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면 가곡리佳谷里 유래
청기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곡(佳谷)이라고 하였다. 특산물로 숫돌과 고추, 담배를 들 수 있다. 본래 영양군 북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점곡과 가마실, 법곡동의 일부를 합하고 가마실과 점곡의 마을 이름에서 글자를 따다가 가곡이라 하여 일월면에 들게 된다.가곡의 가(佳)는 가마실에서 따 왔으나 아름답다는 의미로 승화시켜 쓴 것이요, 곡은 부곡의 곡(谷)을 썼으니 한자의 뜻을 빌려다가 합하여 이룬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특징]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야성 정씨 장렬공(壯烈公)의 종택ㆍ월잠고택(月岑古宅)ㆍ그리고 한양 조씨(漢陽趙氏) 삼수당(三秀堂) 종택을 들 수 있다.한양 조씨 삼수당 종택은 영양면 가지리(加芝里)에서 약 3백년 동안 대단한 문형(文衡)을 이루고 살다가 1900년 초에 일족이 많이 살고 있는 가곡 문양촌(汶陽村)으로 이주하여 정(鄭)ㆍ조(趙)ㆍ양성의 화수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한편 장렬공(장렬공) 사당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서 웅치(熊峙) 싸움에서 순절한 정담(鄭湛)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95호(1987년)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정면 4칸이요, 측면이 5칸으로서 입구(口)자 모양을 하였다. 지붕은 박공기와로 이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가마실ㆍ가곡(佳谷)ㆍ부곡(釜谷)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곡이라 불렀으며 혹은 가마실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는 안뫁과 뒷뫁이 있는데 안뫁은 굿뫁이라고도 하고 구릉향촌이라고도 했다. 뒷뫁은 두들못이라 했으며 가마솥 형국의 마을이 있다. 오늘날의 주곡, 가곡, 도곡은 이어진 세 마을로 통틀어 삼부곡(三釜谷)이라고 하였다. 마을마다 가마솥의 모양을 하였는데 주곡은 590 번지에 한양 조씨(漢陽趙氏)의 터전이 있고, 가곡은 407 번지에 야성 정씨 월잠고택의 터전이 있으며, 도곡은 196 번지에 야성 정씨 오헌(梧軒) 고택의 터전이 있는데 모두가 가마솥의 형국이므로 땅 이름을 부곡(釜谷)이라 하였고 세 마을을 일컬어 삼부곡이라고 불렀다. 뒷뫁에는 가마솥 형국의 야성 정시 월잠고택(月岑古宅)이 있다. 고택 앞쪽 부엌 아궁이처럼 생긴 곳에 못을 막았더니 상서(祥瑞)롭지 못한 일들이 자주 생겨 걱정하였는데 스스롭게 못둑이 허물어지고 옛길이 드러나 오늘에 이르렀다(정동춘(66) 1996. 11. 제보).가마란 이름은 마을 이름 가운데에는 상당한 보기들이 있다 가마는 거북 신앙 곧 검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물신과 땅신 곧 지모신(地母神)을 섬기는 믿음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거북을 땅 이름에 따라서는 거무 혹은 거미라고도 이르는바 겉모양으로라면 거북이의 모양과 솥의 형상이 비슷하여 가마 또는 거북을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쓸 가능성이 있다. 기원적으로 거북-검-감(가마) 신앙은 우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곰신앙과 바로 걸려 있지 않나 한다.여기서는 일월산으로 이어지는 산신숭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신자선』을 보면 신(神)을 '검'이라고 하였으니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부곡은 가마실을 한자로 뒤쳐 적은 것인데 한자의 뜻을 빌려다 쓴 것이다.
*금마래골ㆍ금마라골ㆍ문종곡(文宗谷)ㆍ금곡(金谷)ㆍ금계곡(金鷄谷)
옛날 글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문종곡이라 했는데 발음이 변하여 금마래골이라 불리운다. 또 마을 앞 산의 모양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하여 금계골이라고도 불리우고, 앞산에 금이 매장되어 있어 금곡이라고도 부른다. 1935년 일본인이 금광을 개발 운영하기도 했다(장성도(71) 제보).금마라골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묘자리가 있으므로 금계골이라고도 불렀고 금곡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뒤 발음이 바뀌어 금마래골이라 부른 듯하다. 문종곡(文宗谷)은 1700년경에 야성 정씨(野城鄭氏) 종택이 영해로부터 이 마을에 입향한 이후 대대로 글 잘하는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글 잘하는 종택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정동춘(66) 1996. 11. 제보).글-금의 소리가 비슷하여 붙인 풀이로 보인다. 그럼 금마래의 마래는 무엇일까. 마래는 마루 곧 머리를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가마실 부분에서 풀이한 바 있거니와 거북을 검이라 하였는데 이로 보면 검-금-감이 모두 걸려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금마래-검머리-거북의 머리란 말이 된다. 곰토템에서도 곰의 머리는 아주 신성한 것으로 섬기는 대상으로 삼음을 알 수 있으니 거북이 신의 상징이라면 머리 또한 소중한 섬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마을의 본래 이름은 금마래골로 보인다. 이를 한자로 뒤쳐서 금곡 혹은 문종곡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문두들ㆍ문양마(文陽忖)ㆍ문양(文陽)
옛날 이 곳에 글방이 있어 한문을 많이 공부하여 글 잘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어 마을을 빛냈다 하여 문양 또는 문두들이라 부르고 있다. 땅 이름의 걸림으로 보면 문-물의 상관성이 있으므로 하여 물의 북쪽(陽)으로 마을이 생겨 남을 바탕으로 한 이름이다.
*배골ㆍ뱃골ㆍ이곡(梨谷)
가곡 안마을에서 동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계곡이다. 이 골짜기에는 배나무가 많았는데 배꽃이 만발하여 눈처럼 흩날렸으므로 이화낙지(梨花落地)라 하여 배골이라 부른다(조술영(67) 제보.옛날 오래된 족보의 묘지란에 보며 기운곡(其蕓谷) 또는 기운곡(起蕓谷)이라고 기록되어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다. 근래에 와서 뱃골이라고 하는데 배골이 변한 듯하다. 계곡의 산 102번지 하단부에 이화낙지(梨花落地)로 알려진 묘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 돌배나 무가 많이 자생하여 배나무와 관련을 보이는 지명이다(정재홍(59) 1996. 11. 제보).이곡은 배골을 한자로 뒤쳐 적은 것이니 한자의 뜻을 빌려다가 굳힌 이름이다.
*부처골(부채골)
통일 신라 시대에 중들마을에 절이 있었으며 서쪽 계곡에 석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처의 영검이 놀라워서 아들을 얻으려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한 노인이 부처에게 와서 빌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자, 화가 나서 노인은 말채찍으로 부처를 때렸다. 일설에는 칼로 내리쳣다고도 한다. 그러나 노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는 피를 토하고 죽었고, 지금도 그 부처의 머리가 갈라져 있으며 그의 무덤이 부처골 등마루에 있다고 전해 온다. 지금 이 석불은 도곡리 선운사에 보전되어 있다(정재홍(59) 1996. 11. 제보).
*숫두바웃골
문두들 건너편 동쪽에 있으며 이 산은 숫돌산으로 예로부터 연모를 가는 데 필요한 숫돌을 징으로 깎아 낸 곳이다. 숫돌바웃골의 소리가 와전되어 수두바웃골이 되었다(정동춘(66) 1996. 11. 제보).
*점골(店谷)ㆍ전곡(廛谷)ㆍ토점곡(土店谷)1930년경부터 옹기를 구워 파는 옹기점이 있었다. 옹기가 생산되고 옹기를 파는 옹기점이 있다 하여 점골이라 하였다(손수영(71) 제보).
*큰골(大谷)가곡에서 청기로 넘어가는 큰길이 있던 곳으로 골이 깊고 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화의 재산쪽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있으며 마차가 다닐 수 있던 길이기도 하였다(정재홍(57) 제보).
*새장골
큰골과 점골 사이에 있는 골로서 산이 둘러 있어 마치 새장의 모양과 같아서 새장골이라 하는데, 골 안에는 못이 하나 있고 집이 한 채 있다(정동국(54) 1996. 12. 제보).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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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40, 219) 일월면 가곡리(佳谷里)가 궁금니껴?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댁낄, 농갈래, 가꺼러, 파뭍채, 똘빼, 단지, 꼬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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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리(佳谷里)는
본새부터 영양군(북이면) 지역이였꼬
청기면으로 넘어가는 길맥(길목)에 있니더.
가곡(佳谷)이라 카기전에는
마실 모양이 풍수상 가마솥 가꺼러 생겼따꼬
가매실 혹은 가마실이라 켔니더.
그후 마실 경치가 댁낄로 아름답따 케가
가곡(佳谷)이라 부르게 됬따 카기도 하고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
점곡캉 가마실, 그리고 법곡의 일부를 엄친뒤
가마실캉 점곡의 앞뒤 이름을 따가
가곡이라 부르게 되었따 카기도 카니더.
(가마실ㆍ가곡ㆍ부곡)
야성정씨참판공종택캉 월잠고택이
있는데시더.
1600년경 야성정씨캉 한양조씨들이
들어와 집성촌을 맹글었니더.
마실 경치가 댁낄로 아름답따 케가 가곡
(佳谷) 혹은 가마실이라 카고
안뫁캉 뒷뫁으로 농갈래져 있니더.
안뫁은 굿뫁이라꼬 카기도 하고
구릉향촌이라꼬도 카니더.
글코, 뒷뫁은 두들뫁이라 카며,
풍수상 가마솥 가꺼러 생겼니더.
부곡(釜谷)은 가마실을 한자로 쓴거시더.
(금마래골ㆍ금마라골ㆍ문종곡ㆍ금곡ㆍ금계곡)
주곡리캉 이사져 있는 골짜기시더.
학문이 디게 잘하는 사람이 나는데라 케가
문종곡(文宗谷)이라 카다가
앞산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케가
금계골(金鷄谷)이라꼬 켔니더.
그후, 앞산에 금(金)이 파뭍채(매장되)
있따께가꼬 금곡(金谷)이라꼬도 켔니더.
금마라꼴은 금계포란형 묘자리가 있따고
금계골 또는 금곡이라 카다
발음이 바께가 금마래골이 됬니더.
(문두들ㆍ문양)
가곡마을회관캉 가곡경로당
그리고 영양유통공사가 있는 데시더.
과거부터 글을 배우는 곳이 있었꼬
학문 연마로 뛰어난 사람이 나는데라 케가
문양(文陽)이라 켔니더.
글코, 문두들은 언덕마실로 들어가는 데라꼬
문두들이라꼬 카니더.
(배골ㆍ뱃골ㆍ이곡)
가곡 안마실서 동쪼구로 건네 뷔는 데로
구름이 일어나는 계곡이라 케가
기운곡(基雲谷)이라꼬 카다가
똘빼낭기 쌔배꼬,
배꽃이 눈가꺼러 흩날리는데로
이화낙지(梨花落地)로 알려진
묘지가 있는데라꼬 배꼴이라 카니더.
이곡(梨谷)은 배꼴을 한자로 쓴거시더.
(부처골ㆍ부채골)
통일 신라 시대때 절캉 석불이 있었니더.
이 부처의 영검이 디게 놀라워
아들을 얻고자 기도하는 사람이 쌔배었는데.
한 노인이 와가 빌었찌만 얻지 못하자
말채찍으로 부철 때리고
칼로 내리처가 머릴 쪼가리 내뿌레가꼬
얼마 못가 피 토해 죽꼬
그 석불은 지금 도곡리 선운사에 보전되고 있는
석보여래좌상이라꼬 카니더.
글코 부채꼴은
음이변해서 부채꼴이 됬따꼬 카기도 하고
지형이 부채가꺼러 생겼따꼬
부채꼴이라 부른다꼬 카기도 하니더.
(숫두방구골)
문두들 건너편 동쪼구에 있꼬
숫돌이 나는 꼴짜기로
숫돌 방구꼴이 소리가 점차 바끼게 되가꼬
숫두바웃꼴(방구꼴)이 됬니더.
(점골)
단지캉 옹기등을 꼬오가(구워) 파는
옹기점이 있었따꼬
점골(店谷)이라 카기도 하고
같은 뜻으로 전곡(廛谷) 혹은 토점곡(土店谷)
이라꼬도 카니더.
(큰골)
가곡서 청기로 가는 큰길이 있꼬
봉화(재산)로 넘어가는 산길도 있니더.
글코, 골이 크고 찝따라타꼬
큰골(大谷)이라 카니더.
(새장골ㆍ조롱곡)
큰골캉 점골 새에 있는 골로
산이 둘러싸 있는게 새장가꺼러 생겼따게가
새장골이라 카니더.
조롱곡(鳥籠谷)은 새장골을 한자로 쓴거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