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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종소리가 있는 진천 ▷지역 :충북 ▷일정 :1일 ▷위치 : 충북 진천 ▷주요 포인트 : 진천농교, 보탑사, 진천종박물관, 태실, 길상사 ▷코스 : 중부고속도로 진천IC → 진천농교 → 보탑사 → 진천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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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이야기, 동물의 이야기, 하다못해 쇳물을 부어 만든 종에도 이야기가 있다. 진천은 그런 이야기들을 아기자기하게 엮어서 들어도 재미있는 곳이다. 진천농교에 얽힌 전설과 이야기들, 목탑을 건설하기 위해 정성을 쏟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울림에 담아낸 종 이야기를 진천여행을 통해 들어 보자. |
1. 진천농교 - 나그네도 웃고 가는 옛날이야기 |
중부고속도로 진천인터체인지로 들면 ‘생거진천, 천 년의 숨결 농다리’라는 입간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백곡저수지를 지나서 닿는 농다리는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의 일명 굴티마을 앞에 놓여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겹겹으로 돌을 쌓아 만들어진 농다리는 건너편 산정에서 바라보면 여지 없는 지네 모양이다. |
원래 28칸으로 만들어졌다는 농다리는 25칸만이 남아 있다. 마을 앞에서 농다리를 건너가면 풍류를 담은 듯한 정자가 맞이하고, 그 정자 뒤로는 산책로가 있다. 농다리를 건너 정자에서 쉬고, 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서먹서먹하던 남녀도 어느새 손을 잡고 걷게 된다. 초평저수지까지 연결된 수변데크가 옛 정취를 가득 담은 농다리와 대조적으로 현대적인 정갈함을 맛보게 한다.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세금천의 흐르는 물과 어우러져 있는 농다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
옛날 옛적 아주 먼 옛날에, 끈 떨어진 갓을 간신히 얽어매고 산천을 유랑하는 이가 있었다. 의복은 선비 같으나, 행색은 걸식하는 이와 비슷하니, 사람들은 그를 두고 ‘유랑선비’라 했다. 재를 넘고 물을 건너, 목적지 없이 유랑하던 그가 세금천 농다리 앞에 서니, 때는 조선 중엽이었다. |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유랑객인지라 다리를 건너 또 어디로 갈 참인데, 마침 첨벙첨벙 세금천을 홀로 건너던 소가 그를 보더니 어떻게 할 모양인가 하고 끔뻑끔뻑 지켜보고 있었다. 겸연쩍은 선비는 소에게 아는 체라도 하듯 한탄조로 한 마디 한다. |
“백성들의 땀과 피가 이 다리에도 베었는지, 자색을 띄고 있구나.” |
선비는 농다리의 돌 색깔이 자색에 가까운 것을 보고 미루어 짐작했던 것이다. 그 말에 선비를 다시 힐끔 쳐다보던 소가 조금씩 앞서 가며 말한다. |
“의복은 선비 같은데, 아는 것도 없는 선비가 말만 앞세우는구나.” |
깜짝 놀라 소를 쳐다본 선비, 귀를 의심하며 쳐다보는 선비의 눈이 황소의 눈만큼 커졌다. |
말을 알아듣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소가 말까지 하다니, 선비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
`이 다리는 고려시대에 임 장군이 자주빛 돌로 쌓은 것인데, 무슨 백성들의 피와 땀을 이야기하는 거요?` |
마을의 소가 그런 이야기까지 알고 있는 게 신기했던 선비는 그 사연을 자세히 물었다. |
`저 윗마을은 예로부터 임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요. 그 마을에 임 장군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이 세금천 물로 세수를 했지요.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어느 겨울에 어느 여인이 이 세금천을 건너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니, 임장군이 사연을 물었다오. 부친상을 당해 친정으로 간다는 여인의 말에, 임장군이 `그 효심을 세금천이 거스르면 아니 될 것`이라며 용마를 타고 돌을 날라 이 다리를 쌓았다오.` |
그 말을 들은 선비는 `임 장군이라면, 고려 혜종 때 왕비인 의화왕후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냐?`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소는 선비가 또 아는 체를 한다며 대꾸도 않고 첨벙첨벙 세금천을 가로질러 가 버렸다. |
가다 보니, 선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다리의 묘한 모양새였다. 얼기설기 쌓은 줄로만 알았는데, 일정한 모양이 있으니 이것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자세히 들여다 볼 양으로 돌다리에 고개를 들이대자 뻐끔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다. |
소가 말을 하더니, 이번엔 물고기조차 말을 한다. 어이가 없어진 선비는 돌이 어떤 모양으로 쌓여 있는지 보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물고기가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하기를 “보면 모르시오? 내 비늘처럼 단단하게 겹겹으로 쌓은 뒤에 덧댄 거라우.” 했다. |
“벌써 몇 백 년 동안이나 흐르는 물살을 견뎠으니, 내 비늘모양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겠수?”하며 제 잘난 척까지 곁들이니, 선비가 더 기가 차다. |
“저기 윗마을에 임씨 마을이 있지요. 거기에 장사 집안이 있었는데, 그 집안에 힘 좋기로 이름난 오누이가 서로 힘을 자랑하다가 목숨을 걸고 힘겨루기를 하게 됐다우. 그때 아들은 굽 높은 나무신을 신고 목매기송아지를 끌어 서울까지 갔다 오기로 하고, 딸은 여기에 돌다리를 완성하기로 했다우. 근데 서울 간 아들이 늦게 오면 질 것 아니유?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아들을 이기게 하려고 딸의 일을 요리조리 방해했다우. 덕분에 딸은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돌다리를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은 내기에 져서 죽었지요. 그때 이 다리의 미완성 부분을 동네 사람들이 돌을 놓아 완성했는데, 장마만 지면 다른 바위는 그대로 있지만 동네 사람이 놓았던 부분은 계속 떠내려 간다우.” |
얘기는 재미있지만, 반말도 아닌 것이 존댓말도 아닌 것이 꺼림칙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물고기에게 선비는 그만 화가 났다. |
“전하는 얘기는 재미가 있어 흥이 돋는데, 네 놈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
선비가 벌컥 화를 내자, 물고기는 실컷 얘기해 준 것이 아깝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
“천 년을 산 돌다리 얘기를 해 주는데,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화만 내는구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물고기 비늘에서도 다리모양을 생각해 낸 사람도 있는데, 행색만 선비요 실용을 모르니 후대에 고생 좀 하겠구나”하고 물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이 말을 들은 선비는 부끄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해 하늘을 보았다. 한낱 물고기 같은 미물도 실용을 알고, 가축으로만 여기던 소마저도 마을 이야기를 전하는 이곳이 과연 신비로운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비는 이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마을에 정착해 기나긴 세월을 떠돌아다닌 역정을 잊고 장수를 누렸다. |
유랑하던 이에게 휴식을 주고 마음을 가다듬게 할 만큼 정다운 곳이기에, 그런 정기가 농다리에 녹아 있었던 덕분인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농다리에는 노인이 이 다리를 건너면 장수하고, 자식 없는 사람이 건너면 자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
선인들의 지혜도 보고, 우리네 정취도 맛보는 농다리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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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설화가 전하는 농다리는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선인의 지혜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농다리는 너비가 30~40cm 되는 커다란 바위를 놓고 그 위에 조금 작은 바위를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교각을 얹었으며, 그 사이를 긴 장대석으로 연결해 만들었다. 물이 흐르는 유속을 감안한 덕분인지 물살의 제지를 비교적 덜 받으며 천 년을 지켜온 농다리는 장마로 물이 불면 물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장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개발하는 선인들의 지혜가 녹아 있는 다리임에 틀림없다. |
2000년부터는 매년 여름 농다리축제가 열려 한층 볼거리도 많아졌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설정될 정도로 정취와 풍경이 아름다운 농다리 위를 걸으며 걷기체험도 하고 장사씨름대회,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어 흥미롭다. |
○ 위 치 :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32 ○ 문의전화 : 043-539-3725 |
진천읍 연곡리 비립동, 연곡저수지와 만뢰산이 있어 낚시하는 이들과 등산하는 이들에게도 깨나 익숙한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보탑사다. 진천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가 어깨를 대고 있던 경계지역이었는데, 원래 큰 절이 있었던 이 자리에는 통일대탑이 들어서 보탑사로 거듭났다. |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세워진 통일대탑은 대목장 신영훈 선생을 비롯해 여러 장인의 혼이 담긴 탑이다.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지어진 통일대탑은 3층으로 설계되었으며, 비구니의 사찰로 알려진 보탑사의 사찰 경내는 유난히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멋을 지니고 있다. |
보통 사찰에는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고도 금강문이나 사천왕문, 해탈문(불이문)을 지나야 석탑과 대웅전이 있는 경내에 들어서게 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보탑사에는 일주문도, 금강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범종각과 법고각이 어깨를 맞대고 있고, 그 사이에 단정한 계단이 놓여 있다. 이 계단이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듯하다. |
계단을 오르면서 시야에 바로 보이는 것은 통일대탑이다. ‘탑’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은, 이름 모를 작은 사찰에도 서 있었던 오층석탑, 삼층석탑 등이다. 탑은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이 때문에 언뜻 ‘탑’이라고 하면 이런 석탑을 떠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보탑사의 탑은 본당을 가슴에 품은 탑이다. 그것이 바로 통일대탑이다. |
유일하게 목탑으로 남아 있는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처럼,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터만 남아 있는 경주 황룡사 9층목탑처럼, 통일대탑은 목탑의 형태인 것이다. 목탑은 사리만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석탑과 달리 목조 건출물 안에 아예 불상을 모신 경우가 많았다. 법주사 팔상전이 그렇고, 황룡사 9층목탑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역사적으로는 석탑보다 목탑이 앞서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과 역사를 겪어내면서 불에 타고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게 남은 목탑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게 만든 목탑이란 어떤 느낌일까? 정밀하게 돌계단에 새겨진 연꽃무늬에 감탄하며 계단을 올라서면 1층 금당에 들어갈 수 있다. 네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중앙 사면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동쪽에는 약사여래, 서쪽에는 아미타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 북쪽에는 비로자나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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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것은, 약사여래 불단에 올려진 수박이다. 초파일에 신도들이 수박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동짓날까지 그냥 두었다가 동짓날 기도가 끝난 다음에 여러 신도들이 함께 공양한다고 한다. 그때까지 신기하게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보살핌 덕분일까? |
사찰에 들어가면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경건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사찰이 지닌 고요함과 신앙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목탑의 계단을 오를 때에도 발소리를 죽이며 오르게 되는 건 그런 이치임에 틀림없다. |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2층 법보전에 이른다. 법보전은 말 그대로 경전을 봉안한 곳으로, 중심에는 윤장대를 두어 꽃무늬로 장식해 법화경 석경을 봉안했고, 사면에는 경전의 내용을 필사해 붙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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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층을 오르면 뜬금없이 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목탑의 구조상 하중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해 지어진 `암층`이라는 것인데, 밖에서는 3층으로 보이지만, 안에서는 1층과 2층 사이, 2층과 3층 사이에 암층이 있는 것이다. 첫 암층은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지만 두 번째 암층에는 보탑사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탑에 대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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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 오르면 미륵전, 56억 7천만년 뒤에 오신다는 미륵불을 모셔 두었다. 3층까지 오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청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다. 장인의 손으로 일일이 그려졌을 단청은 층마다 무늬가 다르고, 색감 또한 다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성을 반영하기도 했고, 현대적인 색감을 도입했다는 설명에 걸맞게 각 층마다 단청의 무늬와 색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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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3층 난간에서 바라보는 보탑사의 모습은 정겹고 아름답다.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의 안뜰도 아기자기하고, 초록 물결을 배경으로 동산 위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산신각의 모습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은 짧지만 기분 좋은 길이다. 오를 때도 기분이 좋지만 탑의 3층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그렇다. 사리를 모신 석탑이 스님들의 경지를 말한다면, 신도들이 가람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이 목탑은 신도들에게 거시적으로 세상을 내다보라고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통일대탑은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목조건축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냈고, 수많은 사적을 보수한 경험이 있는 한옥문화원 원장 신영훈 선생이 감수를 맡고, 지금은 유명을 달리 한 고 조희환 선생이 도편수를, 단청장인 고 한석성 옹이 단청을 맡았으며 한옥전문가인 김영일 선생이 공사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이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세워진 것이 이 통일대탑이다. 그런 만큼 탑에 깃든 통일의 염원도 크고, 여기에 불심을 담은 스님들의 노고 또한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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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통일대탑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삼국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던 목탑을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법주사 팔상전을 기본으로 한다 하더라도 설계에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게다가 턱없이 적은 공사비로 시작을 했고, 여러 사람의 정성과 노고로 그 골짜기를 헤쳐 왔으며, 그것이 불교계에선 여러 가지 이야기로 회자되기도 한다. |
하지만 무엇보다 머리 맞대고 천 년을 거슬러 올라 만들어진 통일대탑은 찾는 이들에게 그 만큼의 신비감을, 경이로움을 심어주고 있기에 그들의 노고가 한층 빛나는 것이 아닐까. 진천 보탑사 통일대탑에서 그런 경이로움의 세계를 경험해 보길 권한다. |
거기에 더해, 보탑사는 석기와로 너와지붕을 올린 건물이며, 벽면 하나에도 꽃담을 연상케 하는 무늬를 넣은 요사채며,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오솔길 걷듯 오를 수 있는 산신각이며, 사계절 야생화의 생명성이 숨 쉬는 경내의 풍경까지 모두가 정성 깃든 손길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
○ 위 치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 문의전화 : 043-533-6865 |
진천의 백곡저수지 수문을 거쳐 백곡 방면으로 들어서면 특이한 모양의 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온다. 범종의 모양을 형상화한 건물 외관부터 남다르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궁금해서 들어가 보는 곳이 이곳 종박물관이다. |
서양에서는 종을 통칭해 ‘Bell’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범종에 대해서는 ‘Korean bell’이라는 이름으로 그 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 만큼 우리의 범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술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요, ‘전래’라는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들여온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전래될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으로 재탄생한 것이 우리의 범종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범종만의 독자적인 형태와 소리를 갖고 있으니,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부분이겠다. |
진천종박물관은 그런 우리나라의 범종을 널리 이해시키는 데 일조한다. 영혼을 울리고,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담은 우리의 범종을 여기에 모았다. 특히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뛰어난 범종 11점은 복제한 것이 아니라 실물과 같은 기법으로 복원한 레플리카(Replica) 작품들이다. 일생을 범종의 제작에 몸과 마음을 바친 원광식 명예관장의 작품들이다. |
범종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삼국시대이다. 이미 6세기 이전부터 범종을 만들어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범종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이후의 범종들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종은 특별함을 갖추었다. 모양에 있어서는 일본이나 중국과 비슷하게 항아리를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세밀한 부분에서는 우리의 독특한 문양과 섬세함이 묻어난다. 대표적인 예로 상원사 동종이 그렇고, 경주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그렇다. |
소리 또한 그렇다. 딸랑거리거나 ‘땡땡’ 소리를 내며 야철음이 먼저 귀를 파고드는 서양의 종과는 다르고, 깊은 울림이 적은 동양의 다른 나라 범종과도 다르다. 소리가 진동이니, 종소리 또한 진동이다. 그런데 우리의 범종에서는 머리를 울리는 진동이 아니라, 가슴을 흔드는 진동이 느껴진다. 과연 그런가? 범종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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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종박물관의 전시실에 가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범종 앞에 서서 종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분명 범종소리이지만 시대마다 각기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통일신라의 종소리가 더욱 훌륭한 소리를 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종이 들려주는 이야기, 종의 소리가 담은 이야기 |
사람들은 내 소리를 듣고 ‘맑고 영롱하다’고 하오. 그러나 내 소리를 자세히 들으면 그 맑고 영롱한 소리 위에 두껍고 가슴 아픈 울림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오. |
때는 1200여 년 전, 신라 성덕대왕의 아들이신 경덕왕께서 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 봉덕사에 범종을 만들라 명하셨소. 지엄한 명령을 받은 봉덕사 스님들은 온 나라를 돌며 시주를 받고, 정성을 기울여 종을 만들었소. 백성들도 그 뜻을 받들어 성의를 담아 시주를 했음은 물론이오. 그런데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때, 한 아기를 업은 아낙에게 시주를 청하니 그 아낙은 ‘아기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소. |
어찌 되었든, 봉덕사 스님들은 범종을 완성했고, 그 종을 타종하기에 이르렀소. 그런데 기이하게도 범종에서 소리가 나질 않는 것이오. 이 해괴한 일에 고심하던 주지스님은 그날 밤에 부처님을 꿈에서 보았고, ‘아기 밖에 없다’던 아낙의 시주를 받으라고 하는 게 아니겠소? |
열 달을 뱃속에 품고 피를 나누고 살을 나누어 낳은 아기인데, 그 아기를 어찌 범종에 시주할 수 있었겠소. 하지만 주지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아낙네는 부처님의 뜻이라 여기고 아기를 시주하여 바로 내가 태어난 것이오. |
내 소리에 담긴 영롱함은 세상을 겪지 못한 천진한 아기의 영롱함이요, 또 내 소리를 둘러싼 슬픈 울림은 바로 그 어미의 슬픔을 가슴으로 흐느끼는 울림이라오. |
나는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에 있는 범종이오. 사람들은 나를 `상원사 동종`이라 부르오. 내 비록 성덕대왕신종보다 섬세하기가 덜한 비천상을 새기고, 투박하다는 소리를 듣는 몸이지만 성덕대왕신종보다는 일찍이 이 세상에 나왔소. |
나의 소리는 맑고 영롱한 소리와는 다르오. 이 산과 저 산을 넘어가고, 재를 넘고 산허리를 돌아도 내 소리는 장대하게 울려 퍼진다오. 내 울림이 얼마나 멀리까지 가는지는 신라 때 겪는 일을 보면 알 수 있소. |
벌써 천 년도 훨씬 넘은 얘기요. 어느 날 동이 트기 전이었소.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내 앞에서 읍소하더이다. 그리고는 제 몸을 날려 내 당좌를 치더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까치는 ‘동이 트기 전에 범종을 울려야 한다’고만 하였소. 이 몸의 덩치가 다섯 자 반이 넘는 키에 둘레가 세 자나 되는 덩치인데, 그 작은 까치가 어찌 내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단 말이오. 그래도 까치는 머리가 깨어질 때까지, 뼈가 부스러질 때까지 내 당좌를 쳐 댔소. 그놈의 정성이 닿은 덕분에 내 몸에서도 울림이 있었소. 하지만 까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소. |
그런데 그날 석양 즈음에 한 과객이 날 찾아왔소. 그리고는 까치의 시체를 보며 울더이다. 이야기인 즉은, 전날 까치가 구렁이에게 물려 죽을 뻔했는데 마침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던 과객이 구렁이를 죽이고 까치를 살려줬다 하오. 그런데 한밤에 죽은 구렁이의 짝이 과객을 찾아와 동이 트기 전에 동종이 울리면 살려주겠노라 했다오. 거기서 예까지는 첩첩이 산을 넘어야 했으니, 동 트기 전에 여기 도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 목숨을 포기하려던 차에 나의 울림이 거기까지 들렸다는 것이오. |
그러고 보니 까치가 은혜를 갚고, 과객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 소리가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서까지 울렸기 때문이 아니겠소. |
진천종박물관, 범종의 소리와 형태를 가까이,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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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간직한 범종들은 진천종박물관의 야외전시관과 실내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입구부터 줄줄이 늘어선 범종은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이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범종형태를 띄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키를 재듯 범종을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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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을 만지다 보면, 제대로 된 종을 만들기 위해 힘을 쏟은 장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도공은 찬란한 빛의 도자기를 얻기 위해 수많은 도자기를 깨트리지만, 범종을 만드는 이는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가진 범종을 얻기 위해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고 또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온전한 우리의 범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
진천종박물관에서는 그런 범종의 소리와 학교종소리, 스위스 목동들의 종소리는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서 들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종을 비롯한 동양의 종, 스위스와 유럽 등 서양의 종을 분류별로 찾아볼 수 있다. 종의 모양뿐 아니라 각각의 소리, 느낌까지 얻어올 수 있다. |
야외전시관에 타종체험을 할 수 있는 상원사 동종의 레플리카와 성덕대왕신종의 축소판 레플리카는 범종의 울림과 그 소리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전시관에는 종의 역사와 범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제 1전시실, 범종의 문양과 제작기술, 소리의 특성을 알려주는 제2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
진천종박물관을 방문하면 우리 범종이 들려주는 소리의 특성을 가슴으로 느끼고, 옛날부터 일본인들이 탐을 낼 정도로 훌륭하게 발전한 우리 범종의 독특함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
○ 위 치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710번지 ○ 관람시간 : 평일 오전9시~오후 6시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 관람요금 : 일반(19세-64세) : 개인 1500원, 단체(20인 이상) 1000원 어린이 (7세-12세) : 개인 1000원 단체(20인 이상) 500원 * 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무료관람 ○ 문의전화 : 043-539-3847~8 ○ 홈페이지 : www.jincheonbel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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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으로 기세를 올리던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해 홀로 고구려 장수의 머리를 베어왔다는 김유신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신라의 화랑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진평왕 때부터 태종무열왕에 이르기까지 장수로서 최대의 공적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백제를 토벌해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으며, 당나라 소정방의 군사와 합류해 백제를 멸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후세에 이름이 거듭 회자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추앙받는 그는 시대를 호령한 걸출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 입구에는 태수 관저가 있는 장군터, 1983년에 세워진 그의 유허비, 그리고 우물터인 연보정이 남아 있다. 또 그가 무술을 연마하며 보냈다는 치마대와 태실이 산 정상에 원형 석축으로 남아 있다. |
○ 위 치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 ○ 문의전화 : 043-539-3623 |
태종무열왕으로부터 ‘흥무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김유신, 그의 탄생과 관련한 사적지가 태실이라면, 길상사는 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장수에 대한 예로, 신라 때부터 장군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고 국행제를 지냈다. 이것이 조선 태종 때부터는 관행제로 바뀌었다. |
길상사 맨 윗전에 자리잡은 흥무전이 본전인데, 그 안에는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안치돼 있다. 생전에 전장터에서 말 달리고, 목숨 건 외교에 진력했던 그의 영정은 태령산 아래의 아담한 사당에서 마치 휴식을 하듯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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