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계
정장을 입은 중년사내가 요양원에 급하게 들어선다.
누군가를 찾는지 두리번 거리다가 이내 벚나무 아래 휠체어에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중년사내는 뒤에서 말없이 휠체어를 민다.
할머니는 뒤를 힐끔 돌아 본다. 아들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는 한가득 눈물이 맺혔다.
아들은 요양원으로 부터 전화를 받는다. 며칠전부터 할머니가 말도 통 안하고 식사도 잘안하시고 기운이 없다고 연락을 한것이다.
어머니는 낯익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
유심히 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어릴 때 어머니의 장롱서랍에 있던 그 시계였다.
“어머니 목마르지 않아요? 베지밀하나 드실래요?”
아들은 자신이 사온 베지밀 한개를 컵에 따루어 어머니께 건네준다. 언어가 어눌해진 어머니는 이제 긴대화는 불가능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부탁한다.
"나 죽으면 지금 차고있는 시계를 함께 묻어 줘.
"화장을 하게되면 역시 함께..."
아들은 말했다.
“선산이 있는데 먼 화장이라니요 엄마....”
아들은 시계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남모르는 어머니만의 곡절 아니면 사연이 있을지도...
아들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강하게 키웠다. 아버지 없는 아들이라는 놀림속에서 이겨낼려면 아들이 강해지는 수 밖에 없다는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한번은 초등학생때 친구와 다투면서 쌍코피를 터준적이 있었다. 그날 학교에 찾아온 친구의 어머니로 부터 아버지가 없는 호래자식이란 소리를 듣고는 어머니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어머니. 저는 왜 아버지가 안계세요?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말씀 좀 해주세요. 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대답을 해주시지 않았다.대답대신 회초리를 드셨다.
그날밤 어머니가 소리없이 훌쩍이는것을 보고 아들은 다시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들은 오로지 공부.또 공부에만 열중했다. 성적은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두번 다시 어머니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리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공부한 결과 명문대 법대에 들어갈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 채소 장사를 하였고 아들은 2번의 낙방끝에
그토록 바라던 법조인이 되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아들은 가정을 이루었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던 어머니는 백발의 모습으로 변했고 기력이 약해져 쓰러졌다.
요양원에 모신지 두어달이 지났고 몇 차례의 응급실행을 거치며 어머니는 몇일뒤 임종을 하였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 하던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빛바랜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아버지의 이야기와 시계에 대한 내용들이 꼼꼼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받았다.
다음주 화요일 양평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간다고 하였다.
파월군인은 주중면회도 가능하며 주말엔 외출도 할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면회하고 싶었지만 경리업무를 혼자하기 때문에 그녀는 주중엔 직장을 비울 수 없었다.
토요일 새벽 일찍 그녀는 대구에서 열차를 탔다. 서울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가서 다시 열차를 탔다.
어느 기차역에 열차가 서고 건너편엔 서울 청량리행 열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당시 중앙선은 단선이어서 교차하여 통행 하였다.
청량리행 열차의 객차 옆면엔 '파월 백마부대'란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고 군인들이 가득타고 있었다.
병력수가 많아서 날짜별로 출발일이 다른가 보다 생각 하였다.
양평역에 내린 그녀는 택시를 타고 백마부대로 향했다. 남성의 영역이어서 인지 군부대는 삭막하고 웬지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위병소 군인이 그녀에게 거수 경례를 하였다.
면회신청을 하고 그녀는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잠시후 중사계급을 단 하사관이 면회실로 들어왔다.
“아..이걸 어쩌지요. 김하사는 아까 오후에 여의도로 출발 하였습니다.”
부산 출항이 앞당겨져서 김하사는 일진으로 출발하게 되어 여의도에서 수송차로 부산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사를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교차했던 군인들이 가득탄 열차가 떠올랐고 그열차에 그가 탄 것이라면 서로 못 보고 지나쳐 간 것이다.
대구에서 새벽 출발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를 못만나고 돌아갈 생각하니 무척 기다렸을 그의 모습이 상상되어 안타까웠다.
마지막 휴가 나왔을때 할 말이 있었는데 뭔가 갈구하던 표정을 잊지 못하던 모습이 생각나고,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그때....그냥 보내지 말걸....
월남 다녀와서 돈벌어 오면 아담한 집도 구하고 결혼도 하자고 하였다.
두사람은 대구 성서 고아원 출신이었다.
후에 보육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열여덟살이 되고 퇴소이후 그아이는 유독 외로움을 탔다.
키만 멀대처럼 길쭉할 뿐 말이 없는 편이었다.
일요일만 되면 둘이 많이도 돌아다녔다.
앞산 너머 청도에 가서 들판길을 걷던 옛날 생각이 난다.
달성공원으로 앞산을 오르기도하고 수성천변을 걸었으며 동촌의 어느 사찰의 절벽 아래론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앉아서 지난 보육원의 추억들을 되새기기도 하며.....
월남에서 그가 고급시계를 선물로 보낸후 서신이 끊겼다. 그리고 얼마후 보육원 원장님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잠시 다녀가라고 한다.
그가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보육원을 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해가는 그녀는 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지만 그녀는 서러움에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길가에 쪼그려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었다.
그녀의 시계는 여성용 롤렉스데이터 저스트였다. 그녀는 그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고 간혹 꺼내어 손수건으로 먼지를 닦기만 하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닦고 닦았는지 시계는 늘 반들반들 하였다.
어머니의 일기장을 덮으며 아들은 만감이 교차하였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시계를 고이 포장해서 함께 선산에 묻었다.
"잘가,엄마" "그곳에서 아버지랑 행복하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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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어머니의 시계
멋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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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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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슴아푼 인생사였네요, 무슨말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부듸 하늘나라에서 부군을 만나 이생에서 못다한 행복을 누리실것입니다.
아.저의 첫 픽션 글입니다.
넌픽션인줄 알았습니다.^^
대구분 이신가봐요. 낯익은 지명들이 줄줄 나와서 정감있게 읽어내려 갔습니다.
ㅎㅎ부산 사람입니다. 대구는 훤희 잘알죠.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