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 3. 26. 00:00
■연해주(沿海州)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연해주 재이주
1. 동방을 정복 한다는 의미 “울라디보스토크”
“울라디보스톡”은 연해주란 주정부의 수도이다, 연해주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프리 모르스키 크라이”를 번역 한 것인데,
◇프리 - 근해,
◇모르스키 : 바다의,
◇크라이 : 주 라는 뜻이며 연해주란 바다에 연접한 주라는 의미의 연해주 이다.
『울라디보스토크』의
◇울라디 : 정복하다.
◇보스톡 : 동쪽, 동방을 의미 한다고 한다.
2. 한일합방과 한민족의 이주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연해주에는 한민족인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민족의 연해주 대이동 시기는 1차로 1860년대 함경도 부근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고자 함경도 지방주민들이 월경을 하게 된 시기이고, 제2차 대이동은 1910년 한일합방 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면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해주 지역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거사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1930년 초반 소련의 스탈린 시대에는 연해주 울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하산지역 거주 한인의 수가 약20만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지런 하고 근면하기로 이름난 한민족들은 연해주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 자리를 잡아가면서 러시아 중앙정부로부터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6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연해주지역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한인들은 시련을 맞게 된다.
일본은 합방되어 나라가 없어진 한인들이 일본의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 아래 이 지역진출에 관심을 두고 개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동태를 감시 파악하고자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개입 하려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아니하는 상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확대되면서 러시아는 유럽지역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휘말려 들게 되고 극동지역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져 2개의 전선을 형성 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 상태였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적성국가가 되었고 한일 합방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상태에서 소련의 입장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시 하게 되었다
조선인은 곧 일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인은 모두 적성국민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연해주지역 한인들은 교육, 기회도 없고 군대에 가기도 불가능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일본은 조선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면서 골치가 아픈 연해주 고려인집단을 와해하고자 하면서 이를 러시아 측에 한인강제 이주해체를 비밀리에 요구하였다는 밀약설이 전해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동쪽지역을 조용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1930년대 중반 소련중앙 아시아지역에는 대흉년이 들면서 농업기술이 있는 한인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서 농업개발을 통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한 소련중앙정부의 의도가 일치 한 것 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3.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정확한 배경과 원인이 어찌되었든 간에 20만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강제이주를 착수하기 전에 러시아정부는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에서 지도자가 나타나 고려인들이 결속하여 저항하거나 자립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한인지도자 또는 지식층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3000명 정도를 체포하여 모두 처형 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연해주로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는데 엄동설한 한겨울에 그야말로 맨몸으로 난방시설도 없는 우마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가면서 배고픔과 추위 속에 어린이 들은 대부분 얼어 죽었다.
4. 소련 연방해체에 따른 고려인들의 연해주 재이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황무지 허허벌판에 농토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가며 자리를 잡아갔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하고 통제가 완화되면서 구소련에서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농업개발과 식량증산을 이루어 낸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소개하기도 하고 영웅칭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89년 소련연방이 해체되면서 고려인들에게는 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카자흐스탄, 우즈벡스탄 등 소수민족국가들이 독립을 하면서 독립 국가들은 러시아어 대신 자국의 토착 언어를 공용국어로 사용하였다.
러시아어 밖에 모르는 고려인들에게는 말도 통하지 아니하고 독립 국가들의 경제여건 마저 어려워 취업기회 조차 막혀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동안 고려인들이 일궈놓은 농지와 농산물은 독립국가 정부에서 빼앗아 가다시피 저가로 매입하여 감으로서 고려인들은 살길이 막막하여 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앙시아 일부독립국가중에서도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 경우는 러시아어를 그대로사용하고 경제도 괞찮은 편이어서 이들 국가에 남아있는 고려인들은 재이주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한다.
살길을 다시 찾아 나선 고려인들은 기왕이면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비교적 인종 차별이 적으며 선친대가 정착했던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가족 중에 젊고 힘이 있는 사람이 먼저 연해주로 건너와 생활 근거기초를 닦고 자리가 잡히면 그다음으로 가족, 친지를 불러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그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나타났으나 언제 가는 가족이 모두모여 살기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삶의 터를 찾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처지가 마치 2차 대전기간 중 시련과 고초를 겪은 유태민족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다만 가스실에서 대량학살이 없었던 것을 제외하면~~
5. 알려지지 아니한 연해주의 한인 독립운동가들
연해주
“우수리스크”
시 중심부의
“아무르스까야”
에는 러시아 한인 이주 140년을 기념한 고려인 역사문화 박물기념관건립이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는 러시아에서 영웅칭호를 받은 고려인들의 사진과 안중근, 여운형을 비롯하여 빨치산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진이 함께 걸려 있었다.
여기 걸려있는 사진들을 통하여 그동안 우리에게 안중근 의사만이 독립운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 외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아니한 독립운동가도 상당히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북한에서 자주 인용되는 빨치산 이름은 지리산과 같은 어느 산 이름 인줄 알았으나 빨치산은 산 이름이 아닌 연해주의
“빨찌산 스크” 지역 이름임을 처음 알았다. 아마 도 이지역을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 들이 북한정권을 창출한 모태가 된 것 같았다.
그동안 냉전시대에 대한민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모든 것이 차단되면서 우리는 반쪽 역사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라독립 후 우리는 지금 글로벌화를 지향하며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한민족 전체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통합이 이루어 져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알려지지 아니한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가>> 작성자 울지 않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