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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은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니 누가 더 큰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새 시대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는 거부되고 배척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박해당하고,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하늘나라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된 엘리야라면(말라 3,23; 집회 4-10 참조),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된 구세주이심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방치하거나 빼앗겨도 안 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마태 11,15).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
(에페 6,10-1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 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거나 폭행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이오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 큰 사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요한이 큰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요?
제 생각에 목전의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비난을 들을 수 없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안 될 때 조급해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질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며,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신발 끈을 풀어드릴 수조차 없는 큰 분으로 받들고. 그런 요한을 주님은 사람 중의 큰 사람이라고 치켜세우십니다.
소인배는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남을 작게 만들며 자기가 커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고, 낮출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면 이런 것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큰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주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즉시 그분이 오시기로 된 분임을 알아봅니다.
하늘에서 땅만큼 낮추어 오신 크신 분을 땅에서 하늘 님으로 알아보는 요한은 진정 큰 사람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가고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권력의 힘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혼탁한 이 세상의 빛입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하고 보여줘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것을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죄라고 해서 독성죄라고 합니다.
독성죄는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취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까지 폭력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있을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있을법한 한 부부의 이이기입니다.
어떤 남자는 직장 일을 열심히 하며 아내를 굳게 믿는 순정파 남편입니다.
둘에게는 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능력이 없는 남편을 무시하며 남편을 만나기 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길면 꼬리가 밟히는 법.
남자는 조금씩 아내의 불륜 사실을 눈치챕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아내가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점점 더 대범해져서 남편이 잠깐 집을 비워도 남자를 들입니다.
급기야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기의 분유에 수면제까지 탑니다.
이런 아내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남자를 보며 남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더는 아내가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아내를 떠나고 어쩌면 둘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야 하는 남편도 슬프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복수는 불륜을 저지른 둘의 몫이 될 것입니다.
부부는 일단 혼인했다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혼인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하지 못한 배우자와 혼인했다면 아무리 그녀와 헤어져 살 능력이 되더라도 한 번은 물려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한순간에 모든 인간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셔도,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한 번은 폭행 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성죄까지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설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면 결국 어떻게 할까요?
관계를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5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이 아들 벨사차르 왕은 큰 잔치를 벌이고 그와 그의 손님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신성한 그릇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잔치 도중 신비한 손이 나타나 벽에 메시지를 씁니다.
벨사차르는 매우 놀라 그 글을 해석해 달라고 박사들과 마술사들을 불러왔지만, 그들은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비의 제안으로 다니엘을 데려옵니다.
지혜와 꿈과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다니엘은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다니엘은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이라는 메시지를 해석하여 하느님께서 벨사차르의 통치를 심판하시어 그의 나라를 메디아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차르는 살해됩니다.
이 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다니 5,25-28)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지.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가 죽고 내가 그분의 것이 되어 그분께 이용 당하는 것이 내가 살아서 그분을 나의 금송아지로 이용하는 것보다 더 행복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처음에 그들에게 폭행 당하십니다.
그러니 먼저 회개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파라오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목자, 곧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파라오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파라오는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 그와 대치되는 ‘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뱀과 같습니다.
뱀을 긍정하면서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독성죄가 벌어집니다.
하느님을 폭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아가 강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독성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감사의 봉헌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감사하게 봉헌하는 이들은 결코 성체를 영하며 독성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충만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오늘 우리 교회는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학자(1542~1591) 기념일을 경축합니다.
그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한 가지 삶의 노선이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요한의 생애 전체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생애 내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꼭 끌어안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은 십자가의 연속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그의 가문은 아버지 때에 이르러 몰락하여, 어린 시절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이 아직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활고에 쪼들린 어머니와 요한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어린 요한 역시 목수 보조, 양복점 점원, 조각가 조수,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다가오는 큰 십자가 앞에서 요한은 우리처럼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와중에도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일하면서 기도했고, 시간을 쪼개어 신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요한의 착복식 때, '수도명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십자가의 요한!'을 선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자신에게도 지워지기를, 그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짐을 통해 한없이 기울어져 가는 수도회와 교회와 세상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거룩한 결심을 합니다.
당시 가르멜 수도회는 퇴폐한 시대사조의 영향을 받아 많이 기강이 많이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완덕에 대한 열정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도원을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도피처로 여겼습니다.
수도자들은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호의호식하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요한은 또 다른 개혁 동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의기투합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수도자들과 결별하고 극단적 청빈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다리도 쭉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천장이 낮은 공동 침실에서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열악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요한과 동료들의 얼굴을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극단적 청빈과 고행을 즐겼습니다.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한 동료 수도자들은 요한의 극단적 청빈생활과 원리 원칙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그를 독살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워 실행했지만, 마지막 순간 하느님의 은총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때로 동료 수도자들은 그를 독방에 감금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구약성경 말라키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 3,23-24)
여기서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심판의 날’을 뜻하고,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다.”는 죄인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죄인들의 멸망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에제 33,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날’이 되기 전에 먼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심판 전에 오는 엘리야 예언자가 할 일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다.”는 표현으로는 ‘가족 공동체의 회복’인데, 뜻으로는 “회개와 신앙생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바로 그 엘리야 예언자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가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환생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 예언자의 일’을 세례자 요한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구약시대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위대한 것은 메시아의 일을 준비함으로써 신약시대를 준비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는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하다.”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한 시대인 신약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였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였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은총의 시대이고, 메시아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라는 말씀은 신약시대를 거부하는 자들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사도들과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는 “구약시대는 끝났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신약시대의 첫 번째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은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라.” 라는 뜻입니다.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과 심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씀은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의 시간은, 즉 ‘지금’이라는 시간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있고, 또 예전에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날을 정하셨습니다."
(히브 4,6-7ㄱ)
회개를 미루거나 거부해서 이 기회를 놓치면, 심판관으로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회개할 시간이 없고, 곧바로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날은, 말라키서의 예언대로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고, 주님께서 내리치는 파멸을 당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 뜻에 합당하게 회개하고 잘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완성되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의 삶 -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나라”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하늘나라를 살라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내야 할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저 밖 어디엔가 있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소원이, 평생 화두가 하늘나라였고 실제 하늘나라 꿈을 사셨습니다.
하늘나라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하나 소망하는 것은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꿈을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그러합니다.
얼마전 참 많이 나눴던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함께 계시기에”
-2023.10.21
바로 선물처럼 찾아온 하늘나라 삶의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시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모든 날이 다 좋은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 행복을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이어 떠오르는 두 편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2018.10.16.
또 한편의 “하늘나라”란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사랑으로 꽃피어 내어
하늘 담으면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가 하늘나라이다.
”-2023.6.8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우리의 복된 신원을 상기시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당신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우리 하나하나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비록 가장 작은 우리들이라도 이미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살고 있기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는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처럼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정말 엄청난 자부심을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있는 사람을 들어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가 바로 우리들이며, 요한에 이어 하늘나라를 사는 우리 모두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끝날까지 이런 폭행과 폭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늘나라를 지켜낸 하늘나라의 전사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무수한 순교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인성녀들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하늘나라를 사셨던 성인들이었고 끊임없이 하늘나라를 지켜냈으며, 아마도 세상 끝날까지 하늘나라에 대한 세상의 온갖 폭행과 폭력, 박해는 과거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새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서 즉 하늘나라의 전사로서 우리의 전의를 날마다 새로이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전사로서 그 빛나는 모범 중 한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입니다.
에스파냐 아빌라의 폰티베로스 출신의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에 태어난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1591년에 만 49세로 선종하기까지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와 영적도반이 되어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분입니다.
교회학자이면서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였던 성인은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등 영성신학의 고전을 남겼습니다. 성인의 마지막 유언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 저는 천국에서 아침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Hoy estaré en el cielo diciendo maitines)
아빌라에서 있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체험도 인상적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하고 있을 때 십자고상의 예수님과의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요한아, 너의 이 모든 수고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Ioannes quid vis pro laboribus)”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고 경멸을 받는 것입니다(Domine pati et condemni pro te)”
주님을 위해서라면 온갖 고통과 모욕도 달게 받겠다는, 얼마나 십자가의 주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던 신비가 십자가 성 요한인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영적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으로서 하늘나라의 전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하늘나라 수호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따랐던 모든 성인성녀들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겨놓고 싸우는 영적승리가 보장된 영적싸움이요, 다음 주님의 복음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ㄴ)
이사야서의 주님 말씀도 평생 하늘나라의 전사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그대로 하늘나라의 영적전사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격려말씀입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이런 주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
하루하루가 하늘나라를 살라고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대림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나라의 전사가, 하늘나라의 수호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자 요한>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을 때부터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지요(루카 1,44 참조).
그런데 지금 요한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마태 11,2-3 참조).
예언자적 소명의 완성인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외친 바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마태 11,14)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음에 답을 하신 뒤(마태 11,5-6), 이번에는 요한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그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그분의 길을 닦아놓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입니다(마태 17,10-13 참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
그는 모든 인간을 통틀어 가장 큰 인물입니다.
광야에서 보여준 극기와 절제의 삶은 물론, 세상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끈 통찰력과 지도력, 자신의 자리를 아는 겸손,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순교의 영예 또한 예수님은 잘 아시지요.
세례자 요한은 "일찍이 주님의 가르침을 깨달은"(입당송 참조) 존재이며,
이사야 예언자가 묘사한 "날카롭고 날이 많은 새 타작기"(이사 41,15)입니다.
그 타작기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산들을 부수고 언덕들을 낮추며 허영에 찬 세상을 무너뜨리는 힘이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는"(이사 41,16) 그분의 종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땅이 열려 구원자 예수님을 피어나게 하도록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이고 구름이 뿌리는 의로움'입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또한 그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린"(영성체송) 모든 인류의 원형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의 도래와 메시아의 오심을 외쳤지만,
오히려 하늘 나라와 메시아는 세상 힘에 의해 난폭히 다루어집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와 있는 하늘 나라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까닭입니다.
세상이 섬기는 우상과는 다른 하느님, 세상이 좋아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와는 다른 질서, 세상을 충동질하는 쾌락, 탐욕과는 다른 가치에 이물감을 느끼는 세상은 하늘 나라를 자기네 구미에 맞게 재구성하고 편집하려 합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폭행당하고 탈취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힘을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하늘 나라를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도, 작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주인이 되는 하느님 나라를 열어 주신 예수님도 세상 힘에 의해 목숨을 잃을 터이지만, 그늘은 작은 씨앗에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처럼 무성히 번져가는 하늘 나라(마태 13,32 참조)를 어쩌지 못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미완적 상태로나마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명백한 증거이고 증인이지요.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이사 41,17)
하느님의 이 마음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 나라를 지키는 힘입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과 함께 굳은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오른손을 꼭 붙잡아 주고 계십니다! (마태 41,13 참조)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139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하는 사제는 151명입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는 111명이고, 미주지역 소속 사제는 40명입니다.
제가 신문홍보로 한인성당을 다녀보면 성당의 규모와 공동체의 모습이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숫자가 100명 이내인 본당도 많습니다.
보좌신부가 있는 본당도 있습니다.
미주 지역에서 한인 성당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성당을 소유한 곳도 있지만, 미주 지역에 있는 성당에 더부살이 하는 공동체도 많습니다.
제가 미사를 다니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도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성당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미사는 3개 공동체가 하고 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미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령화’입니다.
고령화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에서 오는 이민자의 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민 2세들이 한인 공동체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오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미국 성당으로 가거나, 아예 성당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교구에 본당이 200개가 넘습니다.
본당을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식당에서 보았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의 날 수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을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기도 바쁜데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걱정하고 있습니까?”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에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와 신학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에 관한 강의를 많이 했으며, 신학교에서도 강의 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춘 신학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이제 사제로서의 직분을 떠나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지요.
“나는 하느님의 지식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뒤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은 하느님이란 말밖에 모르는 어떤 할머니보다도 못했습니다.”
지식과 신앙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을 통해 신앙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만 채우는 하느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는 신부들을 바라봅니다.
많은 신학적 지식을 갖춘 신부보다 사랑의 마음을 갖춘 신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신부보다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며 신앙적 열심을 보여주는 사랑 있는 신부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과연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합니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을까요?
지식을 채우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느님에 대해 충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식만 있을 뿐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낙타털 옷과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충분히 사람들 위에 설 수도 있었겠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 대한 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반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도 마치 그 삶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폭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께 대한 신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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