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사용한 대한제국, 한글을 사랑한 한국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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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야마토인(人) 우익 가뢰영명(加瀨英明. 가세 히데아키)이 일본 잡지인『주간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일제시대까지도 서당에서는 한글을「언문」이라고 부르며 천대하였다."고 말한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이를 반박하려고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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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대한제국 황실의 한글 사용을 모르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막 떠들어대는 것은 곤란하다.
한글은 대한제국 시절은 물론 식민지 시대에도 계속 쓰였으며 "천대"받기는커녕 오히려 사랑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때 사람들이 한자와 한글이 반씩 섞여 있는 글을 썼지만 신문은 순 한글로 나왔으며 대한제국 정부의 교과서도 한글로 인쇄되었고『조선왕조실록』까지도 순 한글로 나올 정도로 한글은 널리 쓰였다.
서기 1896년(단기 4229년), 대한제국이 세워지기 딱 한 해 전에 서재필은 조선 조정의 지원을 받고『독닙신문(나중에『독립신문』으로 바뀐다)』을 창간한다. 이 신문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인쇄된 순 한글 신문이며 서기 1898년(단기 4231년) 독립협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독립협회의 기관지이자 대한제국 황실을 지지하는 신문으로써 활약한다.
조선 말기인 서기 1883년(단기 4216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근대적인」(여기서 근대적이라 함은 서양식임을 밝힌다) 신문인『한성순보』가 순 한문으로 인쇄해서 읽기가 어려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14년 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다.
비록『독립신문』이 3년 만에 폐간되지만, 두 '후발주자'가『독립신문』의 뒤를 이어받는다. 바로『매일신문』과 『대한매일신보』다. 서기 1898년(광무 2년, 단기 4231년) ― 이 해는 『독립신문』이 폐간된 해이기도 하다 ― 창간된 『매일신문』은 비록『독립신문』과는 달리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을 받지도 못했고, 정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만든 신문이었지만『독립신문』과 마찬가지로 순 한글로 인쇄해서 독자를 끌어들인다.
서기 1904년(광무 8년, 단기 4237년) 영국인 기자 에른스트 토마스 베델이 세운 대한매일신보사(社)에서 펴낸 신문『대한매일신보』도 순 한글과 영문으로 기사를 싣고 있다. 이 신문은 한글 기사의 경우 반 한글, 반 한자로 제목을 달고 기사는 순 한글 기사나 한자/한글 혼용기사를 싣고 있다. 그러나 순 한글 기사가 가장 많기 때문에 한글신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사는 고종황제의 지원을 받고 신문을 인쇄한다. 정부가 한글신문을 지원한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신문 뿐 아니라 국민교육에 필수적인 교과서까지 한글로 인쇄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만들어진 교과서들은 한자 반, 한글 반으로 인쇄되어 있다. 물론 이제까지와는 달리 '한자를 아는 몇몇 양반'들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온 신민'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이는 대한제국이 무너진 뒤인 서기 1908년에 마지막으로 나온『대한역사(大韓歷史)』라는 교과서도 마찬가지여서, 비록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다는 방식으로 적혀 있기는 했지만 한글이 쓰이고 있다는 점은 을사「조약」이전에 나온 대한제국의 교과서와 다를 게 없다.
정부가 앞장서서 한글 신문사를 지원하고 한글로 교과서를 인쇄한 대한제국.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한글을 적극적으로 썼으며 한글신문을 정부 시책을 신민(臣民)들에게 알리고 반대로 신민들의 주장이나 여론을 듣는 수단으로 여겨 지원하였다.
(실제로 이런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 시절 국채보상운동도『대한매일신보』에서 낸 모금 광고를 보고 민중들이 신문사에 돈을 모아 빚을 갚으려고 한 운동이었고, 의병전쟁(의병운동이라는 말은 틀렸다) 때 어느 의병장은『대한매일신보』를 읽은 뒤 감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켰다고 증언하고 있으니까)
한글에 대한 관심은 을사「조약」이후 나라를 빼앗겼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속국이 된 마당인 서기 1908년(단기 4241년)에도 대한제국 황실은『대한역사』를 한글로 인쇄해서 교과서로 내놓았고, 같은 해 함흥의 학교 학생 17명은 손가락을 끊어 피로 '我(아 : 우리)가 我大韓(아대한 : 우리 대한)을 必復(필복 : 반드시 회복)하리라…我가 我同胞(아동포 : 우리 동포)를 必救(필구 : 반드시 구함)하리라."라는 혈서를 쓰는데 이 때 이들은 한자 반, 한글 반인 혈서를 쓰고 있다. 이 혈서는『대한매일신보』에 실렸으며 혈서를 쓴 학생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보 기자들에게 '어찌 장하지 않으리오?'라는 칭찬을 듣고 있고―. 이후 『대한매일신보』사의 사장이었던 에른스트(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이 서기 1909년 한국에서 쫓겨나 중국 상해에서 세상을 떠나자 베델을 추모하는 한국인들의 글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한글과 한자를 반반씩 쓴 편지를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이 한글로 만든『조선왕조실록』을 펴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4년 전 한글로 만든『조선왕조실록』이 발견되었는데 이 실록은 사람 이름을 뺀 모든 부분이 한글로 적혀있고 실록 가운데서 18대 현종부터 25대 철종까지의 내용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학자들은 정식 이름이『실록초본(實錄抄本)』인 이 한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황실의 여성과 아동을 위해 조선왕조의 역사를 가르치려고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고, 아마도 서기 1908년(단기 4241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글은 식민지가 된 뒤에도 결코 버림받지 않았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라 밖에 나가서 살고 있는 동포라고 해서 다를 수는 없다. 대한제국 시절(아니 조선 말기부터) 나라 밖에 나가서 살고 있던 동포들은 한인(韓人) 사회를 만들고 신문을 인쇄하고 잡지를 펴내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이 때 만들어진 신문과 잡지, 교과서는 모두 한글로 인쇄된 것이다.(물론 한글 반, 한자 반으로 인쇄된 교과서가 많았지만, 어떤 신문이나 교과서는 순 한글로 인쇄되었다) 만주의 한인학교에서 쓰던 교과서도 그 중 하나다.
백범 김구선생은 서기 1929년(단기 4262년) 중국의 상해(上海) 시에서 『백범일지』상(上)권을 한글로 적었고, 서기 1942년(단기 4275년)에 적기 시작해 서기 1947년(단기 4280년)에 완성한 하(下)권도 한글로 적었다.(원본이 한글 반/한자 반으로 적혀 있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서기 1923년(단기 4256년)에 -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 의열단의 이념을 담은 글「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한글로 쓴다.
물론 독립군이 쓰던 군사교과서나 교본도 모두 한글로 인쇄된 것들이고, 한국의 평범한 시민이었던 독립군 병사들은 낙서도(최근에 독립군이 쓴 한글 낙서를 모은 책이 나왔다) 순 한글로 썼다. "일제시대"로 불리던 식민지시대에도 한국인은 한글을 "천대"하지 않고 오히려 널리 쓰고 사랑했던 것이다.
식민지로 굴러 떨어진 본국에서는 한글이 사라졌을까? 그렇지는 않다. 서기 1920년(단기 4253년) '식민지' 조선에서 창간된『조선일보』와『동아일보』는 한글신문이었고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내는 잡지도 한글 잡지였다. 물론 몰래 활동하던 조선공산당이나 사회주의 단체, 그리고 민족주의단체도 선전물이나 책을 한글로 인쇄하였다. 당시(서기 1920∼1930년대)에 활약하던 문인들 - 심훈, 김동인,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 이 시나 소설, 수필을 한글로 적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비록 서기 1940년대부터 한글 사용이 금지되고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한글을 연구하고 한국어 사전을 만들려고 했던 우리나라 학자들이 '반역죄'로 잡혀와 고문당하고 감옥에 가고 사형당했지만, 이 사건을 거꾸로 생각하면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그때까지도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한글을 버리지 않았고 한글을 뜨겁게 사랑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태평양 전쟁 말기에 사할린이나 북해도로 끌려갔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탄광 벽에 '배가 고파요.'나 '어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적을 수 있었지 않았는가.
한마디만 더 하자. "서당"이 서기 1910년대, 식민지가 된 한국에 많이 생겨나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 "서당"은 옛날과 달라 더 이상 한자로 된 유교 경전을 가르치지 않았고 한글로 된 교과서로 대한제국 시절 세워진 신식 학교에서 가르치던 내용 - 과학기술이나 세계 정세, 외국어 -을 그대로 가르쳤다. 그랬는데도 "한글"을 "천대"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서기 1920∼1930년대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성행한 야학은 한글을 가르친 뒤에 다른 내용을 가르쳤다. 한국사람이 "한글"을 "천대"했다면 아예 가르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가뢰영명이 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대한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런 소리는 애초에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헛소리가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글을 사용한 대한제국 정부와 한글을 사랑한 한국사람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교과서에 온전히 되돌려 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