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ㅡ 자신의, 지금의 이 경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면, 믿어 줄 것인가.
바라몬교를 비롯해서, 외도의 난립, 혼란하고 부조화한 마음 등이.
관습으로부터 탈피하고,
이 정도(正道)를 받아들일 것인가.
중생은 깨달을 수 있을까ㅡㅡ.
싯다르타는 법열의 경지 속에서,
이런 질문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해도 알아주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싯타르타는, 생로병사로부터 해탈하고,
전생 윤회의 업에서도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ㅡㅡ 영원한 생명이란, 생로병사가 없는 세계입니다.
육체 속에, 또 한 명의 자신이 있고,
그것이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불생불멸의 생명인 것입니다.
육체는 인생 항로의 고락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이고,
혼*의식은, 불생불멸, 영원한 생명이며,
또 한 명의 자신인 것입니다.
우주대로 확대된 또 한 사람의 자신,
그 무릎 위에서 작아져 있던 현실의 육체의 자신의 모습.
마음이 조화된 평온함의 경지가 되면,
신의 빛으로 가득 채워지기 때문에,
후광의 육체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넓고 풍부한 둥근 마음의 모습이고,
그런 까닭에 신의 자식으로서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자신이,
대우주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그것은,
마치 각개의 물 입자가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것은 또 죽는 것도,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없습니다.
그 자신을 지금은 확실하게 인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자신으로, 언제든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또 이전의 윤회하여 가는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현재의 육체는, 양친의 연에 의해 얻었지만,
그 육체는 인생 항로의 타는 배에 지나지 않는 사실도 알고,
혼(의식)의 표현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것은, 조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 현존(現存)하는 것입니다.
과거세의 육체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혼은,
과거도, 현재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도 자신이고, 지금도 자신인 것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인 혼의 불변성은,
영원히 변화하는 것도, 변화시키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로서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모양은,
그 모양에 따라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원숭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원숭이는 원숭이이며
개는 개로서 혼의 진화과정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만생만물은 신의 의지 아래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낸 것,
즉, 자연의 규칙인 중도라고 하는
신의 의지에 저항했기 때문에 일어난 괴로움인 것입니다.
(주; 예를 들자면 닦아 놓은 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비유하면,
길을 따라 안전운전을 하지 않고,
과속, 난폭 운전으로 여기저기 부딪 치면서
상처투성이로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물고기가 물에 포옥 싸여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제공하는 대자연 속에 포옥 싸여 있는데도,
욕심을 부리는 짓.)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
바르게 말한다는 상념과 행위를,
스스로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도의 마음은,
가장 인간다운,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태도에 있을 터입니다.
싯다르타는 이 점을 깨달았습니다만,
막상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게 되면,
과연 이 사실을, 생명의 실상을,
몇 명의 사람이 이해해 줄 것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싯다르타는, 피팔라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숲 속을 걷기 시작합니다.
어린 사슴들이 뒤를 따라갑니다.
싯다르타가 멈추자,
어린 사슴들도 발걸음을 멈춥니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옆으로 다가와 목을 길게 하고,
싯다르타의 볼에 차가운 코를 가까이 대고,
새콤달콤한 숨을 토하며, 말을 거는 것처럼,
애정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새들도, 아무런 경계심을 품지 않고,
싯타르타의 발밑에서 모이를 쪼고 있었습니다.
작은 새들은, 피팔라의 주인입니다.
싯다르타와 함께 생활한 동료이고,
위선을 모르는 순수한 작은 동물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르베라 숲의 선주자(先住者)이고,
싯다르타를 친구로서 맞이해 준 동료였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싯다르타의 어깨랑 머리에 머물며,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싯다르타도 어느새 즐거워져, 목소리를 내어 얘기를 합니다.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고, 싯다르타가 어떤 것을 특별히 취급하자,
다른 작은 새들의 지저귐과 거동이 바뀌어 오는 것입니다.
평등하게 취급하면, 원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짧은 시간이었지만,
동료끼리의 싸움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침범하지 않고, 침범당하지 않는 것을 지키고, 항상 건강했습니다.
그것에 비해, 싯다르타는, 인간끼리의 추한 싸움을 생각하자.
인간은 작은 새들보다 못하다고까지 느꼈습니다.
싯타르타는 네란자라 강변으로 내려갔습니다.
천천히 흐르는 강의 움직임은, 어제도 그저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허리까지 들어가자, 물의 차가움이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거의 자지 않았지만, 어젯밤의 피로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양손으로 물을 담아, 머리로부터 얼굴에 흐르게 합니다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좋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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