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광주구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에 앞서 김성근 쌍방울 감독(사진 좌)과 김응용 해태 감독이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사진=쌍방울 팬클럽)
주년(周年)은 ‘일 년을 단위로 돌아오는 돌을 세는 단위’다. 주기(周忌)는 ‘사람이 죽은 뒤 그 날짜가 해마다 돌아오는 횟수’를 뜻한다. 올해로 SK는 창단 10주년을 맞는다. 반면 쌍방울 레이더스는 올해가 해체 10주기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우리 곁에 분명하게 있었던 쌍방울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스포츠춘추>와 쌍방울을 기억하는 이들이 해체 10주기를 맞아 ‘돌격대’의 과거를 돌아봤다. 전설이자 역사이며 상처이자 교훈이었던 쌍방울을 통해 한국프로야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보자는 의도다.
<스포츠춘추>의 ‘쌍방울 위클리’는 1편 쌍방울 팬 박동찬 씨가 쓴 ‘지금은 사라진 돌격대를 위하여’ 2편 ‘돌격대의 마지막 거포, 심성보의 회상’ 3편 ‘쌍방울의 마지막 멤버들은 어디서 무엇을?’로 구성될 예정이다.
1999년 1월 7일 새벽 6시 (주)쌍방울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팩스를 통해 "KBO의 법정퇴출을 조건없이 받아들인다"는 공문을 보낸다. 이로써 1998년 이후 '선수 팔기'와 KBO의 지원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던 쌍방울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스포츠춘추>에서 쌍방울과 마지막을 함께 했던 이들을 찾았다. KBO의 1999년 야구연감에 의거해 쌍방울의 마지막 시즌 감독과 주전급 선수들이 누구였으며,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일일이 취재를 통해 살펴봤다.
[감독]
김성근 감독(사진=쌍방울 팬클럽) |
김성근
1942년 12월 13일 ㅣ 출신지 일본 교토 ㅣ 교토 가쓰라고-신일고 감독(79~81년)-OB 코치(82~83년)-OB 감독(83~88년)-태평양 감독(89~90년)-삼성 감독(90~91년)-해태 2군 감독(92~93년)-쌍방울(95~99년 7월)-LG 감독(2002년)-SK 감독(2008~)
쌍방울 제4대 감독으로 1995년 10월 19일부터 1999년 7월 15일까지 ‘레이더스(돌격대)’를 지휘했다. 재임 기간 중 만년 꼴찌였던 쌍방울을 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1996년 정규시즌 2위, 1997년 3위)로 이끄는 기적을 연출했다. 이 기간에 쌍방울은 진정한 전북의 프랜차이즈 팀으로 성장했고, 박경완, 조규제, 김기태, 김현욱 등 대형 스타들을 다수 배출했다.
김성근은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정신교육을 통해 패배주의에 물들었던 쌍방울 선수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으며, 데이터 야구와 기상천외한 마운드 운영으로 ‘감(感)’에 의존했던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하지만, 팀 운영에는 무심한 채 ‘선수 팔기’에만 혈안이던 구단 경영진과 시즌 내내 마찰을 빚다가 1999년 7월 4일 올스타전이 열리는 날, 해고된다.
쌍방울에서 등 떠밀리듯 퇴장한 뒤 LG를 거쳐 현재 SK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성근은 쌍방울 시절 당뇨병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심성보를 “가장 안타까운 선수”로 꼽았다.
김준환
1955년 5월 19일생 ㅣ 출신지 전북 완주 ㅣ 군산상고-상업은행(73~75년)-육군(76~78년)-상업은행(79~81년)-해태(82~89년)-해태 코치(89년)-쌍방울 코치(90~99년)-쌍방울 감독(1999년)-SK 코치(2000년)
김준환 감독(사진=쌍방울 팬클럽) |
그러나 이듬해 1월 팀이 해체하면서 자동으로 감독직을 상실했다. 쌍방울 선수단을 인수한 SK 와이번스에서 창단 수석코치를 맡지만, 역시 1년 뒤 해임됐다.
현재 원광대 감독으로 후진 양성에 애쓰고 있다. 딸 김상희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투어에서 촉망받는 선수다.
투수 박진석(사진=쌍방울 팬클럽)
[투수]
박진석
1968년 1월 28일생 ㅣ 출신지 전북 군산 ㅣ 군산상고-원광대-쌍방울(91~99년)-SK(2000년)
1999년 성적 - 12경기 1승1패 평균자책 4.62
통산 성적 - 171경기 23승 35패 7세이브 평균자책 4.80
초창기 쌍방울의 확실한 선발이었다. 시속 140km 초·중반의 묵직한 속구와 위력적인 슬라이더로 쌍방울의 데뷔시즌이었던 1991년 8승을 거뒀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이 암초로 작용했다.
박진석은 군산상고 시절 조규제와 함께 좌·우 원투펀치로 청룡기, 대통령배대회, 황금사자기대회를 차례로 휩쓸었다. 하지만, 고교 때 무리한 까닭에 팔꿈치가 이상을 나타내며 원광대 시절엔 타자로 뛰었다.
프로에 입단해 다시 투수로 전향했으나, 팔꿈치 부상 후유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99년까지 쌍방울에서 뛴 박진석은 2000년 SK 유니폼을 입고 은퇴했다.
은퇴 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모교인 군산상고에서 코치와 감독을 하다 지금은 광주광역시에서 ‘T·S 모터스’라는 중고차매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박진석은 “쌍방울 멤버들이 모두 잘살고 있다”며 “엄청나게 고생하면서도 ‘똘똘’ 뭉쳤던 쌍방울 정신이 사회에서도 좋은 작용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덕
1968년 6월 4일생 ㅣ 출신지 경기도 연천 ㅣ 동대문상고-쌍방울(91~99년)-SK(2000~2002년)
1999년 성적 - 31경기 2승 12패 1세이브 평균자책 4.50
통산 성적 - 325경기 56승 68패 23세이브 1홀드 평균자책 4.11
투수 김기덕(사진=쌍방울 팬클럽) |
김기덕은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이기는 맛’을 처음으로 알았다”며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팀 분위기가 원체 좋아 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팀 동료 성영재와 함께 언더핸드 스로우 투수였던 김기덕은 왼손 타자에게 더 강한 잠수함 투수로도 유명했다. 그가 좌타자에게 강했던 이유는 체인지업에 있었다.
“1991년 쌍방울 입단 후 3년 차가 되던 1993년 무릎이 무척 아팠다. 이때부터 역동적으로 공을 던지지 못해 변화구를 익혔다. 그게 바로 체인지업이었다.”
잠수함 투수에게 체인지업은 생경한 구종이 아니다. 웬만한 투수들이 체인지업, 그 가운데 서클체인지업을 구사한다. 그러나 김기덕은 “직구 그립과 똑같이 던지되 스피드만 줄인 ‘오리지널 체인지업’을 던졌다”고 했다. 이 구종으로 당대의 좌타자를 효과적으로 제압했다고.
2002년 SK에서 퇴단하고서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LG로 가려 했으나, 김 감독이 전격 해임되는 통에 아쉽게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뒤 3년간 SK 코치로 활동하다 현재는 모교인 한양대에서 투수 코치로 뛰고 있다.
투수 오봉옥(사진=쌍방울 팬클럽) |
오봉옥
1968년 7월 8일생 ㅣ 출신지 제주 남원 ㅣ 포철공고-삼성(92~95년)-쌍방울(96~98년)-해태(99~2000)-KIA(2000~2003년)-한화(2004~2006년)
1999년 성적 - 27경기 2승 6패 평균자책 5.68
통산 성적 - 488경기 63승 68패 56세이브 15홀드 평균자책 3.99
프로야구 선수 가운데 가장 사연이 많은 이다. 제주 태흥초교와 남원중에서 야구동아리 활동을 했다. 제주 함덕고 1학년 때 포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포철공고에서 테스트를 받고 전학한 뒤 본격적으로 야구선수가 된다.
포철고 2학년 때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등 경험면에서 뒤졌지만, 영남대에 스카우트되며 유망주로 성장한다. 영남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프로 진출을 위해 롯데와 MBC에서 테스트를 받은 오봉옥은 MBC 배성서 감독의 배려로 1989년 1월 창원에서 동계훈련까지 받는다. 그러나 2월 징집통지서를 받고 30개월 동안 현역으로 복무하는 ‘이상한’ 불운을 맛본다.
오봉옥은 군 제대 후 1991년 11월 신인 2차 지명선수로 삼성에 입단한다. 제주 출신 1호 프로야구선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입단 첫해였던 1992년 38경기에 출전해 13승 무패로 승률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한다. 그러나 1995년 12월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인사사고를 일으키며 삼성에서 퇴출당한다.
1996년 쌍방울로 이적하고 9승 7패 평균자책 3.06으로 건재를 과시한다. 이해 쌍방울이 정규시즌 2위가 되기까지 오봉옥의 공이 매우 컸다. 그러나 갖가지 기행과 사고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오봉옥은 1999년 4월 16일 해태 송구홍, 박재용의 트레이드 상대로 박계원과 함께 팀을 떠난다.
현재는 제주 제일중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많은 야구전문가는 지금도 역대 최고의 속구로 오봉옥을 꼽곤 한다. 1992년 승률 100%를 기록할 당시 그의 속구는 공이 아니라 돌을 던지는 것처럼 강하고 묵직했다고. 그러나 ‘성실’과는 다소 거리가 먼 까닭에 숨겨진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했다는 게 야구계의 중평이다.
투수 김원형(사진=쌍방울 팬클럽) |
김원형
1972년 7월 5일생 ㅣ 출신지 전북 전주 ㅣ 전주고-쌍방울(91~99년)-SK(2000~현재)
1999년 성적 - 17경기 2승 3패 2세이브 평균자책 4.86
통산 성적 - 542경기 134승 144패 26세이브 12홀드
쌍방울이 낳은 스타 가운데 스타다. ‘어린 왕자’란 별명답게 앳되고 순수한 외모로 많은 소녀 야구팬을 몰고 다녔다. 실력도 출중해 1991년 8월 14일 광주 해태 전에서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뒀다. 당시 그의 나이 만 19살 1개월10일. 1993년 4월 30일 전주 OB전에선 만 20살 9개월25일의 나이로 최연소 노히트노런 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는데 전주구장에서 달성된 최초이자 최후의 노히트노런이었다.
쌍방울의 마지막 정규시즌이었던 1999년 7월 10일 대전 한화전에서 장종훈의 타구에 얼굴을 맞아 코뼈와 광대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2000년 3월 27일 쌍방울 퇴출에 따른 웨이버 공시로 3월 31일 창단한 SK로 이적해 지금까지 같은 팀에서 뛰고 있다.
쌍방울 입단 당시의 오상민(사진=쌍방울 팬클럽) |
오상민
1974년 10월 20일생 ㅣ 출신지 전남 고흥 ㅣ 군산상고-쌍방울(91~99년)-SK(2000~현재)
1999년 성적 - 67경기 2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 5.94
통산 성적 - 660경기 34승 32패 24세이브 65홀드 평균자책 4.39
1992년 봉황대기 타율왕 출신이다. 1997년 신인 1차 지명선수로 계약금 1억 8천만 원을 받고 쌍방울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즉시 전력감’으로 통하며 입단 첫해부터 주전 불펜투수로 뛰었다. 1997년 데뷔 때부터 2001년까지 4년간 60경기 이상을 출전하는 철완을 과시했다.
쌍방울 해체 뒤 SK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가 2001년 12월 20일 삼성 김기태, 김동수, 김상진, 김태한, 이용훈, 정경배가 SK에 올 때 현금 9억 원+텔슨 브리또와 함께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삼성에서 6년간 뛰며 쏠쏠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2007년 방출됐다. 2008년부터 LG에서 뛰고 있다. 지난해 빌린 돈 2천만 원을 갚지 않은 혐의(사기)로 1심에서 법정구속된 바 있다.
오상민과 쌍방울에 뛰었던 모 코치는 “천부적 재능만으로 따지면 국내 역대 좌완투수 가운데 최고”라고 추켜세웠다. 문제는 지금껏 천부적 재능만으로 던졌다고.
투수 박정현(사진 좌)과 김성근 감독(사진=쌍방울 팬클럽) |
박정현
1969년 7월 10일생 ㅣ 출신지 경기도 화성 ㅣ 유신고-태평양(88~95년)-현대(96~98년7월)-쌍방울(98년8월~99년)-SK(2000~현재)
1999년 성적 - 37경기 5승 11패 3세이브 평균자책 3.92
통산 성적 - 253경기(완투 48) 65승 54패 21세이브 평균자책 3.45
1989년 5월 16일 태평양 소속으로 잠실 MBC(LG의 전신)와의 경기에서 만 19살 10개월6일의 나이로 3대 0 완봉승을 거뒀다. 종전 해태 신동수의 만 20살8개월10일의 최연소 완봉승 기록을 깨는 순간이었다. 이해 박정현은 신인왕에 오르며 짧은 전성기를 달린다.
그러나 1994년 허리부상 여파로 1997년까지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다. 결국, 1998년 7월 31일 쌍방울 마무리 조규제가 현대로 올 때 ‘가내영+현금 3억+전주구장 광고협찬 3억’과 함께 쌍방울로 트레이드된다.
쌍방울 입단 2년 차였던 1999시즌 6년 만에 100이닝 이상(124이닝)을 소화하며 재기를 하는가 싶었지만, 이듬해 SK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1승 2패 평균자책 5.75를 기록한 뒤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됐다.
현역에서 은퇴 뒤 일산 주엽고 코치로 일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썼다. 박정현과 함께 태평양에서 뛰었던 최창호는 “지난해 (박)정현이가 이민을 했다”고 말했다. 현재 박정현은 캐나다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투수 성영재(사진=쌍방울 팬클럽) |
성영재
1971년 3월 9일생 ㅣ 출신지 광주 ㅣ 광주일고-인하대-쌍방울(93~99년)-쌍방울, SK(2000년)-해태(2000)
1999년 성적 - 31경기 5승 16패 2세이브 평균자책 6.10
통산 성적 - 304경기 58승 85패 8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 4.24
1992년 12월 신인 2차 지명선수로 계약금 8천800만 원을 받고 쌍방울에 입단했다. 김기덕과 함께 잠수함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쌍방울의 전성기였던 1996, 1997시즌에 2점대 평균자책으로 팀을 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끌었다.
2000년 병역비리에 연루돼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현재는 LG에서 투수코치로 활약 중이다.
투수 가내영. 사진은 KIA 시절이다(사진=KIA) |
가내영
1971년 3월 29일생 ㅣ 출신지 충남 ㅣ 제물포고-태평양(91~95년)-현대(96~98년7월)-쌍방울(98년8월~99년)-SK(2000)
1999년 성적 - 57경기 10패 4세이브 평균자책 5.66
통산 성적 - 291경기 34승 43패 15세이브 1홀드 평균자책 4.71
제물포고 출신의 가내영은 태평양과 현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1996년 중간계투와 마무리 투수로 44경기에 출전해 8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 3.38을 기록하며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한 첫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러나 1998년 7월 31일 쌍방울 조규제와의 트레이드 때 인천을 떠나 전주로 왔다.
1999년 가내영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10패만 기록한다. 평균자책 5.66을 고려해도 무승 10패는 ‘기이한’ 성적이었다.
가내영은 시즌 중반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며 4세이브를 챙겼다. 재미난 건 그해 막바지 정민태(현대)의 20승이 걸린 경기에 가내영이 마무리 투수로 출전해 블론세이브를 기록한 것. 만약 이때 가내영이 뒷문을 단단히 지켰다면 정민태의 20승은 물 건너갔을 터. 가내영은 현재 제물포고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포수] 포수 양용모(사진=쌍방울 팬클럽)
양용모
1967년 12월 20일생 ㅣ 출신지 충남 서산 ㅣ 천안북일고-동아대-빙그레(91~93년)-삼성(96~98년)-쌍방울(99년)-SK(2000~2002)
1999년 성적 - 59경기 타율 2할4푼2리, 4홈런, 23타점
통산 성적 - 746경기 타율 2할3푼8리, 395안타, 21홈런, 187타점
1991년 신인 1차 지명선수로 빙그레 (한화의 전신)에 입단한 양용모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다 1994년 11월 임의탈퇴선수로 퇴단하고 곧바로 현역병으로 입대한다. 1995년 11월 군 제대 후 삼성으로 복귀해 3시즌을 뛰지만, 1998년 12월 25일 현금 20억 원+이계성과 함께 쌍방울 김기태, 김현욱과 트레이드된다.
양용모는 “리그 최고의 부자구단 삼성에서 가장 가난한 쌍방울로 트레이드돼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며 “뭐든지 최고였던 삼성에 비해 쌍방울은 숙소부터 허름한 빌라에다 식사도 지하식당에서 해야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친화력이 강하고 리더십이 좋았던 양용모는 2001년 SK에서 주장을 역임한 뒤 2002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현재는 롯데 자이언츠 2군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장재중
1971년 5월 19일생 ㅣ 출신지 경북 청도 ㅣ 선린상고-건국대-쌍방울(94~99년)-SK(2000)
1999년 성적 - 118경기 타율 2할1푼1리, 4홈런, 36타점
통산 성적 - 596경기 타율 2할1푼9리, 14홈런, 104타점
1994년 신인 2차 지명선수로 계약금 2천만 원을 받고 쌍방울에 입단했다. 타격보다 수비가 좋았던 포수였다. 현재는 KIA에서 배터리 코치로 활약 중이다.
[내야수]
김성래
1961년 2월 21일생 ㅣ 출신지 경북 의성 ㅣ 경북고-연세대-삼성(84~96년)-쌍방울(97~99년)-SK(2000). SK 코치(2001~현재)
1999년 성적 - 113경기 2할7푼2리, 9홈런, 48타점0.272 113 346 94 19 0 9 48
통산 성적 - 1,277경기 타율 2할7푼7리, 147홈런, 595타점
쌍방울의 최선참이었던 김성래(사진=쌍방울 팬클럽) |
1993년 타율 3할, 28홈런, 91타점으로 홈런·타점왕에 오르고 그해 최우수 선수(MVP)타이틀을 수상했다.
1996년 11월 25일 삼성의 코치제의를 거절하고 쌍방울로 팀을 옮겨 3년간 더 현역생활을 계속 한 김성래는 2000년 8월 13일 인천 LG전에서 은퇴경기를 갖은 뒤 SK 코치로 전향해 지난해까지 활동했다. 올 시즌부터는 일본 프로야구단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2군 타격코치로 뛸 예정이다. 한국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단의 정식 코치가 되기는 김기태 요미우리 2군 코치에 2번째다.
내야수 김호(사진=쌍방울 팬클럽) |
김호
1967년 5월 3일생 ㅣ 출신지 전북 전주 ㅣ 마산고-경성대-쌍방울(91~2000년)-SK(2000년)-해태(2000년)-두산(2001년)
1999년 성적 - 117경기 타율 2할5푼5리, 8홈런, 37타점, 11도루
통산 성적 - 1,170경기 타율 2할2푼7리, 53홈런 338타점, 131도루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쌍방울 선수들을 “항상 얼굴이 검게 타 있던 이들”로 기억한다. 그 가운데 김호가 가장 얼굴이 까맸다고 한다.
김호는 “김성근 감독 밑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했는지 얼굴이 하얄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1996년 정규시즌 2위의 기적을 연출할 당시 쌍방울 선수들은 서울 원정 경기를 마치고 새벽에 전주에 도착하고도 집으로 가지 않았다. 전 선수들이 실내연습장을 찾아 스윙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침까지 연습하다가 잠깐 눈 붙이고서 정오부터 다시 훈련하고 경기에 나갔다”는 게 김호의 회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주도로 마무리 훈련을 갔을 때는 비 때문에 구장이 적셔 있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땅을 말렸다고 한다. 1분이라도 빨리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런 노력이 바탕이 됐을까. 김호는 타율은 낮았지만, 탁월한 작전수행능력과 수비력을 바탕으로 9년 연속 110경기 이상에 출전했다. 쌍방울 창단 멤버로 프로생활을 시작해 1999시즌을 끝으로 팀이 사라질 때까지 돌격대의 선봉에 섰던 ‘오리지널 쌍방울 맨’ 김호는 한화 주루코치를 거쳐 현재 강릉 영동대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이민호
1969년 9월 2일생 ㅣ 출신지 경북 영일 ㅣ 포철공고-영남대-빙그레(93년)-한화(94~98년)-쌍방울(99년)-SK(2000년)
1999년 성적 - 96경기 타율 2할3푼5리, 9홈런, 31타점
통산 성적 - 555경기 타율 2할4푼1리, 51홈런, 167타점
국가대표 내야수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였다. 1992년 11월 빙그레 신인 2차 지명선수로 입단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양쪽 다리 모세혈관에 피가 통하지 않는 ‘버거병’에 걸리는 등 불운을 겪다가 1998년 11월 쌍방울 임창식과 트레이드되며 돌격대의 일원이 된다. 2000년 SK에서 은퇴하고 인천에서 유소년 야구팀을 지도하고 있다.
쌍방울의 리더 최태원(사진=최태원) |
최태원
1970년 8월 19일생 ㅣ 출신지 서울 ㅣ 성남고-경희대-쌍방울(93~99년)-SK(2000~2003년)-KIA 코치(2008~)
1999년 성적 - 132경기 타율 2할3푼9리, 2홈런, 40타점, 12도루
통산 성적 - 1,284경기 출전 타율 2할6푼8리, 1,133안타, 24홈런, 344타점, 130도루
쌍방울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다. ‘성실’의 대명사답게 한국프로야구 최다 연속경기 출장기록(1천14경기)을 보유하고 있다. 실력도 좋아 1995년 최다 안타상, 1997년엔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 수상자로 뽑혔다.
가뜩이나 노장 선수가 많은 쌍방울에서 선참과 신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훌륭히 담당했다. 1998시즌이 끝나고 김기태가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뒤로는 팀의 리더로 침몰 직전의 ‘쌍방울호’를 마지막까지 지켰다.
최태원은 쌍방울을 유독 ‘정(情)’이 많았던 팀으로 기억한다.
“모든 조건이 열악했지만, 선수단과 프런트가 서로 잘해주려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특히나 프런트는 자기 것을 덜 가져가는 한이 있어도 선수단을 지원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지금은 사라진 현대가 해체 직전까지 한국야구위원회의 지원금을 ‘펑펑’ 썼을 때 많은 야구인이 “쌍방울 프런트의 반만 닮아라”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최태원은 현재 KIA 2군 주루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야구계가 꼽는 준비된 ‘차세대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동수
1973년 3월 24일 ㅣ 출신지 경북 영천 ㅣ 대구고-삼성(92~96년)-삼성·롯데(97년)-롯데·쌍방울(98년)-쌍방울(99년)-SK(2000년)-KIA(2001~2002)-두산(2003년)
1999년 성적 - 86경기 출전 타율 3할2푼, 19홈런, 68타점
통산 성적 - 674경기 타율 2할6푼9리, 89홈런, 328타점
1995년 신인왕을 받을 당시의 이동수. 삼성 유니폼을 입을 때 찍은 사진이다(사진=삼성) |
그러나 그는 ‘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나 감독 운이 없었다. 1995년 대활약을 펼치고도 이듬해 개막전에서 그는 대타로 출전했다. 그의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은 감독 때문이었다. 1997년 손가락 골절로 고생하던 그를 박석진과 함께 롯데 박동희, 김종훈과 트레이드한 것도 당시 감독의 결정이었다.
부상으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이동수는 1998년 6월 5일 박계원과 함께 쌍방울 투수 박성기, 내야수 김현민과 재트레이드된다. ‘반짝 신인왕’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은퇴 위기까지 몰린 그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때 그를 도와준 이가 김성근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이동수를 특별 지도하며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아준다. 김 감독의 배려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동수는 1999년 시즌 초 손등골절로 엔트리에서 빠졌다가 복귀하자마자 맹타를 휘두르며 그해 타율 3할2푼, 19홈런, 68타점으로 ‘원맨쇼’를 펼친다.
2000년 SK 유니폼을 입고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지만, 김 감독이 떠난 빈자리는 컸다. 삼성 때처럼 그의 스타일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신임 감독은 이동수의 출전기회를 조금씩 줄인다.
2003년 두산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동수는 현재 대구 TBC 라디오에서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외야수] 외야수 김광림(사진=쌍방울 팬클럽)
김광림
1961년 3월 9일생 ㅣ 출신지 대전 ㅣ 공주고-고려대-OB(84~93년)-쌍방울(94~97년)-현대(97~98년)-쌍방울(99년)
1999년 성적 - 117경기 출전 타율 2할9푼2리, 2홈런, 32타점, 9도루
통산 성적 - 1천630경기 타율 2할8푼5리, 35홈런, 431타점, 170도루
1993년 11월 22일 저녁. 두산 김광림은 전등을 갈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천장에 붙어 있던 백열등의 불이 나간 것. 한창 등을 갈고 있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와 잘 아는 팬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어요.” 팬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뭐가 큰일이에요?” 김광림이 물었다.
“아니, 세상에! 모르시고 있단 말씀이세요?”
“뭘 모른단 말입니까?”
팬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듯 이렇게 말했다.
“광림 씨가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답니다. 쌍방울로요.”
전화를 끊고 김광림은 아내를 불렀다.
“여보, 오늘이 만우절이야?”
아내는 “무슨 소리냐?”라며 “만우절은 4월 1일”이라고 대답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두산 프런트 가운데 잘 아는 이에게 확인전화를 건 김광림. 돌아온 답은.
“일이 그렇게 됐다”는 말이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김광림은 당시 트레이드가 거짓말 같기만 하다. 1993시즌 타율 3할을 기록하며 OB 타선을 이끌던 ‘간판 타자’인 자신이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때도 베어스는 ‘좌완투수 부족’에 시달렸다. 당시 이진 같은 좌완 유망주 투수가 있었지만, 제 기량을 꽃 피우지 못한 상태였다. 팀에서 좌완투수를 데려오려고 트레이드를 하리란 소문이 있긴 했다. 그러나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했다.” 김광림의 고백이다.
좌완투수를 영입하려고 쌍방울과 접촉한 OB는 “김광림을 달라”는 쌍방울의 요구에 난색을 나타낸다. 특히나 쌍방울이 좌완 대신 우완투수 강길용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밀자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는듯 했다.
그러나 투수 부족에 시달리던 OB는 결국 강길용을 영입하는 조건으로 김광림과 최동창을 함께 내준다. 결과는 참혹했다. 강길용이 6년간 OB에서 단 6승만을 기록한 반면 김광림은 쌍방울에서 4년간 평균 타율 3할을 거두며 팀 타선을 이끈 것이다. 여기다 1995년 김광림은 타율 3할3푼7리로 타율왕에 오르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김광림은 성적 외에도 쌍방울의 젊은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실’한 훈련 자세였다. 쌍방울에서 김광림과 룸메이트였던 최태원 KIA 코치는 “경기가 끝나고도 몇 시간이고 방 안에서 ‘붕붕’ 소리를 내며 스윙연습에 몰두하던 김광림 선배를 잊을 수 없다”며 “선배의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를 많은 후배가 자연스럽게 본받았다”고 회상했다.
1999년 쌍방울에서 은퇴하고 나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타격코치로 활동한 김광림은 올 시즌부터 두산 2군 감독을 맡는다.
마지막 돌격대원, 조원우(사진=쌍방울 팬클럽) |
조원우
1971년 4월 8일 ㅣ 출신지 부산 ㅣ 부산고-고려대-쌍방울(94~99년)-SK(2000~2004년)-한화(2005~2008년)
1999년 성적 -.314 47 188 59 9 2 6 22 25 11
통산 성적 - 1천368경기 타율 2할8푼2리, 68홈런, 443타점, 123도루
“마지막 돌격대원이었다.” 쌍방울 프런트였던 모 인사의 표현이다. 맞는 말이다. 조원우는 주축선수가 빠지기 시작한 1997시즌 이후부터 1999년까지 쌍방울 타선에서 고군분투했다. 1997, 1998년 2년 연속 전 경기에 출전하면서도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여기다 투수들의 집중 견제에도 2년 연속 15도루 이상을 거뒀다.
조원우는 쌍방울 하면 ‘엄청난 훈련량’과 ‘열악했던 구장 환경’이 떠오른단다.
“1995년 군 제대 후 팀에 돌아오니 김성근 감독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부터 엄청난 훈련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타격폼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 타격코치였던 이마쓰 미쓰오 씨와 궁합이 잘 맞았던 것도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엄청난 훈련량이 그의 선수생활에 호재로 작용했다면 열악했던 구장환경은 선수생활을 단축하는 악재가 됐다.
1998년 조원우는 타율 3할1푼1리, 12홈런, 62타점, 23도루를 기록하며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해 5월 30일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원우는 다음 시즌 더 좋은 성적을 내려고 전주구장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그러나 전주구장은 재앙을 잉태하고 있었다.
당시 전주구장 외야 그라운드 안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는 잔디로 덮여 있지 않았다. 대충 고무판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수비연습을 하던 조원우가 이 고무판에 발이 미끄러지며 스프링클러에 넓적다리관절을 부딪치는 사고를 당한 건 ‘인재(人災)’에 가까웠다.
이때 부상으로 조원우는 2000시즌까지 제 활약을 펼치지 못한다. 다행히 힘겨운 재활을 끝마치고 2001시즌부터 제2의 전성기를 달린다.
현역시절 누구보다 투쟁심이 넘치고, 성실했던 조원우는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로 “SK의 정근우와 두산의 이종욱”을 꼽았다.
지난해까지 한화에서 코치로 뛰었던 조원우는 현재 일본으로 야구연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쌍방울의 마지막 4번 타자 심성보(사진=쌍방울 팬클럽) |
심성보
1973년 2월 16일 ㅣ 출신지 충남 합덕 ㅣ 천안북일고-단국대-쌍방울(95~99년)-SK(2000년)-LG(2001~2002년)-삼성(2003년)
1999년 성적 - 59경기 타율 2할6푼1리, 6홈런, 22타점
통산 성적 - 758경기 타율 2할5푼7리, 63홈런, 321타점
쌍방울의 마지막 4번 타자였다. 대학시절 고려대 심재학과 함께 아마추어 최고의 좌타자로 꼽히며 1995년 1월 신인 2차지명선수로 쌍방울에 입단한다. 이때 그가 받은 계약금 1억 6천만 원은 당시로써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그만큼 쌍방울은 심성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1998년 주로 4번 타자로 출전해 타율 2할6푼9리, 24홈런, 8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듯했다. 그러나 그해 시즌이 끝나고 갑자기 당뇨병에 걸리며 내림세를 탄다. 현역시절 ‘맘보’가 별명이었던 심성보는 현재 천안에서 스포츠용품점과 당구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주 : ‘돌격대의 마지막 거포’, 심성보의 회상 )
윤재국
1975년 5월 5일 ㅣ 출신지 인천 ㅣ 인천고-경남대-쌍방울(98~99년)-SK(2000~2001년)-롯데(2002~2003년)-두산(2004~2007년)-한화(2008년)-SK(2009년)
1999년 성적 - 108경기 타율 2할6푼5리, 1홈런, 21타점, 15도루
통산 성적 - 714경기 타율 2할5푼7리, 19홈런, 170타점, 53도루
쌍방울 시절의 윤재국(사진=쌍방울 팬클럽) |
윤재국은 쌍방울에 입단하고 처음으로 경험한 훈련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어찌나 힘들던지 ‘여태까지 해온 야구는 야구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8개 구단이 모두 이렇듯 힘들게 훈련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의 눈에 들어 데뷔 때부터 주전 경쟁을 펼친 윤재국은 “감독님이 선수들을 대신해 구단과 처우와 복지 문제로 많이 싸웠다”며 “1달짜리 국외 스프링캠프도 예산이 떨어져 20일가량만 하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어려웠던 쌍방울 시절을 회상했다.
재미난 건 당시 윤재국과 동료 선수는 워낙 훈련이 힘든 탓에 속으로 예산이 떨어지길 바랐다고. 지난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윤재국은 현재 서울 청원고에서 타격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다.
이연수
1963년 3월 3일 ㅣ 출신지 전남 영광 ㅣ 광주일고-성균관대-청보(87년)-태평양(88~89년)-쌍방울(90~95년, 99년)
1999년 성적 - 2경기
통산 성적 - 299경기 타율 2할3푼4리, 11홈런, 63타점, 15도루
1995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연수는 이듬해부터 쌍방울 1군 매니저로 활동했다. 그러나 일은 고되지만, 박봉인 까닭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이연수를 다시 현역선수로 복귀시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성근 감독이었다.
“당시 매니저 월급이 원체 적다 보니까 감독님께서 ‘선수로 등록하면 연봉을 좀 더 많이 챙겨줄 수 있겠지’하는 마음에서 나를 다시 현역선수로 등록해주셨다”는 게 이연수의 고백이다.
실제로 이연수는 1999시즌 단 2경기에만 출전했다. 현역시절 이름을 날리지 못했던 이연수는 은퇴 뒤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감독을 맡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현재는 국내 대학야구 감독 가운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고 있다. 대학야구계에서 그의 별명은 ‘아마추어 야구계의 김성근’이다.
이진영
1980년 6월 15일 ㅣ 출신지 전북 군산 ㅣ 군산상고-쌍방울(99년)-SK(2000~)
1999년 성적 -65경기, 타율 2할5푼8리, 4홈런, 13타점, 5도루
통산 성적 - 1천198경기 타율 3할1리, 123홈런, 529타점, 79도루
쌍방울의 마지막 신인(사진=쌍방울 팬클럽) |
1999시즌을 마지막으로 쌍방울이 사라진 뒤 2008시즌까지 SK에서 뛰다가 지난해 FA(자유계약선수) 신분으로 LG로 둥지를 옮겼다.
쌍방울의 마지막 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