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대화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들이 늘 걸림돌로 여기는 것이 예수의 신성이다. 같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 어려움 없이 대화를 해야 당연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를 신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의 견고한 자세가 유일신 외에는 어떠한 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들을 당혹하게 만들어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예수의 신성만이 문제일까? 나는 이번 강의에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신성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으며, 이슬람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신앙고백 뒤에 숨겨진 신적 무함마드에 대한 찬미가 있음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1. 예수
굳이 현존 가톨릭 신학계의 거장 한스 큉 (Hans Küng)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논리에 따르자면 인류의 원조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를 대속해 줄 그리스도 (히브리어는 메시아) 없이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이 그리스도가 바로 다름아닌 기원전 4년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깊은 하느님 체험을 한 후 경천애인 (敬天愛人)의 가르침을 펴다 붙잡혀, 도망친 노예와 정치적 폭도들에게만 집행되었던, 실로 입에 담기조차 끔직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역사적 예수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의 부활을 강렬하게 체험하였고 더 나아가 예수가 이 세상 이전에 먼저 존재하였고, 하느님이라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예수 선재 사상은 바울로의 필립비 서간에, 신성 사상은 요한계 문헌에 나오지만 이른바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후 4,5세기 공의회에서 예수를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갖춘 분이라고 신학적 해석을 내린 이후 예수의 신성은 교회의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는 절대 불변의 해석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에 들어서 교회의 전통적 그리스도론을 새롭게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극히 그리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예수 신성론 그 자체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고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예수 신성론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기 보다 어디까지나 예수에 대한 기억이 지배하는 공동체의 신앙체험을 교회가 제한적이고 상징적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서공석 신부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 431년 에페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면면히 이어 오는 예수 신성 사상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것 (실체적 동일함),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는 것은 우연적 질서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필연적 질서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고 예수 안에 손상됨이 없는 하느님의 일하심과 또한 하느님 앞에 응답하는 인간의 일을 본다는 사실 (온전한 하느님, 온전한 인간)을 긍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 힉 (John Hick)은 예수가 하느님의 육화, 하느님의 아들 혹은 성자라는 말은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 시적, 상징적, 신화적 언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는 곧 예수가 우리의 삶과 하느님 사이의 접촉점이 되는 방편적 말이라고 본다. “예수의 현존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 것을 가르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스위들러는 예수가 참된 하느님이요 참된 사람이다 (Deum verum et hominem verum)라고 한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은 “참으로 신적이고 참으로 인간적이다 (vere divinus et vere humanus)”라고 바꾸어 이해해야 더 합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 언명인 예수 신성론을 문자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할 것을 현대 그리스도교 지성들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곧 신성론에 집착하기 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삶을 본받고 따르는 자세 견지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함을 알려준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그 무엇보다도 완전한 인간으로서 예수가 보여준 삶을 모방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역사다. 예수를 본받아 청빈을 덕으로 삼았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구태의연한 신학적 논술보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대해 묵상한 토마스 아 켐피스 등, 그리스도교사에서 예수는 지극히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늘 친근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시대를 초월해서 역사적 예수의 인간적 모습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되었다. 신이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그 완성된 모습에서 그리스도인들, 아니 비 그리스도인들조차 희망과 감동을 느낀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두운 일제시대, 군사독재 시절, 예수는 신학적으로 정치하게 묘사된 신이기 전에 해방자라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세계 종교 성현들과 비교하여 본다면 모세처럼 입법자나 민족지도자도, 공자처럼 학자나 도덕자도, 부처처럼 신비가나 수도자도, 무함마드처럼 사령관이나 정치가도 아닌 모습이 독특하게 드러나는 예수. 그러한 그를 불교적 관점에서 길희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당신은 우리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그토록 오래 사로잡아 온 보살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시는 분이시며 지금도 고통 받는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고 계시는 자비로우신 보살이십니다’라고 고백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예수야 말로 일찍이 인류 역사에 출현한 가장 위대한 보살로서 보살의 이상이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육화된 존재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눈에는 그는 바로 보살을 보살이도록 하는 그 힘, 그 실재 자체의 가장 결정적 육화였기 때문이다.”
진정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 예수의 삶을 통해 진정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사람들이다. 역사적 예수는 “오로지 하느님과 사람에게 관심을 쏟은 사람으로 철저한 경신자며 철저한 인본주의자”였다. 경천 애인에 역행하는 그 어떠한 것도 그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성경에 기록된 법, 조상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준 법, 당대의 사람들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한 법마저도 감히 수정하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예수를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경천애인의 길을 걸어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에 처형된 그처럼 크나 큰 불행을 당할 각오까지 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아끼는 일에 투신해야 한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부활하여 은밀히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충동을 느끼고 죽음을 넘어서는 초월적 돌파구를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2. 무함마드
이슬람 전통에서는 예수의 신성에 대비되는 무함마드의 인간성을 늘 강조해왔다. 그는 알라의 계시를 충실히 전하는 예언자요, 사도이다. 성경의 예수처럼 기적을 행하지도 못하는 예언자이다. 사람들이 “어째서 그대에게는 신으로부터 직접적인 기적의 징표가 주어지지 못했는가”라고 의심을 표할 때도 그는 “기적의 징표는 알라에게만 있는 것. 나는 경고자에 불과하다”라는 계시를 알려 줄 정도로 인간 능력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였다. 아랍어로 계시된 꾸르안이야말로 그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이었다. 그것도 엄밀히 그가 행한 기적이 아니라 알라께서 행하신 기적이다. 무함마드가 보통 인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예언자로 선택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를 믿지 않을 경우 들이닥칠 종말 심판을 알리는 경고자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꾸르안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말하여 주어라. ‘나는 너희들에게 “알라의 보물을 맡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른다. 또 나는 너희들에게 “나는 천사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에 계시된 것을 쫓고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50).’” 그는 모세와 닮은 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모세처럼 유일신에 대한 믿음과 올바른 생활을 강조한 윤리적 예언자, 입법자, 판관, 정치지도자,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예언자가 되기 전까지 상인이었고, 생전 기도, 향수, 여자를 좋아하였으며 결국 생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유한자 인간이었다.
무슬림 전승으로부터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무함마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우선 중키에 넓은 어깨와 가슴, 전체적으로 튼튼한 몸을 가졌다. 크고 튀어나온 이마, 매부리코, 긴 팔. 거친 손과 발. 크고 검은 갈색 빛 눈, 길고 굵으며 다소 곱슬인 머릿칼, 두터운 수염, 목과 가슴 주위의 엷은 털, 마른 뺨, 큰 입, 흰색 피부… 이러한 외모를 지닌 그는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는 빠른 말투를 가지고 있었고, 화날 때는 눈길을 피하고, 기쁠 때에는 눈을 아래로 향하고, 웃을 때는 주로 미소를 띄었다. 자기 통제가 뛰어나 감정 조절을 잘한 그는 슬픔에 잠기기도 하고, 생각에 잠길 땐 긴 말없이 긴 침묵에 들어가곤 했다. 대인관계는 전체적으로 친절하고 부드러웠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여 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시간을 잘 쪼개어 썼고, 늘 바쁘게 움직였으며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리 걷고, 방향을 틀 때는 몸 전체를 돌렸다. 그는 예수처럼 아이들을 좋아하였다. 기르던 새가 죽어 침울한 아이를 정성을 다해 위로해 주기도 하고, 손녀 우마마를 사랑하여 기도할 때는 옆에 앉혀놓고 기도 끝나면 다시 어깨에 올려 다녔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아 주기도 하였다. 동물도 사랑하여 메카 점령 직전 행군 중 어린 새끼와 함께 있는 암캐를 발견하고는 보초까지 세워 보살펴 주기까지 하였다. 많은 아내가 있었던 그는 자신에게 잘 해주는 아내에게 목걸이를 주겠다고 했다가 아내들이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자 손녀에게 주어버리기도 하고, 콥트교인 마리아에 빠져 다른 아내들을 소홀히 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아내들이 항의하자, 이에 이혼하겠다고 위협하는 참으로 평범한 인간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실로 무함마드는 전승에서 그대로 보여주듯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그가 죽었을 때 아부바크르가 한 말은 무함마드의 인간됨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죽었다고 말해주라: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계신다다고 말해주라.” 그러면서 그는 다음 계시를 암송하였다 “무함마드는 단지 사도에 지나지 않는다 (3:138).”
그러나 무함마드는 단지 인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전통은 그를 단순한 예언자요 인간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최후의 예언자로 집으로 치자면 집을 완성하는 마지막 벽돌이다. 예언자의 봉인이다. 그에 대한 무슬림들의 존경심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무슬림들의 예언자 공경이 얼마나 진지한가를 스미스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무슬림들은 알라에 대한 공격을 용인할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있고, 무신론적 저작물이 있으며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함마드를 비방하는 것은 가장 진보적인 무슬림들에게서조차 이글이글 타오를 정도로 맹렬한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사도라는 말만 믿고 무함마드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한다면 대단한 무례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특히 수피 전통에서 영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가장 완성된 존재로 해석되었다. 우선 그가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창조되어 존재하였다는 선재 사상이 눈에 뜨인다. 창조주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가장 먼저 무함마드의 빛 (Nur Muhammadi)을 만드셨고,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나온다. 알라께서는 “나는 숨겨진 보물. 알려지길 원하여 세상을 창조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너 (무함마드)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3세기 유누스 에므레는 이를 시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나의 빛으로 그를 창조하였다. 어제도 오늘도 그를 사랑한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까? 나의 무함마드, 광명의 아흐마드여!” 또다른 수피는 무함마드의 빛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이는 알라의 빛, 예언자에게 들어갔네. 마치 달빛이 햇빛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상은 알라가 만족하시길 바라지만, 알라는 무함마드가 만족하길 바라시며, 이러한 알라는 그 당신의 그 영원한 고독이 알려지고 사랑받기 위하여 무함마드를 당신의 빛과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로 창조하였고, 무함마드를 통해 사랑에 가득 찬 알라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급기야 무함마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를 본 사람은 신을 본 것이다.” 이는 곧 무함마드가 신적 아름다움을 비추는 완벽한 거울이요, 모든 신적 이름과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소임을 표현한 것이다.
세상 창조 이전에 선재한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부각된다. 특히 그의 양 어깨 사이에는 최후의 예언자 봉인이 있다고 믿는데, 이는 비둘기 알만한 크기의 다소 노란색을 띤 검정색 점, 또는 살로 묘사된다. 그의 내면적 아름다움은 수피 영성가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가장 완벽한 인간인 그는 우주의 축이요, 세상의 중심이다. 그러한 그의 행동을 본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슬람 법이 바로 무함마드의 언행을 중요한 법전으로 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는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일 것이다. 그는 무슬림들에게 친구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며, 선생님이요, 영혼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존재다. “나의 빈곤은 나의 자랑이다 (faqri fakhri)”라는 무함마드의 말은 수피 영성가들이 영적인 가난함을 추구하는 데 상징적인 표어가 되었고, 그들은 “나의 눈은 감겨있지만 가슴은 깨어있다”라는 그의 말을 따라 늘 깨어 영성을 깊게 하려고 하였다. 영성가 무함마드. 그는 인간의 기본적 본능과 유혹을 지하드를 통해 제어하는 사람이다. 나스르의 말을 빌자면 그는 가장 큰 지하드인 영적인 지하드를 하는 사람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 명상하고 있다면 무함마드는 정의의 칼을 들고 말을 타고 무한질주하는 것으로 상상하라. 그는 진리의 산 앞에서 멈출 것이다.” 그의 어린 아내 아이샤는 무함마드가 “꾸르안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꾸르안이 화낼 때 화를 냈다”고 하면서 무함마드의 성격을 꾸르안이라고 하였는데, 무슬림 전승은 그러한 그를 알라가 사랑하는 이로 존숭한다. 알라가 사랑하는 이가 무함마드이니 그의 종교 이슬람은 사랑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무함마드는 죄 없는 존재다. 그는 단 한순간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사실 꾸르안에는 그가 유일신의 길에서 벗어나 있음을 뜻하는 계시도 있고, 초기 무슬림 전승에는 우상 숭배행위에 참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흠 없이 깨끗한 존재로 각인된다. 오류가 없는 존재 무함마드. 이는 신학적으로 보면 꾸르안과 직결되어 있다. 첫번째 강의에서 우리는 무함마드의 문맹됨을 그리스도교 마리아의 처녀됨과 같은 종교적 비유라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다. 무함마드의 무오류성 역시 계시의 도구로서 그가 지닌 위치와 관계 있는 상징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는 자가 오류가 있다면 순결한 계시가 훼손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영원히 창조되지 않은 꾸르안은 이로써 글을 모르고 죄가 없는 순순한 존재 무함마드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것이다. 순결한 무함마드,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탄은 완전히 복종하여 내가 명령하는 것만 한다.” 사탄마저 제어하는 오류 없는 존재 무함마드가 돋보인다.
알라의 계시 꾸르안 외에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못한 무함마드. 그런데 꾸르안도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무함마드가 행한 기적이 아니고 알라의 것이다라고 이미 앞에서 말하였다. 그런데 무슬림 전승은 기적을 부인하는 무함마드를 기적을 행하는 인물로 기억한다. 그는 예수처럼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친다. 젖이 안 나오는 양도 그의 손이 닿으면 콸콸 우유를 쏟아낸다. 그는 동물과도 이야기하고, 하늘의 달을 둘로 쪼개기도 붙이기도 하는 초자연적 기적도 행한다. 무슬림 전통에서 실로 이렇게 그는 기적을 행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최후의 예언자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 순서로 만을 의미하지 않고 완성도에서도 가장 훌륭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모든 예언자보다 우위에 있다. 모든 예언자는 “무함마드 빛”의 부분적 요소들에 불과하다. 19세기 말 아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알라의 축복과 평화가 그에게 - 모세의 지도자 (leader)요, 예수의 안내자 (guide)인…” 또 다른 시는 무함마드를 진주로 비유한다: “예수는 모세, 요나, 요셉의 친구. 아흐마드는 홀로 앉았네. 나는 고귀하다라는 뜻이니. 사랑은 내적인 의미의 대양. 모두가 고기처럼 그 안에 있네. 아흐마드는 대양속의 진주. 보라 – 그것이 내가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무함마드는 중재자로 활약한다. 무슬림들을 위해 최후의 심판일에 중재자가 되는 것이다. 알 가잘리의 작품으로 알려진 글에서 무함마드는 “나는 적합한 이로다. 신께서 원하시는 한 나는 적합한 자로다” 라고 말하면서 중재자로서 자격이 충분함을 선언한다. 이에 신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며 무함마드의 중재를 승인한다: “오, 무함마드여, 머리를 들고 말하라. 네 말을 들을 것이다. 중재를 구하라. 그러면 네 허락하리라.” 또 다른 무슬림은 이렇게 중재자 무함마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다: “이승과 저승의 두 세계, 인간과 영령, 아랍과 비아랍의 지도자. 선을 명하고 악을 금하는 우리의 예언자는 누구보다도 (더 충실히) 예,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나니. 알라의 사랑을 받는 그의 중재를 바라노니.”
이상 우리는 단순한 인간 사도가 아닌 신적인 존재 무함마드를 무슬림의 입을 통해 들어보았다. 실로 무슬림들은 단순한 인간이 아닌 초월적 인간으로서 신적 경지를 넘나드는 무함마드를 존경하며 따른다. 그러하기에 무슬림력 3월 12일 (Rabi’ al-awwal)에 무함마드 탄생 축제를 행한다. 기일로도 알려진 이날의 생일 잔치는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이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켜지고 있다. 그리스도교 성탄절 영향을 받았는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와하비 (Wahhabi) 유일신론자들이 훼손한 무함마드 성묘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묘에서 흙을 담아 고이 간직하는 무슬림들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다. 무함마드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히 무슬림 종교생활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따라서 무슬림을 이해하려면 진정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신앙고백의 두번째 문장 뒤에 숨겨진 무슬림들의 무함마드에 대한 이러한 극진 존경심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선재하였고, 내외적으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며, 티끌만한 오류도 죄도 없는 무결점의 인간이요, 중재자요, 기적을 행하는 무함마드를. 단순한 인간이 아닌 우주의 축이요, 세상의 중심인 초월적, 신적 무함마드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