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대명동 유래 (1) 연혁 대명동 일부를 1980년 4월 11일, 남산동에 편입시켰다. 1985년 11월 1일에 대명1동과 대명 6동을 대명 10동과 대명 11동으로 분동, 1980년 4월 11일, 대명 11동을 대명 4동으로, 대명 10동을 대명 6동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대명동이라는 동명(洞名)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에서 연유된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작전계획수립에 항상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으며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으로 왔다.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대구시내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해 주었다. 그 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러나 고향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 : 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여기저기에 묻어 애총을 마련했는데 여우들이 이 무덤을 파헤치려고 몰려들어 "야시골(호곡)"이라는 이름도 붙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살던 한 여자 몽유병 환자가 밤만 되면 나타나 무덤 사이를 여우처럼 헤매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 지나가기를 두려워하였고, 이로써 '야시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일설도 전해지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새못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여우가 살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④ 서괘진(西掛津) : 남구 대명 9동의옛이름은 서괘진이라고 한다. 괘진이란 지명은 이곳을 세거지(世居地)로 정한 두사충이 이곳이 강가는 아니지만 모양이 흡사 강의흐름과 같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다고 해서 괘진(掛津)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괘진과 동괘진의 분기점은 현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를 기점으로 서편이 서괘진이요, 동편이 동괘진에 해당되는 곳이다.
서괘진은 옛날 안지랑골 또는 안지랭이로 불리는 곳이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 골짜기에 안심하고 숨어 지내다가 갔다는 데서 고려 때부터 안지랑골로 불리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날의 서괘진인 이곳은 앞산의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를 품고 있어서 대구 시민들의 휴식처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 못을 만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따른다. 조선시대 말엽 이 부근에 한 고관이 살았다. 어느날 도사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며 유심히 지세를 살피더니 고관집에 들어가 "나으리, 저기 보이는 저 넓다란 터에는 절대로 집을 세우지 마십시오. 그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근심될 일이 생깁니다. 그곳에 12년을 걸려 큰 못을 만든다면 거꾸로 나라에 큰 경사가 생길 것입니다." 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다.
고관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워낙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긴다면 재산을 아끼고 수고를 하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곧 사람들 모아 못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나라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관이 자기 개인 재산으로 일삯을 주며 시키는 것이다. 수백 명의 일꾼이 눈비를 가리지 않고 땅을 파고 파낸 흙을 모아 못둑을 만들었다.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도 생기고 필요 없는 못을 파서 뭘하느냐 부령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고관은 속짐작만 할 뿐 왜 파는지 아무런 설명없이 12년을 끌어 커다란 못을 완성했다. 못이 완성되자 대덕산 등 주위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잡아 가둠으로 여름 장마철에는 홍수를 면하게 되었고 가뭄때는 그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으니 국가적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이 전설은 농업을 위해 못을 만들 때 그냥 단순히 농사만을 구실로 내걸어서는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선못은 그 뒤부터 대명동 일대 수십만 평 논밭의 수원지 구실을 했고 장마철에는 홍수조절 역할을 했다. 대구시가 팽창하여 이 못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던 논밭이 모두 택지로 바뀌자 못은 필요 없게 돼 매립공사가 시작됐고 시장, 주택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못은 없어졌지만 영선(靈仙)이란 이름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산마루에 일본인들이 충혼탑을 세워 일본제국주의에 충성을 강요하는 장소가 되면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 충혼탑은 없어지고 6.25 때 현재 경북잠업검사소 자리에 UN군으로 참전한 미군(美軍) 통신소가 주둔하였다가 휴전 후에 철거하였다. 1956년경 도시 계획에 의해 남문시장에 형성되었던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철거민들의 임시 이주처로 이 동네가 형성되었고, 옛날 충혼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마을(탑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어 지금도 탑마을로 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장등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을 도촌이라 하였는데, 살고 있는 마을 주민 중에도 都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 부락주민 70%가 도씨성) 도촌이라고 불리어 졌다고 하고, 이조 중엽1600년경 대구지방에 무역을 교역할 때에는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현재의 화원유원지 부근에 대구 상인들과 상거래를 형성하였다.
1700년경 갑자기 홍수로 인하여 낙동강물이 범람하여 상선이 정상적으로 운행을 할 수 없어 배가 대피하던 중 배의 일부가 대명천 부근에 정착하였는데 낙동강물이 줄어들면서 배가 다시 강으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 돛대가 걸려서 가지 못했다 하여 그 부근 마을을 도촌(현재 파크 맨션 뒷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둘기촌 : 현재 대명 4동으로, 지금부터 200년 전 정조 12년 이마을 전주 이씨 이양종이 이 마을에 감자를 심어 전국 식량배급을 확대 실시코자 하였으나 당시 먹을 것이 적고하여 걱정하던 중 갑자기 까마귀떼가 모여들어 곡식을 해침에 식량난은 더 심했다. 마침 비이기라는 무당이 굿을 하여 이틀만에 까마귀 떼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 때부터 비둘기촌이라 부렀다. 비둘기촌은 무당의 이름이 飛자와 二자를 사용해서 처음에는 비두촌이라 하다가 옛이름을 따서 비이기를 비둘기라 하여 비둘기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