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술님께서 문의하신 질문의 요지는
족보에 의하면 대호군공파의 파조(派祖)이신 대호군공은 벼슬이
“고려문과장원대제보문각대제학검교대호군(高麗文科壯元待制寶文閣大提學檢校大護軍)”인데
대제학은 종2품 문관(從二品文官)이고 검교대호군은 종3품 무관(從三品武官)인데 어찌하여 후손의 파(派) 이름을 정하면서 더 높은 벼슬 대제학을 버리고 더 낮은 벼슬 검교대호군을 선택하여 대호군공파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해의 편리를 위하여 위에서 언급된 벼슬들의 품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면
대제(待制)는 고려 시대 보문각에 속한 정5품 문관 벼슬입니다.
대제학(大提學)은 고려 시대 보문각 등에 속한 정2품 또는 종2품 문관 벼슬입니다.
대호군(大護軍)은 고려 시대 종3품 무관 벼슬입니다.
그리고 검교(檢校)는 실제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신(功臣)이나 노인(老人) 또는 귀족(貴族)을 예우하기 위해 내린 명예직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 됩니다.
1. “대호군공파”는 언제부터 “대호군공파”로 불리게 되었는가?
2. 대호군공께서 “대제학” 벼슬을 받으신 때가 언제인가?
대호군공께서 “검교대호군”이라는 것은 고려사에 적혀 있으므로 “검교대호군” 벼슬을 받으신 때를 추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1. 대호군공께서 실제 직무를 수행하신 벼슬은 종3품 보다 낮았을 가능성이 있다.
2. 대호군공께서 검교대호군이 되실 때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대개 명예직이 주어지는 것은 그 직책을 실제로 수행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기 때문이고 또 주어진 명예직 직위가 그분이 실제로 수행하신 직위보다 높아야만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호군공의 형제분(안렴사공, 판사공, 중랑장공)들의 나이를 고증해 보면 당시 대호군공의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호군공은 1295년(충열왕 21) 경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려사에 “검교대호군”으로 기록된 1357년(공민왕 6)에는 환갑이 지나신 나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대호군공파”는 언제부터 “대호군공파”로 불리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입니다.
물론 초성일권이 나온 1686년(숙종 12) 이전부터 이미 “대호군공파”로 불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검증 가능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만약 초성일권에 “대호군공파”라고 수록되어 있다면 “대호군공파”는 늦어도 1686년(숙종 12) 이전부터 이미 “대호군공파로 불리었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족보 초성일권 54페이지에서 “대호군공파” 자손록 재기(再起)가 시작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45B1364CE06C331B)
- 초성일권 54페이지 대호군공파 자손록 재기 첫머리 -
족보 초성일권 54페이지 “대호군공파” 자손록 재기 첫머리에는
“대호군용각파 중편(大護軍龍角派中)”
이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편(中篇)이란 재기(再起)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서 설명 드린 대로 “대호군공파”는 늦어도 1686년(숙종 12) 이전부터 이미 “대호군공파”로 불리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대호군공께서 “대제학” 벼슬을 받으신 때가 언제인가?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59F364CE06C3422)
- 초성일권 18페이지 대호군공 기록 -
초성일권 18페이지에서 대호군공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성일권은 대호군공이 “검교대호군”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앞서 언급된 “대제”나 “대제학”을 지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580364CE06C3416)
- 건륭계해보 18페이지 대호군공 기록 -
건륭계해보 18페이지에서 대호군공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륭계해보 역시 대호군공이 “검교대호군”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앞서 언급된 “대제”나 “대제학”을 지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건륭계해보는 1743년(영조 19)에 발행된 우리 전주최씨 두 번째 대동보로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45B7364CE06C3520)
- 가경을축보 대호군공 기록 -
가경을축보에서 대호군공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경을축보 역시 대호군공이 “검교대호군”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앞서 언급된 “대제”나 “대제학”을 지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가경을축보는 1805년(순조 5)에 발행된 우리 전주최씨 세 번째 대동보로 총 11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상 검토 결과를 종합하면 대호군공께서는 1805년 이전까지는 “대제학” 벼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답을
“대호군공파”가 처음 분류될 때는 대호군공이 “대제학” 벼슬을 받지 않았으므로 “검교대호군” 벼슬을 인용하여 “대호군공파”라고 부른 것이다.
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고려문과장원대제보문각대제학검교대호군(高麗文科壯元待制寶文閣大提學檢校大護軍)”
이라는 벼슬 이름은 과연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대호군공께서는 적어도 1805년 이전 까지는 “검교대호군” 벼슬을 가지고 계셨을 뿐 “대제”나 “대제학” 벼슬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족보에 적혀있는 “대제”나 “대제학” 벼슬은 허구인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 이후부터 소위 증직(贈職) 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일들이 수 없이 일어났고 심지어 나라에서 돈을 받고 증직을 내려주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인이 소장하고 있는 족보에 수록된 많은 벼슬 이름들 중에서 상당수가 이와 같이 증직이라는 이름으로 높여지고 부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되었던 나라에서 정식 절차를 거쳐서 내린 벼슬을 허구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정식 절차를 거쳐서 증직된 것이 아니고 그냥 가문(家門)에서 마음대로 벼슬을 가져다가 붙여 기록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 나라에서 정식 절차를 거쳐서 증직한 경우와 가문에서 마음대로 붙인 경우를 구분할 수 있는 근거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떤 한 가문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고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문에 걸친 지극히 보편적 현상이므로 그냥 족보에 적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