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먹고 사는 사람들
권 옥 희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울고 웃는 이유는 뭘까?
웃음이 나게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며 눈물나게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화두처럼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서슴없이 그리움이라고 답한다.
정호승 시인은 ‘그리우니까 사람이다’ 라는 시에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너를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눈은 돌아보지 않으면
나밖에 볼 수 없어서 혼자 외로움을 타지만
이른 봄날 언 땅을 이겨내고 싹이 돋으면
비로소 옆도 보게 된다. 여리디 여린 새싹이 세상을
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 지를 헤아리며
그 애잔함에 비로소 눈과 마음을 돌려보기 바쁘다.
봄은 그래서 늘 사랑을 안고 오고 희망의
설레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눈 맞추는 곳.
거기에 우리가 생각만 해도 가슴 아리게 하는 고향이 있다.
사랑을 가르쳐 주고 사랑을 할 수 있게 그리움을 듬뿍
불어넣어준 고향. 수몰되어 더 애닯고 작아서
더 눈물나게 하는 풀꽃처럼 가슴으로만 크는 고향이 있어
우리는 늘 그리움을 부르며 그리움을 먹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물이 가둬버린 세월이 고향을 잠시
잊고 살게 했다 해도 언젠가 찾게 되는 게 고향인가 보다.
계절 따라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잊지 못할 옛정을
찾아 헤맨 우리들의 못 말릴 허기, 만나고 만나 채워
넣어도 늘 뭔가 허전한 향수는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때가 되면 또 만나야 한다.
그래서 얼굴 한번 봄으로써 우리는 얼마간 살아갈 힘을
얻게 되고 보고 싶음을 재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거다.
온 세상이 꽃으로 새 생명을 폭발시키던 4월도 가고
진저리나게 고왔던 연녹색 잎들이 점점 더 색을
덧칠하며 싱그러운 푸름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5월은
우리의 발길을 어김없이 고향으로 이끌게 했다.
연례행사로 열리는 총동문 체육대회가 안동의 교육감
선거로 5월에 열리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5월의 붉은 모란처럼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다. 임동향우회 카페며,
산행에서 그리고 우리 카페에서도 모두가 고향에서
만나자는 말로 설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모두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고향병도 중증이어서 나는 고향에 간다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이틀 동안 잠을 설쳐서 얼굴이 까칠해 걱정이랬더니
철현이는 그냥 들이대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란다.
부모님 뵈러 먼저 내려간 종열이, 위남이, 택성이를
제외하고 강북, 강서, 강남 세 모둠으로 출발하는
서울팀은 상걸이, 은희, 나, 철현이와 원희를 태운
수색 출발차를 선두로 재영이, 탁준이, 지영이의 광명 출발차,
강이와 재학이, 명화, 도영이를 태운 강남 출발차 등
모두 16명이다. 주관기수였던 작년 보다 책임감이
줄어서인지 아님 결혼시즌이어서인지 몇 명의
친구가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리움을 타는 마음은
모두 같아 고향 가는 길은 그 어떤 약속 보다
우선순위가 되고 열일을 제쳐 놓게 되는 거다.
5월 들어 한여름 같은 더위가 계속 되는 가운데
가뭄 걱정도 만만찮다. 안동댐으로 수몰된 수몰민들이
가뭄으로 고향마을이 드러났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되면
큰일 날 일이지만 혹여 임하호도 바닥을 드러내면
나도 달려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치악 휴게소에서 별미인 가락국수로
아침도 거른 배를 채우고 시원한 정자에서 은희가 싸온
홍어에 시큼한 김치를 싸서 막걸리를 네 병이나 비웠다.
처음 가볍게 한 병을 비우고 잠시 후,
일명 탁배기인 탁준이가 합류하면서 그예 동이 났다.
재학이가 남겨 놓으라고 했다는데 늦게 출발해서
만나지 못할 줄 알고 다 먹자마자 재학이팀이
도착해서 우리는 특유의 홍어 퀘퀘한 냄새만 풍기고
다 먹어서 미안한 마음을 멋쩍은 웃음으로 흘렸다.
요즘 네비게이션은 어찌나 영리한지 제한속도를
조금만 넘겨도 계속 빽빽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는데 시끄러워서도
속도를 줄일 수밖에... 그런데 고속도로에 사고로
죽은 동물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길을 내면서
이동로를 잃어버린 동물들은 끊어진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을까?
세상에서 가장 못된 게 사람이라더니
보금자리에서 쫓아내면서 이동로조차 만들어
주지 않은 이기심이 언젠가 우리도 저 끊긴 길 위에서
희망을 잃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서늘한 생각이 든다. 깎아낸 산의
속살을 덮으면서 보랏빛 등꽃이 곱게도 피었다.
보고 또 봐도 푸르른 산야는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먼 길 가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눈꽃으로, 단풍으로, 꽃과 푸르름으로 경쟁사회에서
살아내느라 힘든 사람들을 공짜로 자연에 들게 한다.
서울에는 아직 필 생각도 않는데 남쪽이라
그런지 곳곳에 아카시아가 피어 향기로운 냄새가
살짝 열린 유리창을 타고 코끝에 묻혀진다.
올해 전야제는 우리 안동토종음식 연구가로
활동 중인 선행이의 낙원회관에서 열린다는데
그 맛이 어떨지 벌써 기대가 된다. 그리고 올해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암탉이 울어야
가정도 살고 나라도 산다. 태어난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는 고향지킴이 순희와 옥례가 손발을 맞춰
우리 고향의 살림을 맡고 있으니 알뜰살뜰 잘
꾸려가면서 모든 친구들에게 귀감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벌써 후배이자 올해 주관기수인
47회 회장단에게 역대 처음으로 격려금도 전달했다니,
역시 형답고 누이답다고 향우회 카페에서 많은
고향 사람들이 우리 친구들을 달리 보고
칭찬하는 소리도 듣고 단결심 강하고 친구들끼리
우정도 잘 나눈다고 부러워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닭띠가 그냥 닭띠인가? 어디든 파헤치고
다녀도 빛을 발한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운동이면 운동 등 어디 내 놔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 등을 타고 놀아도 소는 귀찮아하지 않고
묵묵히 봐 주는 걸까? 닭이 노는 게
무관심이 아니라 귀엽고 예뻐서...
아, 안동! 12시 30분에 출발해서 도착 6시 30분!
4시간 정도 걸렸다. 안동이라는 안내판만 봐도
가슴이 찡하다. 옛날에 너무나 고향이 그립고
사투리가 듣고 싶어 청량리역 근처에 가면 일부러
대합실에 들어가서 한참을 앉아 있곤 했었다.
제 작년에 옥례가 덕유산에서
“야들아, 단풍이 지서로 안 예쁘데이!”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단풍이 곱다는 건지
안 곱다는 건지 한참을 헷갈렸는데 단풍이
보통 예쁜 게 아니라 아주 곱게 물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딴 짓하거나
잡담을 하면 “너 지서로 가만 안 있을 거야?”
하고 소리친다. 아이들 뭔 말인지 순간 멍해진다.
남이야 잘 알아듣지 못해도 우리 고향 말은 그렇게
재미있고 정감어리다. 사람이
그리우면 말도 그리워지는 법이니까.
선행이네 낙원회관은 안동 시내 음식의 거리에 있었다.
이곳이 서울의 명동쯤 되는지 전통혼례식장과
음식박물관, 우리 안동 권씨 시조인 삼태사를
모신 사당도 주변에 있다는데 밤이어서 친구들과
얘기하느라 나가보지 못했다. 아담한 식당에
선행이가 직접 그린 산수화가 몇 점 걸려있다.
새침하고 나 보다 더 소심했던 친구가 요리대회에서
상도 받을 만큼 음식솜씨에 일가견이 있고
그림도 수준급이다. 또 집 옥상에 꽃들도 얼마나
잘 가꿨는지 올라가서 구경해야 되는데 깜빡 잊어버렸다.
어렸을 때 우린 모두 똑같은 모습과 정서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지만
다 자라 때가 되면 이렇듯 생활환경이 달라지고
저마다 사회에 이바지하는 그릇이 되어
하는 일도 달라진다.
그렇게 변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우리 서울팀의 선착으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안동친구들도 달려오고 대구 부산팀도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여걸 석순이가
도착하자마자 식당 안이 시끌시끌하다.
누군가 들어서면서부터 그예 거시기가 석순이 손에
잡혔기 때문이다. 오늘밤 남자친구들은 언제 소중한
거시기가 석순이 손에 잡힐지 모르니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대구에서 조희 며느리 보는데 참석했을 때
나 보고는 쪽파, 부산 승규 보고는 대파라고 하더니
계속 쪽파야! 하고 부른다. 왜 내가 쪽파야? 물어보니
니는 빼쪽해서란다. 날씬하다는 뜻일 텐데, 60kg
내 속살을 보면 석순이 너 금세 쪽파가 아니고
대파라고 할 거다.
안동의 찹쌀떡은 참 희한도 하다.
찹쌀떡에 팥알이 그냥 있다시피 한 고물을 묻혔는데
달콤한 팥에 쫄깃한 찰떡 맛이 아주 환상적이었다.
앞에 앉은 도영이는 밥도 안 먹고 찹쌀떡으로
배를 채웠다. 나는 산나물에 걸신 든 사람처럼 무려
세 접시를 비웠다. 명화가 “야야, 니 그렇게 먹는 거 보니
영락없는 시골 아줌마데이. 그러다가 새파란 똥 싼다!”하고
말했다. 옛날 산나물 뜯으러가는 엄마 따라갔다가
무언지는 모르지만 뜯어주는 나물을 그냥 씹어 먹어도
그럴듯하게 맛났던 생각이 났다. 이것은 잡나물이라고 했다.
산나물은 뭐고 잡나물은 또 뭔지...
작년 체육대회 행사를 주관하면서 지출된 내역을
공개하고 더 나은 동창회가 되도록 회칙도 고쳐가며
힘을 모으자고 화이팅으로 의기투합하면서 우리는
자리를 옮겨 묵을 방이 있는 호텔 옆 단란주점으로 향했다.
60여명 친구들이 들어찬 주점은 금세 활기가
돌았고 오늘 전야제 비용은 작년 회장인 성희가
낸다고 해서 친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작년에도 큰 행사를 앞두고 주관기 회장으로 중책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애써놓고 마지막까지 신임회장에게
힘을 실어준다. 닉네임 안동양반다운 그의 마음
씀씀이에 우리는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광웅이가 뭐니 뭐니 해도 제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은 작년에 동창회 책자 만들기 위해 사천에서
올라와 밤 기차 타고 내려오는 은희와 나를 기다려
옥례네 집으로 한밤중에 들어갔던 일이며,
서로 머리 맞대고 의논한 뒤 옥례가 해준 된장찌개에
양푼으로 밥을 비벼 맛나게 먹던 일이라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그 때도 성희는 안동댐 구경을 못한
나를 위해 우리를 안동댐으로 데리고 가서
맛난 점심을 사 주고 차표도 끊어주었었다.
배부르고 고향의 품에 안겼다는 생각에 노래는
참 잘도 넘어간다. 모두가 가수이다.
회장인 순희의 ‘울산아리랑’을 시작으로 성희가
지영이 아버지가 작사한 영화주제곡
‘저 강은 알고 있다’를 부른다. 비 오는 낙동강~에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우리 고향의 노래나 진배없을 텐데,
여자인 내가 부르기도 잘 안 넘어가는
저 간드러지는 이미자의 노래를 남자가 우예 저래
잘 부르노 말이다. 내 마음이 다 흔들리면서
성희 노래의 맛에 반해 버렸다. 내가 꽃같이
풋풋하던 날. 청평 유원지에서 친구들 몇몇이
짝꿍들이랑 야유회 할 때 우리 신랑이 부른 노래가
당시 유행했던 리칭의 ‘스잔나’였다. 노을 가득한 하늘을
등에 지고 강가에 앉아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부네’ 하며 그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멋지던지 한순간에 넘어가 버렸다.
지금은 별로인 그 노래가 그 때는 왜 그리
사람까지 멋지게 보이던지 이것도 그리움을
먹게 하는 추억의 한 단면인 것 같다.
광웅이에게 뺏겨버린 기하의 ‘미워하지 않으리’를
홀이 아닌 룸에서 듣고 몇 번을 신청해도
끝내 못 듣고 헤어졌던 광호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도
드디어 들었다. 옥례가 태어나 처음으로 불렀다는
‘여자의 일생’은 내 십팔번이기도 하지만
혼자여서 외로운 옥례의 심정을 노래하는 것 같아
너무나 심금을 울렸다. 우리들의 정서는 누가
뭐라지 않아도 정 많고 눈물 많은 세대임이 분명하다.
아마 그것이 우리에게 못 입히고 못 먹였던
부모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 아닌가 싶다.
점점 자기밖에 모르는 이 각박한 세상에 그래도
부모님을 공경하고 나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2학년 때 우리와 헤어진 뒤 40여년 만에 처음
친구들을 보는 장터 권오성이는 더욱 느껴질 것이다.
서울 모임과 향우회 관악산행에도 참석해서 다시 찾은
친구와 고향사람들 때문에 몇 며칠은 행복했을 터이고
그 옛날 깨복쟁이 친구들과 이렇듯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한다는 사실에 또 한번 구름을 탄 기분일 거다.
오성이도 어쩔 수 없이 그리움을 먹고 사는 임동,
우리 고향사람이니까.
일기예보에는 오늘 날씨가 조금 내려간다고 해서
또 추울까봐 가디건까지 챙겨왔는데 아침햇살이
화창하면서도 제법 따갑다. 여전히 옥례네 집에서
산나물 비빔밥 한 양푼으로 배를 든든히 하고
운동장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친정엄마처럼
고추장이며 산나물김치, 조선간장까지 챙겨준다.
그뿐이랴 운동장에 가져가서 친구들 먹게 하려고
산나물을 무치는데 세상에 그 많은 양의 나물을
뜯으려고 얼마나 산을 헤매고 다녔을까?
그래서 어깨 아프다고 간밤에 끙끙 앓았었구나.
한 젓가락의 나물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한 친구의 이 많은 수고가 있었음을 우린
잊지 말아야 되겠다. 너무 바빠 립스틱도 바르지 못하고
달려 나온 옥례에게 내 립스틱 예쁘게 발라준다고
해놓고 잊어버렸다. 내 입술은 행여 지워질까
계속 덧칠하면서도 말이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제 작년처럼 운동장에서 부침개를 하려고 했지만
번거롭다고 못하게 해서 준비 안했는데 영 잔치분위기가
안난다고 했다. 그 말은 맞았다. 부침이도 부침이지만
우리의 마스코트 분자가 웬일인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음을 사가지고 가느라고 옥례와 늦게 운동장으로
향하는데 대촐 건너가는 불거리가 보인다.
보일 듯 말 듯한 나무 푯말. 댐 개발로 찢겨진
고향의 상처가 저것일 것 같아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외갓집 동네가 추월동이고 금소여서 친정 가는
엄마손 잡고 외갓집 가려면 이 불거리에서 내려 깊고
물살 센 거랑을 건너야 한다. 행여나 엄마손 놓칠까봐
꼭 붙들려서 건너다 그만 새로 산 꽃고무신
한 짝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망연자실 악을 쓰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가 예닐곱 살이었던가?
또 조금 지나니 수곡교 다리가 보인다. 저 다리 밑이
우리 고모 할매가 살던 무실동네라던데
꽤 오래 전에 지례예술촌에서 시인들의 행사가 있어
찾아왔다가 그 때도 망연자실했었다.
수곡교가 붕괴될 조짐이 있어 통행제한으로
큰 버스는 건널 수가 없단다. 좀더 가까이서
처음으로 물에 잠긴 고향을 보겠다고 얼마나
설레며 찾아왔는데 버스는 이미 금소에서
길안으로 방향을 틀어 나는 고향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때 쓴 시가 <수곡교 유감>이다.
수곡교 유감
권옥희
그 사람들 건망증이 왜 그리 심해
부실공사 추방은 한낱 말 뿐이지
무너질 위기에 처한 수곡교의 통행은 제한되고
내가 탄 버스는 돌아서고
이 골짝과 저 골짝이 맞대거리로 주고받는 말
큰일이야, 큰일!
올해는 꼭 볼 거라고
좀더 고향 가까이에서
물에 잠긴 고향이라도
눈에 넣어 볼 거라고
지례마을 가는 길
가슴에 층층으로 쌓여지던
눈앞의 무지개는 흩어지고
건너지 못할 다리 위로 점. 점. 점
야위어 가는 내 고향의 지번, 중평리 생가
금소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아득함으로 무너진다
그리움으로 무너진다
무서워라, 이 전쟁터
희망이, 상실이, 체념이 시체처럼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나는 어디로 돌아서는가
몹쓸 것들 물귀신이나 되거라
수곡교 유감을 된 욕설로 퍼붓고도
죽일 것들 물귀신이나 되어버려라
혼자 뱉는 말이 하,
절벽처럼 너무 멀었다.
그리고 그때 하룻밤 묵은 지례마을은
당시 김원길 시인이 종손으로서 의성김씨 종택을
차마 물속에 수몰시킬 수 없어 자신의 손으로
손수 옮겨 수몰위기를 면했다고 한다.
지례마을
권옥희
그래 안타까웠겠지
위기였겠지
댐이 들어서고 고향이 사라진다는데
보상금 대신 산비탈을 깎고 닦아
이끼 절은 기왓장
샛바람 스며드는 문살까지
터를 옮겨 앉힌 종손의 집념
앞마당 석류꽃은 피멍든 그 가슴
서럽게 읽어냈으리라
푸른 물결 어우러진 산굽이 돌고 돌아
사라진 마을 뒤로
아직도 포장되지 않은 길 위에서
그리움을 부르는 사람들
잔을 기울이며 묵을수록 새로워지는 옛것을 탐하며
취해 뒹굴던 간밤
물귀신에 끌리듯 들꽃에 묻은 이슬을 털며
새벽 물가를 찾는 동안
어느새 종택까지 부둥켜안
임하호 만수위로 휘몰아간 안개
지천명에 닿았어도 생생한 그리움이
저 안개 속에 떠 있는 낡은 처마 밑에서
자주 헛짚고 자주 허둥대게 한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벌써 축제 분위기다.
조용하던 임동이 온갖 자동차와 사람들로
이렇게 시끄럽게 붐비는 날은 일년 중 오늘이
아닐까 싶다. 각 기수별로 쳐진 천막 안에 벌써
도착한 선후배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여전히
장국밥은 고향 맛으로 설설 끓고 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한 반이 60~70여명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는데,
그래서 1 2 3학년 때까지 맨 뒤쪽에 서서 조회할 때면
우린 언제 저 연단 앞에 가서 서 보나 했었는데
지금은 전교생이 56명. 줄어든 인구 탓에
새까만 후배들이 외롭게 공부하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 아담한 학교에서 맞춤식 수업을
받고 아기산의 기와 임하호의 기를 듬뿍 받아
훌륭하신 선배님들처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재가 탄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눈부시다 못해 따가운 햇살 아래 오늘은
물을 묻힌 바람도 불지 않는다.
간단한 개회식을 끝내고 경기가 시작됐다.
어느 기수인지 몰라도 코미디언 뽀식이
이용식을 닮은 후배는 빨간 머리 앤으로 여장을 하고
가짜 거시기를 흔들며 뒤따르는 북쟁이와 둥둥둥!
바야흐로 막이 오른 어울 한마당의 분위기를
흥으로 돋운다. 우리 옆자리 후배들은 모두
똑 같은 빨간 등산용 머플러로 한 동기임을
나타내며 풋풋한 젊음을 발산하고 어떤 게임이든
다 이길 듯이 화이팅이 넘쳐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하는 법.
“대구 살던 승현아, 저 하늘에서 친구들 왔다고
내려다보고 있니? 갑작스런 간암으로 너무나
빨리 저 세상으로 가 버린 너, 아직 너의 따스한
체온이 채 식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남자들 중에
유일하게 귀고리까지 했던 네 모습이 아직도 아련하다.
우리 지금 줄다리기 하러 나간다.
너도 뒤에서 힘을 보태줄 거지?”
하며 나는 먼저 세상 떠난 친구를 속으로
이끌고 첫 줄다리기 게임에 선수로 출전했다.
향우회 카페지기 은희는 여기저기 선후배 인사
다니느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옥례에게 영! 하면 순식간에 잡아당기라는
일일코치를 받으며 호르라기 소리와 동시에
줄을 잡아당기려고 힘을 쓰기도 전에 49회 후배들이
굴비두릅처럼 달려온다. 어머나! 뭐가 이리 싱거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아우들이 형들을 봐준 거란다.
서로 나누는 정, 그렇게 쉬운 상대가 있는가 하면
게임은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해야 한다고
준결승전에서는 거꾸로 우리가 한순간에 무너져
또 뒤에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끌려갔다.
제대로 해도 54회 젊음한테는 상대가 안 되는 우리였다.
이번에는 윷놀이다. 모두가 더워서인지
선수 나오라는 안내방송이 계속 들리는데도
아무도 나갈 기색이 없다. 그래서 나는 또 선수로 나갔다.
강구 석순이와 안동 기하, 철현이와 팀을 이뤄
윷말은 순희가 쓰고 옥례와 인숙이의 열띤 응원에
힘입어 우리팀 신나게 이겼다. 그런데 어디로
사라진 석순이 대신 인숙이가 들어온 두 번째
게임은 막상막하였다. 그래서 거의 도착점에 다 간
상대방 말을 잡고 너무 좋아 방방 뛰다가
내 차례가 되어 윷가락을 집는데 아뿔싸! 드드득 하며
바지실밥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윷가락 집을 때마다 행여 속옷 보일까봐
몸을 도사리며 그래도 선전한 끝에 우리가 이겼다.
이젠 결승행! 화장실 가서 전날 입었던 바지로
얼른 갈아입고 오니 나대신 순희가 나서서
윷을 던지고 있었다. 모야! 윷이야! 수없이 외쳤지만
아깝게 졌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동문들 중에 유일한 홍일점인 우리 여성회장 순희,
훌라후프 돌리기에서 승승장구해 결승전에 나간다.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훌라후프 돌리기인데
순희는 아마 하루 종일 돌리라고 해도 해낼 기세다.
와우! 저 유연한 허리, 세 살 박이 손자가 똑똑해서
예뻐 죽겠다고 자랑할 때는 영락없는 할머니더니
젊고 팽팽한 후배들 다 물리치고 우리가 1등!
이 경기의 승리로 결국 우리가 종합우승하는
영광을 안았다. 봐, 뭔가 일을 낸다고 했지?
시상을 하러 네 번이나 연단을 오르내리는
순희의 얼굴에는 그동안 애쓰느라 까칠했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고 함박꽃 같은 웃음이 달렸다.
고향에서 사는 죄(?)로 우르르 왔다가 우르르 가버리는
친구들이 그래도 좋다고 늘 고생하는 고향 친구들에게
이 우승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경기 짬짬이 향우회카페에서 낯이 익은
49회 류현 후배와 반가운 해후도 하고 관악산을
오르며 정을 쌓은 56회 독사 이주환도 보았다.
사진 나눠주러 일일이 기수들 찾아다니던 해동선배,
내가 막걸리잔 받을 때까지 들고 계시던 43회 김희수
재경산우회장님, 그리고 함께 산행하며
우리 대구 친구들의 안부를 물어주었던
강호원(44회)재구산우회장님도 보고,
사진 잘 찍어줘서 넘치도록 술 한 잔
따라드리겠다고 했던 기헌 선배도 만났다.
또 우리 새들 뒷집 살던 45회 김승동,
앞집의 48회 손병국도 만났다.
어릴 때는 모두 부끄럼 없이 발가벗고 멱을 감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서로가 알아보지 못해도
마음은 그 옛날을 그리는 오빠이고 동생이다.
남은 사람이든 떠난 사람이든 모두가 그리움을
찾아 이곳에 모였고 이제 어울 한마당의 열기도
막바지에 달했다. 경품권과 노래자랑 추첨시간이
임동향우회 류필휴회장님의 기어이 우리는 만났다고
송창식의 ‘우리는’을 부름으로 시작됐다.
회장님이 어디 가서 노래 잘하면 모두가 임동인이라고
하시더니 정말 그랬다. 옥례가 선풍기경품 추첨에
당첨되어 얼마나 좋던지 덩실덩실 춤이 절로 춰진다.
매번 노래자랑 신청만 해 놓고 시간에 쫓겨
그냥 떠났다가 이번엔 은희가 무대에 올라가
<쓰러집니다>를 열창한다. 누가 밀치지 않아도
우리는 무대 위로 우르르 달려가 백 댄서가 됐다.
작년에 우리가 이 행사를 주관해봐서 알지만
보고 싶은 마음, 그리움은 제쳐두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지 않으면 치르기가 쉽지 않은 행사이다.
올해 더구나 더운 날씨에 진행하느라 고생한
47회 58년 개띠들, 같은 새들 살았다고
살짝 귀띔해주던 윤병진 총회장을 필두로
순희 동생 상걸이, 서울의 예쁜이 남금옥 등
결코 허술하지 않게 행사를 준비한 후배들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황산사로 소풍 가던 날,
소풍보다 가재잡이에 더 열중이었던 이용필 후배의
지금도 살아있는 추억이나, 1학년 3반 코흘리개
친구들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윤병진 후배,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고향이 되어
신혼여행도 고향에서 보낸 이옥윤 동생,
제 작년의 책자에서 우리 나이 하마 오십이라고 물으며
어린 날을 떠올리던 45회 선배님의 애환 담긴 글들처럼
정말 우리는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고향 옛터,
디딜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더더욱 내가 흘린
발자국조차 눈에 넣을 수 없는 그 아득함 때문에
더욱 사무치게 그리움을 불러오는 게 아닐까?
아쉬운 작별을 나누며 발길을 돌리는 차 안에서
나는 일요일 상행길의 차 막힐 일이 걱정인
상걸이에게 그래도 소원이니 물가에 다가가
손에 물 한번만 묻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기꺼이 차를 돌려주는 고마운 친구, 미나리꽝을 지나며
어릴 때 집 앞에 미나리꽝이 있어서 질리도록
먹었다고 한다. 꿈인 양 40년 동안 날 향수병으로
울게 했던 물가에 손을 담그니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물에 어리는 얼굴에 그리움과
낯설음이 교차된다. 그리고 친구가
뜨는 물수제비 따라 통 통 통 건너 가버린 세월의
저 편에서 나는 잠시 눈앞의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목이 마르다.
막상 만나면 할 말도 못 찾으면서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
오빠 동생들과 더 함께 하지 못한 미련 같은 것이
이제 또다시 채워지지 않은 그리움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우린 죽을 때까지
그리움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유년의 집
권옥희
물에 잠긴 고향, 물가에 서서
물이랑에 너덜거리는 유년의 집을 본다
지붕과 마당, 어디가 우물이며
어디가 홰나무 섰던 자린지
흐물흐물 연체동물처럼 풀어져
추억도 지워진 물속을 그냥 들여다 본다
무수한 날 새벽 공복으로 다가와
쓰린 속을 후벼 팠던 동무들 이름이,
하얀 홰나무 꽃잎으로 피어나
눈발처럼 내 가슴에 날리던 그 이름들이
무성한 물결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할배가 먹고 싶다고 아궁이 속에 묻어둔 고구마
몰래 하나 꺼내 먹었다고
죽일 듯 불호령 떨어지던 매운 시집살이 엄마의
타고 타서 새까만 속 같은 부지깽이마저 그리운
어린 날의 무대 뒤편으로
너무 먼 물이끼의 시간들이 너울거리고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의 한 때
언제나 그리운 그 집을
깨끗이 풀어 놓아야 했다
부끄럽게도 웬 낯선 얼굴이
거기 멀거니 있었으므로.
7080 추억의 골든 팝송
첫댓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앞만보고 달려갈 수도 없는 중년에 접어든 우리들이 가장 들으면 가장 가슴을 일깨우는 단어가 사랑과 고향이라고 생각해 보면서 일찌기 고향을 떠났지만 누구보다 고향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고향 산천과 사람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담아 주는 옥희 누나의 총동창회 참관기를 읽게 되면서 다시한번 고향에 대한 사랑을 가슴속에 깊이 넣어 봅니다. 양지바른 언덕아래 자리잡은 초가집과 토담길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친구들과 가난한 살림에도 인정이 넘쳤던 당시의 정겨운 모습들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나의 머리속의 풍경으로 남게 되고 누나가 더 보태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情은 몸이 흙이 되는 그날이
친구야 너가쓴 운동장 후기는 정말 제미있고 의미깊다. 사랑하는친구 이 글을 쓰기위해 잠도 설첬지 ? 고생 많았다. 이런글을 남겨저서 고마워...
우리46회 까페에걸 슬쩍 담아다가 노래랑 그림을 약간 첨부해서 올려봤다역시 글쓰는 친구라 실감나게 생생하게 담아낸데 감탄하며, 특히나 이번 귀경길에 임하호에 손담그며 시상을 품고와서 새로 썻다는 맨아래 '유년의 집' 을 읽으며 나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옥희선배님, 이번 체육대회에 다녀오시구, 장문의 글,을 올려주셨군요..선배님글,을 볼때마다 고향의 대한 그리움이 더욱 솟구쳐 오른답니다..고향잃은 서러움을 선배님께서 올려주신글,을 접하면서 잠시나마 맘을 래보고 물러갑니다
아름답고 열정적인 추억의 끈이 느슨해지기 전에 쓴다고 쫓기는 시간과 졸음에 제정신이 아닌 채 부랴부랴 썼는데 은희가 이렇게 흥겨운 음악과 예쁜 편지지로 꾸며 놓으니 내가 쓴 글이 아닌 것처럼 예쁘고 더 감회가 깊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또 일년을 열심히 살고 내년에 또 만나 형아, 아우야! 할 날을 기대합니다, 은희야, 고마워! 술은 내가 사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행을 나누니까 읽기도 쉽고 더 리듬이 산다. 지금 내 눈가에 맺힌 이슬 보이지? 이 여운으로 언제 만나 한잔하자.
수몰의 상처에 때론 그리움으로 때론 사랑으로 때론 우정으로 수채화를 그려 놓으셨네요. 46에 우리 49를 바꾸면 그 심정 同一體로 그날의 여정이 살아 납니다. 표현과 묘사력이 탁월하여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네요. 장민의 태평가도 구성지네요.잘 읽었습니다.
훌륭한글 잘 음미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