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학교
나를 놀리는 아이는 없자 학교 생활이 재미있고, 아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게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는 무궁무진한 꿈 밭이 되었다. 공부, 무용, 달리기와 노래 등 나는 무엇이든지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잘하고 싶다고 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다닌다고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학교에 다녀도 엄마는 한 번 시켜서 하기 시작한 일은 계속 시켰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치매가 왔다. 삼년 가까이 할머니께서 싸놓은 똥오줌을 치우고 씻는 일을 엄마는 나와 같이 했다.
할머니는 나를 조금도 예뻐하지 않았다. 첫 만남의 아픔이 뼈에 사무쳤던 터라 나도 할머니가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할머니를 미워하지는 않았는데 할머니는 나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엄마는 할머니는 엄마뿐 아니라 내게도 욕을 퍼붓곤 했다는데 나는 전혀 기억에 없다. 첫날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기억은 다 묻힌 것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가 거처하는 아랫방에 밥상을 갖다 드리고 난 후 우리 세 식구는 안방에서 따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숭늉 그릇을 들고 가는 건 내 일이었다. 할머니는 입고 있는 옷, 빈 밥그릇과 상이며 벽에까지 똥칠을 해놓기 일쑤였다. 비위가 약한 아버지는 구역질이 심해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할머니의 뒤처리는 언제나 나와 엄마의 몫이었다. 펌프가 집에 있었지만 더럽다고 5백여 미터 떨어진 개울까지 머리에 이고 씻으러 다녔다. 할머니가 일을 치를 때마다 엄마는 큰소리로 악을 써 가며 나를 불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엄마에게 매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런 집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학교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4학년이 되면서 매주 한 번 특활시간이 있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할 수 있었다.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악기부(합주부)였다. 학교 운동회나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악대부의 연주 행렬을 지휘를 하는 언니는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하얀 줄무늬가 있는 유니폼을 입고, 까만 구두에 새하얀 타이즈를 입고, 줄맞춰 행진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악기부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엄마는 돈이 많이 들어서 악기부는 안된다고 했다. 악기부가 안된다면 풍금이라고 치고 싶었다. 그때는 풍금이 한 학년에 한 대라 음악 시간이면 풍금을 옮기는 것도 재미였다. 그 풍금을 치는 아이는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음악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선생님은 새 노래를 가르칠 때마다 나를 불러 처음으로 불러보게 하곤 했다. 노래도 노래지만 나는 풍금 소리가 좋았다. 선생님께서 곧잘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풍금을 치게 했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때는 피아노 학원이 참 귀했다. 다니던 학교의 전교생이 2천명이 넘었지만 그 중에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아이는 열 몇 명 정도였다. 그러니 육성회비도 제 때에 못내는 나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악기 하나 다루지 못했던 만큼 내 아들딸에게는 그만 두고 싶어 할 때까지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뭐든 아들딸이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다 배우게 한 것도 내가 그렇게 못한 아쉬움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선택한 것은 독서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5학년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책은 다 보았다. 그 때에 만난 ‘집 없는 아이’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서 잔잔한 여운으로 남았다. 독서감상문을 떠 군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이 엄마를 만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도 친모를 만나는 상상을 하며 막연한 그리움에 잠기곤 했다. 엄마가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지 않으면 야단을 쳤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과 노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 도서관이 따로 있다고 해도 책이 많지 않던 때라 틈만 나면 엄마에게 책을 사 달라고 졸랐다. 기분 좋을 때 부탁을 해도 엄마는 한 권의 책도 사 준 적이 없다. 엄마는 글을 모른다. 그래서 책에 대한 나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을 했고,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밥도 해야 했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채벌도 여전했기에 아버지처럼 나도 엄마가 기분 상할까봐 늘 긴장을 했다. 그러다 힘들면 나를 낳아준 친엄마도 내게 이렇게 했을까 하며 혼자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더 없이 명랑한 아이였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우등생이었고 노래도 잘했다. 4학년이 되자마자 동시 짓기 숙제가 있었다. 그 숙제가 선생님의 눈에 띄어 특활시간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문예부로 불려가게 되었다. 당시 해마다 봄, 가을이면 문경군에 개인은 물론이고 학교 별 우승기가 걸린 큰 문예백일장이 있어서 학교에서는 문예부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내가 불려 가게 된 문예부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 엄마는 돈이 들지 않으니 반대는 하지 않았다. 막상 문예부에 들어가고나서는 문제가 생겼다. 산문부가 아닌 운문부다 보니 원고지가 문제였다. 글을 모르는 엄마는 내가 원고지를 반도 쓰지 않고 버린다고 날마다 야단을 쳤다. 동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였기에 글을 쓰는 게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일 때가 많았다. 원고지 문제도 문제지만 봄에 한 달 가을에 한 달 정도 백일장 준비로 학교에서 방과 후에 글짓기 연습을 했다. 엄마는 일하기 싫어서 내가 아이들과 놀다가 일부러 늦게 오는 것이라며 혼냈다. 그러다. 화나는 다른 일과 겹치면 어김없이 매를 들었다. 한 번은 운동회를 하루 앞두고 맞아서 체육복 밖으로 들어난 피멍이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한 적도 있다. 소름 끼치도록 매 맞는 게 싫어서 나는 늘 긴장을 하며 항상 내 행동거지에 조심을 했다. 엄마의 채벌은 내가 집을 떠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를 떠나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자유롭고 행복했다. 울면서 집을 나서도 학교에만 가면 힘이 났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라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것도 즐거웠고 심심하면 상을 받는다는 소릴 들을만큼 상장을 받는 것도 좋았다. 잊을 수 없는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군내 백일장에서 특선을 받았는데 당시 심사를 하신 박목월 시인이 시상식에 오셔서 상장 수여를 하시고, 강의도 하셨다는 것이다. 강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유명한 시인을 바로 앞에서 봤다는 것에 감동했다. 이후 군내 문예 백일장 단골 수상자라며 선생님들이 이름 대신 문학소녀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학교는 나에게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게 했을 뿐 아니라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었다.
첫댓글 제게도 학교는 희망 꽃밭이었지요. 저는 체육시간 외에는 모든 과목이 즐겁고 재미있었답니다. 강선생님,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팝꽃이 만개했네요
초록과 하얀꽃 어우러진 풍경처럼
기쁨 초록초록 하얀 이 드러내고 웃는 날 되세요.^^
상을 받는 문학소녀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마다가 빛나는 기쁨의 연속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