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 : 2001. 6. 1
수록 : 군사논단 2001년 여름호
(한국 군사학회)
국방일보
韓國戰爭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실체는 무엇인가 |
약 력 ◦3사 제11기 임관 ◦경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경기대학교 통일안보 복지대학원 수료 ◦육군대학 정규37기 수료 ◦육군대학 교관․교육 통제장교 ◦제21사단 수색대대장․군수참모 ◦육군본부 편제 총괄장교 ◦제61사단 작전참모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연구원 |
陸軍 中領 崔容鎬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목 차 1. 서 언 2. 한국전쟁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주장 3. 전쟁 전후의 상황과 불가사의(不可思議) 4. 결 언 |
Ⅰ 서 언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던 38선의 전 전선(戰線)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남침 3일 만인 6월 28일 01시,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11시에는 중앙청을 비롯한 서울 시가지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가 단 3일만에 점령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북한군이 종횡무진으로 국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한군 자체의 능력보다는 남한의 전쟁대비태세에 보다 더 큰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점은 필자(筆者)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당시 남한의 국군 지휘부는 북한군의 남침을 불과 15일 앞두고 지휘부 및 예하 사단에 대한 대규모의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 또한 남침 하루 전인 6월 24일 00시 부로 그 동안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으며, 이날 저녁에는 장교구락부 개관식을 여는 등 목전(目前)에 닥친 전쟁과는 동떨어진 조치들을 잇달아 시행하고 있었다. 이로인해 전선의 방어진지에는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북한군의 전차(戰車)를 막을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되지 못하였으며,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군의 전차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국군의 방어진지를 유린(蹂躪)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겹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이 같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과 직후의 초기작전상황을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많은 분야에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의문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본고(本稿)는 당시 상황요인과 전쟁을 지도하였던 전쟁지도부의 조치사항을 중심으로 일부 참전용사 및 단체에서 제시하고 있는 당시의 불가사의한 의문점들을 규명해 보고자한다.
Ⅱ 한국전쟁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주장
1.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부 군 원로들의 주장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당시에는 대전에 주둔하고있던 국군 제2사단의 사단장이었으며, 휴전 직후인 1956년에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던 창군의 원로인 이형근(李亨根) 장군은 그의 자서전『軍番 1번의 외길 人生』에서 “6.25 당시 육군 지휘부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제기하고 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전후하여 발생하였던 일련의 문제점들이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방어태세 하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 하에 그가 제기한 10대 불가사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선 부대의 남침 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6.25 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이다.
셋째, 6월 13~20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이다.
넷째, 6월 11일부터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6월 23일 자정에 해제하였다.
다섯째, 육본은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및 외출․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다.
일곱째, 병력을 서울북방에 축차(逐次) 투입하여 장병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했다.
여덟째, 6월 25~27일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하였다.
아홉째, 우리측의 한강교 조기폭파다.
열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이다.
이상과 같은 한국전쟁 초기에 발생하였던 10가지의 의문점들을 10대 불가사의로 명명하여 제시한 이형근 장군은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의문점에 대한 확증을 제시할 것으로 믿는다”면서 “바로 그런 증언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이형근 장군이 제시한 10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사를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임에 틀림이 없으며, 보다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러시아 국립문서 보관소 한국전쟁자료의 기록
1950년 당시의 소련과 북한은 남한의 군사력 실태는 물론이고 남한정부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정보 및 첩보사항을 거의 실시간에 입수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예를 든다면, 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 쉬티코프는 1950년 1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의 주제 하에 열렸던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국무위원의 발언내용을 1950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 보고한 바 있다. 다음은 쉬티코프가 모스크바에 보고한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이다.
이범석 : 영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것은 영국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승인한 것과 같습니다. 오래지않아 미국도 이 문제에서 영국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중국을 내버려 둔 것처럼 대만도 내버려 둘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은 국민당정부의 운명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미국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 자신이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그에 의거하여 남북의 통일을 평화적 방법으로 완성하여야 합니다.
---중략---
신성모 : 미국은 전쟁에서나 우리나라의 평화적 통일 문제에 있어 우리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우리가 자체로 해결하여야 하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최종적인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승만 : 현재 국제정세는 전적으로 미국과 소련사이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정치적 상황은 우리에게 극히 불리합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지 않으려 한다는 의향을 보였는데, 다행히도 남한과 일본이 가까워 졌음으로 미국은 일본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남한을 방기(放棄)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일격으로 한국통일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합시다. 그러나 일본문제가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정세가 또다시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문제가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일본정부와 미국과 함께 반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소련과 북한의 정보수집 능력이 남한의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바로 이 같은 사실이 남한의 내부에 소련 또는 북한의 동조자가 침투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한편 러시아의 국립문서 보관소의 자료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남침계획을 협의해 나가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데, 동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기간 중 김일성은 3차례에 걸친 스탈린과의 면담을 통하여 한국전쟁에 관련된 사항을 최종적으로 협의하였다. 이들이 합의한 내용은 첫째 북한의 군사력을 증강하고, 둘째 대남 평화통일을 제의하며, 셋째 남한에서 평화통일의 제의를 남한에서 거부한 것을 빌미로 전투행동을 개시한다는 소위 무력통일 3단계 계획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무력통일의 자신감을 주는 요소 중 한가지로 “남한의 군 내부에 많은 동조자와 유격대가 활동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던 점이 또한 이형근 장군이 제기한 “육군의 지휘부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Ⅲ 전쟁 전후의 상황과 불가사의(不可思議)
한국전쟁 초기작전시 발생하였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 남한 내부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느냐’의 문제와 함께, 당시의 특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 조치사항을 면밀히 검토 해야할 필요가 있다. 당시 상황을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결코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의 정치적 환경과 주한 미 군사 고문단의 역할도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1. 주요직위자 인사이동의 배경과 당위성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1월 30일 법률로 확정 공포된 국군조직법에 의해 제1대 육군 총참모장에 건군(建軍)의 대부(代父)인 이응준 소장이 12월 15일부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육군은 조직체계를 정비하면서 전력증강을 위한 조치들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며,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신생독립국가의 빈약한 재정과 인적자원을 가지고서는 군의 전력증강도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38선에서는 쌍방간에 빈번한 충돌이 발생하여 국지전쟁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또한 다수의 후방지역에서 발생한 무력폭동은 군의 체계적인 전력증강을 위해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군의 지휘부가 구성되자 말자 준 전시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서 춘천에 주둔중인 제6사단의 2개대대가 집단월북을 감행함으로써, 1949년 5월 8일 이응준 총참모장이 지휘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재임기간은 5개월이 채 못되었다. 군의 원로인 57세의 이응준 총장이 물러나자, 제2대 총참모장에는 34세의 채병덕 소장이 보직되어 육군은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2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역시 원로그룹인 김석원 제1사단장과의 불화로 1949년 9월 30일 물러나게 됨으로써, 그의 재임기간 역시 6개월이 채 못되었다. 이어서 제3대 총참모장은 57세의 원로인 신태영 소장이 부임하게 되었으나, 1950년 4월 9일부로 물러남으로써, 그의 재임기간 역시 6개월이었다. 원로그룹의 총참모장이 물러가자 또다시 35세의 채병덕 소장이 1950년 4월 10일부로 제4대 총참모장에 부임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이 제4대 총장으로 취임할 때의 육군본부 참모편성은 참모부장 정일권 준장, 인사국장 강영훈 대령,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 작전교육국장 강문봉 대령,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이었다. 그런데 채총장은 취임직후인 4월 22일 정일권 준장을 도미 유학차 해임하고, 제3사단장 김백일 대령을 작전참모부장에 기용하였다. 또한 제3사단장에 유승렬(유재흥 장군 부친) 대령, 제1사단장에 백선엽 대령, 제5사단장에 이응준 소장을 각각 보임 하였다. 이어서 6월 10일에는 건군 이후 최대의 인사라고 할 수 있는 5개 사단장과 육본의 2개 국장에 대한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육군은 지난 4월 22일의 인사까지 합할 경우 육본의 정보국장과 군수국장만을 예외로 하고 육본의 전체 참모와 전체 사단장을 바꿔놓은 것이다. 따라서 불과 15일 후의 발발한 전쟁 직전의 남․북 전쟁지도부는 표와 같은 편성을 갖게 되었다.
<도표#1> 한국전쟁 발발시 남․북의 전쟁지도부 편성
별지#1 참조 |
국군 조직법 제정으로 이응준 소장이 제1대 총참모장에 보임된 1948년 12월 15일부터 부터 전쟁발발 전까지 20개월 동안 4명의 육군 총참모장이 부임하여, 그 임기는 평균 5개월이었다. 또한 일선 사단장의 평균 재임기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잦은 인사이동의 배경에는 신생 독립국가의 기틀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태하에서 발생한 혼란한 상황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2대 총참모장에 이어 제4대 총참모장에 보임된 채병덕 소장이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배경으로 군의 지휘조직을 확실하게 정비할 필요성을 갖게된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세대교체를 포함하여 자신의 인맥을 구축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인사이동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규모의 인사이동 후 불과 15일만에 전쟁이 발발하였다는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적의 위협을 목전에 두고 그 같은 대규모의 인사가 필요했었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2. 북한의 남침징후와 비상경계령
다음의 문제는 북한에 대한 정보의 부재였다. 당시에 북한은 남한의 전투력을 남한의 지휘관들보다도 더욱 상세히 파악하고, “국군은 대전차 방어대책을 전혀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등 국군의 취약점까지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한인계 사단을 전환받고, 소련으로부터 다량의 전차를 도입하는 등 남침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49년까지만 하여도 근소한 우위에 있던 북한의 전투력수준은 1950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남한과는 견줄 수 없는 수준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반면 남한의 지도자들은 북한의 전력증강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확신을 가지고 대비책을 강구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배경에는 당시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주한 미 고문단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은 “미국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는 정치적 판단에 근거하여 전선에서 이루어지는 전술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군의 내부에서도 그들의 견해에 편승하여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의식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전선에서 보고되는 북한의 도발징후를 고문단에게 통보하여 고문단으로부터 “가치 없는 정보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들이 만연하였던 것이다.
한편 1949년 봄부터 38선 일대에서 시작된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은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 중의 일부는 육탄 10용사가 산화한 송악산 전투처럼 전쟁과 동일한 상황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다 여수, 순천, 대구 등의 게릴라활동이 위협적인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1949년 말부터는 북한군이 남침할 가능할 것이라는 풍문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어서 1950년이 들어서면서부터는 2월 위기설, 3월 위기설, 4월 위기설이 분분하였다. 이어서 1950년 5월 10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북한군이 38도선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다음날인 5월 10일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북쪽에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5~6월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북한은 1950년 6월 10일, 북한에 억류중인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과 남한에서 간첩혐의로 억류중인 김삼룡과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에 따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북한의 평화공세가 속임수일 수 있다”고 보고 6월 11일 16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을 발령하고, 특히 38선 일대의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위기설에 따라 육군은 그때마다 대기태세 또는 경계태세를 반복하였다. 이에 따라 4월 1일 이후 대기령(待機令)이나 경계령(警戒令)이 발령되지 않았던 기간은 4월 1일~6일, 5월 4일~8일, 6월 3일~10일 등 총 19일에 불과하였다. 결과적으로 비상경계령을 발령하여야할 사건이 수시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군은 계속된 비상경계령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너무 장기간 계속되는 비상경계령은 실효성이 없었다. 따라서 군은 비상경계령을 적당한 시기에 풀어 주고, 다시 발령하는 행정조치(行政措置)를 반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6월 11일부터 6월 23일의 기간 중에는 북한군이 38선상의 계획된 공격대기지점을 점령하고 공격준비를 완료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38선 일대의 국군 부대들도 북한군의 이상징후를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육군본부는 의정부의 제7사단 등 전선으로부터 이상징후에 대한 보고가 계속되자, 6월 24일 15시에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일반참모들이 긴급회합을 갖고 비상경계령의 재 발령과 휴가병력복귀 등의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회의에서는 정찰대를 포천․동두천․개성 등지에 파견하여 적정을 확인한 후, 다음날인 6월 25일 08시까지 보고하도록 지시하는 수준의 조치에 그쳤다.
한편 6월 24일 밤에는 육군본부의 장교구락부 개관식이 열렸다. 행사는 그 동안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가운데, 총참모장 채병덕을 비롯하여 수도권의 사단장과 육군본부의 주요 참모,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요원 등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파티는 22시가 넘어 끝이 났고, 일부 장교들은 시내의 업소를 이용하여 2차, 3차의 회식을 갖기도 하였다. 평소 같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국군은 지난 2년간에 걸쳐 계속된 공비토벌작전과 잦은 비상경계령으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와 같은 군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은 육군본부의 구내에 개관되는 ‘장교구락부’의 개관식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즉 침체된 군의 사기를 고양시킴과 함께, 6월 10일부로 일단락 된 새로운 지휘체제의 단결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은 비상경계령 하에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따라서 6월 24일의 비상경계령 해제는 행정적인 요인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같은 판단과 조치가 가능하도록 뒷받침해 주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미 고문관의 낙관적인 상황판단과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였던 것이다.
결국 6월 24일 00시의 비상경계령 해제조치는 6월 11일부터 계속된 비상경계령을 풀어주어 일정시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단계의 대비를 위한 조치로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쟁발발 당일의 전투준비태세에는 커다란 허점이 생기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던 당일 국군의 61개 대대 중 240km에 달하는 38도선 전방진지에 배치된 부대는 불과 11개 대대로, 1개 대대의 책임지역은 평균 22km내외였다. 여기에다 24일 00시 부로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많은 병력에게 그 동안 밀려있던 휴가 및 외박을 허용함으로써, 전선부대의 6월 25일 아침, 영내의 병력은 보직병력의 1/2~2/3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표#2> 전쟁발발 직전 육군의 편성 및 배치
별지#2 참조 |
3. 의정부 축선의 역습
전쟁에 임하는 어느 국가의 경우를 막론하고 수도(首都)가 적에게 함락된다는 것은 곧바로 전쟁의 패배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라의 대부분을 잃더라도 수도만큼은 최후까지 지키는 것이 일반적인 전쟁지도 지침이었다. 당시의 남한 정부 입장에서도 조선 500년간의 도읍지였던 수도 서울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발발직전, 또는 직후에 제기 되었던 ‘서울 사수론’은 피아의 전력이나 지리적 여건 등을 면밀히 분석한 전략적 판단 결과에 의하여 도출된 결론은 아니었다. 당시의 정치적 여건을 고려하여 발언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침 즉 “북한이 남침 시에는 반격으로 전환하여 통일의 호기로 삼는다”는 지침을 수행하기 위한 첫 번째 요소가 서울을 방어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이에 따라 전쟁발발을 전후하여 남한의 전쟁지도부에서 채택하고 있던 방어전략의 핵심은 “서울을 사수하는 것”이었으며, 서울사수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는 후방(서울․대전․광주․대구)있는 4개사단을 서울북방에 증원(增援)하여 ‘서울 북방에서 적의 위협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한편 남침하는 북한군은 “국군이 후방의 4개사단 등 가용전력의 대부분을 서울 북방에 증원하여 서울방어에 주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전쟁초기에 국군의 주력을 격멸하기 위해 제1군단을 서울 북방에서 공격하게 하고, 제2군단을 춘천-수원방향으로 진출하게 함으로써, “국군의 주력을 한강이북에 포위하여 격멸한 후 부산을 향해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전쟁지도부는 북한군이 “서울을 측방이나 후방에서 포위하는 방식의 위협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無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결과를 가정(假定)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지만, 교훈적 측면에서 “만약 국군이 당시의 의도대로 의정부 방어에 성공한 반면, 춘천축선에서 실패하여 북한군이 수원을 차단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개전(開戰) 초기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북한군이 그들의 계획(서울 포위)을 구현하기 위하여 의정부 축선에서 의도적으로 진출을 지체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예상치 못한 국군 제6사단의 선전(善戰)으로 “조공부대인 북한군 제2군단이 춘천을 돌파하여 수원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 좌절됨으로써 “한강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한다”는 북한군의 전략은 실패하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북한군의 의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남한의 전쟁지도부는 대통령의 ‘서울 사수’지침에 따라 후방지역의 가용전력 모두를 서울북방에 투입하게 되었다. 피아의 전력과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여 수립된 전략이라고 하기보다는 밀려오는 홍수를 막기 위한 임기응변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의정부로 달려간 당시의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부터 27일 창동방어선의 방문까지 7회에 걸친 현장지도로 오로지 의정부축선에 나라의 운명을 걸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지휘하는 총참모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의정부지구 전선사령관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긴박성으로 인해 의정부지역에서는 대대단위의 축차투입(逐次投入)으로 의정부축선의 반격작전이 감행되었다. 후방지역에서 도착한 부대들이 제대로 건제(建制)를 갖추기도 전에 도착한 순서별로 축차적인 역습을 감행함으로써, 이들의 역습은 ‘삽으로 홍수를 막는 격’이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의 긴박성을 충분히 고려한다 하더라도 의정부축선의 반격은 용병술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방책의 결정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표#3> 한국전쟁초기 육군의 증원부대 운용
별지#3 참조 |
4. 북한군의 서울진입과 한강교 폭파
한편, 의정부 반격이 실패하고 의정부방어선이 붕괴된 후인 6월 27일 01시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도 채 총장은 “서울을 고수한다. 반격으로 전환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으나, 신성모 장관은 수원으로 천도(遷都)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150만 서울시민을 어떻게 하겠다는 대책은 강구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03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대전)에 올랐다. 그리고 27일 06시에 정부가 “수원 천도”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비로소 사태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한편, 의정부에서 철수한 제7사단과 증원부대인 제2사단 등은 우이동-창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이마저도 6월 27일 10시에 무너짐으로서 인민군의 서울진입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채 총장은 이제까지 주장해오던 “서울 사수” 결심을 번복하고 신성모 장관에게 서울 철수를 건의하였다. 이어서 채 총장은 각군 본부를 시흥 및 수원으로 이동한다고 천명하였으나, 전선부대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한편, 미아리-회기동을 연하는 서울의 최후방어선에는 광주에서 이동한 제5사단이 전선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3,000여명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27일 19시경에는 북한군의 기마 정찰대와 함께 10여대의 전차가 수유리 방면으로부터 미아리를 공격하였다. 배치된 국군 부대들은 사력을 다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차를 막아내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28일 01시경 북한군 전차 2대의 미아리고개 진입을 허용하게 됨으로써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28일 01시 45분경 채 총장은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보고 받고, 전방부대 지휘를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맡긴 채, 자신은 용산의 육군본부를 떠나 시흥으로 향하였다. 이때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한강으로 이동, 대기하고 있던 폭파조에게 명령하여 28일 0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와 3개소의 철교를 폭파하고, 04시경에는 광진교도 폭파하였다. 폭파당시 한강인도교 위에는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이 엉겨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약 500~800여명이 한강교 폭파와 함께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파에도 불구하고 2개의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고 일부분이 폭파되는데 그침으로써 며칠 뒤 북한군 전차의 도강을 허용하게 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의 중심부에 돌입한 것은 28일 11시 30분경 이었다. 서울을 장악한 북한군은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각 경찰서에 들어가 정치범은 물론이고 일반 죄수까지 모조리 석방시켰다. 이들은 죄수들을 인민의 영웅으로 추켜 올리면서 인민군을 환영하는 선봉에 내세웠고, 소위 반민족주의자들의 색출에 앞장세웠다. 이어서 김일성은 28일 서울점령의 축하연설을 방송하고 서울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며, 위원장에 사법상 이승엽을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5. 한강교 폭파의 영향과 책임문제
한강은 서울 부근에서 강폭이 700~1,500m, 수심이 평균 3m에 달하여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는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역이었다. 당시 한강에는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인도교)와 경부 복선화 철교, 경인 상행선 철교와 하행선 철교, 그리고 광진교(인도교) 등 총 5개의 교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한강교 폭파당시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서울시민에 대한 대책이 전혀 강구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한강교가 폭파되면 한강이북의 국군 주력과 서울시민의 퇴로가 자동적으로 차단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6월 28일 02시 30분에 있었던 한강교의 조기폭파는 국군 주력의 붕괴와 함께 150만 서울 시민이 적 치하에서 3개월을 신음하게 만든 절대적인 사건이었다. 한강교가 폭파되자 건제(建制)가 붕괴된 국군은 야포, 박격포, 차량 등 주요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을 휴대한 채로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부대 단위로 도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개전 당시 10만 여명의 국군은 2만 5천 여명으로 급감 하게 되었다. 한강교를 폭파한 책임자는 당시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었다. 그러나 폭파의 시점을 결심하여 폭파를 명령한 것은 공병감의 상급 지휘관이었다.
결국 한강교 폭파의 책임문제가 대두되고 이를 규명하기 위한 군사재판이 부산에서 열렸으나 신성모 국방부장관, 장경근 국방부차관, 채병덕 총참모장 등 수뇌부에서는 “한강교 폭파를 지시한 적이 없다”라고 부인하는 바람에 최창식 공병감이 모든 책임을 지게되어 50년 9월 21일 부산교외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 후, 전쟁이 종결되고 정부가 안정을 되찾게된 1962년, 유족들이 청원한 재심요구에 의해 최창식 전 공병감에게 무죄가 확정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문제와 관련해서 실질적인 책임자는 없는 셈이다. 최창식 대령의 청원을 재 심의한 대법원에서 최창식 대령의 책임 문제만을 심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한강교 폭파의 책임소재’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의 전쟁지도를 책임지고 있는 국방부 장관과 총참모장이 전방에 배치된 군은 물론이고, 150만 서울시민의 생사가 달려있는 “한강교 폭파문제를 명확하게 조치하지 않았다”는 직무유기(職務遺棄)의 책임만큼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Ⅳ 결 언
한국전쟁시 국군은 의정부축선의 방어에 실패함으로써, 개전(開戰) 3일 만에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 준데 이어, 한강교 조기폭파의 여파로 인하여 국군의 주력이 조기에 붕괴되는 참패를 겪었다. 이형근 장군이 주장한 것처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10여 가지의 실책으로 인하여 북한의 기습을 허용하게 되고,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의 전투력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남침시 국군의 대응조치까지도 거의 유사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이 같은 배경에는 1949년에 있었던 2개대대의 집단월북사고를 비롯한 남한의 보안 및 대비태세가 미흡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으나, 남한의 내부에 침투해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역할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김일성이 주장하였던 것처럼 국군의 창군초기 군 내부에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통해 뿌리가 뽑혔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군내에 대규모의 공산주의 조직이 존재하기는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군의 지휘부에 소수의 통적분자(通敵分子)는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의 의사결정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응조치를 유도할 수 있는 조직적인 활동은 어려운 환경이었다. 또한 국군의 지휘부에 그와 같은 조직적인 통적분자가 남아 있었다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였던 시기, 또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진격하였던 시기에는 그 실체가 들어 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설령 그 시기에 감추어진 사실이 있다 할 지라도 5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는 자연스럽게 공개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최근에 공개된 러시아의 국립문서 보관 자료나 중국측의 자료 등에서도 그 같은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는 공개된 적이 없다.
이 같은 면에서 본다면 당시의 김일성은 박헌영이 주장하는 남로당의 실체를 과신하고, 그들이 남침할 경우 30만명에 달하는 남한의 동조자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남한의 실정을 자신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 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형근 장군이 주장한 것과 같은 10가지의 의문점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상황의 특수성을 면밀히 고찰한다면 국군의 초기작전 실패원인은 어떤 통적분자 몇 사람이 고의적으로 그 같은 상황을 유도해 냈다고 하기보다는 전쟁의 전반에 걸쳐 ‘준비된 공자(攻者)와 준비되지 못한 방자(防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일시적인 용병(用兵)차원의 문제가 아닌, 보다 구조적(構造的)인 시스템상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는 한국전쟁 직전과 직후의 초기작전에서 연이어 발생한 몇 가지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의문점들이 북한군의 남침을 도와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말았으며, 그 대가는 너무도 통렬하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실책(失策)을 용인(容認)하지 못하고 통적(通敵)의 측면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형근 장군이 불가사의(不可思議)로 명명한 10가지의 실책은 ‘우리가 잊지 말고 깊이 반성하여, 또 다시 그 같은 실패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교훈을 제시한 것으로 믿는다. 끝.
<도표#1>
전쟁초기 남․북의 전쟁지도부 구성 |
구분 | 직 책 | 계급 | 성 명 | 나이 | 전 경 력 | ||
한 국 군 | 대통령 | 이승만 | 75 | 독립운동 | |||
국무총리 | 신성모 | 59 | 영국상선 선장 | ||||
국방부 장관 | 신성모 | 59 | |||||
총참모장 | 소장 | 채병덕 | 35 | 일본군 소령 | |||
제1사단장 | 대령 | 백선엽 | 30 | 만주군 중위 | |||
제7사단장 | 준장 | 유재흥 | 29 | 일본군 대위 | |||
제6사단장 | 대령 | 김종오 | 29 | 일본군 소위 | |||
제8사단장 | 대령 | 이성가 | 28 | 왕정위군 소령 | |||
제2사단장 | 준장 | 이형근 | 30 | 일본군 대위 | |||
제5사단장 | 소장 | 이응준 | 59 | 일본군 대령 | |||
제3사단장 | 대령 | 유승렬 | 60 | 일본군 대령 | |||
수도경비 사단장 | 대령 | 이종찬 | 34 | 일본군 소령 | |||
독립 제17연대장 | 대령 | 백인엽 | 28 | 일본군 소위 | |||
북 한 군 | 내각 수상 | 김일성 | 38 | 소련군 소령 | |||
부수상 | 박헌영 | 50 | 남노당 | ||||
보위상 | 최용건 | 50 | 중국 제2로군 참모장 | ||||
총참모장 | 중장 | 남 일 | 36 | 소련군 대위 | |||
전선 사령부 | 사령관 | 대장 | 김 책 | 47 | 소련군 중령 | ||
참모장 | 중장 | 강 건 | 32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
제 1 군 단 | 군단장 | 중장 | 김 웅 | 중국 팔로군 연대장 | |||
제1사단장 | 소장 | 최 광 | 32 | 소련군 중위 | |||
제3사단장 | 소장 | 이영호 | 소련군대위(2차대전참가) | ||||
제4사단장 | 소장 | 이권무 | 36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
제6사단장 | 소장 | 방호산 | 34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
제105전차사단장 | 소장 | 유경수 | 35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
38경비 3여단장 | 소장 | 오백룡 | 39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
*제10사단장 | 소장 | 이방남 | 중국 팔로군 | ||||
*제13사단장 | 소장 | 최용진 | 39 | 소련군 대위 | |||
제 2 군 단 | 군단장 | 중장 | 김광협 | 35 | 중국 팔로군 | ||
제2사단장 | 소장 | 이청송 | 소련군 특무장 | ||||
제5사단장 | 소장 | 마상철 | 중국 팔로군 | ||||
제12사단장 | 소장 | 최 인 | 중국 팔로군 | ||||
766부대장 | 총좌 | 오진우 | 34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
549부대장 | |||||||
*제15사단장 | 소장 | 박성철 | 38 | 항일투쟁, 김일성유격대 |
*표시 3개 사단은 초기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음
**자료 출처 : 육군본부, 『한국전쟁사:요도식 요약전사』, 1983, p.41; 김행복, 『한국전쟁의 전쟁지도』, 국방군사연구소, 1999, p.34.; 북한연구소 『북한 인명사전』1996
<도표#2>
전쟁 발발 직전 육군의 편성 및 배치 |
작전참모부장 대령 김백일 | 육군 본부(용산) 소장 채병덕 | 작전국장 대령장창국(강문봉) | |||||||||||||||||||||||||||||||
인사국장 대령신상철(강영훈) | |||||||||||||||||||||||||||||||||
정보국장 대령장도영 | 군수국장 대령양국진 | ||||||||||||||||||||||||||||||||
제1사단(수색) 대령 백선엽 | 7사단(의정부) 준장 유재흥 | 제6사단(원주) 대령 김종오 | 제8사단(강릉) 대령 이성가 | ||||||||||||||||||||||||||||||
제11연대(문산) 대령최경록 | 제1연대(동두천) 대령함준호 | 제2연대(철정) 대령함병선 | 제10연대(강릉) 중령고근홍 | ||||||||||||||||||||||||||||||
제12연대(장단) 대령전성호 | 제9연대(포천) 중령윤춘근 | 제7연대(춘천) 중령임부택 | 제21연대(삼척) 중령김용배 | ||||||||||||||||||||||||||||||
제13연대(고랑포) 대령김익열 | 제25연대(의정부) 중령김병휘 | 제19연대(원주) 대령민병권 | 18포대대소령장경석 | ||||||||||||||||||||||||||||||
공병대 | |||||||||||||||||||||||||||||||||
6포병대대소령노재현 | 제8포병대대 | 16포대대소령김성 | |||||||||||||||||||||||||||||||
공병대대소령장치은 | 공병대대 | 공병대대 | |||||||||||||||||||||||||||||||
수경사(용산) 대령 이종찬 | 제2사단(대전) 대령 이형근 | 제3사단(대구) 대령 유승열 | 제5사단(광주) 소장 이응준 | ||||||||||||||||||||||||||||||
제3연대 중령이상근 | 제5연대(대전) 중령박기성 | 제22연대(대구) 대령강태민 | 제15연대(남원) 대령최영희 | ||||||||||||||||||||||||||||||
제8연대 중령서종철 | 제16연대(청주) 대령문용채 | 제23연대(부산) 중령김종원 | 제20연대(광주) 중령박기병 | ||||||||||||||||||||||||||||||
제18연대 중령임충식 | 포병대 | 보국대대 | 제1독립대대 | ||||||||||||||||||||||||||||||
포병대 | 포병대 | ||||||||||||||||||||||||||||||||
제17독립연대(옹진) 대령 백인엽 | 육군사관학교(태능) 준장 이준식 | 보병학교(시흥) 대령 민기식 | 공병학교(김포) | ||||||||||||||||||||||||||||||
통신․헌병․자동차․군악․경리․병참․정보․군의학교 | |||||||||||||||||||||||||||||||||
기갑연대(서빙고) 대령 유흥수 | 육군참모학교(서빙고) 소장 김홍일 | 포병학교(용산) 중령김계원 | |||||||||||||||||||||||||||||||
청년 방위대 |
*자료출처 : 육군본부, 『한국전쟁사, 요도식 요약전사』, 1983, p.25; 김행복『한국전쟁의 전쟁지도』, 국방군사연구소, 1999, p.73.
<도표#3>
한국전쟁초기 육군의 증원부대 운용 |
도착 순서 | 증원 부대 | 이동구간 | 도착/배속 일 시 | 피 증원 부 대 | 운용 내용 |
1 | 수경사 제3연대 | 서울→의정부 | 25일 아침 | 제7사단 | 주력은 송우리방어, 1개대대 예비 |
2 | 수경사 제18연대 | 서울→동두천 | 25일 오후 | 제7사단 | 동두천 정면 |
3 | 육사․보병교 교도연대 | 태능/시흥→문산 | 25일 오후 | 제1사단 | 각 연대 분할 배속 |
4 | 육사 생도대 | 태능→부평 | 25일 오후 | 김포지구 | 부평리 방어 |
5 | 제2사단본부, 5연대 2대대 | 대전→의정부 | 25일 저녁 | 제7사단 | 26일 새벽에 포천축선에서 반격 5연대 1대대 도착즉시 추가투입 |
6 | 제2사단 5연대 1대대 | 대전→의정부 | 26일 아침 | 제7사단 | |
7 | 수경사 기갑연대 | 서빙고→각 사단 | 26일 아침 | 각 사단 | 각 사단에 분할하여 배속 |
8 | 제2사단 16연대(-1) | 청주→의정부 | 26일 오전 | 제7사단 | 포천 가도에 투입 |
9 | 제2사단 25연대(-2) | 온양→의정부 | 26일 오후 | 제7사단 | 백석천 방어 |
10 | 제5사단 15연대(-2) | 남원→문산 | 26일 저녁 | 제1사단 | 제1선 방어에 투입 |
11 | 제5사단 20연대 3대대 | 광주→문산 | 26일 밤 | 제1사단 | 제1사단 철수엄호 |
12 | 임시편성 김포지구경비대 | 서울→김포 | 26일 밤 | 김포지구 | 김포반도 방어 |
13 | 제2사단 16연대 3대대 | 온양→창동 | 27일 아침 | 제7사단 | 창동선 방어 |
14 | 제3사단 22연대 | 대구→창동/문산 | 27일 아침 | 제1.7사단 | 제1대대 문산, 제2대대 창동선 |
15 | 제5사단 본부, 20연대(-2) 15연대 2개대대 | 광주/남원→미아리 | 27일 오전 | 제7사단 | 미아리 방어선 점령 |
16 | 수경사 8연대 2대대 | 홍천→중랑교 | 27일 오전 | 제7사단 | 중랑교 방어 |
17 | 제3사단 3공병대대 | 대구→봉화산 | 27일 오전 | 제7사단 | 봉화산 방어 |
18 | 수경사 18연대(-1) | 홍천→용산 | 28일 | 육본 | 육본 예비 |
계 | 총 41개 대대 | 의정부축선 27개대대, 문산축선 14개대대 |
*자료출처 : 육군본부, 『한국전쟁사, 요도식 요약전사』, 1983, p.25; 김행복『한국전쟁의 전쟁지도』, 국방군사연구소, 1999,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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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25전몰군경차순위유자녀회 원문보기 글쓴이: 나도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