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기원과 종류
2조(최범신,임동현,정인애,전명선)
1.종교의기원
(1)기원설
종교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이유로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미 원시시대,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벽화나 장법(葬法)에서도 영혼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기원설의 자료가 된 것은 지금도 원시적 생활을 계속하는 미개인의 종교였다.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주물(呪物)을 기원으로 보는 페티시즘설(說), 사자(死者)의 숭배를 최고(最古)로 보는 설,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육체 이외에 영혼을 상상한 것이 기원이라고 보는 애니미즘설, 마나(에너지와 같은 힘에 대한 원시신앙)를 애니미즘 이전의 신앙형태로 보는 마나이즘(manaism)설, 동식물과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의 신념을 원초(原初)로 보는 토테미즘(totemism)설 등이 19세기 말 이래 잇달아 제창되었다.
또 물질문화가 빈약한 미개민족에게 인격을 가진 지상신(至上神)이 많다는 점에서 연유된 원시 지상신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복잡한 관념으로의 경과에서 파악되는 심리적 억측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실증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2)특징
초경험적․초자연적이면서 의지를 가진 존재로 믿어지는 것이 신이나 영혼이며, 원리로 인정되는 것이 법․도덕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으로 만자(卍字)나 십자가(十字架)는 물론, 신상(神像)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또 신의 초인간적 행동이 신화로서 전해지고 숭배의 일정한 형식인 의례(儀禮)가 행해지는데, 이러한 종교의 특징이 고대로부터 철학자․지식인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일으키게 하고, 과학의 인식과 모순된다고 지적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구체성․실재감(實在感)이 사람들의 종교를 지탱해 가는 매력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앙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신앙적 공동체를 갖는 데 있다. 같은 신앙을 가진다는 원칙 위에 결성된 집단을 교단(敎團)이라고 하는데, 교단은 승려나 목사와 같은 전문가를 양성하여 신자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며 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하는 한편, 외부에 대해서는 새로운 신자를 획득하는 행동, 즉 전도(포교)를 한다. 또한 교단에는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종교를 볼 때,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입하는 경우와, 자기의사에 따라 가입하는 경우가 있다.
(3)전개과정
미개종교에서는 각자가 당연한 습관으로서 전해진 것을 믿고 있으며, 개인적인 면보다 사회적인 면이 강해서 제사(祭祀) 등의 의례가 그 중심이 되었다. 다만 종교를 주재하는 신관(神官)의 계급이 생기고 국가형성의 진전과 더불어 각지의 신들이 통합되고, 신들의 친자관계와 그 역할 등이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다신교(多神敎)의 시대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이집트 ․오리엔트제국(諸國) ․중국 ․페루에서와 같이 종교가 국가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국왕은 신 또는 신의 자손으로 여겨진 때도 있었다. 종교사상(宗敎史上) 최대의 질적 전개는 기원 전후 약 10세기 동안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개(BC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의 활약(BC 8~BC 7세기),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제가(諸家)의 활동(BC 6~BC 5세기), 그리스의 탈레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이르는 철학의 발생과 전개(BC 6세기 이후) 등이 주요한 것들인데,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 이들 사상가의 특징은 합리화라고는 하지만 신화나 주술(呪術)에서 분리하여 체계적인 사상을 부여함으로써 철학 ․윤리 등이 독립하고,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도 이루어졌다.
(4) 세계종교
세계적인 여러 사상이 나타난 시기에 발전한 종교사상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현세부정의 사상이다. 미개 ․고대의 시대에는 타계(他界)관념은 있었어도 현세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는데, 이 시기의 종교는, 인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전생(轉生)하며 고통을 경험하여야만 된다든지, 타고난 죄(원죄)의 관념 등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에는 이미 현세의 인간관계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제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내세에서 달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족 특유의 종교로부터 세계적 ․보편적인 종교가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BC 5세기에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 1세기에 유대교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 7세기에 아라비아의 민족종교에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가장 세력을 떨쳤다. 이 종류의 종교는 석가, 예수 그리스도, 마호메트와 같은 교조가 있어서 각기 교단을 형성하고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전도(포교)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으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조직은 존속되어 정치적 집단에 비해 훨씬 오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5)근대이후
근대에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는 크게 변화하였다. 예술․도덕 등이 종교로부터 분화되고, 정치․경제․교육 등의 사회제도에서의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신앙의 자유, 철저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 등이 그 일례이다. 또 한편으로는 계몽사상과 과학의 발전이 종교의 진리성과 존재의식을 위협하고 있고, 따라서 종교비판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그 현대적 존재의의가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2.종교의종류
*불교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대승불교
대승의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종파(宗派)의 총칭.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진언종(眞言宗) ․율종(律宗) ․선종(禪宗) 등이 이에 속한다. 석가 입멸(入滅) 후 500년경(BC 100년?)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때까지 여러 파로 갈라져 자파(自派)의 주장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고집하여 온 불교의 자세를 맹렬히 비판하고, 재래불교를 소승(小乘:Hinayana)이라 폄하(貶下)하는 한편, 대승이라고 칭하면서 이타적(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발하고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대승의 어원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出家者: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개방하려는 재가자(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유적인 스투파(stupa:墳墓)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때까지 석가에게만 한정하던 보살(菩薩)이라는 개념을 넓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일체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광범위한 종교활동을 펴 나갔다.
이 불교운동의 전거(典據)로는 대승불교의 경전이 속속 이루어진 데 있었다. 먼저 《반야경(般若經)》이 나왔다. 공(空)의 사상을 강조하는 《반야경》은 종래의 고정관념을 타파함과 동시에, 일체의 집착(執着)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실천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어 일체를 포함하여 일승(一乘)을 교설(敎說)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세우는 《법화경(法華經)》, 광대한 불타[毘盧遮那佛]의 세계를 교설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거사(在家居士)인 유마(維摩)가 오히려 출가자(出家者)를 교설하는 《유마경(維摩經)》, 서방정토(西方淨土)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를 찬탄하며 일체중생의 구제를 약속하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등이 이루어져 종래의 불교를 일신하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뒷받침하였다. 이 경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승이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거니와, 2~3세기에는 용수(龍樹)가 출현하여 이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어 일체중생에 불성(佛性)을 인정하는 여래장(如來藏)을 교설한 《승만경(勝캐經)》 등의 경전이 이루어졌고, 또한 일체를 마음의 흐름에 응집(凝集)시키는 유식(唯識)사상의 대두에 이어 5~6세기에는 불교논리학인 《인명(因明)》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대승불교 초기부터 일반민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다라니(陀羅尼)》를 외우고 주법(呪法)을 교설하는 밀교(密敎)가 성하여 7세기 이후 불교활동의 중심이 되었는데, 밀교는 대승보다는 금강승(金剛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대승불교는 한(漢)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몽골 ․티베트 ․한국 ․일본 등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재위 491~518) 때 용수(龍樹)의 《중관론(中觀論)》 등 삼론(三論)을 비롯한 천태(天台), 열반(涅槃)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길장(吉藏)은 삼론을 바탕으로 삼론종(三論宗)을 개종(開宗)하는 등 한국에서의 대승불교는 마침내 독자적인 노력에 힘입어 발전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소승불교
사람들을 인도하여 해탈(解脫)을 얻도록 하는 불교 유파(流派).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사를 보면, 첫째로 석가모니 재세(在世)의 BC 6~BC 5세기의 근본불교와, 둘째, 석가모니 멸후(滅後), 갠지스강 유역에 교단을 넓히고 《아함경(阿含經)》 등의 원시경전이 성립된 약 2세기 간의 원시불교(여기에는 근본불교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셋째, 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歸依)로 불교교단이 급속히 발전 확대됨과 동시에 교단분열이 일어났던 부파(部派)불교, 넷째, BC 2~BC 1세기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승불교로 대별된다.
대승불교는 부파 중에서 진보적 ․혁신적이었던 대중부(大衆部) 및 재가신자 집단, 즉 보살중(菩薩衆)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까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던 전통적 ․보수적 불교에 대항하였던 종교운동이며, 그때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 자칭하고 기성불교를 소승으로 낮추어 불렀다. 따라서, 후자가 스스로를 소승으로 자칭하는 일은 없다.
그 기원에서 소승불교는 원시불교를 포함하여 말하는 경우와 직접 대승운동의 상대방이 되었던 보수적인 모든 부파만을 일컫는 경우의 두 가지 용법이 있다. 부파는 처음 불멸(佛滅) 100여 년 후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의 2파(根本 ․部)로 나뉘고,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대중부 계통이 계속하여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상좌부 계통이 분열하였다. 이 분열의 사정과 명칭은 제전(諸傳)이 일치하지 않으나, 북전(北傳)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의 기록에 따르면 [표]와 같다. 이 [표]에서 새로이 성립한 18부파(枝末十八部)를 근본 2부와 합해 소승 20부라 한다. 그러나 남방소전의 《도사(島史)》에서는 불멸 후 약 100년 동안에 상좌대중부의 근본분열이 있고, 그후 약 100년 동안 대중부 계통의 5부, 상좌부 계통의 11부로 분열하여 도합 18부의 부파를 전하고 있다.
각 부파는 자파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각각의 입장에서 종래의 성전을 편집 집대성하였는데, 이로써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해석 ․주석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깊은 이해에 의해 체계화되어 논서가 성립하였다.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부르며, 논장(論藏)으로 총칭한다. 경 ․율 ․논의 3장은 각 부파에 의해 정비되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주로 스리랑카상좌부의 3장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는 논장에 지나지 않는다.
부파 중 가장 유력하였던 설일체유부는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 의해 일체의 법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며(法體恒有), 그 법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고 하였다. 또한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일신의 정진, 덕목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 수행의 단계를 세분하였을 뿐 아니라 열반(涅槃)을 유여(有餘) ․무여(無餘) 열반으로 2분하여 수행의 구극에 도달한 아라한(阿羅漢)도 유여열반에 이를 뿐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번쇄한 교학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집대성되었다. 비바사는 광해(廣解)의 뜻으로 당시의 학자 또는 학파의 다수의 이견(異見)을 열거하여, 소승불교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후에는 불론의 연구 ․정리가 이 학파의 주된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외 경량부(經量部)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에 대하여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을, 법체실유설(法體實有說)을 부정하고 가유설(假有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자설로서 종자는 식물의 종자가 발아의 능력을 내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업력(業力)을 업과(業果)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우리의 업과를 일으키는 종자가 현세에서 내세까지 멸하지 않고 존속할 때, 이것을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 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자 ․훈습(熏習)은 후세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무루(無漏)의 종자는 범부(凡夫)에게도 내재하며, 이것이 계발되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중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통하며, 대승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량부 계통에서 발달한 것이 하리바르만[訶梨跋摩]의 《성실론(成實論)》 및 바수반두[世親:320~400?]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다. 특히 후자는 그후 인도 ․티베트에서도 깊이 연구되었으며, 소승불교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인정되었고,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구사종이라는 일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여 실유의 범위를 한정하였지만, 대개 상좌부의 실재론적인 법의해석(人無我 ․法有)과 실천의 자기 중심적 경향[自利]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공격도 완전히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각각 법무아(法無我)에서 공(空)으로, 이타(利他)에서 자비(慈悲)로 발전하였으며, 보살(菩薩)사상이 형성되었다.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 보살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성문(聲聞:석존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 열반에 이르는 성자)과 연각(緣覺: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성자)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고 있다.
소승불교 중, 상좌부 계통은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등에 전해져 현재에도 민중 속에 확고한 기반을 잡고 있다. 한편 대중부 계통은 후에 대승불교로 발전하여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에 널리 유포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원불교
1916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개창한 민족종교.
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O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교조 중빈은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
5년여의 침잠 끝에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는데, 그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불생 불멸(不生不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그 후 그는 유(儒) ․불(佛) ․선(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경(金剛經)》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깨닫고 근본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석가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 ․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救濟)의 대책을 법어(法語)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 약자(强者弱者)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개교(開敎)의 기치 아래 최초의 법어로써 1916년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였다.
그는 이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후에 정산(鼎山) 송규(宋奎:후에 一代宗法師)를 맞아 도합 9명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에서는 이 해를 원기(圓紀) 1년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장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고, 시주(施主)․동냥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저축조합의 조직을 필두로, 1918년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2만 6,000평의 논을 조성하고, 그후 엿공장․과수원․농축장․양잠․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1919년에는 9명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大祈禱)를 시작하여 3개월 후 최종 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奇蹟)을 낳고, 여기에서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단결(團結)․공심(公心)을 더욱 굳건히 하였는데, 이것이 곧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서중안(徐中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전라북도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중빈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19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기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포명(布明)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계속되어 겨우 교단을 유지해나갔다. 1943년 교주가 죽자 송규가 종법사(宗法師)가 되어 교통(敎統)을 계승하고, 광복 후 19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하는 한편, 교육․자선(慈善)․교화(敎化)의 3대 실천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1962년 규가 죽자 김대거(金大擧)가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교리
원불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3학(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4가지)로써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4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현황
원불교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 교구(敎區)와 교당(敎堂)을 두고 있으며, 그 운영기구로서 종법사(宗法師)를 중심으로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議會)․교정위원회(敎政委員會) 및 교정원(敎政院)과 감찰원 등이 있다. 교당에는 교무(敎務)와 교도가 있는데, 교도는 10인을 1단으로 하는 10인 1단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종 연구소 외에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영산원불교대학교(靈山圓佛敎大學校) 등의 종합대학, 전문대학 1개교, 중․고등학교 6개교, 선원(禪院) 3개처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당별로 설치한 유치원․유아원과 양로원․보육원․수양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한편, 교단 직영의 산업체로 제약회사를 비롯하여 4개의 농원과 정미소․원예원 등이 있으며, 복지기관으로 양․한방(洋韓方)의 종합병원과 보화당한의원 등이 전국 주요도시에 있다. 문화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원광(圓光)》 《원불교신문》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1993년 현재 20개의 국내 교구에 520여 교당과, 미국․일본․캐나다․중국 등 3개의 해외교구에 20여 개의 해외 교당이 있으며, 신도수는 100만여 명에 이른다.
*이슬람교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메트(이슬람어로 무하마드)가 완성시킨 종교.
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⑴ 알라와 《코란(쿠란)》: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는데, 마호메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 주고, 잘 보아 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코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호메트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코란》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敎義) ․제도, 마호메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코란》은 마호메트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주석서(注釋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法學) ․신학(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다.
⑵ 이슬람의 근본신조: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로서 즉 귀의(歸依)를 뜻한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고 마호메트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조이며, 후에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경전(經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 ․희사(喜捨) ․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인데, 이것을 이슬람이라고 칭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므로,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다.
⑶ 이슬람 신앙의 요소: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언(言)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즉 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 오주(五柱):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오주(아르칸 알이슬람:Pillars of Islam)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트(奉化 또는 勤行)라고 한다.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증언 또는 고백(샤하다):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② 예배(살라트):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메카가 있는 쪽을 향하고 행한다.
③ 희사(자카트) 또는 천과(天課):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④ 단식(샤움):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月間: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 ․흡연 ․향료 ․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이 끝난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 순례(하주):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⑸ 교도의 일상생활: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코란》과 《하디스 Hadith》(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관한 서적에 사용되는 명칭)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①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허용된 행위로, 이것은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은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Haram:이슬람법 용어).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립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홍해(紅海)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巡禮者)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코레이시족(族)이었으며 마호메트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마호메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얼마 후에 죽었으므로 어린 마호메트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후 숙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多神敎) 신당에 빠져, 돌 ․천체 ․샘 ․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하니프들은 이에 반대하여 세계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마호메트가 자신은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호메트가 메카 근교의 힐라산(山) 동굴에서 최초로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맨 처음 그의 아내 하디자가 입신(入信)하였는데, 그 후 그녀는 메카의 박해시대에는 자주 남편의 힘이 되어 주었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40명, 10년 만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고 게다가 메카의 집권자인 코레이시족의 박해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이를 피하여 622년 9월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행(行)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명문 인사가 다른 유럽 부족의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헤지라라고 하는데,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풍습이다. 마호메트의 운명과 이슬람의 장래는 이 헤지라를 통하여 일변하였다. 메카에서 이주한 교도(무하지룬)와 메디나의 협력자들은 힘을 합쳐 교단(敎團:움마)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인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마호메트는 교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메카군과 싸워 630년 1월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 신전(神殿)을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어놓았다. 얼마 후 아라비아인의 태반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 광대한 아라비아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은 실로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의 이상은 종래의 부족단위의 사회를 하나의 이슬람 교단으로 바꾸어,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전체 교도를 한 형제로 삼는 평화스런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632년 6월 메디나의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발전
⑴ 이슬람권의 확대:마호메트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에스파냐)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江)의 싸움에서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天山南北路]의 투르크족(族)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人)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니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西)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역정복(逆征服)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人)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왕조는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공략, 비잔틴 제국(帝國)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⑵ 분포 현황: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힌두교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라문교(婆羅門敎)가 복잡한 민간신앙을 섭취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後)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聖典)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직업 ․종교적인 제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 ․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 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 ․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 ․家住 ․林住 ․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 ․성별 ․직업 ․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 ․인종 ․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이 명칭은 그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역사
가톨릭교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해 창립되어,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다. 예수는 제자 중에서 12명을 선정하여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그에게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부여하였다(마태 16:18~19).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 제자들은 성령(聖靈)에 의해 신앙이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사도의 장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로마에 사도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자와 순수한 그리스도교도가 있어 이들 사이에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할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열고 그리스도교도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을 강화해갔으나 전부터 로마제국에 있었던 이교(異敎)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그노시스 ․몬타누스 ․마르키온 및 마니교(摩尼敎) 등의 이단(異端)이 생겼다. 이 이단에 대항하여 교부(敎父)라 불리는 뛰어난 교회사상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클레멘스, 오리게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교에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하였으며, 4세기 말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배척하였다. 한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중요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교의를 명확하게 확정지었다. 중세에 이르러 처음 로마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는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로마가톨릭은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마침내 보름스 협약에서 서임권을 획득하고 교권을 확립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는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며, 안으로는 학문과 문화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교회는 차차 세속주의에 빠져들었고, 교회 지도자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의 계속으로 분열을 일으켜 대립교황(對立敎皇)이 출현하였다.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고 M.루터의 등장으로 결정적 단계를 맞게 되어 가톨릭교가 분리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회 등의 신수도회에 의한 쇄신운동을 진행시켜 교회는 점차 새로운 힘을 회복시켜 해외 선교활동 등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통일이 붕괴되면서 근대국가가 탄생하여 주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자 가톨릭교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어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는 전쟁과 박해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인종 ․국적 ․종교의 차별없이 원조하였고, 전후에는 평화 확립에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제2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 등 뛰어난 교의를 선언하였다.
교의
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적인 교회임을 주장하는 점에서, 그 창립자의 사랑의 가르침이 곧 가톨릭의 교의(敎義)이다. 가톨릭의 교의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바탕을 둔다. 성서는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으며, 성전은 사도시대부터 구전해 내려오는 글로 쓰여지지 않은 하느님의 말을 뜻한다. 가톨릭교의 교도권(敎導權)은 성서와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을 인류에게 널리 전파하고 권위로써 이것을 해석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 신앙은 이 교도권에 복종하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와는 다르다. 가톨릭의 신관(神觀)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라 하며, 이 신관은 4세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하느님의 본성은 하나이지만 위격은 셋(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의 조상인 아담의 죄로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상태를 원죄(原罪)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속죄하여 또다시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사(聖事)에 의해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푼다. 성사는 은혜를 베푸는 의식으로서 일곱 가지가 있다. 즉 성세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백(告白) 혼인(婚姻) 병자(病者) 신품(神品) 성사이다.
한국의 천주교
동양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성직자들은 인류애의 사상과 개척정신에 불타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었는데,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이수광(李光)이 M.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 등을 그의 저서《지봉유설(芝峰類說)》에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한편,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허균(許筠)도 베이징[北京]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十二端)》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써온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당쟁만을 일삼는 주자학(朱子學)이 성행하였고, 이같은 풍조에 싫증을 느낀 일부 학자층에서는 현실적인 학문, 즉 실학(實學)을 내세우게 되었으니 이수광은 바로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실학은 필연적으로 천주교를 믿는 서학(西學)과 결부되어 그로부터 100년이 경과한 1700년대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그의 문인 안정복(安鼎福) 등과 더불어 천주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특히 M.리치의 《천주실의》, 아담 샬[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이탈리아 신부 판도자의 《칠극(七克)》 등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跋文)을 쓰기도 하였다.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검토된 천주교는 마침내 이들 문인에 의해 이것을 믿는 신봉운동(信奉運動)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주동자는 권철신(權哲身) ․일신(日身) 형제와 정약전(丁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의 3형제 등이었다. 이들은 교리연구회를 열어 권철신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권철신의 매부 이벽(李檗)도 참가하였다. 또한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李承薰)도 참가하여 그는 교리연구차 베이징으로 건너가 1784년 2월, 귀국에 앞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梁棟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領洗)신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이벽 ․권철신 형제에게 대세(代洗)를 주었는데, 이들은 후에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약전 3형제, 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상인(常人) 출신의 이단원(李端源) 등 수십 명에게 대세를 주어 84년 겨울, 역관 김범우 집 대청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국의 천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85년에는 전해 겨울에 창설한 조선천주교회가 형조 금리(禁吏)에게 발각되어 서적 ․성화가 압수되고 김범우가 희생되었다. 86년에 재건하였으나 91년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이 터져 정약용의 외종(外從)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95년 교회가 창설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이다.
주신부의 내한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4,000명의 신도수를 헤아리게 되었으나 그의 밀입국을 밀고한 자가 있어, 주신부를 피신시키고 신부로 가장하였던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은 포도청에서 타살 ․순교당하였다. 그 후 주신부는 6년간을 숨어서 전교에 힘썼으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총회장 최창현(崔昌顯)이 투옥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써서 교인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국에 내려지자, 포졸들을 전국에 풀어 이단원을 비롯하여 이가환(李家煥) ․현감 이승훈, 승지 정약용, 홍낙민(洪樂民) ․권철신 ․정약종, 여회장(女會長)인 강완숙(姜完淑)과 그 가족을 잡아냈으며, 이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희생된 교인수는 300명이 넘었으며, 나중에 자수한 주문모 신부도 한강 새남터에서 효수(梟首)되니, 이때부터 외국인 성직자를 새남터 형장에서 처형하는 선례가 되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다시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6년간이나 목자(牧者) 없이 지내다가 강원도로 피신하였던 신대보(申大甫)와 그의 고종사촌인 이여진(李如眞) 등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는데, 이여진은 수차 베이징에 가서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인 11년, 조선 국왕은 다시 전국에 명령하여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게 하여 이른바 지방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도 ․강원도 등에서 수백 명이 잡혀 사형 또는 귀양을 갔으며, 일부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박해가 일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교회재건운동을 일으킨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 하상(夏祥) 바오로이다.
정하상은 16년부터 거의 해마다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전교에도 힘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27년 또다시 박해가 전라도 지방에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9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순교자는 10여 명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되었다. 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두 가지 교서를 발표하였으니, 그 하나는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킨다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브뤼기에르(한국성 蘇) 신부를 조선교구 초대 주교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교회 창설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신부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다가 35년 뇌일혈로 급서하자 프랑스의 모방[羅伯多祿] 신부가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입국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샤스탕[鄭牙各伯]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에 힘썼다. 이때 나신부는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고 최양업(崔良業), 최(崔)프란체스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로마 인류복음화성성[傳敎聖省] 동양경리부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이들은 조선시대에 해외로 보내진 최초의 유학생이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각자들이었다.
37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范世亨] 신부를 조선교구의 제2대 주교로 임명하여 그가 이듬해 정월 무사히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 창설 7년 만에 비로소 주인을 만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김조순(金祖淳)은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므로, 그들 세 신부는 열심히 전교하여 2,000명 가까운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전국의 교인수가 9,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조순이 죽고 풍양조씨(豊壤趙氏)가 세력을 잡자 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118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정하상 ․유진길(劉進吉)을 비롯한 69명이 순교하였으며, 이때 외국인 신부 범주교 ․정신부 ․나신부 등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가장 큰 일을 이룩한 순교자는 정하상이었다. 그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잡힐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宰相書)>의 글을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렸다. 이 글에서 천주교가 조금도 그릇된 교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고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논박하였는데, 이 글은 87년 홍콩에서 책자로 간행되어 중국 전교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마카오로 유학하였던 김대건은 44년 부제(副祭)가 되고 이듬해 조선교구 제3대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高] 주교의 집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安敦伊] 신부와 함께 어렵게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700여 명에게 성사를 주었고 교우의 수는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페레올 신부의 명령으로, 앞서 함께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李] 신부를 맞이하러 연평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병오(丙午)박해가 일어났다. 김대건 주교는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현석문(玄錫文) 이하 20여 명이 잡혀 그 중 9명이 처형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1925년 한국 순교자 79명을 시복(諡福)하였다. 철종(哲宗)시대에 이르러 천주교는 보호받아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張敬一] 신부를 비롯한 10여 명의 신부가 내한하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는데, 그는 전국의 3,7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그러나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원군이 집정하자, 다시 병인(丙寅)박해를 일으켜 1871년까지 근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외국 함선의 내침으로 박해를 거듭 겪어오다가 86년 한 ․프랑스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가까스로 전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용산신학교의 개설, 성 바오로수녀회의 진출, 성서 활판소를 개설하였고, 98년에는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1900년 전국에는 프랑스 성직자 40명, 한국인 신부 12명, 41곳의 성당과 4만 2000명의 신자가 있어 그 교세가 제주도에까지 퍼졌는데, 1901년 제주도에서 다시 한 번 박해를 겪어 700여 명의 교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같이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인 41년에는 9개 교구와 169명의 외국인 신부, 139명의 한국인 신부, 18만 명의 신자로 증가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어 사용이 강요되고 일본식 이름으로의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는 한편, 각 교구의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었다가 미국인 성직자는 본국으로 추방하고 기타 성직자들은 행동을 감시하였다. 42년 서울 교구의 라리보 신부가 그 직책을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기고 은퇴하자, 노신부는 교황청 지시에 따라 평양과 춘천교구장도 겸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노신부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43년에는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평양교구장이 되어 이듬해 성성식(成聖式)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대구와 광주교구에 일본인 신부를 임명하고 각 성당들을 병사(兵舍)로 사용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인 신부들을 구속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다가 8 ․15광복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국토가 양단되고, 북한 지역은 공산집단에 의해 종교 자체가 말살되면서 이 지역 천주교는 또다시 큰 박해를 받았다. 각 교구의 주교를 비롯하여 신부 ․수사(修士) ․수녀가 모조리 체포되고, 수많은 교인이 수난을 당하는 한편, 성당 ․수도원 ․신학교 ․병원 등의 시설은 모두 몰수하여 그들의 기관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년 6월 25일 남침을 자행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한 남한 지역의 성직자 ․수도자를 납치하여 갔으며, 성당 ․학교 등은 파괴되고 많은 평신도가 희생당함으로써 한국 천주교 사상 마지막으로 여겨지는 박해를 겪어야만 했다. 6․25전쟁 후 북한지역의 천주교는 거의 그 명맥을 잃었고 교인들도 자신이 교인임을 표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비참한 환경에 처하였다. 반대로 남한지역의 천주교는 54년, 6개 교구에 교인수 18만 9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94년 12월 현재 15개 교구에 교인수 334만 명이라는 큰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성직자도 대주교 2명(한국인), 주교 18명(한국인 16, 외국인 2), 한국인 신부 2,072명, 외국인 신부 210명, 수사(修士) 한국인 496명, 외국인 21명, 수녀 한국인 6,632명, 외국인 212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문화 ․복지사업도 유치원 230, 초등학교 6, 중학교 26, 고등학교 36, 대학 10, 대신학교 6, 기타 특수학교 19곳에 이르고 있으며, 그 밖에 병원 ․의원 36곳, 종합복지기관 270곳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대주교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樞機卿)으로 임명되었다. 68년에는 100년 전 병인박해에서 순교한 근 1만 명의 신도 중에서 24위에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諡福)함으로써 한국의 복자위(福者位)는 모두 103위가 되었는데, 83년 9월 로마 교황청은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聖人)으로 승품시켰고, 84년 5월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식전에서 이들 복자위 성인 승품식을 친히 집전하였다. 이어 88년에는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다.
*기독교(그리스도교)
1세기에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본질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교를 아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시대와 신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원하고 참된 진리를 내포한 종교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종교라는 두 가지 기본원리 아래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순전히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밝히려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자존(自存)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랑(agape)'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존재와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그 사랑으로써 세상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이룩하는데, 그 사업은 바로 인류의 역사 속에 구현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역사 속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의 근거와 핵심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을 '사랑의 계약'이라고 한다. 본질이 선(善)이요 사랑인 하느님은 인간과의 계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겨 계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하느님은 사랑의 계약을 지켰다. 하느님은 그 계약의 실현인 인간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에서는 이것을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셨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때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이 세상에 구현되는 원리로서, 이의 육화(肉化)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교를 알려면 가장 특징적인 신관(神觀)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느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신으로서, 그 자신이 3위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곧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3위로서, 이 셋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느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3위는 하나의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樣式)의 차이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로서 구약성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었다. 아들로서의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살았고, 또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영적 존재이다.
이같은 삼위일체의 신앙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그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구현하였으며, 그의 사랑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핵심이며, 본질을 이루는 원리이다. 이와 같은 교의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啓示)한 것으로 믿는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자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나, 자연계시에 의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만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올바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종교(啓示宗敎)라는 특수성을 가지지만, 그 계시는 인류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형성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성령강림절)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 예수그리스도시대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력(西曆)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 1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 사학자들은 유다 나라 헤롯대왕(BC 37~BC 4?) 통치 말기에 실시한 호구조사령(戶口調査令)을 근거로 BC 4년경 출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종말신앙(終末信仰)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BC 6세기부터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등 외국의 지배를 받아 왔었다. 특히 BC 3세기 초부터는 그리스의 지배하에서 유대교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까지 약탈당하였으며,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살되었다. BC 2세기 중반에는 반(反)그리스 전쟁으로 한때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을 하였지만, BC 63년에는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믿고 있는 야훼신(하느님)이 그들 민족을 구하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의 세상은 얼마안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과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새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 메시아(Messiah)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원어는 헤브라이어의 마샤(mshia)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상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종말사상이 팽배해 있고, 그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이 높아 있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나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福音)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바로 사랑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의 이 말 속에 그의 모든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여, 병든 사람과 불구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를 가까이 하며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으며, 예수의 제자들도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6:16)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신에 기초한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묶여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을 자칭한다는 정치적인 반(反)로마 운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2) 사도들의 전도
하느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神的)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3)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 ․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고가톨릭교회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를 지나 2세기 이후에 교회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경전으로서 신약성서를 편찬하였고, 유대교에서 계승한 경전을 신약의 준비서로 보아 구약성서(舊約聖書)라 하여, 신 ․구약성서를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채택하였다. 이 때부터 중세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가 형성되기까지의 초대교회를 고(古)가톨릭교회라고 한다. 이 시기의 교회에 명확한 개념을 부여하여 교회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통일에 대하여》라는 저서 속에서,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유일한 구원기관(救援機關)이며, 교회의 주교(主敎)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적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가 하나요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교회도 하나임을 주장하였다. 그가 사용한 카톨릭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하는데, 전체적 보편적 공적(公的)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로마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어, 오늘날 카톨릭이라고 하면 곧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 가톨릭교회는 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이단을 배척하면서 정통신학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키프리아누스 외에 유스티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의 교부(敎父)들은 성서적인 증언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노시스파(派)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派)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들에 의하여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격(三位格)으로써 일체(一體)를 이룬다는 삼위일체 신학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325년의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과 같은 신격(神格)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3세기 이후 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충돌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 문제였다. 그 무렵 쇠퇴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황제숭배에 의하여 국세를 만회해 보려는 의도로, 황제숭배를 국민의례로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결국 전국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는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듯, 대규모의 박해를 감행하여 무수한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은 더욱 단결하여 믿음을 지켰고, 교회를 키워 나갔다. 이렇게 되자 로마 제국에서는 회유책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는 313년에 밀라노칙령(勅令)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승인하였고,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선포하였다.
중세 그리스도교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은 스콜라 신학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기초가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한 것으로서, 그리스 철학의 힘을 빌려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신학자로는 안셀무스, 보나벤투라, 롬바르두스 등을 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신과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다같이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를 세워 《신학대전(神學大全)》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에 의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는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1439년의 종교회의에서 세례(洗禮) 견진(堅振) 고백(告白) 등의 7가지 성사가 제정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이들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교의가 확립되었다. 스콜라 신학은 이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3세기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둔스 스코투스, W.오캄 등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성으로써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스콜라 신학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
1) 그리스정교회 분리
국교로서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 로마 교회는 교세를 확장하여 전체 교회를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이 중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세 교구는 7세기에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교구가 동서(東西) 양쪽에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두 교회는 각각 비잔틴제국과 게르만족 국가 사이의 상이한 정치상황 탓으로 서로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는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를 따르고 있었고, 서방의 로마교회는 황제권과는 독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협조체제는 무너져 갔다. 이 후 11세기에는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와의 정면충돌로 결정적인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로마교회와 갈라져 그리스정교회(正敎會)로 독립하였다.
2) 교황권의 전성기
게르만 민족 중에서 중세 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프랑크족은 이미 5세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 교회와 제휴하여 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교황의 지지를 얻어 카롤링거 왕조를 창시한 피핀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벌하고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헌납하였다(756).이것이 교황령(敎皇領)의 시초인데, 이러한 경제적 거점을 얻게 된 교황은 세속적으로도 서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황제와 대립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가 죽은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굴복시켰다. 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서로 다투었으나, 결국은 교황권이 황제권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 때는 교황이 서유럽의 전 군주(君主) 위에 군림하였다. 이같이 교권(敎權)이 강대해짐에 따라,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세속화도 심화되어 갔다. 교황은 교황령의 지배자로서, 또 주교나 수도원장은 영주(領主)로서 세속적인 일에 관계하여,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게 되었다.
3) 수도원의 개혁운동
교회가 부패되어 가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적(靈的)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룬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4세기경 이집트에서 비롯된 은둔생활에 그 기원을 두지만, 이것을 사회적 공동체로 성립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이다. 그는 6세기에 몬테카시노수도원을 세우고, 청빈(淸貧) ․정결(淨潔) ․순명(順命)의 생활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상에 봉사하는 수도생활을 창시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자는 운동은 이 베네딕투스파의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그 후 11~12세기에는 각지에 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프란체스코회(會)와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회(會)가 유명하다. 이들 수도회는 사유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탁발생활을 하는 가운데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수도회를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라고 한다. 수도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과 청빈생활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교 안에 신선한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으며, 학문연구와 사회봉사 등을 통하여 세계역사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교황권의 쇠퇴
절정기에 이르른 교황권은 봉건영주의 호응을 얻어, 십자군 원정(1096~1270)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원정은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과 대립하여, 1309년에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유폐(幽閉)시켰다. 이를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종교개혁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상 가장 파고(波高) 높은 변화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반기를 들고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운동은 몇 가지 시대적 흐름이 한 곳에서 만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 흐름들은 중세 신비주의 ․회의주의 ․르네상스 ․민족주의 등이었다. 중세 신비주의운동은, 후기 스콜라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고 하느님 이해의 이성적 추구의 가능성을 부인하자, 이에 따라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순수체험적인 영적 차원에서 얻으려고 한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에크하르트, J. 타울러, T.아 켐피스 등이 이 운동의 대표자인데, 이들에게 있어 공통적인 것은 신의 내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람 안에서 탄생하는 신(God being born within)을 주장하였다. 이 신비주의운동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스콜라 신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앙의 생동감과 역동감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중세기 회의주의운동은 15세기 전반부를 특징짓는 종교운동으로서, 교황청의 분열과 부패 등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였다. 이들은 중세 말기의 교회의 타락을 공박하고 교황의 절대성에 항거하여, 교황권이나 황제권의 근원은 모두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 권한은 각기 자체의 한계 내에서 선용되어야 하며, 교회는 재산을 가져서는 아니되고, 교회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 모두 처형되고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들에 의하여 장차 16세기에 이루어질 종교개혁의 기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5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고전(古典)의 연구와 인문주의(人文主義:humanism)로 집약시킬 수 있는데, 이러한 근대정신이 종교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고전연구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인문주의는 인간을 교회의 제도적 권위 아래서 해방시키려는 운동을 싹트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을 태동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였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그 때까지 로마교황청에 예속되어 있던 각 민족의 독립의식의 발로에서 형성되었다. 독일은 교황청의 착취를 가장 심하게 당하고 있던 지역의 하나였는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에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 입장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그는 첫째, 가톨릭교회의 전승주의(傳承主義)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개인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교회의 성사(聖事)와 같은 외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가톨릭의 사제제도(司祭制度)에 반대하여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사제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제후(諸侯)들의 보호를 받아 개혁운동을 성공시켰다. 그는 지방군주적 교회통치제를 확립하고, 1529년에는 제후들의 공동 커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H.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측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태생의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같은 흐름을 이루면서도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여 생활 전체의 성화(聖化)를 주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도 하느님의 소명(召命)으로 보고, 세속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려는 근세적인 종교관을 구체화하였다. 칼뱅의 개혁운동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개혁파교회를 형성하여 루터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특이하게 종교개혁이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서 발단하여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이 곧 교회의 지배자가 되는 수장령(首長令)이 선포되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영국국교회로 분립되었는데, 한국에서 성공회(聖公會)라 불리는 이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가톨릭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유럽 각지에 프로테스탄트운동이 퍼져 나가자 가톨릭에서는 무력(武力)으로 반(反)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면서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1545년부터 6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열린 트리엔트공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교의(敎義)가 재검토되고 가톨릭 신학이 재확인되었다. 또 I.로욜라가 창시한 수도회인 예수회는 가톨릭의 포교를 위해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획기적인 전도사업을 폈다.
근대 그리스도교
종교개혁 운동은 제도적인 가톨릭교회에 묶이어 있는 신앙을 개인에게로 돌리려는 데서 일어난 운동으로, 신학적으로는 그 때까지 교회의 정통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이 발흥하고 과학이 진보하자, 그리스도교 신학사상은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신론(理神論)은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사상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 사상인데, 이것은 근세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유물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신론은 우주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한편 독일의 합리주의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반대하여, 성경을 사람의 손에 의하여 쓰여진 역사적인 저술로서 연구 비평하려는 운동이었다.
이같은 합리주의적인 흐름에 반대하여, 근대 조직신학(組織神學)으로의 새로운 길을 연 사람은 독일의 F.E.D.슐라이어마허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1799)과 《그리스도교 신앙》(1822)은 당시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스도교 신학에 새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종교와 철학 및 윤리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직관과 감정에 의한 개인의 절대귀의(絶對歸依)의 체험을 종교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개인의 주체적 종교를 역사종교로 완성시킨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의 A.리츨은 칸트의 인식론 위에 그 가치판단설을 세워, 근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가장 근본적인 가치판단은 인간이 자연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인 인격이라는 판단으로서, 이러한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정신의 승리를 얻는 실천적 활동이 종교라고 정의하였다. 이 실천적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 건설의 기초라는 판단을 가져오게 하였고, 여기에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확인되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중반에 J.웨슬리를 중심으로 하여 합리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일어났다.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이성적 ․신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영감(靈感)에 의한 종교체험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운동은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방법을 요구하게 되어 메서디즘(Methodism)이라 불리었으며, 영국의 산업근로자들에게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널리 전파되어, 메서디스트 처치(감리교회)를 형성하였다. 감리교회는 그 뒤 미국으로 전파되어 침례교회(浸禮敎會:Baptist Church)와 함께 2대 복음주의 교회를 이룩하였다. 근대 교회,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밖에 여러 교파를 파생시켰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Presby- terians)가,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에 의하여 조합교회(組合敎會:Congregational Church)가 파생하였다. 이 조합교회는 곧 미국으로 건너가 큰 교파를 형성하였는데, 조합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작은 교파이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퀘이커파(Quakers)와 유니테리언교회(Unitarian Church) 등과 함께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여, 근대사회에 휴머니즘 신상을 전파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현대 그리스도교
계시종교이며 또한 역사종교로서의 특징을 지니는 그리스도교는 지난 2,000년 동안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하게 인류역사에 영향을 끼쳐 왔고, 인류역사상 그 어떤 세력보다도 깊은 변화를 초래한 영적 세력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가 세속화(世俗化)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종교적 이해와 통찰력으로써는 파악될 수 없으며, 영적 신앙의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지성의 이해와 통찰력으로써 파악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종교가 신앙을 잃고 속화(俗化)된다는 뜻으로, 극단적으로는 그리스도교가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신앙의 종말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부, 특히 변증신학(辨證神學)에 의하여 지지를 얻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교를 비신화화(非神話化)하려는 신학적인 시도 역시 그리스도교를 세속화시키는 데에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위기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교회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는 2,000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난관을 겪었으나 늘 새롭게 변모하면서 그 본질을 지켜 왔다. 그리스도교회는 본래의 영적 위치로 되돌아가는 힘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은 바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20세기의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 갱신운동들은 20세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초월 체험을 겪음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새로이 부상(浮上)하고 있는 전례(典禮) ․종교음악 ․명상 ․기도 ․경건신앙 등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의 하나로, 교회일치 운동이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유물론적 경향에 맞서서,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단결하려는 움직임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910년 이래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일치운동으로도 번역되는 이 운동은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호응을 얻어, 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일치운동이 목적하는 바의 일치는, 특정한 교리나 의식(儀式) 등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분의 성령이 가져다 주는 신앙정신적 일치를 상호 대화 속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 일치를, 다만 교회 안의 일치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인류의 일치라고 하는 넓은 관점에서 파악하여,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교회 전체가 일치 협력하자는 데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세계 역사 속에서의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天主敎),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改新敎)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西學:서양 학문이란 뜻)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光)이 베이징[北京]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천주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운동(實學運動)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다. 이 무렵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가톨릭 선교활동의 첫 열매이었다.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당시 정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약소민족으로서의 고난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는 어지러웠고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러한 때였으니,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 이념과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역사의식이 강한 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을 배척하고 새 학문인 서학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 가톨릭교인 가운데 많은 지도자들이 실학자들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았는데, 이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전도 없이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성립되어, 세계 가톨릭 전교사상(傳敎史上) 커다란 특징을 이루었다.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朝廷)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18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18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金大建)이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도 곧 순교하였고, 1866년(고종 3)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18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조선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주요 종교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85년(고종 22) H.G.언더우드 목사와 H.D.아펜젤러 목사가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라안으로는 부정과 부패정치에 의해 정부는 약체였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먼저 서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프로테스탄트는 개혁의지를 담고 있었으므로, 우리 서민층에게 개혁의 에너지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개선에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의한 국권피탈 때는 우리 국민의 자주정신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에 지대한 협조를 하였다. 그 후 6 ․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세계 그리스도교 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보였으나, 반면 많은 교파의 분열 등을 초래, 난립상을 드러내기도 하여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파가 있다.
*대순진리회
증산교(甑山敎) 계통의 민족종단 중 하나.
증산교 창시자인 강일순이 죽고 나자 증산교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그때에 경상도 함안 출신의 조철제(趙哲濟;일명 鼎山)를 중심으로 하여 파생된 태극도(太極道)의 도주(道主)가 죽고 그 유명(遺命)대로 박한경이 제2세 도주가 되었는데, 조철제의 아들인 영래(永來)와의 사이에 알력이 심해졌다. 그 갈등이 노골화하자 박한경이 추종자들과 상경하여 성동구 중곡동(中谷洞)에 자리를 마련하고 '대순진리회'라는 간판 아래 포교를 시작하였다.
분파된 여러 갈래의 증산교 교파들 중에 가장 조직성을 갖춘 종교단체로서 능동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며 활발하게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서울로 옮겨와 사회봉사 활동도 병행하며 교세가 급성장하자 1971년 종단 본부 건물인 도장을 짓고, 1987년에는 여주에 대규모의 수도장을 건립하였다. 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포천군 포천읍에 대진대학교을 설립, 운영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교단의 운영은 '도헌(道憲)'에 따라 운영되며 의결기관인 중앙종의회(中央宗議會)와 주요 집행기관인 종무원(宗務院)이 있는데, 종의회는 전국에 산재하는 교당․회관․회실․포덕소 등을 관리하는 자들 중 선감(宣監)․교감(敎監)․포정(布正)으로 구성되고, 종무원에는 기획․총무․교육․수도․교수부 등을 두어 각각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그 밖에 대순종교문화연구소․대순출판부 등의 사업기관을 두고 있다.
중심교리는 천지공사(天地公事)이고, 종지(宗旨)로는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造化), 해원상생(解寃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 등의 실천목표와 윤리요강을 내세우고 있으며, 또 성(誠)․경(敬)․신(信)을 수도의 3대 요체(要諦)로, 안심(安心)․안신(安身)․경천(敬天)․수도(修道)를 4대 강령(綱領)으로 삼고 있다. 주요 경전은 교주 강일순의 언행과 행적들을 적어 놓은《대순전경》으로서 이것이 곧 그 신자들의 신앙지침이자 생활의 표준이 된다
*대종교
단군(檀君)숭배를 기초로 하는 민족종교.
근본 교리는 성(性) ․명(命) ․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 ․조(調) ․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도일(渡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동지 오기호(吳基鎬) 등 10명과 함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교도수는 2만여 명으로 늘었고,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本司)를 이 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 1916년 나철이 죽자 제2세 교주 김헌(金獻)이 취임하였는데,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고, 3 ․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19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1948년 김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 ․만주 ․노령(露領) ․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施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 ․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도교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 ․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제신과 경전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 ․무시천존(無始天尊) ․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 ․문창제군(文昌帝君) ․후토(后土) ․서낭신[城隍神] ․조군(君:五祠 중의 한 神) ․화합신(和合神) ․삼관(三官) ․재신(財神) ․개격신(開格神) ․동악대제(東嶽大帝:泰山神) 등 수많은 신들을 제사지낸다. 한편 도교의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神符:부적) ․옥결(玉訣:秘試) ․영도(靈圖:鬼神像) ․보록(譜錄:敎法의 연혁) ․계율(戒律:修道의 율법) ․위의(威儀:齋戒 등의 의식) ․방법(方法:귀신을 쫓는 術策) ․중술(衆術 ․鍊丹類) ․기전(紀傳:老子 등의 전기) ․찬송(讚頌:神典의 偈) ․표주(表奏:귀신에게 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졌다 금주(禁呪)나 부록(符) 등 방술을 행하는 것도 이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특정한 날과 시간에 목욕재계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지,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 요괴(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따위가 방술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 태식법(胎息法)으로 충화기(沖和氣)를 받아들여 장생하는 수련인 내단(內丹), ② 황금 ․수은과 약물들을 복용하거나 몸에 주입하는 외단(外丹), ③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 충만하게 하는 방중술(房中術) 등이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수련 결과, 상자(上者)는 허공에 올라가 우주에 소요하는 천선(天仙)이 되고, 중자(中者)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에서 사는 지선(地仙)이 되며, 하자(下者)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尸仙:人仙)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와 같은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국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 ․무속(巫俗) ․산악(山岳)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 ․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眞)을 도모하는 사람이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 ․영성(靈星) ․산신(山神),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위 2년에 연경궁(延慶宮) 후원에 있는 옥청정(玉淸亭)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시고 달마다 초제(醮祭)를 지냈고 청연각(淸燕閣)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 ․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 ․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유교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한대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註釋)하는 훈고학(訓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 ․정호(程顥) ․정이(程)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 ․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 ․교감(校勘) ․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 ․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 ․이귀(李貴) ․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 ․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 ․물(物) ․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 ․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 ․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유대교
천지만물의 창조자인 유일신(야훼)을 신봉하면서, 스스로 신의 선민(選民)임을 자처하며 메시아(구세주)의 도래 및 그의 지상천국 건설을 믿는 유대인의 종교.
기원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통 유대교라고 하면 바빌론 포로(BC 586~BC 536) 이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발달한 유대인의 고유 종교를 말한다. BC 2000년대 말에 사울과 다윗왕으로부터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 왕조는, BC 6세기 초 신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무너졌다. 그 당시 전국토는 괴멸적 타격을 입고 초토화하였으며, 지배층․지식층․기술자 다수가 포로로서 바빌론으로 연행되어 갔다(바빌론유수). 이 사건은 이스라엘 종교사에도 큰 오점을 남겼으며, 그후의 유대교의 성격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페르시아(키로스 2세)의 메소포타미아 정복은 반세기에 걸친 바빌론 포로기(期)에 종지부를 찍고, 포로민의 해방을 가져왔다. 그들 일부가, 야훼신이 그들 조상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는 땅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복구하였고, 문서학자인 에즈라의 지도 아래 선민사상적 유일신 신앙을 종교적 이념으로 하는 민족집단으로서 그들의 역사를 재개하였다. 이 시기에 과거의 역사가 신학적으로 검토․반성되고, 그에 따라 전승(傳承)이 재편성되었다.
유대교의 경전(구약성서)은 BC 1세기에 결집이 거의 완료되었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고, 그들의 신학도 이때에 역사의 원점을 향하여 역투영(逆投影)시켜 정립하였는데, 세계의 시초를 신화적․설화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마지막, 즉 종말사상의 궁극적 전개가 가능하도록 구성해 냈다. 비단 이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적 전승 속에 그들의 역사가, 또 공간과 시간이 끊임없이 수용(受容)․정리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 역사상 종말론이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페르시아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후 BC 2세기 이후이지만, 이스라엘적 종말사상의 맹아(萌芽)는 이미 바빌론 유수 이전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싹텄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종말론적 정신풍토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인 일부에게 받아들여져 팔레스티나와 외지(外地) 거류민의 유대교 회당을 포교의 장(場)으로 활용하면서 전파되었으나, 할례(割禮) 문제를 계기로 하여 유대인의 범주를 넘어섰다. 유대교측은 예수가 일반 민중을 상대로 한 종교적 인격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는 인정하지 않으며, 유대교에서의 메시아 대망(待望)은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실제로 메시아라고 호칭되거나, 자칭하여 다수의 추종자를 끌어들인 인물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때때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이스라엘을 성립시킨 시오니즘 운동의 배후에도 성지(聖地)귀환 촉진의 한 요인으로서의 현대적인 메시아 사상이 깔려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교 본래의 특색은 율법(律法)에 있다. 율법의 기초는 계약의 개념으로서, 이것은 원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경제적․사회적 통념이었는데, 그것을 신(神) 대 인간의 관계 속에 끌어들인 점에 유대교의 특성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은 그들의 조상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았고, 그 자손들에게 약속한 땅을 주어 그들을 지키고 축복한다는 것이 선민사상의 개념이다. 한편 그들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같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에게만 오직 정성을 다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야훼신 이외의 신을 섬기지는 않는다. 이 계약이행의 내용은 신의 편에서는 '헤세드(은혜)'이고, 백성 쪽에서는 신이 부여한 율법의 준수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계약위반이므로 신의 분노를 초래한다. 특정집단에서만 숭배되는 일신(一神)이 과연 종교사에서 말하는 일신교의 신(神)관념과 합치하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보편(普遍)종교에 비하여 유대교는 보통 민족종교로 정의된다. 게다가 이스라엘인은 처음부터 완전한 초월적․절대적 일신의 관념에 도달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어느 면에서는 《제2 이사야》와 같이 고도의 종교적 보편성을 나타내면서, 한편 신 관념에서 합리화, 즉 주술성(呪術性)의 극복을 추진하고 있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경전은 뒤에 그리스도교의 경전(구약성서)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적 유대교에서는 그 이후의 구전(口傳)의 율법과 고대 말기에 그 해석을 집대성한 《탈무드》를 경전에 추가하여, 오히려 거기에서 유대교의 특색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뒤에도 시대에 따른 율법해석이나 전승(傳承) 형성이 라비(스승:율법교사)의 지도 아래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정통파․개혁파 등 여러 파가 생겨나고 있다. 예루살렘의 라비 본청(本廳)은 유대교의 2대 종합집단인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을 통합하는 형태로서, 최고권위를 이루고 있으며, 민법 특히 혼인법의 규제를 통하여 교단 유지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천도교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 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종교사상
동학, 즉 천도교는 신, 즉 한울님을 모시는 유신적(有神的) 종교인데, 신관을 비롯하여 인간관․윤리관․역사관․수행체제가 모두 독특하다.
① 신앙대상인 한울님(天主)은 유일신으로 인격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모시고 있는 초월적이면서 내재하는 신이며, 아직도 참뜻을 펴려고 애쓰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주나 심판의 신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영적인 것과 기적(氣的)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② 인내천(人乃天)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신앙의 실천적인 핵심으로 삼는다.
③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대표되는 윤리관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1920년대의 천도교가 어린이운동의 목표로 어린이의 윤리적 해방을 내세웠던 것도 역시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셨다고 보는 천도교의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다.
④ 천도교는 개체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으나 영생론을 주장한다. 영생은 종교적인 높은 체험의 경지에 이르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⑤ 천도교의 역사관은 발전론과 순환론을 겸한 파동형(波動形:起伏盛衰論) 사관으로 보며, 문명의 단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점으로 본다. 즉 지금까지의 문명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⑥ 천도교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인간구제, 부유한 사회구제를 위한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위한 현실참여에 적극적이 된다.
수행체제
천도교의 수행은 개인적으로는 청원(請願)과 기복(祈福)이 수반되지만,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희생․봉사로써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바지하는 데 두고 있다.
그의 실행을 위해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 윤리의 준칙(準則)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행위로는 ① 주문(呪文), ② 청수(淸水), ③ 심고(心告), ④ 경전봉독(經典奉讀), ⑤ 기도, ⑥ 성미(誠米), ⑦ 시일식(侍日式), ⑧ 기념식 등이 있다. 주문은 본 주문이 13자로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며, 강령주문(降靈呪文)은 8자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 글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우는데, 그 목적은 마음을 닦고(修心), 기운을 바르게(正氣) 하는 데 있다. 심고는 한울님 감응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다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모든 제례의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바치는 것이며, 경전봉독은 《천도교 경전》(《東經大典》과 《龍潭遺詞》)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다. 기도는 심고 ․청수봉전(奉奠) ․주문 읽는 것을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미는 우리들이 끼니마다 먹는 음식을 한울님의 녹(祿)이라고 생각하여 끼니마다 쌀 등을 한 숟가락씩 뜨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모아서 교단에 바친다.
시일식은 1주일에 한 번(일요일에 교당에서 행함) 집회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기념식은 창도일(創道日) 등 기념할 만한 날에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를 특히 오관(五款)이라 하여 교인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수를 모시는 사람을 향해 차려놓는데, 이것은 조상이나 스승님의 영(靈)도 내 안에 모셔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천도교의 수행기본(修行基本)은 기원만도, 깨달음만도 아닌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의 은총과 자력을 겸하는 데 있다.
약사
천도교는 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제2세 교조 해월 최경상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 1870년경에는 신도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해지방에서 이필제(李弼濟)가 주축이 되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켜 1871년 3월 10일 군아(郡衙) 습격과 8월 2일의 문경 초곡 군기고 습격사건으로 300여 교도가 희생되어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1875년 최경상은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고 강원도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시작, 많은 교도를 얻었다. 이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적 수도요령과, 위생 등 생활의 합리화를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1880년에는 강원도 인제와 단양 천동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를 최초로 목판 간행하여 경전종교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 지방으로, 1889년경에는 교세가 전라도 지방까지 뻗치기에 이르렀다.
1892년경에 이르자 신앙자유를 내세워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를 벌였는데 이후부터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종교 자유화와 교조신원을 소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3월에는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척왜양이(斥倭洋夷)를 내세운 반봉건․반제국주의적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894년 3월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고부 접주에 의해 고부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김덕명(金德明) 등 지방의 동학 대접주가 공동으로 동학군을 동원,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5월에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53곳에 집강소(執綱所:군사위원회 같은 것)가 설치되어 폐정(廢政)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결국 청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려 들었는데 이때 최시형은 전 동학군에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반제국주의 무력항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 수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98년에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지도급 인물 중 손천민(孫天民)과 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제3세 교조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1~1902년에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1906년 1월까지 머물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10월 8일 360곳에서 30만 명이 색옷입기와 단발을 단행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민중운동이었으나 동학군이 주동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인 이용구(李容九)가 단독으로 일진회(一進會)와 합동,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1906년 1월 말경에 귀국하여 2월부터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을 위해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를 경영 또는 보조하는가 하면,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는 그리스도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하였다. 1922년 5월 19일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생애를 마치자 한때 교세는 주춤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에 의해 1919년 9월에 발족한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토대로 1920년 3월에 천도교청년회를 조직,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운동이 시작되었고, 19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1922년 9월에는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黨)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천도교가 간행한 잡지만도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천도교 월보》 《신인간》 《별건곤(別乾坤)》 《자수대학강의》 등이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1935년 이후부터는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22년 조직)을 조직, 1935~19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고, 1938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委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광복 이후 국토가 양단되자 북한에서는 천도교 북조선종무원과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을 조직, 활동하였는데 280만 교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측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 이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국토 분단을 영구화하려 하자, 1948년 2월에 3․1재현운동, 즉 남북통일 총선거운동을 전개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만 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많은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원시종교
일반적으로는 발전단계에서 본 원시, 즉 고도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은 미개인의 종교를 가리킨다. 공통된 특징으로는 고정된 교의(敎義)가 없고 신화로써 표현되기 때문에 신관념(神觀念)은 유동적이다. 애니미즘 또는 애니머티즘, 초자연적인 주력(呪力), 원시적 일신관의 여러 신앙이 널리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것이 종교의 기원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신앙은 사회생활과 결부되어 현세적이며, 의례나 제사를 통한 일체감이 신앙을 받쳐주고 있다. 신관(神官)이나 승려와 같은 전문직은 아직 생기지 않고, 씨족이나 부족의 조직이 그대로 신앙조직이었으며, 교단도 형성되지 않았다. 아프리카 서부와 중앙부를 제외한 아메리카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미개종교는 그 후 여러 종교의 전파와 근대화 압력으로 대개는 붕괴되었거나, 한편으로는 사회의 동요기에 신흥종교와 같은 형태로 미개종교적인 것이 부활하는 수도 있다.
물신숭배
페티시즘이란 원래 자연물 또는 인공물에는 초자연적 ․신비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원시종교 특유의 신앙에서 유래한 주물숭배(呪物崇拜)를 가리키지만, 그 후 마르크스의 《자본론(資本論)》 첫머리에 상품세계(商品世界)의 물신적(物神的) 성격에 관한 기술(記述)이 나옴으로써 사회과학 용어로서 일반화되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본주의적인 생산체제 아래에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물건과 물건과의 관계로 나타나고 사회관계가 물상화(物象化)되며, 물상적 의존관계(物象的依存關係)로 변질한다. 그래서 본시 인간이 노동에 의해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지나지 않는 상품 ․화폐 ․자본 등의 물질이 마치 고유의 힘을 지니고, 그들 배후에 있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떠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되고, 상품 ․화폐 ․자본 등 인간노동의 생산물을 신앙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 이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와 같은 사태를 물신숭배라 하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일상적 종교가 되어 있다고 한다.
애니미즘
물신숭배(物神崇拜) ․영혼신앙(靈魂信仰) 또는 만유정령설(萬有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되는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아니마(영혼)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가 《원시문화》(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야만인의 철학으로써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종교의 근본원리가 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타일러에 의하면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추리되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령 잠자고 있는 동안 몸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도 멀리 떠나 있는 꿈을 꾼다거나, 또는 죽음 직후에는 외관상 아무 변화는 없으나 살아 있을 때의 상태와는 다른 것을 느낀다. 그래서 육체와 유리되어 활동하는 원리, 즉 영혼을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수면과 가사(假死)는 영혼의 일시적 부재(不在)상태이며, 죽음은 그 영원한 부재상태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영혼은 독립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숭배하는 데서 종교가 비롯되었으며, 동물이나 나아가서는 자연물에까지 영혼을 인정함으로써 신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같은 타일러의 학설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한 원시인에게서 꿈이 그처럼 중대한 경험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논란도 있었으나, 이원론(二元論)의 사고양식을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아직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보통 사람이 넋을 잃으면 질병에 걸리거나 죽는다고 믿는데, 무당이 행하는 병치료법은 그같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어 환자의 육체에 되돌려주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오 사회에서는, 인간과 특정의 동물이 넋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신앙을 흔히 보게 되는데, 그 상대 동물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믿고 있다.
샤머니즘
엑스터시[忘我․脫我․恍惚]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다른 종교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샤먼이란 말은 17세기 후반 트란스바이칼 지방과 예니세이강가에서 퉁구스인(人)을 접했던 한 러시아인에 의하여 알려졌는데, 이 말의 어원에 대하여 19세기의 동양학자들은 샤먼의 관념 내용과 병행하여 산스크리트의 승려를 뜻하는 시라마나(飽rama緘a), 팔리어(語)의 사마나(sama緘a)에서 샤먼의 어원을 찾는 수입어설을 주장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 J.네메스와 B.라우퍼 등은 퉁구스계 제종족 사이에서 주술사의 일종을 지칭하는 浹aman, saman, s'aman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퉁구스 토착어설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샤먼의 어원에 대한 해설은 구구하나, 대체로 퉁구스 토착어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실제로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부랴트․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말이며, 또한 샤먼의 역할이 북아시아 제종족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유사하지만 샤먼을 지칭하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고, 그 의미도 다양하다.
토테미즘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 ․식물류(독수리 ․수달 ․곰 ․메기 ․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 ․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 ․식물이나 자연물에서 따붙인 예는 미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 ․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 ․의례 ․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 ․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 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 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②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 ․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 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 ․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④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다. 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토테미즘은 현재도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멜라네시아 ․인도 등 넓은 범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전에는 남아메리카 ․폴리네시아 ․아프리카 ․북극 에스키모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토테미즘은 J.F.맥레넌의 조직적인 연구에 의해 1870년경부터 학계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平.뒤르켐의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정밀한 연구에 의해서 종교기원론 ․본질론으로서 전개되었으며, 그 후의 조사연구로 여러 가지 측면이나 형태가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토테미즘을 제도적인 주술(呪術), 종교적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여러 학문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 실체는 아직 충분히 해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민간신앙
특정한 교조(敎祖) ․교리체계(敎理體系) ․교단조직(敎團組織)을 가지지 않고 일반민중의 생활 속에 전승(傳承)되고 있는 전종교적(前宗敎的) 또는 주술적(呪術的)인 신앙형태.
민간신앙이라는 어휘는 아직 학문상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학술어가 아니다. 따라서 그 개념은 막연하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종교민족학 또는 종교민속학이 진전됨에 따라서 개념내용이나 영역, 대상에서 하나의 통설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즉, 자연종교적이면서 성립종교(成立宗敎:established religions)와 유합적(琅合的)이라는 것이다. 자연종교적이라 함은 특정한 창교자가 없고, 계시적(啓示的)이 아니며, 신앙의 체계화가 이룩되지 않았고, 조직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믿어 온 민족으로서의 계승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에는 만들어진 것도 있으나, 성립종교의 신앙을 받아들여서 유합한 것도 있다. 그 유합과정에서 재래의 민간 신앙이 파괴되어 해체되는 경우가 있다.
유럽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래에 의해서 그 신앙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성립종교의 전도보급 또는 형성이 있었으나 민간신앙은 남아서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왔다. 이런 계승면에서 민간신앙은 그 민족의 독특한 신앙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민간신앙이 지지되는 범위는 한 민족 한 국가 내의 한 마을에 한정되어 작은 지역사회 안에서 생활하는 작은 규모의 생활공동체에 국한되고 만다. 그 생활공동체에서도 불교 ․유교 ․도교 ․그리스도교 등과 같은 성립종교나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등의 여러 민족종교에 귀의하고 있는 층과 지역사회 공동체의 일상생활 영역 밖에 있는 층이 제외된다. 그러나 민간신앙층의 영역은 공동체의 일상생활층에서 생활하는 소위 서민층에 그 기층(基層)을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 민간신앙은 그것이 지역적인 범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방적인 색채가 짙다.
이와 같이 성립종교와는 달리 개인신앙보다 한층 더 공동체적이고 서민적인 민간신앙은 이성판단이 아닌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경험의 반복에 따른 판단에 그 신앙구조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숭배로 구성되어 있다. ① 자연숭배, ② 정령숭배, ③ 주력(呪力)숭배, ④ 신당(神堂)숭배, ⑤ 외래종교와의 접촉에서 생기는 여러 숭배 등이다. 자연숭배는 인간의 생득적(生得的)인 신앙심이 민간사회에 가라앉아서 마을생활의 밑바닥에 퇴적되어 있다. 그 중에서 뚜렷한 것은 산 ․바위와 나무 ․물이다. 이런 것들의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자연숭배(원시신앙)는 사회진전에 따라 일어난 생활의 분화에 적응하면서 종교영역에 정착하여 왔으며, 또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산이 수렵사회에서는 수렵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물이 어로사회에서 어획물 취득을 보장하고 해상운항의 안전을 다스리는 수호의 대상이 되는 따위이다.
이 자연숭배에서 발생한 신앙 속에 이미 정령에 대한 신앙이 잠복하여 있다. 즉, 산에 산령, 물에 수령, 나무에 수목령, 바위에 암석령, 사람에게 인간령이 있다고 믿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닥에 그것을 성립시키는 제각기의 정령(anima)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정령숭배에서 농경민은 씨앗에 농업생산을 충실하게 하는 산령(産靈)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 산령은 생식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또 한편, 정령숭배에서 조령(祖靈)숭배가 파생되어 인간 속에 영혼의 실재가 신앙된다. 그 영혼은 육체가 사멸하여도 남아 있으며, 후손의 탄생은 영혼의 이입(移入)이라고 믿음으로써 조령신앙이 성립되었다. 한편 공동체에서 가족의 주체성이 확립됨에 따라서 일가를 창시한 선조를 특별히 숭배하는 선조령(혹은 선조신)이 탄생했다. 동시에 동족단(同族團)이 결성됨에 따라서 시족신(始族神)이 만들어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나 국가의 시조신(始祖神)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정령숭배는 민간사회층에서 많은 신당의 건립을 동반하였고 감터[聖地]를 마련하게 하였다.
신당의 건립과 감터의 정위(定位)는 원시신앙의 윤리-종교화(倫理-宗敎化)의 추세에 따라서 마침내 민간신앙의 테두리 바깥에 두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의 메카(Mecca)와 거기에 건립된 모스크(寺院), 가톨릭의 바티칸에 세워진 베드로 성당, 고대 잉카신전이나 마야신전 등은 모두 민간신앙의 테두리 바깥에 밀려난 것이나, 그 기층에는 민간신앙이 깔려 있다. 끝으로 민간신앙은 그 자체의 윤리종교화와 외래종교(外來宗敎)의 접촉과정에서 그것들의 교리(敎理)나 교의(敎義)를 흡수하여 민간신앙화한다. 반대로 보면 그런 종교들이 부분적으로 민간신앙화하였다고도 간주된다. 중국의 도교(道敎)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신신앙(庚申信仰)이 민간에 정착하면 그 본래의 뜻과는 달리, 재앙을 쫓는 신앙이나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언신앙(呪言信仰)으로 옮겨진다. 기도가 주원(呪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성립종교가 민간신앙화한 영역도 매우 넓다.
민간신앙의 구조는 앞에서 보았듯이 여러 요소를 포갠 중첩적인 것이다. 즉, 맨 밑바닥에 생득적으로 발생한 자연신앙이 있고, 거기에서 정령숭배가 일어나고, 이 숭배에서 신령이나 조령의 신앙이 진전되고, 이와 함께 신당 ․감터란 신앙이 동반했다. 이 2차적인 민간신앙이 다시 성립종교와의 접촉에서 세속적인 혼합신앙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민간신앙은 민간사회층에서 중첩적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민간신앙을 한국인의 종교생활체제란 측면에서 보면 성립종교의 밑에 정위되면서도 그 종교들의 기층부(基層部)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이 구조를 분석하여 보면, 그 체제의 핵심권에 본래의 민간신앙이 자리하고, 그 외곽권에 혼합된 민간신앙이 위치하며, 그 주변권에 성립종교들이 병립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간신앙은 세 개의 권에 둘러싸여 있다고 할 것이다. 이 겹침 때문에 민간신앙은 종교생활 전체의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고 그 밑에 잠복하고 만다. 그러나 한편 한국의 종교에서는 표층권(表層圈)에 있는 성립종교의 신앙 속에 민간신앙이 잠복하고 있기도 한다.
민간신앙의 본래의 특색은 주술의례(呪術儀禮)에 있다. 주술은 한국에서의 푸닥거리에 해당된다. 이를 보면 성립종교의 순수한 교리 ․교의의 주창과는 달리 가정(假定)된 초자연적인 힘 내지는 영적 존재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통제하고 이용하려는 종교적인 행동이다. 이 행동에 의해서 바라는 바를 실현하고자 하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초자연적으로 예지(豫知)하는 전조(前兆)신앙이 동반된다. 이것이 무꾸리이다. 그러므로 그 특색은 한마디로 푸닥거리와 무꾸리의 행동에 있으며, 사고적(思考的)으로는 흉(凶)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없애고, 일상적 상태로 회복하려는 바람에 있다. 이 점에서 그 신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타산적이고 이익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