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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여행 (2)
블랙홀! 물리학 용어 중에 이 단어만큼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일상생활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또 있을까? 블랙홀이란 단어는 공상과학 소설을 넘어 시사와 문학에서도 무언가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여 검을 수밖에 없다는 블랙홀. 무엇이든 끌어당겨 잡아먹는 우주의 진공청소기라 여겨지는 블랙홀. 일반상대성이론이란 ‘넘사벽’을 넘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블랙홀. 과연 우리는 블랙홀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지난 글에선 블랙홀의 역사와 개념을 살짝 알아 봤으니, 이번 글에선 본격적으로 블랙홀로 여행을 떠나기 위한 시동을 걸어볼까 한다. 여기서 시동이란 다름 아닌 약간의 수학이다. 수학을 싫어하는 독자들에게는 힘든 시간이 되겠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교과과정 이상의 수학을 요구하지는 않으므로 지레 겁먹고 미리 여행을 포기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준비해야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여행에 큰 도움을 준다. 또 여행지가 안전한 곳인지 아니면 위험한 지역인지도 알아봐야 할 중요한 정보 중에 하나다. 목숨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어떤 것을 쓰는지, 시차는 얼마나 되는지, 미터를 쓰는지 마일을 쓰는지, 기온은 어떤지 등등, 알고 보면 여행을 잘 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지식은 의외로 참 많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덜컥 아무 비행기에 올라타 계획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블랙홀 여행도 마찬가지다. 블랙홀로 뛰어 들기 전에 알아야 할 사전지식이 꽤나 된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제일 중요한 것은 아마도 블랙홀 지도를 펼쳐보는 일이 아닐까 한다.
군인들이 필수적으로 교육받는 독도법이란 지도를 읽는 법을 말한다. 지도에는 동서남북 방향이 표시되어 있고, 또 거리를 알아낼 수 있는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또 지형의 높낮이를 표시한 등고선도 표시되어 있다. 등고선이란 같은 높이를 가진 지역을 선으로 연결해 놓은 것을 말한다. 등고선이 조밀한 지역은 경사가 급한 지역이고, 등고선과 등고선 사이의 간격이 큰 곳은 경사가 완만한 지역을 뜻한다. 이와 같은 지형도에서 두 지점 간의 실제 거리를 측정하려면 자로 두 점간의 거리를 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사가 급한 곳은 지도상으로는 가깝게 보이더라도 높이 차를 고려하면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약간의 계산을 도입하기 위해 먼저 가장 쉬운 경우로 평평한 지형도를 생각해보자. 한 축을 x축이라하고 다른 축을 y축이라고 하면 평평한 지형도 위에 놓여 있는 두 점, P1과 P2 간의 거리 ds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로부터 으로 간단히 구할 수 있다.
그럼 울퉁불퉁한 현실적인 지형도에서 피타고라스정리가 어떻게 될 지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는 평평한 지형도처럼 간단히 로 두 점간의 거리를 구할 수 없다. 등고선의 조밀도가 나타내는 만큼 길어진 경로를 계산에 넣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부러진 경로를 고려하여 거리를 구하는 식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할 것이다.
왼쪽 그림과 같이 평탄한 공간에서의 두 점간의 거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쉽게 구할 수 있다. 반면 오른쪽 그림과 같이 높낮이를 가지고 있는 표면에서의 두 점간의 거리는 높이에 따른 효과를 고려해서 계산하여야 한다.
여기서 f(x,y)와 g(x,y)는 x축 방향과 y축 방향으로 각기 고려해야할 거리의 보정치가 된다. 수학에서는 이런 함수를 계량(metric)이라 부른다. 그런데 ‘계량’이란 말은 언뜻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 용어다. 사람들의 일상 속 대화에서 계량이란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안 쓰이는 단어는 아니다. ‘수도계량기’처럼 뭔가 양을 측정하는 장치를 계량기라고 부른다. 이 계량기를 옛날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분들은 ‘메다기’라고 불렀는데, 이 메다기의 ‘메다’는 사실 영어의 meter다.
한편 meter는 측량기란 뜻도 있지만 그보다 길이의 단위이기도 하다. 여하튼 계량, 영어로 메트릭(metric)이란 말은 뭔가 깔끔하게 와 닿는 말은 아닌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는 오히려 ‘지형(地形)’이란 말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계량’이란 단어를 이 글에서 만큼은 ‘지형’ 또는 ‘지형도’로 바꿔 부르고자 한다. (수학이나 물리학 전공자라면 계량으로 바꾸어 읽으시길 바란다.)
그러면 3차원 공간에서의 두 점 간의 거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3차원 공간도 평탄한 공간이라면 간단히 2차원 피타고라스 정리를 확장하여 곧바로 구할 수 있다. 즉, 로 차원만 하나를 더해주면 된다. 그러면 2차원 지형도에서도 보았듯이 3차원 지형도에서도 등고선 같은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빛의 굴절을 예를 들어 보자. 빛은 공기 중에서는 1초당 30만km를 날아간다. 그런데 빛이 굴절률 1.5인 유리 속으로 들어가면 1초당 20만km밖에는 날아가지 못한다. 유리 속에서는 빛의 파장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유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유리가 마치 지형도의 등고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여길 수 있다. 빛의 입장에서는 같은 진동수로 한걸음씩 걸어 나가는 것이지만, 보폭(파장)이 줄어들어 빛의 속도가 줄어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보폭을 등고선의 간격으로 보면 되겠다.
매질 속에서의 빛의 굴절빛은 매질 속에서 파장이 짧아지면서 느리게 진행한다. A와 B점을 잇는 최단거리는 직선인 반면, 빛의 실제 경로는 A-C-D-B로 더 먼 길을 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소시간이 걸리는 경로로 진행한다.
이렇게 3차원 공간에서 찌그러진 지형을 고려하면 두 점간의 거리를 구하는 공식은 2차원 지형도에서 거리를 구하는 공식을 그대로 확장하여 라 쓰면 되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f(x,y,z), g(x,y,z), h(x,y,z)가 지형을 나타내는 함수가 된다. 이들 함수를 아는 것이 곧 3차원 지형도를 아는 것이고, 3차원 지형도를 아는 것이 곧 공간의 성격을 아는 것이 된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빛이 굴절해 가는 경로를 보면 길이만 따지면 빛은 더 긴 경로를 택해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빛은 가급적 빨리 달릴 수 있는 경로를 최대한 택하고, 늦게 달리는 경로는 최소한으로 거쳐 결국 최단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 신기하게도 빛은 목적지에 가보지 않고도 공간의 지형도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4차원 시공간 지형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블랙홀을 여행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시공간의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시공간이란 3차원 공간에 시간 차원 하나를 더한 공간을 말한다. 문제는 3차원 공간도 2차원 평면에 그리기 힘든 판에 4차원 시공간을 지면 위에 표현한다는 것이 매우 무리한 일이란 것이다. 그래도 굳이 그려야 한다면 공간 좌표 3개 중에 두 개를 희생시켜 1개 차원만 남겨놓고, x축을 공간에 대응시키고 y축을 시간에 대응시켜 그리는 방법이 있다.1)
(a) 시공간 상에 움직이는 파리와 파리채를 도식화한 그림시공간 상의 궤적을 세계선이라 부른다. (b) 동일한 장소에서 벌어진 두 사건과 동일한 시간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벌어진 두 사건
먼저 시계 하나와 자 한 개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건, 예를 들어 잘 날아가던 파리가 파리채와 충돌하여 피가 ‘팡’ 터지며 죽는 사건이 났을 때, 자를 가지고 그 사건이 일어난 곳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또 시계를 가지고 사건이 벌어진 시각을 기록했다고 하자. 이는 4차원 시공간에서 발생한 한 사건으로 시공간 지형도에 그림과 같이 한 점으로 표시될 것이다. 이때 파리와 파리채가 걸어온 시공간의 궤적은 지도상에서 어떤 선이 될 텐데, 이를 ‘세계선’이라 부른다.
이제 4차원 시공간에서 2개의 사건을 관측했다고 생각해보자. 한 사건을 E1이라 부르고 다른 사건을 E2라고 부르자. 그럼 4차원 시공간에서 이 두 사건간의 거리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만약 두 사건이 동일한 장소에서 움직임이 없이 벌어진 사건이라면, 이 4차원 거리는 두 사건이 벌어진 시간차를 말할 것이다. 반대로 서로 동떨어진 장소에서 동시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두 사건이 벌어진 공간상의 거리를 뜻하게 된다.
그런데 수학적으로는 이 두 사건 간의 4차원 시공간 상의 거리를 으로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초(s) 단위이고 공간은 미터(m) 단위여서 그대로 제곱해서 더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은 공간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척도도 아니다. 그럼 4차원 시공간에서의 거리는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
우선 4차원 시공간 좌표를 다시 그려 볼 필요가 있다. 아까 그림에서 y축은 그냥 시간을 나타냈지만, 이번에는 시간좌표를 거리로 환산하여 x축과 y축이 모두 길이의 단위를 갖도록 그려보자. 상대성이론에서 광속은 상수이고 궁극의 속도이므로 시간 단위에 빛의 속도를 곱해, 시간 축을 길이의 단위로 바꾸어 그릴 수 있다. 이렇게 좌표계를 설정하면 1초는 30만km라는 길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좌표계에서 빛은 정확히 45도를 가로 지르는 직선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그림 참조).
한편 시간 축에 놓인 값을 허수로 해석하면 여러 가지로 이로운 점이 많은데, 이렇게 시간좌표를 허수축으로 놓고 그린 복소수 좌표 공간을 민코프스키 공간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렇게 설정된 민코프스키 4차원 시공간에서 벌어진 두 사건, E1과 E2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보면, 허수 i의 제곱이 –1이 되어 가 된다.2)
이렇게 정의된 4차원 시공간에서의 거리가 무슨 뜻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상상을 해보자. 우선 A란 사람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사건을 E1이라하고, B란 사람이 총알에 맞는 사건을 E2라고 생각하자. 두 사건이 벌어진 시간 간격을 dt라 하고, 총알의 속도를 v라고 하면 A와 B 사이의 거리는 v에 dt를 곱한 것이 된다. 즉 이 되고, 총알의 속도는 광속보다 매우 느리므로 4차원 시공간에서의 거리의 제곱은 음수가 된다. ()이런 경우는 시간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인과율이 착착 맞아 들어가는 세상이다. 즉 A가 총을 “팡” 쏘니까, 잠시 뒤에 B가 “윽”하고 쓰러지는 것이다.
(a) 시간축에 광속을 곱해 길이의 단위를 갖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빛은 45도를 가르지는 선이 된다. (b) 빛보다 느린 속도로 진행하는 일반적인 사건은 빛의 세계선보다 기울기가 크다. 반면 빛보다 더 빨리 진행하는 사건이 있다면 빛의 세계선보다 기울기가 더 작을 수 있다. 우리가 관측하는 모든 자연현상의 경우에는 두 사건 간의 4차원 거리의 제곱이 음수가 된다.
4차원 거리의 제곱이 양수()가 되는 경우도 있을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수식으로 보면 빛보다 빨리 총알이 날아가면 될 것 같다. 이 경우는 마치 A가 총을 쏜 것을 보기도 전에 B가 “억”하고 먼저 쓰러지는 경우와 같다. 즉 원인을 보지도 못했는데 결과가 발생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다. 이렇게 인과율이 깨진 세상은 이해하기가 힘든 세상이 된다. 한편 빛의 경우는 항상 ds=0이 된다. 즉 빛은 4차원 시공간 상에선 멈춰있는 존재가 된다.
시공간 지형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두 가지 문제를 풀어보자.3) 아래 그림 (a)는 시공간 좌표에 그린 직각삼각형이다. 선분 AB, BC, CA 중에 거리가 가장 긴 것은 어떤 것일까? 선분 AB와 선분 BC의 길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각각 5과 4이다. 하지만 선분 CA의 길이를 민코프스키 공간에서의 거리 공식 에 넣고 계산을 해보면 으로 나온다. 눈에 보기에는 가장 길게 보여도 민코프스키 공간에선 이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가장 짧은 경로가 된다.
다음으로 오른쪽 그림 (b)를 보자. 이 그림에서는 3개의 우주선이 그리는 세계선이 들어 있다. 첫 번째 빨간색 선분 AB는 우주선이 움직이지 않고 지구의 발사대 한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경우의 세계선을 나타낸다. 두 번째 초록색 경로 ACB는 우주선이 지구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다시 원 위치로 돌아오는 경로를 나타낸다. 끝으로 파란색 경로 ADB는 우주선이 광속도로 날아갔다 다시 광속도로 지구로 돌아오는 경로를 나타낸다. 이 세 가지 경로의 길이를 각각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 , .따라서 가만히 있는 경우가 가장 긴 경로이고, 빠르게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돌아오는 경로가 민코프스키 시공간에서는 더 짧은 경로가 된다. 게다가 빛의 속도로 움직인 경우는 아예 4차원 시공간에서 움직인 거리가 0으로 나온다. 이렇게 신기한 민코프스키 공간에서의 거리계산법을 알고 나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나오는 쌍둥이 패러독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알고 보면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한 쌍둥이 형제가 더 짧은 시공간의 세계선을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 3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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