고 서툰 생각을 정리하여 풋글을 엮어서 보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저를 나비박사란 별명을 얻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