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 선제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은 대통령에 의해 직접 하달된게 아니라 교전수칙에 포함되어 있었고 교천수칙은 한국군이 아닌 미군이 만들었는데 그로인해 김대중 정권 이전에도 해군은 이와 같은 교전수칙을 준수있습니다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0&num=52069
유엔사 교전수칙이 서해교전 당시에도 작용했습니다
http://terms.naver.com/item.nhn?dirId=704&docId=5595
실제로 이와같은 교전수칙은 현재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연평도 포격 당시에도 합참으로부터 전투기 폭격을 위해서는 유엔군사령관(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임)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승인이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가 있은 뒤 이를 포기했다"고 전했다. 며 F-15K 폭격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84288&sid=E&tid=1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및 군사주권을 획득하기위해 노력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짐작할수 있습니다
기념하는 행사나 위령제등은 과거에도 해군 주관으로 치뤄졌고 위에 답변내용에서도 보다시피 당포함 사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4. 참전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에 최근 적과의 전투당사자를 포함하는 범위의 확대문제에 대한 문제점 및 국가보훈처의 입장>에서
<국내 국지전 참여자를 참전유공자로 예우시 문제점>
(문서내용중 <>사항을 자세히 참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로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답변에서 작성한것처럼 가장 중요한 보상금등의 조건에 문제가 생긴것입니다 그 외에 이중 배상금지도 작용해서 더더욱 보상수준이 낮았습니다 보상금문제는 김대중 정권에서 개정을 약속한후 노무현정권 임기초에 이뤄졌고 그뒤 유공자 기준은 2008년 3월 바뀌게 되어 서해교전 부상자들도 유공자 혜택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추가로 중요한점은 제2 연평해전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를 7개월밖에 안남긴뒤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인 제도적,법적 절차를 변화시키기 어려웟다는점도 감안해야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은이유
영결식 날 월드컵 구경이라 표현하신부분에 대해서 그날은 단순히 어떤 경기가 치뤄지는게 아니라 결승전과 폐막식이 겹쳐져 있었고 한일 월드컵인만큼 국가적 정상이 모여서 회담을 열기로 예정된 중대한 자리였기 때문에 2박 3일간 일본에 참석한겁니다(한일월드컵은 두국가가 공동으로 여는 특수한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개막식은 한국에서 치뤄졌고 폐막식은 일본에서 치뤄집니다) 이전 과거의 대통령들은 국가적인 주요 행사가 없었지만 북과 교전하다 전사한 장병들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그게 서해교전보다 더 심각한 규모의 사건이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국군통합병원에 가서 부상 장병들을 위로했습니다 (이후에는 위에서 보시다시피 20일뒤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초정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99932 인사“좌천”이나 처벌등은 사실이 아닙니다 박정성 제독의 신동아 인터뷰를 보면 문제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좌천당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장 진급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 두가지를 가지고 신동아 기사는 박 제독이 불이익을 당한 것처럼 기사를 썼습니다.
2002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준 국방부 장관님이 답변한 내용입니다.
해군 장성의 인사는 소장의 경우 매년 진급 후 함대사령관으로 보직되며 함대사령관 임기는 통상 1년을 기준으로 보직하고 있습니다. 함대사령관 임기 만료 후에 해군본부 또는 합참의 부장급으로 보직되나 인사주기가 맞지 않을 경우에는 참모총장 특별보좌관 등 임시보직으로 대기 후 보직하고 있으며 박 제독의 경우 2함대사령관 보직만료 후 참모총장 특별보좌관을 거쳐서 해군본부의 핵심보직인 군수참모부장을 마치고 금년 1월 16일 자부터 정보작전참모부장 직책에 보직 중임을 말씀드립니다.
출처: 국회 속기록 40쪽 오른쪽 하단 <U>http://likms.assembly.go.kr/cgi-bin/highlight.cgi?filename=/record/data2/232/pdf/232ha0001b.PDF&keyword=서해교전&page=12</U> [새창에서 열기] <U>[새창에서 열기]</U>
이후 박정성 제독은 해군군수사령관까지 지내고 2004년에 소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제가 해군 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르거든요.
군수참모부장, 정보작전참모부장, 군수사령관이란 자리들이 그렇게 안 좋은 자리인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한 자료들이 인터넷에 없네요. 진짜 궁금해서 그럽니다. 저 세 자리는
해군에서 무시당하는 자리인가요?
그 다음은 2004년의 중장진급에 관한 얘기입니다.
기사를 찾아보니 그 당시 해군의 중장진급에 관한 기사들이 있네요.
2004년의 기사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304130904371&code=910302 [새창에서 열기]
해군은 이번 인사에서 최근의 참모총장 인사로 공석이 된 작전사령관을 비롯해 현 보임자의 계급정년이 다된 해사교장, 합참의 해군 몫 본부장 1자리 등 중장 보직3자리가 채워지고, 해병대 사령관이 교체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장진급 후보로는 해사 25기인 윤 연(尹 淵)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박정성(朴正聖) 해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 김성만(金成萬) 합참 전략기획부장, 26기인 남해일(南海一) 국방부 인사복지국장, 최기출(崔基出) 국방정보본부 해외정보부장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사에 따르면 중장 자리는 세 자리밖에 없는데 후보는 다섯 명이나 됩니다.
그 후 또 기사나 났습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154635 [새창에서 열기]
국방부는 16일 김인식(金仁植.해사26기)합참 전비태세검열실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해병대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육.해군 중장과 소장의 진급 및 보직인사를 단행했다. 기무사령관은 국방부에서 올린 후보를 노무현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아 이번 발표에서 제외됐다.
◇중장 승진 ▶육군=박영하(朴永夏.3사1기)육군본부 감찰관, 김병관(金秉寬.육사28기)합참 전력기획부장, 김종천(金鍾千.육사28기)국방부 획득국장을 군단장에 임명 ▶해군=윤연(尹淵.해사 25기)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김성만(金成萬.해사25기)합참 전략기획부장, 최기출(崔基出.해사26기)국방정보본부 해외정보부장을 각각 해사교장.해군 작전사령관.해군본부 참모차장에 임명
◇중장 전배 ▶육군=국방정보본부장 김창호(金昌鎬)2군부사령관, 합참 작전본부장 김장수(金章洙)7군단장, 육군사관학교장 김충배(金忠培)국방정보본부장, 육군본부 참모차장 홍갑식(洪甲植)11군단장, 합참 전략기획본부장 권안도(權顔都)5군단장 ▶해군=합참 인사군수본부장 오승렬(吳承烈)해군본부 참모차장, 해군 군수사령관 박정성(朴正聖)해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 해군 교육사령관 남해일(南海一)국방부 인사복지국장
◇소장 승진=한민구(韓民求.육사31기)육군본부 전략기획처장 등 준장 9명을 사단장에 임명
결과는 박정성 씨가 중장승진은 못하고 해군 군수사령관이 됐다는 내용입니다.
원래 다섯 명 중에서 세 명은 중장이 되고 두 명은 못 된거죠.
이렇게 모두 다 중장이 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중장이 안 됐다고 좌천당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면 합당한 이유를 댔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자기가 왜 중장 승진한 윤연, 김성만, 최기출 보다 더 유능했었는지를 말해야죠.
근거도 없이 정권이 북한 눈치를 봐서 좌천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비 않은 것 같네요.
그리고 연평해전 때 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분들이 다 중장이 되고 해군참모총장이 될 수는 없죠.
연평해전 때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던 송영무씨는 그 후 잘 나가다가 노무현 정부 때 해군참모총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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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책임요구를 하지 않았다"도 역시 아닙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서울공항 귀국보고회에서 서해교전사태와 관련,북한에 대해사태의 진상규명과 사과,재발방지 등을 거듭 요구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524588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23일 오후 6·29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의 불법적이고 무도한 도발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210560
->김 대통령은 북한상선의 영해 침범과 관련해서는 서해교전 당시 북한군의 도발을 무력으로 응징했던 일을 상기시킨 뒤 “무력으로 도발하면 무력으로 응징하고, 비무장 상선은 압력을 넣어 공해로 몰아냈다”면서 “우리 국군이 가장 적절하게 대처했다”고 평가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069487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1,2 연평해전당시 북한군함에게 선제발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UN사 교전규칙"때문입니다. (이 교전규칙은 소규모의, 우발적인, 양측간 교전이나 총격전이 남북간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한미연합사령부에 의해 정해지고 우리군이 북한군과 마주쳤을때의 대응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검색하면 더 자세히 나오지만 간단히 말해서 한국군은 해상에서 북한군을 먼저 선제공격할수 없습니다. 북한군에게 공격받고 응사하는건 가능할지라도 북한군함이 무기를 쏘지않는한 우리 군함도 북한군함을 공격할수 없고 경고방송과 위협기동을 해야되죠 한마디로 미국이 만들어준 교전규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게 현재의 한국군인거죠)
* 제1,2 연평해전당시 2함대 사령관이였던 박정성 제독의 해임 또는 좌천 주장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루머에 불과합니다. 박정성 제독은 연평해전이후 해임은 커녕 정보작전참모부장과 군수사령관등을 지내며 김대중 정부 임기 끝난지 한참 지난 2004년이 되서야 예편했거든요
김대중 정권 시절에도 보신것처럼 해임이나 징계같은건 받지도 않았고, 예편시기도 이미 김대중 정권이 끝나고 1년이나 지난 시점이죠
덧붙여 제1연평해전 당시 제2전투전단장이던 송영무 제독에게 김대중 정권은 북한군함을 서해에서 몰아낸 공로를 인정해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즉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상간 회담이나 국가적행사에 참여하는게 전사자 장례식,영결식에 참석하는것보다도 중요했을수도 있습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은 한일 양국의 동시 개최로 이루어진 특수한 경우이며 폐막식 부분은 일본측이 담당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폐막식에 참가한 것에 대해선 비난여론이 존재한다. 당시의 분위기와 국제사회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등을 고려할 때 폐막식 참관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반박 의견 또한 있다. 또한 북한의 그 이전 침범 사건들의 목적이 대부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끄는데에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에 휘둘리지 않고 행사에 참여한 것이 옳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폐막식때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 월드컵 공동 주최국 대표자로서 공식 참석한 것이고 당시에 이미 한일 정상 회담도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5] " - 엔하위키 미러 - - 추가로 박정희때 일어난 해군 교전사건 - 침몰 중인 해군 초계 호위함 당진호 1967년 1월에는 강원도 거진 동쪽 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우리 해군 초계 호위함(PCE-56, 650톤급)이 북한 해안포의 기습공격으로 침몰합니다.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하죠. 얼마 전 서해 교전과는 비교도 안 될 일이죠.
당시 해군 함정이 침몰당하고 거의 승조원 절반 (39명, 참고로 서해교전 전사자는 6명입니다.)
39명이 전사한 이 대형 사건에 이후 추모제가 매년 거행되었다거나 추모비가 건립된 바를 알지 못합니다.
추모제나 추모비가 없는데 대통령이나 장차관 그리고 해군 참모총장이 참석할 수가 없었겠죠.
다음은 1970년 6월에 서해안 연평도 부근 공해상에서 어선단 보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우리 해군의 120톤 급 방송선을 북한 해군이 공격을 해서,
승무원 20여 명이 대부분 사살당한 채 납치당한 사건이 있습니다. 연평도 하니까 꽃게잡이가 떠오르시죠?
서해교전도 결국 꽃게잡이가 문제였으니까요.
거의 같은 장소에서 우리 해군 함정이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에 20여 명의 생떼 같은 젊은 목숨이
어디 하소연 한번 하지 못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사건 3년 후 당시 해군본부와 제대한 해군 병사들이 모금을 하여 당포함 충혼탑을 건립했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로 4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고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 누구도 당포함 전몰장병 추모식에 참석한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1974년 6월28일에도 동해안 거진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 함정 3척의 공격을 받고 우리 해경 경비정 863함이 격침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죠.
참 이 사건을 보면 맘이 아픈 게…
기본적으로 당시 해경은 지금과 달리 장비나 훈련상태 그리고 기지의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황이었고,
또 나중에 떠내려온 전사자들의 상태를 확인해 본 결과 최후까지 필사의 접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걸로 판단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가령 인양된 시체 6구 모두 구명복 착용에 관통된 다리의 지혈을 위해 옷을 찢어 동여맨 채 발견되는 등 ..
현장의 격렬한 전투가 그려져서 맘이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니었죠.
게다가 사건 2주일 후에 전투 현장에서 163마일이나 떨어진 영일만에 김시오, 김원한 두 순경의 시신이 떠내려 온 겁니다.
이 두 순경 분의 고향이 경북 울주군과 경북 영일군으로, 자신의 고향에 부모, 형제, 처자를 찾아 먼길을 떠내려 왔다고 해서,
유가족과 많은 사람의 맘을 참이나 아프게 했던 걸로 유명하죠.
다시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려니 처자식이 있는 가장으로서 맘이 정말 무겁군요.
나중에 해경에서는 1986년 12월 30일에 이 사건을 포함한 해경 창설이래 순직, 전사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합니다.
충혼탑 건립이 언제라고요?
1986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 만 7년 후엡
그나마 이 충혼탑은 이후 역대 정부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가
말끔하게 단장이 끝난 해경 충혼탑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인 2002년 4월과 6월에 성역화 작업이 실시되고,
2003년 4월에 조경공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답니다 http://kcg.go.kr/memorial/cms/content.jsp?&directory=menu_01&menuSeq=167&page=8 -> 이래도 여러분들 말처럼 김대중 노무현이 종북 빨갱이고, 희생된 장병들이 개죽음(누구 표현이지?) 취급 당했습니까? 성의가 부족했다고요? 그럼 당진호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북한 김정은 돼지새끼 밑에서 구르지 않는 덕분에, 어떤 생각을 하든, 여러분들 자유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생각은, 망상일 뿐입니다. 망상은 혼자만 하시고 진실인냥 믿지 마시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