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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17~42절, 12장35~59절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 마르다와 마리아, 선한 사마리아인
17절~24절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칠십 인의 제자들은 사명을 완수한 뒤 하나님 나라가 전진하고 사람들이 귀신의 억압에 속박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합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절)
"사탄이....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는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 있었노라"(헬, '테오레오', '보다'의 미완료 시제)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인 세계에서 환상적인 무언가를 보신 것을 말씀하고 계신지 아니면 이것이 단지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대한 생생한 선언에 불과하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는 어느 경우든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한 사탄의 권위와 능력이 결정적으로 붕괴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번개같이', 이는 몰락의 급작스러움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18절).
"내가 너희에게....권능을 주었으니", 귀신을 제어하는 예수님의 큰 능력은 제자들에게 맡겨졌습니다. '뱀과 전갈'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 중에 겪게될 육체적 위험이자 귀신의 대적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19절).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하신 일을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복은 그들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이름이(하나님께 의해) 하늘에 기록된 것" (참조, 빌 4:3; 계 3:5, 20:15)을 기뻐해야 합니다(20절).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아버지여", '천지의 주재',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주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와 사탄의 몰락을 '어린아이들', 즉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에서 기인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배척한 자들을 언어적으로 언급하십니다(21절).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22절).
선한 사마리아인
25절~37절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 교사는 오직 "자기를 옳게" 보이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25절).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예수님에게 구약은 믿음과 실천의 결정적이고 정확한 기준입니다(26절).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고 또한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마음'(감정, 의지, 가장 깊은 확신), '목숨', '뜻'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27절).
"네 대답이 옳도다", 율법 교사의 대답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아까?'라는 질문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이를"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 교사에게 그가 이 명령 들을 제대로 준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곧 보여 주실 것입니다(28절).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는 율법 교사의 위선을 보여줍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는 부적절한 질문입니다. 율법 교사는 어떤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이들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타인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고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이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한 질문일 것입니다(29절).
'제사장',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책임을 맡은 아론의 후손입니다. '피하여 지나가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31절). '레위인', 레위 지파의 일원이지만 아론의 후손은 아니며 따라서 제사장이 아닌 자를 말합니다. 이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주는 사람일것입니다(32절).
'사마리아 사람', 문화적으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돕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심지어 보통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을 이들에게까지 돌봄과 궁휼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는 부가적인 요점을 강조하십니다(참조,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눅 6:27, 35). (33절)
사마리아 사람은 다쳐서 고통을 겪는 강도 만난 자를 돌봅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이 사람은 걷지도 못할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돌보았고 주막 주인에게 계속해서 이 사람을 돌보도록 '데나리온 둘' (이틀째 임금과 맞먹는 액수)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용이 더 들더라도 필요한 만큼 돌보는 이 사마리아 사람의 궁휼 어린 돌봄을 강조하십니다(34~35절).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율법 교사의 부적절한 질문을 바로잡습니다. 이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냐이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겠나이까?"라는 질문입니다(36절).
38절~42절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와 마리아 마을', 베다니. '주의 발치에 앉아', 제자의 적절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화에 속한 어떤 이들과는 달리 여인들에게 성경을 공부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이 말씀은 가장 큰 소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인생의 '분깃'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약의 성구들을 상기시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택했고 이것은 (지금 부얶에서 마르다를 돕는 일에는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38~42절).
12장35절~48절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이는 긴 겉옷을 허리띠 아래 밀어 넣은 뛸 준비가 된 사람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35절).
'깨어 있는',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를 알지 못하므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히고', 이는 말세의 메시아적 잔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식 '3경'체제(오후 6시~10시, 오후 10시~오전 2시, 오전 2~6시)를 사용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로마식 '4경'체제(오후 6시~9시, 오후 9~12시, 오전 12~3시, 오전 3시~6시)를 사용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경우에든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핵심은 주인이 어느 때 든 심지어 보통은 사람이 대비하지 않는 때에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37~38절).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까', 예수님은 사실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으며 이는 많은 것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이 비유가 적용됨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진실하고 공평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말씀)을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이 진실한 청지기는 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신실한 신자들이 받을 보상에 대한 비유적 묘사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한 청지기는 종들을 때리며 술에 취하는 불성실한 종과 대조됩니다. 그러나 불성실한 종에게는 놀랍게도 주인이 알지 못하는 시각에 되돌아와 신속하고 엄중한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주인은 그를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자 에게 받는 벌에 처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불신자를 기다리고 있는 형벌에 대한 비유적 언급입니다. 후자의 묘사는 영원한 심판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가리킵니다. '많이 요구할 것이요', 하나님이 많은 능력과 책임을 맡긴 사람들(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은사자들)은 마지막 날에 더 높은 기준을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41~48절).
49절~55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지 말지를 결정할 때 인류의 '위대한 분리하는 자'가 되시기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불을 땅에 던지러', 이는 아마도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시키는 재련하는 불을 가리킬 것입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불"은 세상에 영향을 주는 반면 이 "세례"는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며 그리스도에게 홍수처럼 쏟아질 것입니다(참조, 시 88:7; 욘 2:3; 벧전 3:21).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비록 그것이 고난과 죽음을 의미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상의 화평을 주셨지만(요 14:27) 화평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을 가져 오셨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아버지가 아들'과 분쟁하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고 다른 사람을 예수님을 배척하기도 하기도 하는 상황도 수반됩니다(49~53절).
지중해 위에서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현상은 그 구름이 팔레스타인의 한랭한 산지를 타고 오르면서 습한 공기의 응결을 가져왔습니다. '남풍이 부는' 현상은 사막에서 시로코(뜨겁고 건조한 바람)가 불어와 뜨거운 열기를 몰고 오는 것을 뜻했습니다. 무리는 이런 표징들은 분간할 수 있었지만 위선의 영적 공허함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표징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54~56절)
이 비유는 '재판장' 앞에서 분쟁이 벌어지기 전에 '고발하는 자'와 화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실제적 충고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맥 안에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즉 너무 늦기 전에 우주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필요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57~59절).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내 이름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생명책은 구약에 뿌리를 둔 표현이며(예컨대 출 32:33, 시 69:28) 하나님께 속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을 가리킵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이긴 자의 상, 즉 예수님과의 교제와 승리의 흰 옷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 책에 확실히 있으며 그들은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시인했으므로 예수님도 성부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시인하실 것입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사람은 그 행위의 기록으로 인해 정죄를 받을 것이며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천성)에 들어갑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보면 거짓 예언자들도 많고 거짓 스승들도 넘쳐납니다. 어디서 이상한 영 내지는 교육을 받아서 기독교 무당(예수 무당)짓을 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구원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것은 잠시입니다. 그러나 죽음 뒤에 오는 몸의 부활에서 영원한 지옥과 영원한 생명, 지옥과 천국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타락한 선지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스승들과 미혹의 영들이 넘쳐납니다. 말세 시대에 살면서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누구에 의해서 받는게 아니고 오직 내 믿음으로 받는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엾습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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