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진흥법 제정/1966
1966년 8월 3일 수산진흥법이 법률 제1814호로 제정되었다. 수산진흥법은 수산업 발전을 위한 기본 시책을 촉진해 수산업의 생산 및 수출을 증가시키고 어민의 소득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전문 18조 및 부칙과 이에 따른 시행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과 1990년 2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제3조와 제4조에서 어민의 생활개선과 어업기술의 향상, 조업의 안전 등을 위해 필요한 조치 등 정부의 역할과 국립수산진흥원 설립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수산업 생산증대와 기술개발을 위한 시험연구기관과 훈련소 설치, 보호수역 설정과 수산자원의 유지증대를 위한 각종 대책, 어업생산성의 향상에 대한 내용 등도 담고 있다. 그밖에 수산단체의 육성, 어획물의 유통조정과 적정가격유지, 수산물의 수출장려방안, 재해대책, 정부의 재정적 지원, 조세감면조치, 종사자의 지위향상 등에 관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8·3긴급금융조치 공포/1972
1972년 8월 3일 경제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 제15호로 긴급금융조치가 공포되었다. 이 조치는 기업에 대규모의 금융·조세상 특혜를 베풀고 강력한 물가억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첫째, 모든 기업은 자체 보유하고 있는 사채(私債)를 정부에 신고하고 채권자에게 이를 분할상환하거나 출자로 전환시키며, 둘째, 금융기관은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을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하며, 셋째, 정부는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 및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에 20억 원을 출연하며, 넷째, 정부는 산업합리화자금을 장기저리로 기업에 대여해 세제상의 혜택을 주는 등 총 7개의 긴급명령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대통령의 내각지시사항으로서 금융기관의 금리인하, 환율 안정, 공공요금인상 억제, 물가상승 억제, 예산규모증가 억제 등이 제시되었다. 그 결과 사채신고액 중 3,203억 원이 동결되었고, 금융기관의 단기고리대출금 2,000억 원이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되었으며, 500억 원의 산업합리화자금이 풀렸다. 세제면에서도 감가상각률의 할증률 인상 및 국내자원 이용 기업의 법인세·소득세의 투자공제율 인상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볼드윈 Stanley Baldwin, 1st Earl Baldwin of Bewdley
1867년 8월 3일 태어남 / 1947년 12월 14일 죽음
◀ 볼드윈(1932)
볼드윈은 총리를 지낸 영국 보수당 정치가이다. 1908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16년 12월 앤드루 보너 로의 원내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로와 인연을 맺었다. 1922년 10월 로와 협력해 로이드 조지의 연립내각을 해체시켰고, 얼마 후 로가 보수당 내각의 총리로 취임하자 재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 1923년 1월 전쟁부채 협상을 위해 워싱턴에 파견되었으며, 1923년 5월 22일 로가 도중하차하자 그 뒤를 이어 내각을 이끌었다. 1924년 11월 4일 노동당 내각이 붕괴하고 볼드윈의 2차 내각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 경제불황이 계속되고 1926년 5월 4일 총파업이 일어나자 노동조합 집행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반노조 성향의 '노동쟁의조정법'을 통과시켰다. 계속되는 실업문제와 노동쟁의조정법으로 인해 1929년의 총선에서 보수당이 참패하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35년 6월 7일 다시 총리에 취임한 볼드윈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독일의 라인란트 회복, 스페인 내란에 대한 파시스트의 간섭 등 계속되는 국제위기를 맞아 군비강화에 치중했다. 1937년 네빌 체임벌린에게 총리직을 인계했다.
美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 세계최초로 북극점 통과/1958
1958년 8월 3일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인류역사상 최초의 북극점을 통과하는 해저 항해의 위업을 달성했다.
노틸러스호의 역사적 탐험은 7월 23일 진주만에서 시작해 베링해협을 거쳐 북극으로 이어졌다. 이번 항해에서 노틸러스호는 포인트 베로우와 알래스카의 만년 극빙 밑으로 들어가 단 한차례 잠수함의 방위를 검사하기 위해 잠망경을 올렸을 뿐 그곳에서 잠수한 채 머물러 있었다.
노틸러스호가 북극의 빙원을 통과한 시각은 이날 오전11시45분으로 이후 4일간 북극지역을 항해해서 8월 7일 아이슬랜드에서 탐험을 마쳤다.
노틸러스의 함장인 해군중령 W.R.앤더슨에게는 레종 공로메달이 주어졌으며 110명의 승무원들과 동행한 참관인 모두에게는 표창장이 수여됐다. 1954년 1월 21일 진수된 노틸러스호는 영어로 '앵무조개'란 뜻을 가진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다.
월북작가 한설야 출생/1900
韓雪野
1900. 8. 3 함남 함흥~ 1962(?).
소설가·문학평론가.
◀ 한설야
1920~30년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을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작가로 활동하다 8·15해방 후 북한문학의 건설자로서 김일성 및 당 정책과 관련된 문학활동을 했다. 본명은 병도(秉道). 필명은 만년설(萬年雪)·한형종(韓炯宗)·김덕혜(金德惠)·윤영순(尹英順)·H생.
함흥 교외 나촌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함흥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함흥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함흥법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교내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하고 베이징[北京]의 익지영문학교에 들어가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1921년 일본으로 유학,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다니다 1923년 관동대진재로 귀국하여 북청사립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집안의 몰락으로 만주 푸순[撫順]으로 이주하여 탄광 등지를 돌아다니며 노동을 체험하게 되었다. 1925년 KAPF에 가입한 뒤 1927년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에는 함흥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기도 했다. 1931년 〈대조〉·〈신계단〉의 편집을 맡았다가 1933년 잡지가 종간되자〈조선일보〉 편집기자 생활을 했다. 1934년 8월 KAPF 제2차 검거 때 체포되었다가 1935년 1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귀향하여 서점·인쇄소·극장 등을 경영하면서 창작에 전념했다. 해방 직후 이기영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을 조직하여 임화·김남천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대항하다 두 단체가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합쳐지자 바로 월북했다. 북한에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결성 초기부터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해 1962년까지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외에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교육문화상, 당중앙위원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1962년말 복고주의자·자유주의자로 몰려 숙청된 후 문단 및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최근 복권되어 다시 주요 작가로 거론되고 있다.
1925년 1월 〈조선문단〉에 단편 〈그날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 발표한 〈합숙소의 밤〉·〈인조폭포〉·〈과도기〉 등은 자신의 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만주 유민들이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향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이 세 작품은 '귀향'의 모티프에 의해 서로 연관성을 지닌다. 특히 〈과도기〉는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농민들이 일제의 산업정책으로 노동자로 변신하는 현실을 그려냈는데, 임화는 이 작품을 "그 양식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실로 그 정신에 있어서도 분명히 새 시대의 문학"이라고 호평했다. 이후 한동안 공장노동자들의 삶을 그려냈으며, 〈과도기〉의 속편에 해당하는 〈씨름〉이나 〈공장지대〉·〈삼백육십오일〉 등이 그런 유이다. 이 작품들은 식민지적 산업화과정에서 고향을 등졌던 이농민이 귀향하여 노동자로 편입되는 과정과 노조활동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그려내 신경향파시기를 끝맺게 한 소설사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어 일제 말기에 〈황혼〉·〈청춘기〉·〈마음의 향촌〉·〈탑〉 등의 장편소설과 〈탁류〉 3부작 등의 농민소설, 〈임금 林擒〉·〈철로교차점〉·〈이녕 泥寧〉 등의 지식인 소설을 발표했다. 〈황혼〉(1936)은 온갖 고난 끝에 선진적인 노동자가 되는 농촌여성 출신 지식인 여순과 이념을 지녔으나 방황 끝에 무기력한 지식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부잣집 아들 경재의 삶을 그렸다. 작가는 이러한 연인의 대비를 통해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대부분의 소시민적 지식인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청춘기〉에서는 주인공 태호와 은희의 애정 갈등을 중심으로 소시민적 지식인이 현실을 모색하며 겪는 갈등과 변혁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한말을 배경으로 한 가족사를 다룬 〈탑〉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김남천의 〈대하〉에 비견되는 작품이다.
한편 그는 평론에도 주력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성립과정과 당위성을 드러낸 〈계급대립과 계급문학〉(1927)을 발표한 데 이어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1928)·〈조선문단운동의 당면과제〉(1929)에서 이북만·박영희를 비판했고, 〈사실주의 비판〉(1931)에서 작품 창작보다 조직을 통한 실천을 주장했다. 북한에서 조국 해방을 그린 〈대동강〉(1955)과 함경도 성진 지방의 농민운동과 반일투쟁을 그린 〈설봉산〉(1956)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그밖에 〈발전 도상에 오른 전후의 조선문학〉(1955) 등 당의 문예정책을 해설하고 KAPF를 기념하며 남한 문단에 보내는 비평과 정치논설 형태의 정론작품을 많이 썼다. 소설집으로 〈청춘기〉(1939)·〈귀향〉(1939)·〈황혼〉(1940)·〈한설야 단편선〉(1940) 등이 있고,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을 그린 〈역사〉로 북한에서 인민상을 받았다.
시사 만화가 안의섭 화백 별세/1994
시사만화가 안의섭 화백(70)이 1994년 8월 3일 중앙병원에서 별세했다.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그는 힘없는 소시민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우회를 거부하는 직선적인 풍자, 통쾌한 해학, 걸쭉한 입심. 두꺼비는 촌철살인의 4단 컷으로 세상에 대해 말못할 체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을 씻어 내려주곤 했다. 고인은 1924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춘천교대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뒤 1954년 경향신문 편집부기자로 입사했다. 편집기자를 하던 중 우연찮게 그려본 만화가 신문에 실리면서 시작된 '두꺼비'의 역정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풍자하다가 1년 간 연재를 중단 당했고,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가을 3개월 간 또 다시 침묵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또 5공 시절인 1986년에는 만화내용이 문제가 돼 사흘동안 수사기관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종양을 앓고 있던 레이건 미대통령의 장수를 비는 내용의 만화가 엉뚱하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건강악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오해를 샀던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등 40년 동안 국내 유력 일간지를 두루 거친 고인은 1980년 관훈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0년 --- 니제르, 프랑스로부터 독립
서(西)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나라로 정식명칭은 니제르공화국(Republique du Niger)이며, 수도는 니아메이다. 북쪽으로 알제리·리비아, 동쪽으로 차드, 남쪽으로 나이지리아·베냉, 서쪽으로 부르키나파소·말리, 남동쪽으로 차드호(湖)를 끼고 카메룬과 접한다.
1805년과 1830년에 영국인 M.파크와 R.랜더에 의해 나이저강이 탐험되었으나, 현재의 니제르 국내가 답사된 것은 1854년과 1870년 독일인 H.바르트와 나하티가르에 의해서였다. 1891∼1892년 프랑스군(軍)이 세네갈에서 동진하여 사이에서 나이저강을 건너 그 영내(領內)를 탐험하고 트리폴리에 도달하였다. 이 보고를 기초로 하여 프랑스는 1897년 이 지역에 주둔군을 두어 그 영유(領有)를 실현하고, 1906년 영국-프랑스 협정으로 현재의 나이지리아와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니제르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한 주(州)가 되고, 1926년 부르키나파소의 일부를 병합하였다가 1947년 부르키나파소의 부활로 현재의 영토가 되었다(부르키나파소는 1933~1947년까지 그 행정단위가 소멸되었다). 프랑스 통치 시대에는 다른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식민지와 공통의 역사를 거쳤고, 1958년 특기할 만한 민족주의운동을 거치지 않은 채 프랑스 공동체 내의 공화국이 되었다가 1960년 8월 완전 독립하여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1954년 ---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 1873~1954)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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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지방 출생. 1893년에 작가인 윌리와 결혼하였다. 소녀시절의 자서전적인 소설이며, 남편과 공저로 된 연작 《학교에서의 클로딘 Claudine l’ cole》(1900) 《파리의 클로딘 Claudine Paris》(1901) 《가정의 클로딘 Claudine en m nage》(1902) 《클로딘이 떠나다 Claudine s’en va》 (1903)로 데뷔하였다. 1906년 이혼하고 파리의 뮤직 홀에서 무용을 하면서 창작을 계속, 《방황하는 여인 La Vagabonde》(1910) 《질곡(桎梏) L’Entrave》(1913) 《뮤직홀의 무대 뒤》(1913) 등을 발표하였다. 1912년에 언론인인 앙리 드 주브넬과 재혼한 후 무대에서 은퇴,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보도기자로 활약하였다.
콜레트의 작품이 원숙해진 것은 전후이며, 이제까지의 자서전적인 경향을 벗어나, 분방한 상상력을 구사하여 남녀의 애욕의 미묘함을 묘사하는 심리소설로 변해 갔다. 《신화 Mythe》(1919) 《셰리 Ch ri》(1920) 《청맥(靑麥) Le Bl en herbe》(1923) 《제2의 여인 La Seconde》(1929) 《암코양이 La Chatte》(1933) 《언쟁》(1934) 등의 많은 명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동식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 야성적인 참신한 감성, 특히 여성의 관능의 세계로 깊이 침잠하는 점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특징이기도 하다.
1903년 --- 튀니지의 건국공로자, 초대 대통령 부르기바(Habib Bourguiba, 1903~2000) 출생
알무나스티르 출생. 튀니스와 파리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배우고, 수년간 국내의 사회경제문제의 모순을 연구하다가, 1932년 프랑스어판 민족주의 일간지인 《락시옹 튀니지엔 L’Action Tunisienne》을 창간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네오데스투르당 창당에 참가, 서기장이 되었다가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1945년 이집트의 카이로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도하면서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가 1954년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5년 귀국, 그 이듬해 독립한 튀니지왕국의 총리가 되었다. 1957년 공화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온건한 경제개혁,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아랍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1969년 대통령에 재선되고, 1975년 3월 종신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1987년 11월 총리 벤 알리의 무혈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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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 종군기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파일(Ernie Pyle, 1900~1945) 출생
본명은 어니스트 테일러 파일. 인디애나주 다나 출생.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소도시의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파일은 다양한 편집업무를 체득한 뒤 스크립스 하워드 계열 신문사에서 다양한 종류의 일을 맡아 하였는데, 이때 그가 겪은 폭넓은 경험은 그에게 훌륭한 칼럼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그의 칼럼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200여 신문에 게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칠리아섬·북아프리카·이탈리아·프랑스에서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현장감 넘치는 보도로 돋보이기 시작, 일약 명기자가 되었다. 그의 활동상이 인정되어 1944년에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1944년에 이오섬[硫黃島]·오키나와[沖繩]에 종군하던 중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다.
많은 신문들에 기고하였던 기사는 《영국에서의 어니 파일》(1941), 《이것이 전쟁이다》(1943), 《용감한 사람들》(1944), 《마지막 장(章)》(1946) 등으로 정리·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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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Haakon VII, 1872~1957) 출생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을 되찾은 이후 노르웨이 최초의 왕. 나중에 덴마크 왕이 된 프레데리크 8세의 차남으로, 원래 덴마크의 카를 공이라고 불렸다. 해군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으며, 1896년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딸인 모드 공주와 결혼했다.
스웨덴-노르웨이 연맹이 해체된 후인 1905년 노르웨이 왕위를 제안받았다. 그는 노르웨이 국민투표에서 승인되는 경우에 한해 왕위를 맡는 데 동의했다. 1905년 11월 12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그는 11월 18일 의회(스토르팅)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고대 노르웨이 이름인 호콘을 취했다. 호콘 7세의 재위 기간에 제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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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초기의 총리 디킨(Alfred Deakin, 1856~1919) 출생
멜버른 출생. 법률가로 활동하다가 1880년 빅토리아 식민지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관계로 진출, 1883년부터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0년 런던으로 가서 영국 정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연방헌법 초안에 관하여 협의하였고, 귀국 후 빅토리아 각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각 식민지의 연방화 촉진을 호소하였다. 연방정부 총리를 세 차례 지냈고, 1912년 건강상의 이유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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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년 ---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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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발행-La Scala, Opera House, Milan)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오페라극장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 중 하나다. 1778년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따라 교회 자리에 세운 것으로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개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공습으로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재건되어 1946년 A.토스카니니(Toscanini)가 지휘한 역사적인 콘서트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V.사바타(Sabata), T.세라핀 등이 음악감독으로 재임하였고 2000년 현재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가 음악감독으로, 파올로 아르카(Paolo Arca)가 예술감독으로 재임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약 3,600명이다.
1778년 8월 A.살리에리(Salieri)의 오페라 《Europa Riconosciuta》를 개관 기념으로 공연하였으며, 베르디의 《오베르트》,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비롯한 많은 오페라가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사립극장으로 출발, 후원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박스를 구입하여 사용해오다 1921년 토스카니니, E.칼다라(Caldara), 상원의원 L.알베르티니(Albertini) 등의 노력으로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자치법인이 되었고 일반에 공개되었다.
부속기관으로는 스칼라극장오케스트라와 스칼라극장필하모니, 스칼라극장합창단, 스칼라극장박물관 등이 있다.
1492년 --- 콜럼버스(columbus), 산타 마리아호 타고 1차 탐험위해 스페인 팔로스항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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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獻策)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를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免罪)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밖에
1998년 박준규 제15대 국회의장 피선
1990년 헝가리 대통령에 아르파드 겐츠 당선
1988년 미국 상원, 수퍼301조 가결
1983년 삼성반도체, 64KD램 개발 성공
1981년 갬비아 전역에 비상사태 선포
1975년 로열 에어모로코항공 소속 보잉707 여객기 추락. 188명 사망
1972년 박정희 대통령,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경제조치) 발동
1967년 보사부, 기생충 국민감염률 처음으로 발표
1966년 산림청 신설
1964년 신문편집인협회, 언론윤리위법의 위헌성 지적하고 법시행정 거부성명
1960년 정낙현 북한 소위, MIG기 몰고 귀순
1960년 니제르,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4년 프랑스 여성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사망
1953년 군사정전위 본부 판문점에 설치
1951년 정전반대 국민대회 각지서 연일 개최
1950년 유엔군, 워커라인(마산, 왜관, 영덕을 잇는 방위선)구축 - 왜관 낙동강 철교 폭파
1943년 독립운동 언론인 안희제(1885-1943) 세상 떠남
1938년 이탈리아, 유태인의 대학통학금지. 취학금지
1929년 미국의 사회학자 손스틴 베블런 사망
1926년 윤심덕,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 자살
1920년 상해의용단의 문일민 등 평남도청에 투탄
1918년 일본 전역에서 쌀폭동
1908년 1974년 군사과두체제에 의해 대통령직에 오른 브라질의 대통령 가이셀 출생
1908년 영국 양로연금제 채택
1903년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1957-87) 부르기바 출생
1892년 러시아, 청 전선협정 성립
1857년 캐나다 작가 미첼 비보 사망
1811년 안전 엘리베이터를 발명한 오티스 출생
1792년 영국의 산업혁명기 방적기 발명자 아크라이트 사망
1631년 사계(沙溪) 김장생 사망
1492년 콜럼버스 제1차 탐험 출항(스페인)
B.C.210 진시황 세상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