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은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도우리라"
순종 1874 ~ 1926 (53세) 재위 1907.7(34세) ~ 1910.10(37세) 3년 1개월
순명황후 민씨 (1872 ~ 1904 : 33세)
순정황후 윤씨 (1894 ~ 1966 : 73세)
신하나 백성들이 황제를 칭할 때 폐하(陛下)라고 한다. 하늘의 아들(천자)이 땅에 내려오셔서 높은 계단(陛) 위에 계신다.
워낙 높으신 분이라 감히 마주 대할 수 없고 단지 돌계단 아래서 알현할 수 있으니 '폐하'이다. 후삼국, 고려 중기까지 이
땅의 왕들은 폐하라는 칭호를 들었으나 원나라 속국으로 전락한 이후는 격하시켜 전하(殿下)로 불렀다. 전(殿)은 왕이 거
처하는 궁전이다. 전하(殿下), 합하(閤下), 각하(閣下)들은 집의 규모와 품계에 따른 호칭이다. 서열은 이렇다.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의 순이다.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은 대웅 즉 위대한 영웅인 부처
를 모신 집이란 의미다.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영화가 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며 후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한 '푸이' 의 생애를
그린 영화이다. 한국에서는 1988년에 개봉되었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주연 존 론(Jone Lone), 이탈리아, 중국, 영국 합작 영화다. 198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중국 당국이 자금성에서 영화촬영을 허락한 최초의 영화다. 서태후가 푸이를 황제로 지명하고 서거한 1911년부터, 생애를 마치는 1967년까지 일어났던 일을 중심으로, 평범한 시민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푸이의 인생역정을 그린 영화다.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를 바탕으로 각색했다. 푸이 역은 존 론이 맡았다. 전범수용소 소장 역을 맡은 배우 잉 루오쳉은 당시 중국 문화부 차관이었다. 색채 감각이 풍부한 베르톨루치의 영상미는 압권이다. 특히 즉위식의 장엄하고 화려한 장면은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
식민지 조선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자서전도, 영화도 없다. 왕릉은 천하 명당이라는 통설도 깨졌다. 홍유릉은 일제의
계략으로 흉지에 택지됐다. 홍유릉을 택지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유주현의 소설 <조선총독부>에는 이곳 택지를 고영희 가 잡았다고 하며,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집 <조선의 풍수>에는 제갈, 주운한, 김광석, 전기웅 등이 선정 했다고 나온다. 고영희는 친일파로 1910년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 중 한 사람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풍수장이들로 총독부 이왕직(李王職, 왕실 재산 관리부서)의 직원들이었다. 총독부 이왕직 풍수장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만행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고 한반도 산천 곳곳에 산재한 쇠말뚝 박을 지점을 앞장서서 총독부에 알려준 것이다. 북한산에는 쇠말둑이 수두룩하다.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가끔 발견된다. 물론 발견하는 대로 뽑아버린다. 그런 자들이 홍유릉을 명당에 택지 할 리 없다.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다. 조선의 운명과 같이 절손(絶孫)됐다.
순종은 탄생 다음 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1882년 민씨(뒷날 순명황후)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됐다. 1904년 새로이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정
객의 매국 행위로 왕위를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황
제(皇弟)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고,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순종을 허위(虛位)의 황제로 만
들어 버린 이토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소네를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온 후 일본은 대한제국
의 숨통을 끊고자 더욱 거센 공작을 펼쳤다. 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핼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
다. 그리고 한국과 만주 문제를 러시아와 사전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했다.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
해 포살되자 이를 기회로 한반도 무력 강점을 실행에 옮겼다. 일제는 이러한 침략의도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의 원(願)에 의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 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순종 주변에는 친일매국 대신들과 친일내통 분자들만이 들끊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됐다. 창덕궁 이왕으로 예우하고 왕위의 허호(虛號)는 세습되도록 조처됐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기거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에 승하했다. 6월 국장을 치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裕陵)에 안장됐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해 6 ·10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그가 남긴
한 맺힌 유언이 조선천지를 흔들었다.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수 없지만 그의 혼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일명(一命)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해 조칙하노니 지난 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
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짐이 한 바가 아니도다.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해 나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짐이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작금에 17년이
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됐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도다. 지금 병이 침중
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해 짐이 최애(最愛), 최경(最敬)
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은 내가 한 것이 아님을 효연이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무효가 되
고 말 것이라. 만백성이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도우리라."
유릉(裕陵)...
유릉은 조선왕조 마자막 왕인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3인 합장릉이다. 조선
의 마지막 왕릉이며 유일한 동봉3실의 합장릉이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대조전(大造殿)에서
53세로 승하해 같은 해 6월 11일 이곳에 초장봉릉됐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1904년 9월 28일 경운
궁 강태실(康泰室)에서 33세로 승하해 같은 해 11월 29일 양주군 용마산 내동 (현재 어린이대공
원 경내)에 초장돼 유강원(裕康園)이라 했다. 1907년 황후로 추봉되고 능호도 유릉으로 했으며,
1962년 6월 5일 이곳에 천릉됏다. 순종효황후 윤씨는 1966년 1월 13일 73세로 죽어 이곳에 묻혔
다. 능의 상설로 홍살문과 석물 침전은 일직선 상이나 능침은 옆으로 비꼈으며, 국권을 상실한 일
제 때 조성됭 능이라 석물들이 사실적이긴 하나 표정은 묘하다. 문인석은 무표정에 인색한 느낌을
준다. 무인석의 눈은 겁에 잔뜩 질려 있다.
순정효황후
첫댓글 종묘내의 불신위신주인 제1대 태조부터 시작하여 제27대 순종황제까지 공식적인 519년의 조선 왕조를 불교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을 마무리 한다. 몇군데는 가보지 못한 왕릉도 있지만 2년이란 시간의 흐름을 네이버 블로그에서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