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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나는 말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①
http://cafe.daum.net/hollywoodcouples/5cto/831086
[한국사傳] 나는 말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②
http://cafe.daum.net/hollywoodcouples/5cto/831117
그 때 나혜석에게 빛이 된 것은 파리였다.
클뤼니 미술 박물관.
고대 로마의 목욕탕을 개조하여 만든 이 박물관은
2만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한 중세 미술의 보고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 때 박물관의 정원에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생 제르망 성당의 문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혜석은 이 문을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이 나혜석의 대표작 <정원>이다.
이혼 후 나혜석이 파리 생활을 그리며 완성한 이 작품은
1931년 조선미전과 일본제전에 연이어 입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입상 후 나혜석은 재기한다.
화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머물던 집에 불이나 작품 대부분을 잃고 만다.
나혜석은 다시 주저앉고 만다.
이혼 후 그녀에게 그림은 자식이고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충격 끝에 나혜석은 병을 얻는다.
붓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점차 사지가 굳어갔다.
파킨스씨병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물론 입까지 돌아가 사회생활이 쉽지 않았다.
시련은 연이어 닥쳤다.
조선미전에 입선한 작품들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그것은 조선의 남성들이 이혼녀에게 가한 따돌림이었다.
나혜석은 다시 펜을 들었다.
자신이 직접 이혼에 대해 밝히기로 한다.
나혜석은 이 글에서 결혼에서 이혼까지 자신의 결혼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정조에 대한 남자들의 이중성을 고발했다.
이혼을 막으려 경성에 있는 남편을 찾은 날,
나혜석은 숙소에서 한 여자를 목격했다.
남편이 보란듯이 기생을 끌어들인 것이다.
나혜석이 <이혼고백서>를 쓴 이유.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의도와 반대로 전개된다.
이혼고백서를 가장 격렬히 비난한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여느 여성들에게 나혜석은 정신병자로 비춰졌다.
이혼고백서가 발표된 후 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 곁은 떠나갔다.
출중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자라서는 신여성으로 누구보다 많은 여성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이혼녀 나혜석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나혜석에겐 단 한 명의 동료도 지지자도 없었다.
평생 여성의 인간다운 삶을 주장했지만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는다.
1934년 경성에 희대의 소송사건이 일어난다.
원고는 나혜석.
피고는 최린.
추문의 두 당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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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 다 실으려고 했는데 사진 첨부 제한 때문에 한 번 더 끊어야 겠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