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박은우 조휘
■하반기 / 차콜 외 4편 / 박은우
차콜
오래 가려고 지금 떠나
벼락 맞은 나무에 연기가 멎지 않아 숲은 산 사람 반 죽지 못한 사람 반 그을린 자궁에서 검정을 배운 아기들 벽에 그린 기린 그림은 영정이 아니야 불 꺼진 케이크를 어제라고 부른다
더 있으려고 매일 떠나
가고 있다 두 번째 삭朔을 지나 곧 깨어날 파랑을 비껴
덜 마른 잠을 물리고 식빵을 굽는 고양이들 화구를 보며 순서를 기다리는 시신들 근조 리본을 떼어 날개를 덧대는 나비
탯줄이 장난감일 때 보이지 않던
새벽 숲을 지나다 뒤로 걷는 사람을 피해 멈춘다 멈춰 선 것도 걸음이 되고
아침도 흔들 수 없는 악몽, 묵독하는 안개, 타다만 바람을 누아르라고 부르며
내 걸음이 짧아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한 발짝 떼면 다음 발자국이 닿기 전 죽는다
방금 멈춘 그림자를 날기 직전에 두고 오려면
벼락 맞은 나무를 다음 생에도 알아보려면
자꾸 태어나는 얼룩을 나비라고 부르자
캄캄하니까 떠나 숲길이 지워지기 전 글피쯤 가 있을래
2월의 총체
*
무한 루프의 한 점에서 멈췄다 치자 신이 찍어둔 쉼표라 치자 거긴 아직일까 어느새 일까
그린 라이트 ; 다음 베이스를 노리는 본능처럼
움찔거리지 마 복수초에 속지 마
대륙 고기압이 구깃거려도 아직 겨울! 비호와 비보호 혹은 발열과 돌발의 중간에 머문 공기로부터
메타언어를 지켜낼 것
이월된 북풍은 실어증을 앓고 있대
마른 대기가 머금고 있는 단어에서 물기운을 감지해
어떤 언어치료사도 바로잡을 수 없는 공감 언어의 활용예제를 연습하는 시간, 굳어 있는 혀를 풀고
백치들의 언술은 시상식 시즌이 끝나도 뻣뻣한가요
*
외야로 넘어가는 공이 새와 부딪칠 확률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비디오를 판독하는 시간처럼
저절로 움츠러드는 세리머니가 있습니다
포기하기엔 이르고 시작하기엔 눈치 보이는
*
28일뿐인 게 어떠냐고 잔망을 떨어 본다 4년에 한 번꼴로 처음 잔 남자의 기일이 찾아오는 것인데 대체로 28일인게 문제일 수 없고
하루치 일기를 지어낼 필요 없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29일이 생일인 남자와
*
연인으로 가장 큰 자비는 눈꺼풀과 입술을 다무는 것 그러니 누구라도 며칠간 축축한 단어를 짜낼 필요 없다
겉표지가 와인색 시집을 읽는다 안구에 레트로 필터를 끼우니 얼핏 벽돌처럼 보이는데 애인께서 가로되 팥죽색이네,
오래 사귀면 그럴 수 있어요 애인 어록에 이르기를
새는 낙서, 기도는 책갈피, 영혼은 덧니, 첫사랑은 복숭아넥타……넥타?
신도 믿지 않는 것 같은 당신의
그녀라는 대명사는 도무지 빈칸입니다
페브루아, 고대 로마에서는 2월이 새해였대 몸을 씻자 몸으로 새해를 들려줄게
알아듣지 못해도 겉도는 우리의 학명은 '호모 랑구아'
비틀거리는 몸짓에 힙하다는 표현은 쓰지 말 것
*
졸피뎀 타르타르산염 10 ㎎의 처방일 수는 28일이다
*
학생은 아닌, 학생이 아닌 것도 아니던 때를 알고 있어요
그러므로 완숙한 잠을 흔드는 해면체의 발기는 절대
소릿갑으로 구현하지 말 것 스토브 리그가 끝나갈 무렵
물관을 푸는 꽃의 겨울눈
애인의 첫사랑 같은 목련 꽃잎에 포비돈을 바르는 상상으로 2월을 견디고
*
'너는 들여 쓴 문장처럼 물러서 있지, 신도 믿지 않으면서 사랑은 어떻게 해? '
*
나눠 낀 반지가 살 속을 파고 든다 속말은 순환선처럼 외곽을 돌고
해동이 덜된 태양을 나눠덮고
環의 시기에 절대란 말은 절대
부사로만 쓰기
기척들
6=110(2)
그네 고양이 웅덩이 느티나무……나 너희
쓸 줄 아는 단어 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도화지를 펼치고 너희를 가두면 단짝인 척 놀아주던 때
첫사랑
오고 있는 중이구나 어디쯤이니?
가고 있어 어딘지는 잘 모르겠어 큰 개가 짖었고
아침은 아닌 것 같아 빈 화분에 찍힌 짐승 발자국은 누가 피워 놓은 걸까 화분 속에서 동고비가 태어나면 좋겠어 연한 향기를 물고 날아가 네게 먼저 닿으면 좋겠어
거의 온 것 같아 너 있는 곳을 알 것도 같아 다 와 가고 있어 너는 그냥 있어 나는 거기
도착하지 않을게
열일곱
별은 공기에 흔들려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대 네가 별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이과생이 될 수 없단다, 여름에도 스카프를 풀지 않는 과학 선생이 그랬어 손 씻을 때 시계를 풀지 않는 내가 말했지 바깥으로 기운 아빠의 구두가 내 좌표점이군요
곯은 눈동자보다 반짝거리는 별을 본 적이 없어 애초 눈빛은 수선할 수 없는 흉터
커터칼과 밧줄이란 단어를 넣어 시를 짓는 사람이 될 거야
어렴풋이 다녀가는 일 년 :Ⅱ
열아홉이었어 스물둘이었어 몰라서 도착하는 곳 모르니까 갈 수 있는 거기
초여름의 풀밭 같은 곳이야 한 움큼 베고 돌아서면 낌새없이 뒤를 밟히는
악몽이 다녀가는 새벽이었어 가늘지만 끈덕진 매일의 악몽 그리고
어쩌면 그림을 보고 있는 건 관람객이 아니라 벽, 쉬고 있는 건 산책하는 사람이 아니라 벤치, 흔들리는 건 깃발이 아니라 막차를 놓친 동그란 무릎, 그런 것들을 떠나보내며
있지도 않은 널,
아플까 봐 사랑은 시작도 못 하고
네가 나타나기 전부터 너의 배경은 역광이었다
오는 중이며 도착한 적 없고 어룽거리다 말 빛 그림자다
재워둔 저녁이 아침을 부르는 것이라면
닿지 않는 너의 실루엣은 내가 담아 놓은 빛 때문
나는 언제 자라나요
죽음도 자란다는 걸 눈치챘을 때 여섯 살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흔적처럼 예감처럼 괴담처럼
무당거미
오방 깃발 없이 방울 소리 없이
무엇으로 신점을 치나 꽝꽝나무 그늘 속
어쩌면 궁수자리를 맴돌다 쫓겨온 떠돌이별인지 몰라
놓친 활시위는 점집에 날아들어
기우는 대주의 앞날을 꿰뚫고 있나
빛을 당겨 제단을 펼칩니다 공중그물에 붙들린 야생의 제물들, 흑마법이 아닙니다 강령술이 아닙니다 나의 몫은 살을 풀고 터주를 받드는 일
백단향 흘러드는 저녁입니다 나도 덜컥 쏟아집니다 어느 무녀의 비난수가 악귀를 달래주는 걸까 믿고 싶은 마음이 신을 깨우는 거라면
나를 부려 놓은 신어미는 바람입니다
투명한 집 한 채가 밥상이고 구들입니다 수직이 자아낸 건축법은 공중그물에 당집 하나 들여놓는 것
귀문살을 벗을 수 없이 붙박이별처럼 머뭅니다
걸어놓은 덫에 오늘은 배추흰나비와 나나니벌
날갯짓이 식기전
제단에 조아려 신을 부릅니다
그림자를 옮겨가며 나무는 제 그늘을 벗으려 하지만 꽝꽝나무는 꽝꽝나무로 무당거미인 난 무당거미로
올가미 쓴 업을 겨우 삽니다
청수동
내가 만지면 바람이 식었다 불 끄고 먹는 복숭아 같은 걸 여름방학이라 불렀다 81번 버스가 사라진 차고지, 열병 앓는 나를 따돌리고 모두가 술래인 놀이는 해종일 이어지고
물 주는 대로 쑥쑥 저지르던 여름 녹슨 드럼통 속에서 열에 달뜬 내가 식어갔고 빈터는 잠에 취한 척 타이어를 걷어찼다
먼눈 뜨고 달아나는 아이들과 컹컹 뒤를 쫓는 비구름, 드럼통을 씻기는 한 질금 소나기가 지나자 엉치뼈를 들썩거리며 붉나무 밑동을 파헤치던 개떼,
내가 만지면 여름이 달아올랐다 붉나무 숲을 뒤적이다 돌아온 아이들은 뙤약볕 아래 훌쩍 자라 있었다 큰언니의 브래지어를 몰래 차보고 한 달 치 탐구생활을 꾸며 쓰던 여름 차부집 상이군인이 어린애 잠지를 만진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동네 이따금 개들이 물어 오는 두개골은 밤중에 삶아 먹는 감자를 닮았다
애장터였다는 그,
아기를 먹고 자란 붉나무 숲을 돌아 81번 막차가 사라지던
드럼통 속에서 깨났을 때 나는 커 있었다 친구들은 삶은 감자로 저녁을 때웠을까 잠자리 꼬리를 잘라 시잡을 보냈을까 나를 잊고
비탈을 구르며 수박처럼 쪼개지던 여름의 끝자락
2학기가 되면 붉나무 숲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지을 거라고 했다
비어 있는 개집 한쪽에 먹다 만 감자와 두개골 몇 개가 뒹굴고
난 젖무덤이 차오르는 13살이었다
박은우_충남 온양 출생.
■하반기 / 활어 레지스탕스 외 4편 / 조휘
활어 레지스탕스
오늘은 납작하고 붉은색을 띤 금요일 저녁, 손님들로 성황이죠 회만 걷어먹고 밥 덩어리는 휴지로 싸는 손은 빨라서 잘 들키지도 않아요 추가요금이 두려워 컵 속에 욕심 덩어리를 욱여 넣기도 하지요 속이 다 비치는 컵일수록 직원은 속아주죠 이렇 땐 나도 디저트처럼 공기 방울을 잘 먹는답니다 탈이 없는 튼튼한 위장을 가졌거든요 직원은 깔끔하게 화장을 했군요 머리는 항상 그물망으로 묶여 있어요 내가 밖으로 달아나지 못하게요 얼굴이 식기 세척기 열기로 붉다고 해야 하나요 뜨거운 접시만큼 그 손을 탁, 떼어놓고 싶을까요 몇몇 손님이 나가고 또 몇몇 취기가 불콰해질 무렵, 주방에서 허드렛일만 하는 그도 뒷골목에서 담배 한 개비 태울 낭만은 있을까요 온종일 음식 찌꺼기와 설거지에 치이지만 한번쯤 앞치마 벗어던지는 상상을 달달한 도넛에 끼워 넣기도 했을까요 구름 위 태양을 갸름하게 뭉친 뒤 저녁은 어스름에 얹어 온답니다 별들은 톡톡 터지는 식감일까요 이제 슬슬 잔반과 친해져야 할 시간, 식탁 위 냅킨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센스도 필요하답니다 신선한 활어! 푯발아래 손님들이 슬슬 나를 돌아보는군요 요리사가 뜰채를 들고 다가와요 바로 이때죠, 밖으로 튕겨 나와 파드닥! 물 한 됫박씩 흔쾌히 뿌려주죠
해바라기 타투
오른팔 줄래 왼팔 줄래 화장실에만 산다는 귀신이 내 팔에 달라붙었어요 시장통에서 친구와 장난치다 튀김가게 솥 옆으로 기우뚱했죠 김말이 하나가 떨어졌던 순간인데 솟는 기름이 팔등에 튀었어요 귀신이 재빨리 그림을 그렸죠 미술학원에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구도였어요 그림은 그때부터 나와 함께 자랐어요 그 기념으로 성인식 날, 해바라기 꽃판이 되도록 타투를 했죠
편의점 사장님 앞에서 팔을 걷었어요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이 뜨악했죠 허허 거 참, 감탄사가 여러 번 들렸어요 불쌍하다는 건지 불량하다는 건지 얼굴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건지, 난 시급하게도 시급이 더 필요한데 말이죠 다음날부터 매출이 오른 건 귀신 덕인가 봐요
그런데 김말이 튀김은 못 참겠어요 팔은 데었어도 몸서리치는 맛은 어쩔 수 없죠 이러다가 오른팔까지 내 줘야 할까요
난 항상 한여름만 되면 왼쪽 팔부터 살펴요 귀신 한 바퀴 돌아, 나만 바라보는 꽃바퀴가 오돌토돌 튀어나와 있죠
감정 수선사
수선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감정에 뜯어진 부분이 있군요 해어진 틈, 이곳이 두려운가요 완벽하게 처음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순리에 맞게 손질해드리겠습니다 말에도 바늘이 있어 여러 번 누빌수록 꿰어 들 확률이 있어요 곧이곧대로 듣고 상처받는 대로 덧대다보면 어느 새 너덜너덜해지지요 그렇다고 아파할 필요는 없어요 누구나 소모되고 낡아가니까요 입을 다물고 있군요 침묵은 또 다른 밑이 닳고 있다는 것이니, 받쳐줬던 바닥을 과감히 뺄게요 자존심도 굽갈이가 필요해요 말이 말을 마모시켜 그냥 통과할 지라도 걱정 마세요 목적 없는 감정이란 있지 않으니까요 하고 싶은 말 다하세요 이곳은 당신을 체계적으로 바꿔주는 곳, 지금이 다섯 번째 방문입니다
무자위를 밟는 노인
한때 소금이 반짝였을 염전
함초 가득하다 불바다 같다
염부였던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다
지팡이로 턱을 괸 눈빛이 아득하다
소금물 퍼 올리려 한 발 한 발 밟았을 무자위,
낡아서 반질반질 모서리가 없다
이곳으로 사시사철
저녁놀이 가라앉았으리라
이제는 길어 올릴 차례라고
무자위가 돌아가면서
붉은빛 퍼내고 있다
삯군들의 취한 저녁과 노동의 피로와
덜그럭거리는 관절들,
간직하고 있다가 마침내
함초로 토해지는 거라고
붉은 소금꽃이 지천이다
이곳에서는 새들도 낮게 난다
빛과 색이 바뀌었더도
본색은 그대로라는 듯
무한한 바닥의 힘을 안다는 듯
노인의 두 다리가 자꾸만 움찔거린다
오직 오오
돌담길을 톡탁 쳐대는 힐이 걷고 있다
금고문 덜커덩 닫힐 것 같은 점심시간,
그녀의 강박은 숫자 5,
구름 낀 창문을 5까지 세고
가로수들도 5로 묶어 양옆에 세워둔다
출납 관리에 분주한 바람,
블라우스 5번째 단추 틈을 드나든다
허겁지겁 식사한 뒤
일어서다 엎지른 이쑤시가 25개!
숫자가 완벽하므로 허기가 통째 풀린다
소개팅에서 만날 넥타이에도 줄무늬 있을까
오늘밤 그녀의 틀은 인상보다 앞서 있다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간판의 개수와
빌딩의 층수 5가 넘어서면 10을 채운다
의자에 앉자, 숫자들이 두들겨달라고
계산기에 정렬해 있다 4는 안 돼
9도 안 돼, 오, 오직 오오!
재무제표가 정확하게 들어맞아 있다
조휘_경북 영양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