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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매일미사 스크랩 [대한문 매일미사_0813] 희망의 미친 존재감으로..
예수사랑 추천 0 조회 60 13.08.14 19: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한문 매일 미사 집전순서

 

 

         8/14(수)  수원교구        8/15(목)   인천교구      

      8/16(금)    예수회         8/17(토)                 

      8/18(일)   서울교구 등        8/19(월)    전주교구  

 

  2013_08_13_화

 

  +++ 함께 해 주신 사제 

   

  주례 : 유이규 신부(작은형제회)

  강론 :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 유이규, 김정훈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 서영섭 신부

  예수회 : 박종인 신부

  서울교구 : 임용환, 나승구 신부

  인천교구 김동건 신부

 

  +++ 함께 해 주신 수도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아씨씨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         성가소비녀회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살레시오 수녀회

  천주섭리수녀회                                   노틀담수녀회

  서울 베네딕도 수녀회

   프란치스코 정의평화 창조질서 보전위원회

 

 

 

 

 

 

 

희망의 미친 존재감으로.. 

 

                                         강론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가끔 제게 묻습니다. 어쩌다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냐고 말입니다. 사실 특별히 노동문제를 관심을 갖게 된 게 아닙니다. 물론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수도자로서 깊게 고민하며 살아갈 신앙의 주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속세를 떠난 수도자이기에 그저 기도하며 살아가는 영성이 깊은 수도자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일 따위는 나랑은 그리 상관없다며 기도하는 척하며 영성이 깊은 척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사제품을 받을 무렵 묘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사제품을 앞둔 부제라면 한번쯤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설렘보단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상상으로 제 자신을 불안함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이라면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과연 내 자신이 수도복을 입고 죽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겁이 많습니다. 아직도 공포영화를 보면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릴 정도로 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죽하면 사제서품 성구를 "두려워하지 마라" (애가 3,57)로 정했을까요? 이렇듯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 대해 온갖 고민과 걱정으로 두려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에 떨며 2010년 사제품을 받고나서 첫 부임지는 부산 대연동 우리 수도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아동 시설이었습니다. 사제품을 받으면 걱정과 고민 없이 아니 걱정과 고민이 있다고 해도 그까짓 거하며 굳건히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충만했었습니다.

 

그렇게 열정 가득함으로 나름 청운의 꿈을 꾸며 사도직임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웬걸 3개월 후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삶의 권태기가 찾아왔습니다. 사제품을 받으면 두려움과 열등감으로 가득한 내 존재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습니다. 사제품이 이 모든 걸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3개월 만에 사제로서 극심한 삶의 권태를 느꼈던 건 다름 아닌 이런 거였습니다. 가자마자 부산 수도원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경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아동 시설에서는 아이들 보육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살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늘 적자였고 이러한 궁핍한 살림살이를 이야기하면 같이 사는 형제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이야기 할뿐 살림 맡은 내가 알아서 할 거라는 눈치였습니다.

 

 

돈 걱정 안 하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머릿속엔 온통 살림이 적자인데 이놈의 돈 돈 돈타령하다 보니 정말 머리가 돈 사람이 될 거 같았습니다.

 

돈도 돈이었지만 더욱 힘들었던 건 장애아동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아동들과 사는 건 처음이라 시설에서 나름 배려해주었습니다. 정신지체이긴 하지만 시설에서 비교적 지능이 높은 아이들의 방을 맡게 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3개월 지내면서 욕심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사회복귀에 어려움이 없을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쉼 없이 아이들에게 반복 교육과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상하게도 이쯤이면 발전이 있어야 되는데 성장은 그렇다 치고 더딘 게 아니라 오히려 퇴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당근만 주고 채찍질을 안 해서 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체벌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매를 들면 긴장하기 때문에 놀라운 변화가 있을 거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과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사제로서의 기쁨보다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곤한 일상을 접하면서 내 삶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삶을 꿈꾼 게 아닌데 아이들을 키우지 그리고 돈을 벌어 살림을 하지 차라리 이럴 거면 결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푸념을 잔뜩 늘어놓으며 삶의 회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16월 중순경 생면부지인 수녀님에게 다급한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들을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경황없이 받은 전화라 대체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 새로운 부임지에서 아직 적응도 못하고 있는데 이런 일까지 신경 쓰기엔 여유가 없는 내 자신이라며 스스로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그냥 넘겼습니다.

 

그냥 넘기게 될 줄 알았는데 자꾸 수녀님의 목소리가 마음에 밟히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더욱 긴박했던 것은 그해 1차 희망버스 다녀간 후 공장 안에 있던 해고 노동자들과 85호 크레인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해 곧 강제퇴거 행정대집행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정대집행이 있기 전에 공장이나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공장에 도착하니까 정문은 이미 덩치는 산만하고 온갖 화려한 문신으로 장식한 건장한 청년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들이었습니다.

 

로만칼라를 한 내게 어떻게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순진하게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왔다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짜고짜 나이 어린 용역 친구가 내게 배를 들이대며 너 신부냐 난 부처다.’라며 조롱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온갖 욕설을 그 짧은 시간 내에 다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서웠습니다. 아니 무서움은 둘째 치고 인간에 대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는 용역들의 안하무인 한 행동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결국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서둘러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더 이상의 봉변을 당하기 싫어서 급하게 그곳으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날 저녁 고민이 되었습니다. 계속 그곳을 가야 되나? 괜히 가서 망신만 당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무엇보다도 용역들의 욕설과 폭행이 두려워 가기가 싫었습니다.

 

갑자기 두려움이라는 단어와 "두려워하지 마라"는 제 사제서품 성구가 떠올랐습니다. 대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되는 걸까? 불의한 광경과 고통을 받고 있는 해고노동자들을 보고서도 아주 잠깐의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며 그 알량한 내 자존심만을 생각하는 무한 이기적인 저의 모습이 갑자기 질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밤새 두려움이라는 화두로 묵상을 하면서 참 불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피하고 싶은 예수님의 마음처럼 저 역시 피하고 싶었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러기엔 해고노동자들과 가족의 고통스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오죽하면 내게 와서 살려달라고 할까? 이들을 외면한다면 강도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웃을 보고서도 외면한 사제와 무엇이 다를까?

 

그러면서 또렷하게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를 말하고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느님의 가르침이고 하느님의 질서이고 복음의 가치이기에 두려움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비겁함이라는 것, 즉 생을 마치고 훗날 내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을 했냐? 라는 질문을 받고 세속을 떠나 살아가는 수도자이기에 침묵했습니다.’ 라는 초라하고 궁색한 답변 밖에 하지 못하는 그 비겁함을 두려워해야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대한문에 있는 것도 그런 마음의 연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이곳 대한문에 있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세상은 가난하고 힘없는 해고노동자들을 업신여기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권리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강론을 준비하면서 깊은 밤을 길게 보낸 건지 이른 새벽을 일찍 맞이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아프면서도 정신이 맑은 이 불편한 관계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감정은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면서도 그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잃어버린 양처럼 대한문 거리에 있는 쌍차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 가톨릭 신자라면 무척 잘 아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애쓰시는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너희들이 감히 내 사랑을 알아?’ 라고 당신 사랑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책망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있고 더욱 사랑하고 싶기에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간절한 말씀이십니다. 사랑의 완전한 결정체이며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사랑에 있어 미친 존재감인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애간장을 녹이는 사랑고백입니다. 오늘 다시금 사랑이라는 말에 떨림과 설렘을 느껴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았다.”(창세 1,31) 라는 말씀은 우리 인간을 바라보기에 좋은 장식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스럽게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우리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고스란히 심어져 있기에 우리 모두는그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것도 나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여길 때입니다. 그만큼 견디기 힘든 상실감은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잃었다고 해서 포기해버리면 더 힘들어지는 게 사랑입니다. 잃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사랑, 바로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곳 대한문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고만 있을 거냐고 말입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을 거 같은 답답함에 대한 푸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힘이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힘이 없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비록 힘은 없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희망은 희망하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희망하며 희망찬 세상을 위해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더디게 온다고 해서 희망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조급한 마음을 뒤로하고 희망을 기다렸으면 합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가는 기다림이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희망의 미친 존재감인 것처럼 우리 역시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만들어가는 희망의 미친 존재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용역깡패를 부르는 자본과 경찰에 홀로 맞서는 노동조합

 

 

           3M지회 해고노동자 이야기

박근서

 

반갑습니다. 저는 저 멀리 전남 나주에서 올라온 한국3M이라는 회사의 지회장을 맡고 있는 박근서라고 합니다.

3M이라고 다들 한 번 들어보셨죠? 쑤세미도 있고 선팅지도 있고요, 마스크도 있고 연마제도 있고 테이프도 있고 의료용품 반창고부터 해가지고 그 외에서만 판매되는 제품이 한 2만점이 됩니다. 그리고 한국3M100% 미국자본이구요. 서울에 본사가 있고 전남 나주에 있는 공장이 너무 규모가 커져버렸어요. 사업이 잘되어가지고 경기도 화성에 2003년도에 공장을 또 하나 짓습니다.

 

전체직원 1,600명 정도 되고요, 연매출이 한 2조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1년 한 영업이익이 천억 정도 됩니다. 천억이란 돈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는데 매스컴에 보면 외환은행 팔아가지고 4천억 손해 봤다고 그러는데 저희는 일 년에 천억씩 그 돈이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굉장히 알짜배기 회사예요. 국내에서 투자한 것도 아니고 미국놈들이 투자해서 한국에서 그렇게 벌어가고 기술력은 가공만 합니다. 원기술력은 미국에서 다 가지고 있고 그 다음단계 수순부터 제조공장에서 만들어갑니다.

 

저희회사 본사직원들의 보통 학력이, 영어가 안 되면 안 되고 SKY 출신들이 아니면 뽑지를 않습니다. 홈페이지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신입사원 연봉이 한 사천만원 됩니다. 작년에는 매스컴에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현대자동차보다 더 높게 나온 적도 있어요. 굉장한 글로벌 기업으로 전세계 한 60여개국에 3M이 있고요. 미국에 본사가 있는 굉장히 큰 기업니다

 

 굉장히 좋은 회사라고 해서 2000년도에 입사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현장직의 사정은 전혀 다릅니다. 거기에서 생활하는 아주머니들은 계약직으로 최저임금을 받고 계시고, 사원들은 당시에 한 달에 잔업특근을 한 300시간씩 했습니다. 300시간이면 1년에 한 10일정도 쉬고,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로 일을 했던 공장입니다. 돈을 안 벌 수 없죠. 그렇게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조합원들이 폭발 단계까지 갔어요.

 

 

그러다가 이 노동조합이라는 구심점을 찾게 되었어요. 그래서 2009514일날 노동조합을 저희들이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속노조에 가입해서. 저희들은 정말 노동조합을 만들면 어떤 세상이 열리고 다 잘 될 줄 알았어요. 우리가 못하는 소리도 회사에 할 수 있고 그랬는데 저희들 생각하고는 다시 또 정반대였어요.

 

소위 말하는 쌍용자동차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겠지만, 노종조합을 만들면 회사가 가장 먼저 하는 게, 이명박 정권 때 2009년도에는 그랬거든요. 용역투입해가지고 현장에 한 100~150명씩 관광버스로 내려가지고 당시에는 그 천막을 쳐놓고 있으면 커터칼로 다 찢고 조합원들 다 두들겨 패고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왜냐면 당시 저희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불과 몇 주가 되지 않아서 쌍용자동차 사태가 터지거든요. 그러면서 저희들이 쌍용자동차 영상을 보는데 조합원들이 그렇게 두들겨 맞는 거예요. , 노동조합을 만들면 저렇게 두들겨 맞는구나-라고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처음 노동조합을 접했으니까. 너무 억울한 거예요.

 

용역들한테 두드려 맞고 용역들이 한 일 년 반 동안 상주를 해요. 그래서 현장에서 일하는 경기도 화성과 전라도 나주에 있는 조합원들 처음에 한 97%정도 다 가입을 시켰는데, 1년 반 정도 지나니까 한 400여명이 탈퇴를 합니다. 견딜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저도. 노동조합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요.

 

현장에 용역들이 순찰을 합니다. 그러면서 뭐 조합원들이 일하고 있을 때 쳐다보면 아시겠지만 십팔십팔 욕설을 하고, 그리고 조합원들이 잠깐 실수를 하면 넘어져서 쇼를 해서 고소고발을 하고, 회사가 징계를 하는데 1년 반 동안 한 달에 한 두 세 번 징계를 해요. 조합원들 230명에 대한 징계를 합니다. 그 일 년 반 동안 19명이 해고를 당하고요, 정직 한 6개월 3개월씩 때려버립니다. 정직을 때리면 임금이 안 나오고 해고를 당하면 굉장히 고달픈 생활을 하거든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할 수가 없고, 회사를 출입하는데 용역들이 줄을 서있어요. 2열로 줄을 서있고 고개 빳빳이 들고 회사에 들어가면 용역들이 고개를 숙이고 다니라고 시비를 겁니다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진짜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저희들이 2010년도에 용역들한테 두들겨 맞는 폭력대참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용역들을 대상으로 저희가 고소고발을 하는데, 그 용역회사가 여러분들이 들어보셨는가 모르겠지만 <컨택터스>라는 데예요. <컨택터스 용역>이 우리 회사를 시발점으로 해서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3M에서 본보기로 정말 잘해서 이런 이미지를 살려서 <컨택터스>가 퍼져나가거든요. 우리가 고소고발을 한 것으로 <컨택터스>가 영업정지를 당합니다. 그러는데 그 놈들은 또 사업장을 내서 또 영업을 하는 거예요. 저희들은 그 당시에 <컨택터스>가 뭔지도 몰랐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SJM사태가 터지고 한겨레 기자한테서 전화가 오더라고요.

“3M지회장님, ‘컨택터스가 지금도 쓰리엠에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 ‘컨택터스가 뭡니까?”

, 모르시냐고 <컨택터스 용역> 그 회사를 모르시냐고, 그래서 직원들 명찰을 봤더니 용역들 명찰에 <컨택터스>라고 적혀있는 거예요. 아 이놈들이 그 놈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계속 영업을 할 수가 있죠?”라고 물어보니까 다단계 식으로 영업이 취소되면 또 다른 이름의 명의로 영업을 하고 그러는 겁니다. 만약에 2010년도에 <컨택터스>가 영업정지를 당해서 정말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그렇게 만들었더라면 SJM사태가 터지지 않았을 것이고 용역들의 이런 폭력사태가 번지지 않았을 겁니다.

 

 

3년을 투쟁을 하니까, 670명의 조합원들이 현재는 한 120명 정도 남았거든요. 현장의 노-노간 갈등이 처음에는 굉장히 심했어요. 형제간에도 형은 탈퇴를 하고 동생은 조합원으로 남고.. 뭐 사돈지간 ... 왜냐하면 전남 나주라는 곳이 조그만 시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시입니다. 그런 지역에서 모든 지역민들을 뽑아서 키우다 보니까 그런 거죠. 그래서 뭐 조합원들이 탈퇴할 때는 울며불며 나갑니다. 죄송하다고. 그런데 어쩔 수 없다고...

 

근데 저희들이 노동조합을 처음에 만들고 그래도 잘했다고 하는 것이 있어요. 지금은 여성분들이 거의 다 탈퇴를 했는데, 계약직으로 있던 여성 조합원들을 저희가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해서 정규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상여금도 받고 진급도 할 수 있게. 그런데 그 분들이 거의 다... 모두 다 탈퇴를 했어요.

왜나하면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특근을 안 하잖아요. 그런데 회사가 돈이 많다보니까 주말에 특근을 하는 사람들은 신세계 상품권 5만원짜리를 하나씩 줍니다. 주말특근수당을 주면서 상품권 5만원짜리를 주잖아요. 그러면 여성분들이 토요일 일요일 나와서 일합니다. 소위 말하는 아주머니들이. 그러면 일주일에 십만원을 더 벌어요. 한달이면 40만원을 더 가져가는거죠. 돈에 이제 눈을 뜬거죠.

 

조합원들은 임금을 올려주질 않습니다. 그리고 비조합원들은 매년 임금 인상 폭을 굉장히 높게 줍니다. 그래서 그 임금수준이 조합원들하고 비조합원들이 한 천만원정도 차이가 납니다.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돈을 버니까 투쟁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조합원들은 해고자들이 있기 때문에 싸워나가고 있고, 현재 4년 동안 300차례 넘게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단협안을 맺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너무나 억울했어요. 너무나 억울해가지고.... 그 억울함의 표출이...

영화를 보거나 하면 경찰들이 조폭들을 잡으면 수갑 채워가지고 조폭들은 꼼짝 못하고 조사받고 그런 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저희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희들은 너무 억울하고 죄 지은 게 없거든요. 죄 지은 게 없는데 경찰의 조사를 받고 검찰의 조사를 받으니까.

제가 한 일 년 반 동안 재판을 50차례 정도 받았습니다. 명예훼손부터해서 집회금지가처분 등 해서 뭐 12가지 재판을 회사가 걸어가지고 제가 법원을 다니는데, 회사가 교모하게 서울 남부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수원지방청에다가 계속 번갈아가면 뭐 다른 일을 볼 수 없는 거예요. 재판 때문에. 재판을 받으러 다니느라고.

 

 그런데도 회사 편을 들어줍니다. 정당한 노조활동으로 한 행위에 대해 회사가 10건을 걸면 한 7번은 회사 손을 들어줘요. 저희 조합원들로 인해서 금속노조도 돈을 정말 많이 썼습니다. 10억 이상 썼을 거예요. 벌금부터 해가지고..

용역들하고 다투면서 조합원들이 두드려 맞고도 벌금을 내고! 걔들이 먼저 고소를 하거든요. 심지어는 뭐 변호사까지 간 직원도 있거든요. 용역들한테 맞고.. 두들겨 때렸으면 억울하지나 않죠. 그래서 그런 상황을 거치면서 한 6개월 전부터는 조합원들 탈퇴가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악이 받혀서, 악으로 깡으로 한 120명이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뭐 어디 가서 호소할 곳도 없고, 시민들은 어떻게 보면 이런 조끼를 입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을 느끼고 그러거든요. 이야기를 해보면 굉장히.

이렇게 대한문처럼 호응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조그만 지역 시인데 조합원들이 나가게 되면 시민들이 그러거든요. “! 직장이 있어가지고 월급 준 것으로 감사를 해야지 니들이 뭔 투쟁을 하느냐

그래서 부모들도 쫓아다니면서 말리고... 일가친척들이......워낙 회사가 홍보를 하거든요. 그러면 조합원들 너무 괴롭죠. 내가 떳떳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서 고개를 잘 못 들어요. 아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잘못하고 있는게 아닌데도 지역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니까 그런 세월을 한 4년 넘게, 천 육백 몇 일 된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해고된 동지들 그리고 현장에서 투쟁하는 저희 조합원들의 마음이 굉장히 피폐해져 있어요. 정신적으로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누구하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상황들..

 

 

 

그리고 당시 저희 회사 사장이 주한미상공회의소 부회장과 회장을 하고 있던 미국놈이거든요. 매스컴에 보면 맨날 이명박이하고 같이 옆에 앉아가지고 사진찍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주한미국 상공회의소하면 우리나라 청와대 이상 가는 빽을 가지고 있어요. 주한미상공회의소가. 거기 회장을 하고 부회장을 했으니까 얼마나 빽이 좋았겠습니까.

 

저희들도 뭐 추측이지만 청와대의 개입설 노동조합을 깨트리기 위한 청와대의 개입설- 굉장히 많이 지배를 했었습니다. 아무리 검찰청이나 이런데 저희들이 고소를 하고 뭔가 제기를 하면 다 묵사발이 되고, 저희들이 두들겨 맞아가지고 심지어 경찰서에 고소고발을 해도 경찰이 조사를 안해요. 정말 생각도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 정말 일반 시민들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왜 쟤들이 저렇게 하나 알지를 못하지요.

 

매년 서울 해고자들과 같이 길거리를 헤매면서 투쟁을 합니다. 청와대도 갔다가 국회도 갔다가 어디 뭐 당사도 갔다가 민주당사·새누리당사 할 거 없이 그렇게 4년 넘게 투쟁을 해갖고요. 이번 7월에 부당노동행위 그리고 회사 사장에 대해서 구속 수사하라는 노조문건들을 가지고, 저희 회사의 노동청 관계자들에 대한 뇌물수수혐의를 저희들이 증거를 확보해서 검찰에 기소를 해놓은 상황입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이렇게 투쟁을 하고 있으면 같이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들이 굉장히 많아요. 금속노조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에도. 그래서 저희들이 그런 사업장들하고 함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외롭진 않습니다. 다들 이야기해보면 처지가 똑같아요.

모든 회사들이 다 용역깡패를 동원을 했고 복수노조를 만든다거나, 정리해고를 하고 노조파괴를 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 정부는 정말 왜 노조파괴를 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나 궁금하기도 하더라고요. 이명박정권 때는 명박이 사위라거나 자식들이 다 누굽니까? 삼성전자에 있고 한국타이어에 근무하고 자식들, 친인척들 모두 이런 놈들이 문어발처럼 기업에 다 들어가 있거든요. 이런 놈들의 꿈이 뭐냐면 노동조합이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놈들의 꿈이거든요. 그럼 이명박이 해줄게 뭐가 있냐? 노동조합을 없애주는 거. 내 자식들을 위해서!

 

그래서 이명박이 5년 동안 그것만 한 겁니다. 물론 4대강도 망쳤지만 더 중요한 건 이명박의 꿈은 자자손손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자본가들을 잘살게 해주는 것. 그래서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서, 특히 금속노조를 깨면 사업하는 자본가들 마음대로 할 수 있죠.

노동조합이 없으면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어떻게 싸울 수가 있습니까? 회사를 상대로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상황이 안 좋아서 같이 투쟁을 하고 있는 동지들이 있어요. 오늘도 대경찰청 압박투쟁을 전개해나가고 있거든요. 검찰에서 정말 해고된 동지가 법원부터 해가지고 1차 법원, 행정법원부터 해서 고등법원까지 승소를 해가지고 대법원에서 져버린 그런 사례도 있고, 정말 부당노동에 의해서 증거자료 입수해가지고 용역깡패들한테 맞아서 다 피투성이가 되가지고 증거자료 냈는데도 검찰이 다 취하를 해버립니다. 왜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느냐...

 

그렇게 같이 내일까지 23일 투쟁하고 있는 저희 3M도 있지만, 쌍용자동차도 있고, 그런 사업장들을 제가 조금만 소개해드릴게요. 대표자로 나왔으니까.

콘티넨탈 사업장이 있습니다. 박 수 한 번만 쳐주세요. 그리고 유성기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KEC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보워터 코리아, 보쉬전장 함께 하고 있고요 상신브레이크, 발레오 만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포레시아, 풍산 마이크로텍, 그리고 콜트 콜텍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그네틱스, 쓰리엠 화성·나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엠도봉정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쌍용차 함께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죠? 같이 이야기해보면 너무나 가슴 아파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지역민들 호응을 얻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아직까지도 우리나라가 조금은 멀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노동자들 마치 돈만 보고 투쟁을 하는 것처럼...

결국은 다 해고자들이거든요. 저희가 돈보고 투쟁을 하는 것도 없고, 정말 단 하나 바램이 있다면 회사 들어가서 일하면서 내가 일하는 만큼 댓가를 받는 것! 그것을 원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고, 앞으로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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