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에두아르 마네(프랑스어: Édouard Manet, 1832년 1월 23일 - 1883년 4월 30일, 프랑스 파리 출생)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한 점에서 공적이 크다.
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들중의 하나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초기작인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나 반면에 수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모으는 힘이 되었는데,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창조하였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1832년(1세)
1월 23일 법관의 아들로 파리의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생제르맹데프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인 외제니-데지레 푸르니에는 외교관 아버지를 두었고, 할아버지가 스웨덴의 왕자인 샤를 베르나도트(현 스웨덴 왕가의 시조)였다. 그의 아버지인 오귀스트 마네는 프랑스의 법관이었는데 그의 아들이 법조계에 종사하기를 바랬다. 그의 삼촌인 샤를 푸니에르가 그에게 미술계에 종사하도록 독려하고 어린 마네를 종종 루브르 박물관에 데려갔다.
1839년(7세)
보지라르에 있는 카농 푸알루 학교에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고전 문학을 공부했다. 그후 팡테옹 근처에 있는 롤랭 학교의 기숙생이 되었다.
1845년(13세)
가난한 학생이었던 그는 학교에서 특별히 실시하는 소묘 강좌에만 흥미를 가졌을 뿐이다. 삼촌의 조언에 따라 그는 한 미술 교육과정을 수강하였는데 여기서 미래의 예술부 장관이자 그의 평생의 친구인 앙토닌 프루스트를 이 곳에서 만났다.
1848년(16세)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학교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끝내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가 지망을 허락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제안으로 리우데 자네이루로 항해하는 연습선에 올라 선원견습생를 하기도 하였다. 12월 9일 수송선 '르 아브르 에 과들루프호'의 수습 조타수가 되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났다.
1849년(17세)
6월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다시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이번에도 역시 떨어졌다. 두번이나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자 마네를 딱하게 여긴 아버지는 그가 예술 교육을 받도록 허락하였다.
1850년(18세)
남아메리카를 항해하면서 이해에 겨우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여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미술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나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받았다.
고전주의의 화가인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갔는데 쿠튀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재를 양성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자신의 기술을 아는 화가를 양성한다." 선생은 마네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마네가 소묘와 회화적 기법을 확실히 파악한 것은 쿠튀르 덕분이었다.
마네 가족은 프티오귀스탱가(후에 보나파르트가) 5번지에서 몽타보르가 6번지로 이사했고, 네덜란드 출신의 아가씨 수잔 렌호프가 에두아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러 이 집에 드나들었다. 젊은 화가와 음악 선생 사이에는 연정이 싹텄던 것 같다. 실제로 렌호프는 나중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마네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레옹 에두아르 코엘라 렌호프라고 이름지어진 그 아이는 수잔의 동생으로 입적되고 마네는 그의 대부가 되었다.
1856년(24세)
쿠튀르에게서 6년 동안 그림을 배운 뒤 56년에 그는 생토귀스탱 구역의 라부아지에가에 군대에 관한 주제를 그린 알베르 드 발르루아라는 화가와 함께 화실을 차렸다. 그는 빌리에가에 있는 화실을 떠나 빅투아르가 58번지로 옮겨, 이곳에서 그는 〈버찌를 든 소년, The Boy with Cherries〉(1858경, 파리 귈벵키앙 콜렉시옹 소장)을 그렸는데, 이 작품의 모델이 어느날 화실에서 못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는 다시 두에가로 가서 18개월 동안 지냈다. 여기서 샤를 보들레르를 만나 그의 제의에 따라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La Musique aux Tuileries〉를 그렸다. 야외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는 토르토니 카페와 바티뇰 예술가들의 집결지인 게르부아 카페의 단골손님들이 그려져 있으며 제2제정 때의 들떠 있는 듯한 파리 상류사회를 엿볼 수 있다. 행인들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이 화가가 야외에 화폭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 시기의 그의 스타일은 붓 터치에 힘을 빼고 표현을 간결하게 하여 중간 톤을 억제하였다. 같은해 그는 네덜란드와 독일 및 이탈리아를 잠시 여행했다.
버찌의 소년 (The Boy with Cherries)
1859년, 캔버스에 유채
초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27세 때 그린 이 그림 속에는 지금까지의 회화 수업 역정(繪畵修業歷程)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 반면 '마네 초기의 경신작'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델인 알렉산드르 소년은 마네의 작업장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붓도 빨아주는 사동이었는데 어느날 이 소년이 마네의 작업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감수성이 강하고 예쁘장한 미소년의 사체를 보고 마네는 겁에 질려 작업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작업장 기둥에 굵은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여기서 목을 매었느냐?'고 무심결에 묻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대답하여 마네는 대경실색, 다른 아틀리에로 옮겼다는 일화도 있다.
압상뜨를 마시는 사나이 (The Absinthe Drinker)
1858-1859. 캔버스에 유채
1858년에 제작을 개시하여 다음해 관전(官展)에 낸 마네 최초의 살롱 출품작이다. 1857년에 만 들라크로아만이 찬표를 던졌고 나머지 심사 위원들은 모두 부표를 던진 불운한 대작이다.
마네와 아는 체하고 지내는주정뱅이 불량아를 아틀리에로 모셔와 강한 술에 취해 의식이 몽롱한 상태를 그린 것인데, 모델의 발, 무릎, 얼굴 등 몸가짐이 어쩐지 딱딱하게 꾸민 것 같으나, 정면에서 비친 광(光)이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를 낳고, 버려진 상징적인 술병과 어울리지도 않는 복장과 모자, 그리고 술잔 등이 대도시의 퇴폐를 은유적으로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황폐를 화제(畵題)로 구한 것은 '惡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와의 교분으로 미루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다.
Portrait of M. and Mme. Auguste Manet.
1860. Oil on canvas
기타 연주자, 1860년, 캔버스에 유채
마네의 28세 때의 작품, 다음해 살롱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교과서식 전통 도식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명암 처리, 신선한 색조의 대비로 창출시킨 살아 있는 듯한 화면 구성 등 그의 재능과 예술적 특질이 잘 나타나 있는 문제작이다.
대담한 필촉과 사실주의적인 색채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 등신대의 인물상에서 기타 반주에 맞춘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오는 듯하며, 밝은 빛과 어두운 배면과 오른쪽의 붉은 병과는 서로 대비되면서 이곳이 무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인물의 배치, 묘법 등에서 스페인 취미가 엿보이나, 생기 있고 발랄한 모티브의 포착, 강렬하면서도 평면적인 마티에르에 이미 마네의 독자성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특질은 3년 후의 <올랭피아>, <풀밭 위에서의 식사>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Woman Pouring Water 1860년
1861년(29세)
살롱에는 겨우 입선하여 수상했으나, 처음부터 이색적인 작품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낙선을 거듭하였다.
Surprised Nymph. (Nymphe surprise).
1861. Oil on canvas
Boy with Dog, 1861년, Oil on canvas
1862년(30세)
9월 25일에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마네는 기요가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1865년까지 마르티네 화랑이 주최하는 전시회에 참여했다.
거리의 악사(The Street Singer)
1862. Oil on canvas
Boy with a Pitcher 1862년
The Old Musician. 1862. Oil on canvas
Baudelaire's Mistress Reclining, 1862년
Mlle Victorine Meurent in the Costume of an Espada., 1862. Oil on canvas
Portrait of Victorine Meurent. 1862. Oil on canvas
롤라 드 발렌스(Lola de Valence)
1862년, 캔버스에 유채
'스페인 발레'에 등장한 몰라라는 발레리나를 그린 것인데 우측(右側)으로 무대와 객석이 보인다. 스커트의 적(赤), 흑, 황,녹의 대담한 채색법은 형태나 음영(陰影)과의 유기적인 연관을 제일의(第一義)로삼았던 전통적인 채색법에의 반역으로, 당시 평론가들에 의해 '잡탕 칠'이란 혹평을 받았다.
스커트의 색깔과는 대조적으로,롤라의 팔과 다리의 상아색(象牙色)은 배면의 불꽃 같은 색깔과 스커트의 눈부신색깔의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부는 위치에 따라 신비로울 정도의 미묘한 색으로 변한다. 쿠르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사실적인 '살 붙임'도 간과할 수 없다. 보들레르는 롤라의 야성적인 표정, 대담한 채색으로 생긴 선려한 인상을 '4행시'로 써서 그의 유명한 '惡의 꽃'에 수록했다.
Guitar and Hat. 1862. Oil on canvas
스페인 발레(The Spanish Ballet)
1862. Oil on canvas
보들레르가 마네에게 말했다. '마드리드 왕립 극장 무용단의 인기가 대단한데, 한번 구경해봐.' 마네는 1862년 8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무려 80일 동안 롱런한 이 '세빌리아의 꽃' 공연을 보고 감동, 이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특별히 교섭, 공연이 없는 3일 동안 단원들이 포즈를 취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마네는 친구의 넓은 아틀리에를 빌려 스케치, 이 해 늦게 이 그림을 유채로 완성시켰다. 마네의 열성도 대단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마네를 위해 사흘씩이나 포즈를 취해 준 성의도 무던하다. 친해지기 쉬운 정경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렸는데 간결, 자유로운 필촉의 리듬이 발레의 리듬과 잘 어울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Music in the Tuileries Gardens.
1862. Oil on canvas
Oysters, 1862. Oil on canvas
Young Man in the Costume of a Majo
1862년, Oil on canvas
1863년(31세)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미술전의 살롱 심사위원들은 획기적 양식을 사용한 그의 〈풀밭 위의 점심, Le Déjeuner sur l’herbe〉를 낙선시켰고, 마네는 이 작품을 낙선전(공식 미술전에서 낙선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창설된 전시회)에 출품했다. 세로 214㎝에 가로 270㎝인 이 커다란 그림은 옛날 거장들의 작품인 조르조네의 〈전원의 연주회, Concert champêtre〉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 Judgment of Paris〉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요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이때부터 마네에게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그 '전시회에서의 악평'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이 그림에서 옷을 입은 젊은 남자들 사이에 발가벗은 한 여인이 끼어 있는 것에 분개했다. 같은해 10월 28일 네덜란드의 잘트봄멜에서 수잔 렌호프와 결혼했는데, 그는 자신의 결심을 친구들에게 밝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결혼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풀밭 위의 점심, 1863년, 캔버스에 유화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한 작품으로, 같은해 '낙선전'에 출품되어 비난과 조소의 표적이 되었으며, 원래의 이름은《목욕》이었다. 그림은 파리 교외의 전원 행락 풍경에서 착상하였는데, 나체의 여인에 옷을 입은 남성을 배치한다는 구상은 조르조네(Giorgione)의 《전원의 주악》에서 얻었다고 한다.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을 참신한 분위기 아래서 조화시키고자 르네상스의 조르조네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와토·부셰·코로 등이 선호한 고전주의적 주제를 현대화한 것이다.
그러나 관람자에게는 현대생활의 한 장면에 나체를 채택한 주제의 대담성이 자극적이었다.
또 그늘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부분을 생략하고 밝은 표면(나체의 살결)도 어두운 표면(남자들의 검은 옷)도 각각 자체의 색채로써 평면적으로 포착하여 이들 색채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킨 수법이 전통적 회화의 비전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낯설게 비쳐졌던 것이다. 그림은 나체뿐만 아니라 앞쪽의 빵·바구니·천 등 정물의 표현도 뛰어나다.
처음에는 이를 89х115㎝의 캔버스에 그렸으나 뒤에 지금과 같은, 그로서는 처음의 대작으로 다시 그렸다. 모델의 나부(裸婦)는 《올랭피아》와 같은 빅로린무랑, 가운데 남자는 처남, 오른쪽은 마네의 동생이다.
올랭피아(Olympia), 1863년, 캔버스에 유화
아카데미살롱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이며, 모델은 《풀밭 위의 점심》의 나부(裸婦)와 같은 빅로린 무랑인데, 그녀는 1860년대 마네의 몇몇 작품에 등장한다. 착상은 이탈리아에서 티치아노(Vecellio Tizjano)의 명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보고 했다고 한다. 그림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여인이 서슴없이 온몸을 드러낸 채 비스듬히 누워 있고, 발밑에는 검은 고양이가 눈을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흑인 하녀가 손님이 보낸 꽃다발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전시되자 평론가와 시인들의 혹평과 빗발치는 야유 때문에 작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천장 밑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델의 나체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며, 신화나 우의(寓意)의 베일을 씌우지 않고 거의 초상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람자들은 비너스 대신 모델이 된 거리의 여인을 보고 파리의 밤의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고 격분하였던 것이다.
살결의 밝은 우윳빛이 또렷한 윤곽에 의해서 검은 배경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효과, 그 평면적 표현의 기법을 평론가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거꾸로 그가 제시한 표현 기법의 참신함과 근대적인 명쾌함을 일반에게 인상적으로 남겨 작가에 대한 관심을 모으게 하였다.
1864년(32세)
11월 바티뇰가 34번지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여 1867년까지 살았다. 그는 경마장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하여 친구인 에드가 드가가 즐겨 다루는 주제를 능숙하게 소화해냈다. 드가는 마네보다 2년 먼저 경마 습작을 시작했다. 마네는 이를 주제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에서는 〈파리 롱샹에서의 경마, The Races at Longchamp, Paris〉가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The Angels at Christ's Tomb. 1864. Oil on canvas
Still Life with Eel and Red Muller.
1864. Oil on canvas
Peonies in a Vase. 1864. Oil on canvas
Peony Stem and Shears. 1864. Oil on canvas
Branch of White Peonies and Shears.
1864. Oil on canvas
Still Life: Fruit on a Table. 1864년, 캔버스에 유채
과일, 나이프, 컵 등 여러 마티에르의 상호간의 밸런스, 이런 사물들의 구성에 견고한 토대를 부여하는 테이블의 수평선과 배경의 절단 방법 등이 마네의 스승인 샤르당(Chardin)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샤르댕은 면밀하고 무게있는 필치로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주로 그렸고, 그의 정물화는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마네는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을 그렸으나, 이에 비해 정물화는 극히 적은 편이다.
1846년에서 66년 사이에 그린 10여 점의 정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집토끼>는 샤르댕의 <죽은 토끼와 몰이 도구>를 모사한 것처럼 닮았다. 마네는 인물화에도 레몬, 컵, 포도 등을 장식물로 등장시켜 때로는 주제인 인물 이상으로 집요하게 묘사, 화면 전체를 대위법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데, 이 그림에서는 '견고한 구성'을 직감할 수 있다.
The Battle of the Kearsarge and the Alabama.
1864. Oil on canvas
Women at the Races. 1864-1865. Oil on canvas
The Dead Toreador. 1864. Oil on canvas
The Philosopher(Beggar with Oysters), 1864-1867
기구(祈求)하는 수도사(修道士)
한 수도사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기구(祈求)하고 있다. 바닥에 있는 두개골은 수도사의 경건한 얼굴표정과 대비(對比)되어 기구하는 내용이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한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화면 전체가 암갈색(暗褐色)의 색조로 이루어져 표현주의풍(風)의 강한 감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순수한 종교화(宗敎畵)로 볼 것인지는 의문이다.
마네는 평생을 통해서 몇 점밖에 안 되는 종교화를 그렸고, 또한 수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파(派)나 네덜란드파의 선인(先人)들의 작품을 모사한 습작조차 별로 없는데, 이 작품 역시 어떠한 동기에서 그렸는지, 또 언제 완성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러 장르의 그림을 그린 마네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865년(33세)
2년전에 제작하여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 Olympia〉도 큰 화제가 되어 일약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이 흰색의 교향곡과 같은 그림(프랑스의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는 1907년에 이 작품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했음)은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비난을 견디다 못한 마네는 8월 스페인으로 떠났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스페인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스페인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마드리드에서 그는 테오도르 뒤레를 만났는데, 나중에 이 사람은 마네의 작품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옹호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작품에 대한 비난은 지나쳤으나 도리어 그의 표현기법의 참신성과 밝음을 결정적으로 인상지어준 결과가 되었다. 이 사건 이래 화단과 문단 일부에서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고, 자신을 경모(敬慕)하는 C.피사로, C.모네, A.시슬레 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그 후에 대두될 인상주의에의 길을 여는 기연(機緣)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려, 인상파그룹의 전람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대단히 꺼렸으나 한때는 인상파기법을 채용하여 제작한 적도 있다.
The Tragic Actor(Rouvière as Hamlet).
1865-1866. Oil on canvas
Angélina. 1865. Oil on canvas
Bull-Fighting Scene. 1865-1866. Oil on canvas
투우
1865년 <올랭피아>의 악평에 번민한 나머지, 스페인으로 피신(?)한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즈와 고야의 그림에 감명을 받고, 투우(鬪牛)에도 열중했다.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스페인의 추억들을 캔버스에 옮겼는데 이 그림도 그때의 것이다. 경쾌하고 거친 필촉 등 즉흥적인 묘사로 보이나, 드높은 하늘, 햇빛을 듬뿍 받은 밝은 대지, 소의 검은 고체(固?),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말이 적절히 대비되고, 또한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과 새빨간 물레타와 긴 칼 등이 푸른 하늘색과 해조(諧調)를 이루어 투우장의 속성인 잔혹성(殘酷性)과 시원한 맛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마네는 당시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 <투우>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표현한 듯하다.
Jesus Mocked by the Soldiers, 1865년
The Bullfight, 1865년
첫댓글 이렇게 많은 작품이 있군요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