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
낮잠을 잔 게 실수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 초저녁잠을 놓치면 그만 새벽까지 뜬눈이기 십상이다. 누워, 귀에 고이도록 빗소리를 들었건만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다. 모로 한 손을 짚고서, 말린 고사리를 펴듯 허리를 조심한다. 열시쯤 됐으려나, 어둑한 주위에는 인기척이 없다. 난감하다고, 주황(朱黃)의 안내등을 켜며 나는 생각한다. 초저녁잠을 놓친 기분이 흡사 출근버스를 놓친 기분이다. 출근이라… 출근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불과 십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달아난 저녁잠처럼 세월도 그렇게 지나간다. 이제 어떤 버스도 오지 않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영원한 퇴근이다.
다리 사이가 축축하다. 조심조심 옆자리의 송씨가 깨지 않게 숨죽여 기저귀를 벗는다. 새 기저귀를 찰까 하다, 나는 그냥 일어선다. 괜찮겠지, 바지를 입으며 생각했다. 그저 가벼운 요실금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저 약간의 당뇨가 있을 뿐이고… 그저 조금 심장이 좋지 않을 뿐이지만,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단단히 뭉친 기저귀를 들고 나는 화장실에 들어선다. 갓 꺼낸 동물의 심장처럼 기저귀가 뜨끈하다. 거울을 본다. 한 손에 자신의 기저귀를 든 늙은이가 거울 속에 박혀 있다. 기저귀는 참, 따로 분리함에 넣어 달랬지. 간병인의 지적이 떠오르자 화장실에 들어온 이유가 사라진다. 소변이 마렵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다. 나는 그저…거울을 보다가 머리를 빗어 넘긴다. 눌렀던 머리칼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러고 보니 근 오십년을 이 스타일을 유지해왔다. 오십 년이나…이 머리로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정년퇴직을 하고, 했다. 이 머리… 그래도 아직은 괜찮지 않은가, 라며 나는 거울 속의 사내를 향해 중얼거린다. 예순여섯이라 쳐도 흰머리가 없는 편이다. 머리숱이 옅어진 것도 아니다. 이만하면, 하는데 손에 들린 기저귀가 눈에 띈다. 이것은… 그러니까 기저귀라네 이사람아, 하고 나는 실소를 지어 보인다. 거울 속의 늙은이도 따라 웃는다. 심장을 적출당한 동물처럼 우리는 함께 공허해진다. 문득, 그렇다.
조심조심 문을 연다. 도어의 딸각임에도 잠을 깨는 노인들이 있다. 버스에 잘 올라탄 누군가를 내 손으로 끌어내리고 싶진 않다. 발소릴 죽여 나는 복도를 걷는다. 공제실의 분리함에 기저귀를 던져 넣고, 역시나 조심조심 거실을 향해 걸어간다. 안내등이 늘어선 요양원의 복도가 살아온 세월처럼 길고 아득하다. 이곳, 소명(昭明)요양원에 온 지도 삼 년이 다 되었다. 노인 전문 치료기관, 이라고는 해도 일반 양로원을 갈 수 없는 노인들이 그저 간호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대개가, 그래서 질환을 앓고 있다. 중풍과 치매가 많고, 나처럼 심장이 좋지 않거나 당뇨가 있거나… 혹은 멀쩡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다. 오 년 전 아내가 죽었을 대도, 이런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무언가… 그래도…그랬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부질없이 평생을 살고, 부질없이 죽음을 기다린다.
혼자서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어떤 고지서를 어떻게 처리하고… 세탁기를 사용하거나 청소를 하고… 가스 검침원에게 어떤 숫자를 불러줘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외로웠다. 주말이면 아들네나 딸네를 찾았지만,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활이 있다는 걸 머잖아 알 수 있었다. 교회라도 좀 다니세요, 딸아이가 말했었다. 교회를 싫어한 건 아니지만 나는 무언가…그래도…그랬다, 어떤 무언가가 내 삶에 남았을 거라 믿어왔다. 여유가 있고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노후…퇴직을 하고 한동안 그런 삶을 산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데생을 배우기도 했고, 기원을 오가고, 아주 잠깐 철학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곧,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할 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자괴감,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허무감, 길고, 시들고, 말라가는 시간의 악취…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가는 직장인들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진심에 나는 좌절했었다.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그 삶이,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이었다니. 언젠가 퇴직을 하면, 하는 상상으로 삼십삼 년의 직장 생활을 견뎌내지 않았던가. 내 삶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삶이란… 무엇일까.
아내가 쓰러진 것은 그 무렵이다. 자궁암이었다. 곧바로 입원을 하고 이 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 심장이 나빠진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쯤이었다. 아들 내외와 딸 내외가 함께 병원을 찾아왔다.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딸이었다. 요는, 재산을 미리 정리해두자는 것이었다. 세금 문제라든지 갖가지 이유를 토로 달았지만 내가 느낀 요는, 미리 재산을 물려달라는 것이었다. 오빠랑 언니랑 우린 다 의견이 일치했어요. 솔직히… 이제 아빠도 준비를 하셔야 되구요. 준비 없이, 그런 얘길 들어야 했다. 고개를 돌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자궁에서 뻗어 나온 세상도 이미 커다란 암이 되어 있었다.
비가 내린다. 어둑한 거실을 가로질러 창가에 선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다. 박인수라는 그 양반… 아직도 살아 있나 몰라. 창에 맺힌 점점(點點)수증기들이 검푸른 첩첩의 산을 먹으로 얼룩 지운다. 가만히, 나는 창문을 연다. 개폐가 가능한 건 좁다란 환기창이 전부지만 불만은 없다. 습기와 빗소리, 바람과 어둠이 화선지 같은 나의 안면에 동시에 스며든다. 밤나무 숲을 누비는 바람이 보인다. 벼루 위를 맴도는 먹처럼 어둠도 숲 사이를 맴돌고 있다. 수장(水葬)된 밤꽃들이 승천하는 봄밤이다. 빗줄기가 빗어내리는 어둠의 머리칼에서 나는 심한 쉰내를 맡는다.
아내는 그렇게 갔다. 쉰내 나는,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칼을 그날 아침 마지막으로 빗겨주었다. 살갑게 평생을 살진 못했지만 언제나 곁에 있던 아내였다. 앙상한 육신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아… 하고 나는 부르짖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어떤 절차란 게 있겠지, 막연히 여겼던 죽음의 과정은 간결하고 간결했다. 자궁이 적출된 배 위에 얼굴을 묻고서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른다. 탯줄이 끊어진 예순두 살짜리 태아가 된 기분이었다. 아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고, 스스로를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창을 닫는다. 아내의 관 위에 던지던 한 삼의 흙처럼, 한 뼘의 쪽창이 어둠을 덮는다. 묻는다, 묻어버린다. 묻어, 보내는 일어 어느새 익숙해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를 묻는 일도 하마 그러하겠지. 몸에 이상이 생긴 걸 안 것은 장례를 마치고 나서였다. 하루 눈을 떴는데 숨쉬기가 곤란했다. 가슴을 누가 쥐어뜯는…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이 내 심장에 전동칫솔을 갖다 댄 기분이었다. 찰나의, 죽음이었다. 곧 통증은 사라졌지만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직 버리지도 못한 경대 위, 아내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여보… 아무일 아니란 듯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왈칵 눈물이 났다. 마음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심근경색입니다. 병원을 나와 혼자 걷던 그 길이 지금도 생각난다. 앰뷸런스가 한 대 지나갔고, 지자제 선거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오토바이를 세운 퀵이 휴대폰으로 위치를 묻고 있었고, 그럼 천원만 더 주셔야 합니다, 했고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거운동원들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만삭의 젊은 처자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고, 그 옆엔 우체통이 있고, 다릴 저는 어떤 한 묶음의 신문을 내려놓았고, 가로수는 푸르렀고, 기사식당에서 나온 운짱들이 커피를 든 채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고, 구구 비둘기들이 인도 위를 걷고 있었고, 나는 심근경색이었다.
당뇨도 있으시군요, 의사는 더욱 주의를 당부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수술 얘길 꺼내는 의사에게 고갤 끄덕이며 말했지만, 수술은 받지 않았다. 대신 나는 담배를 끊었다. 사십칠 년을 피워온 담배였다. 신문을 읽고, 우두커니 라디오를 듣다가도 문득 삶이 저무는 느낌을 받던 여름이었다. 약과 주사, 약과 식사, 주사와 식사, 식사와 설사… 의미 없이 티브이를 보다 보면 겨우, 또 하루가 저물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요실금이 찾아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병원을, 다시 약국으로 젖은 종이배 같은 발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뭘 드릴가요? 약사는 젊은 여자였다. 기저귀를 달라는 말이, 그래서 차마 입 밖으로 새지 못했다.
끊었던 담배를 딱 한 대만 피우고 싶은 밤이다. 숲이라는 벼루를 다 갈아버린 듯 창밖은 오로지 묵(墨)하고 묵하다. 어두운 방 안에 두 꾸러미의 기저귀를 내려놓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창밖을 응시하던 그날 이 기억난다. 그해의 구월인가 시월인가, 요실금이 부쩍 심해진 무렵이었다. 약과 주사, 약과 식사, 그리고 기저귀…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그랬다. 처음으로 모든 걸 정리하고 아들네로 가고 싶었다. 맞벌이를 하는 집이라 어쩌면 내가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을 봐주고 아니,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가… 생각도 들었다. 짐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랬다, 나는 평생을… 그래서 우선은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셨어요 아버님? 심근경색이 생겼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며느리에게 털어놓았다. 어머, 병원은 가보셨어요? 당뇨의 괴로움을… 일상의 고충을 입 밖에 꺼낸 것도 처음이었다. 어떡하냐고는 했지만, 저희 집으로 오시란 얘기는 끝끝내 하지 않았다. 얘야, 내가 말이다… 지금은 요실금까지 생겼구나, 이게 소변이… 며느리에게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며느리로부터 들어야 할 얘기 역시 듣지 못했다. 아들과 달은 각각 한 번씩 전화를 걸어 괜찮으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나는 괜찮았다. 주변을 정리하고 이곳을 선택한 것도 나의 의지였다. 나는 살아 있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조일호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 그 무렵이다. 이따금 전화로 소식을 나누던 하나 남은 고향 친구였다. 바쁜 일 끝나면 꼭 한번 내려감세, 입버릇처럼 했던 약속을 사십 년 만에 지킬 수 있었다. 겨우 약속을 지켰건만 친구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누워 있었다. 만나리,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들으며 생각했다. 곧 나도 건너가겠네. 이번엔 그리 늦지 않을 걸세. 죄지은 자처럼 물끄러미 친구의 늙은 얼굴을 되새기고 되새겼다. 강을 건넌다 해도 영정 속의 낯선 인물을 몰라볼 것 같아서였다. 자넨 누군가?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영정 속의 친구도 나를 바라보았다.
영안실에 딸린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때였다. 등 뒤로 조일호의 차남과 직장 동료들이 진을 쳤는데, 그만 본의 아니게 들어선 안 될 말을 듣고 말았다. 안됐네 조과장… 그래도 호상(好喪)이지? 그럼, 그럼. 그래, 얼마 받았나? 뭘? 뭐긴 이 사람… 몰라 물어? 글쎄… 허름한 상가건물이라 팔아봐야 뭐… 이래저래 나누면 한 이억 되려나? 이이, 호상 아니네. 뭐가? 요샌 그래도 오억은 받아야 호상이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새파란 것들이… 아직 일이란 걸 십 년도 안 해본 것들이 억, 억 하는 소릴 듣고 잇자니 분통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될까? 재산을 속셈해보는 나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입을 헹구던 물이 소주처럼 씁쓸했다. 호상 소리 듣긴 글렀군… 나는 중얼거렸다.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호상은 없다, 그 어떤 죽음도 비루한 일상(日常)일 뿐이다.
사십 년 만에 들러본 고향은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소소했던 읍내가 시가지의 전부였는데 어느새 번화한 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늙은 친구의 옛 얼굴을 그려보듯, 소소했던 읍내의 주름살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여기였지 아마, 저기가 그러니까… 그리고 결국 학교를 발견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였다. 바로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렸었다. 세 칸 교실과 작은 강당이 전부였던 학교는 어느새 번듯한 인문계가 되어있었다. 하긴 그때는… 그래도… 변치 않은 은행나무를 나는 볼 수 있었다. 아 하고 신음이 배어 나왔다. 느려진 걸음은 접어두고, 종이학 같은 마음이 우선 밑동에 이르렀다. 오십 년 전의 그, 그늘이었다. 말없는 나무를 올려보며 다녀왔습니다. 말없는 누군가에게 고하는 느낌이었다.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래서였다.
다리가 뻐근하다. 건고사리 같은 육신을 살짝 달래어 소파에 주저앉힌다. 층마다 서른 명 정도가 모인 곳이라 이곳의 거실은 매우 드넓다. 리모컨이 어디 있을까, 소파의 이음새와 틈새를 뒤져 나는 리모컨을 찾아낸다. 치매 환자의 손을 피하려면 누군가 늘 이런 수고를 해야만 한다. 초저녁잠이 들었던 티브이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얼른 소리를 죽이고 이런저런 채널을 돌려보기 시작한다. 수십 개의 유선 채널이 들어와 있지만 정작 볼 만한 것은 많지가 않다. 수십 년을 일하고 일구어도 정작 남은 게 없는 인생처럼.
집을 정리한 돈을 미련 없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내와 더불어 평생을 장만한 집이었다. 이제 됐소? 경대 위, 아내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잘했다고도, 잘못했다고도 아내는 말하지 않았다.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거나 하는 생각이 나도 들지 않았다. 모든 짐을 정리하고, 오천 정도가 든 예금통장만 가지고 이곳으로 몸을 옮겼다. 아빠 자주 찾아뵐게요. 가식인지 진심인지 눈물을 훔치던 딸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서울에서 두어 시간 거리긴 해도 아이들이 오는 건 일 년에 한두 번이다. 잘 키웠다거나 잘못 키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세상이 변한 거라 믿고 있다. 원망도 미련도 없다. 기다림도 없다. 냄새가 난다며 오지 않던 손주들도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가만, 저 여자는
오드리 헵번이 아닌가. 채널을 고정시키고 나는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본다. 헵번이다. 그리고 저건 <로마의 휴일>이다. 아득한 마음으로 나는 무릎을 끌어당긴다. 미루나무를 만났을 대의 느낌처럼 오십 년 전의 극장에 돌아와 앉은 기분이다. 좋은 시절이었다. 헵번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그 시절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검표원을 피해 다니며 세 번을 연달아 본 영화였다. 바로 저 장면, 그레고리 펙이 스쿠터에 헵번을 태우고 질주하는 저 장면을 나는 잊지 않았다. 절로 손이 머리를 빗겨 넘긴다. 또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나도 꼭 한 번은 저런 장면을 연출해보고 싶다. 따지고 보면 쉬운 일이다. 아내가 살았을 때 한 대의 스쿠터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헵번은 아직도… 살아 있을까?
젊다… 영화 속의 그레고리 펙처럼 내게도 젊음은 있었다. 키 하나는 그레고리만큼이나 훤칠하지 않았을까. 소릴 죽이고 영활 봐도 줄거리는 빠짐없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공주는 그레고리의 친절에 감동하고… 그렇지, 그러나 결국 궁(宮)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만 어떤 감정이, 떨림이 두 사람 사이엔 존재하고… 수많은 사진을 확보했지만 그레고리는 자신의 특종을 숨기고… 공주를 위해, 사랑을… 사랑을 위해… 아, 지나간 세월은 어쩜 저리도 아름다웠단 말인가, 나는 그만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지난 세월을 돌이키는 일은 어둠 속에서 무성(無聲)영화를 보는 일과 매우 닮아 있었다. 대사는 사라져도 줄거리는 남아 잇다. 여기… 내 가슴속에, 모든 게 사라진 삶이라지만 옛날은 남아 있다.
깜짝이야, 순간 다가선 검은 인기척에 심장이 놀라 멎는 줄 알았다. 소리 없이 누군가 곁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또래의 여성인데 못 보던 얼굴이다. 그렇다면 아까 낮잠을 잤을 때 들어온 게 분명하다. 어, 아버지가 여기 계셨네? 뜻밖의 인사를 건네며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치매다. 뭐라뭐라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린 그녀가 거실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종이꽃 같은 얼굴이고 무신경한 시선이다. 빗소리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다. 이런, 티브이의 절반을 가려버린다. 지금 바로 저 장면인데, 기자 회견장에서 드디어 그레고리는 공주와 재회하고… 공주는 그레고리를 알아보고… 그러나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하지만 저기서 공주가 보내는 눈빛…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두 사람만의… 그걸 봐야 하는데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 헵번의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에서 물끄러미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바보,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눈을 뜬다. 조식을 준비하는 조리사들의 분주함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모로 한 손을 짚지 않아도 나는 거뜬하게 상체를 일으킨다… 일으켜, 진다. 이른 봄의 고사리처럼 허리가 부드럽다. 젖은 기저귀를 갈고 이틀 입은 바지도 새것으로 갈아입는다. 세수를 한다. 면도를, 그리고 총무과 김군에게 부탁해 받은 올드 스파이스의 마개를 딴다, 바른다. 아, 바로 이 느낌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사십년을 유지해온 내 스타일이다. 모양이 바뀐 범선 로고를 지그시 바라본 후, 면도기와 올드 스파이스를 송씨의 손이 닿지 않는 사물함 끝자락에 올려둔다. 다시 거울을 본다. 남자는 역시…향취(香臭)다.
식탁에 앉는다. 간병인의 보조 없이도 식사를 할 수 있는 노인들이 이렇듯 빙 둘러 식탁을 차지한다. 중풍을 피한 사람들, 치매가 있어도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이들이 여기서 식사를 한다. 열댓 명 정도… 절반이 채 안 되는 인원이지만 연이은 두 개의 테이블은 언제나 떠들썩하다. 고향이 좋긴 하다. 열댓 명의 노인들 중… 세 명이 동창이다. 저쪽 테이블 끝, 사각(四角)에 앉은 친구가 노성진이다.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뜀박질을 잘해 다들 ‘노루’라 불렀는데, 여기선 아무도 노루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피사의 사탑’이다. 뇌가 어떻게 망가진 건지 늘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다. 해서 노성진이 걸어갈 때면 피사의 사탑이 지나간다,고들 말하게 되는 것이다. 릴레이에서 일등을 먹던 노성진을 기억하는 것은 나뿐이다. 해서, 지금의 노성진을 보면서도 ‘피사의 노루’ 정도로 그를 떠올리는 것이다.
노성진의 왼편, 두 자리 건너에 앉은 놈이 정동필이다. 키가 큰 윤동필이란 친구가 있어 작은 동필이라 불리던 녀석이다. 백육십이 될까 싶은… 정말이지 작은 키다. 참견하길 좋아하고 촐싹대는 면이 있어 ‘똥피리’란 별명을 따로 갖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지만 요양원을 통틀어 가장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드러난 병이 없다. 동필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오로지 가난 대문이다. 요양원도 여러 형태가 있는데 이곳은 정부의 보조를 받는 실비 시설이다. 일반 노인에겐 요양비의 절반을, 생활보로 대상자에겐 전액을 지원해준다. 말하고 보니 동필이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아픈 노인이란 생각이 든다. 가난보다 큰 질병은 세상에 없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그리고 지금 내 맞은편에 앉은, 아니, 내가 그 맞은편에 앉은… 김이선이 있다. 동갑이며 인근의 여고를 다녔는데 현재는 치매를 앓고 있다. 기억이 자주 왔다 갔다 한다, 게다가 선셋증후군이 있어 해질녘 이후엔 배회가 심한 편이다. 수줍음이 많고 공부를 곧잘 하던 모범생이었다. 지난 봄 이곳에 들어왔는데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뒤늦게 밤잠을 설친 다음 날, 총무과에 내려가 김군을 구슬렸다. 김이선. 내가 알던, 그 김이선이 확실했다. 아는 분이세요? 김군의 질문에 으응, 그냥… 이라고는 했지만 으응, 그냥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인근 여고에서 그녀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청아한 피부와 단정한 외모… 우수 어린 커다란 눈동자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예부의 부장직을 맡았었는데 그해 가을의 합동 문학제(文學祭)에서 윤동주의 시를 낭송했다. <별 헤는 밤>이었다. 그 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 시작해, 애잔한 기타 반주를 매경으로 잔잔히 시를 읽어내려가던 그녀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당당의 지붕이 사라지고 순간 밤하늘의 별들이 내 머리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나에게 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러브레터를 쓰고, 또 버렸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문예반을 들고 시를 외우곤 했지만 선뜻 그녀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녀는 모두의 우상이었고, 나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한 마리 벌레였다. 기적처럼, 우연히 길에서 딱 한 번 그녀에게 우산을 빌려준 적이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는 여름날이었다. 이거… 쓸래요? 네?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쳐다봤지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난 하나 더 있어서… 거짓말까지 나왔다. 고마워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실래요? 정말로 그런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정말로, 지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반대방향이라… 그리고, 길을 돌아 꼬박 오십 분을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그녀의 집은 같은 방향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조일호를 통해 그녀가 인근 도시의 서점에 취직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고향을 찾아도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향이 같았던 그녀의 집도 이사를 간 지 오래였다. 특별히 여자를 사귄 기억이 없는 까닭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매결혼을 하면서도 내내 마음이 건조했었다. 먹고살고, 먹고, 살아야 하고… 오십 년의 세상살이가 그녀를 잊게 했지만, 풀이 무성한 기억의 저변에는 그녀라는 운석이 단단한 결정(結晶)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내 앞에서 오이냉국을 떠먹고 있다. 그리고 시금치를, 계란찜과 두부를… 고등어를 먹고 있다. 인생의 같은 방향에서, 같은 집에서… 우리는 다시 조우했다. 인생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왔다, 온 것이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고,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잘 드셨습니까?
라고는 해도, 그녀는 예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도… 그랬다, 차차 치매가 진행될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좋다.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또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기억이 돌아왔다 싶을 때에도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도 제일고의 문예반이었어요. 저 한, 영, 진입니다. 모르겠어요? 웃으며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 오는 날… 그때 제가 우산을 빌려드렸는데… 그 우산 빌려주던 한영진이요. 알 리가 없다. 하긴 선망의 대상이던 그녀가 나같이 평범한 남학생을 기억할 리 없다. 말하자면 나는, 헵번의 영화에 출연한 추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불만은 없다. 별이 인간을 헤아릴 순 없으니까. 오로지 인간이, 별을 헤아릴 뿐이니까.
그 김이선이라고? 동필이의 얼굴에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똥파리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김이선이 이런 곳엘 왜? 그랬다. 정말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막연히 상상해온 그녀의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훌륭한 가문의 규수가 되고, 조신한 아내 인자한 어머니로 빛을 발하고, 이민을 갔다거나 해외를 두루 둘러보며 여생을 보낼 거라 여겼었다. 설사 치매가 왔다 해도 대기업이 운영하는 호텔 같은 병원이 어울릴 김이선이다. 부군이 죽고 사업이 말했을 수도 있겠지, 사연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그런 짐작으로 그녀를 대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이 산보라도 가실까요?
외출을 할 수 있는 노인은 극히 드물다. 우선 각층을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일층의 현관으로 내려갈 수 있다. 치매 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의식이 멀쩡하다 해도 사유가 있어야 한다. 가족의 면회라든가, 진단이나 기타 검사, 물리 치료실을 이용할 때만이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직원이나 간호사가 함께한다.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자면…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그래서다.
자신의 의지로 외출을 하기 위해선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의식이 맑아야 하고, 거동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며, 저 사람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란 직원 모두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물론 정문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그저 왔다 갔다 요양원의 앞마당을 거니는 게 전부지만, 이곳에선 커다란 특권이자 자유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런 자유를 얻은 이곳의 몇 안 되는 노인이었다. 평소의 성품과 서울에서 언론사를 다녔다는 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이 아니라 실은 경기도의 보잘것없는 신문사지만, 게다가 데스크와는 거리가 먼 총무영업이지만… 여기선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공부를 한 사람이란 대접이, 나도 싫지는 않았다.
잠시 산책 좀 다녀오겠습니다. 매일 나가는 산책이지만, 마주치는 직원마다 겸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산보 가시나요 한 선생님? 아 원장님!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두 분이 요즘 사이가 아주 좋으시군요…그런 얘기를 듣는 것이다. 어릴적 친군데 여기서 만났지 뭡니까? 제가 잘 보살필 테니 염려 마시구요,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나 손… 같은 곳을 잡고 이끌어 함께 산책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청순하고 하늘은 청연(淸姸)해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서 그녀와의 산책이 하나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눈에 띄는 행동이긴 해도 추문(醜聞)이니, 그런 것에서 자유로운 나이였다. 누구냐? 동필이 정도가 관심을 가졌을 뿐 누구 하나 이상한 시선으로 우릴 보지 않았다. 외출의 느낌을 그녀도 무척 즐기는 듯했고, 의미를 알건 모르건 단둘이 얘길 나눌 수 있어 나는 좋았다. 물론 일방적인 대화였다. 예를 들면 부군은 어떤 분이셨소? 라고 묻고서 배가… 배가 참 고프네요, 란 답을 듣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혼잣말을 그녀에게 늘어놓았다. 때로는 넋두리를, 때로는 추억을, 또는 누구에게도 건네지 못한 가슴속 멍울들을, 혹은 가벼운 그날의 기분 같은 걸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사십 년 가까이 아내와 살았는데 말입니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겁니다. 돌이켜보니 살가운 표정 한번 제대로 지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살아온 것이… 그런 기분이었던 겁니다. 산다는 게 원래 이런 거라는… 예, 돌이켜보면 그저 먹고 살았던 거예요. 일하고… 벌고… 그저 먹고살고… 자식들한테 내 전부를 걸고, 바치고… 우리 내외는요… 중국집 가서 짬뽕을 한 번 못 먹었어요. 왜? 더 싼 자장면이 버젓이 보이니까… 그래서 내가 자장면을 시키면 집사람이… 글쎄 이 바보도 자장을 시키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그렇게 모아서 뭘 하려고 했는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산다는 게 뭔지 이 나이가 되어도 모르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예컨대 짬뽕을 한 번…에서 울컥 목이 메면 그녀가 그럼요, 그럼요 하며 내 손등을 만져주는 것이다. 그 손등으로 안경 속의 눈물을 훔치다 보면 왠지 모를 평안함이 느껴지고는 했다. 그것은 마치 고해성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나의 여신이고 연인이었으며 친구이자 어머니였다. 자식들은 말입니다. 모든 걸 다 가져가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제가 뭘 바랍니까? 다들 잘살면 그만이죠… 그래도… 그래서요, 이런 허무가 없는 겁니다. 자기들도 당해봐야 알지… 안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오늘은 하늘이 참 좋습니다, 라고 나는 말문을 연다. 벤치 주위로 핀 코스모스, 코스모스 사이를 몇 마리의 잠자리가 구름처럼 서성인다. 코스모스를 보니 김상희가 생각나는군요. 그 노래 기억나십니까?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무심코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가, 그러다 그만 나는 숨을 쉬지 못한다. 나지막이 그녀가 노래를 물렀기 때문이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나. 시를 읽던 그 목소리, 그 눈빛으로 부른 노래였다. 순간 세계가 멈춰버린다. 날개를 떨던 잠자리들도 얼어붙은 듯 앉아 있다.
야, 김이선!
깜짝 놀라 고갤 돌리니 희죽한 얼굴을 하고 동필이가 서 있었다. 어쩐 일이냐, 라고는 해도 실은 건강해서 직원들의 허드렛일까지 거드는 녀석이다. 그건 그렇고 김이선이라니, 좋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망가져버렸다. 이놈이… 누구 맘대로 말을 턱턱 놓는 게냐? 따지기 무섭게 놈이 반박을 해왔다. 그럼 동기끼리 말 놓지 말 높이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아이고, 참 고왔는데… 글쎄 몰라봤다니까… 그래도 자세히 보니 옛날 얼굴이 남아 있네. 눈하며 요기 요 턱선이랑… 심장이 아파온다. 슬쩍 그녀의 턱을 만지는 놈의 손가락에 간식으로 나온 계피떡 가루가 묻어 있다. 아아, 화를 낼 겨를도 없이 놈의 수다가 이어진다. 나 몰라? 정동필… 우리 한동네 살았는데, 동필이 기억 안나? 똥피리잖아 똥피리!
또…똥피리…
풉 하고 그녀가 폭소를 터뜨린다. 기억나지 똥피리? 놈이 똥이란 단어에 힘을 줄 때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며 박장대소를 한다. 신이 난 녀석이 일부러 똥, 똥을 반복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방귀 뽕 방귀 뽕 하며 제 궁뎅일 두들긴다. 뭐 하는 짓이냐, 버럭 화를 질렀지만 분이 요만큼도 풀리지 않는다. 에이 왜 그러냐? 장난친 거 같고… 놈이 꼬리를 내렸지만 다시금 심장이 찌릿한다. 가, 갑시다. 웃음을 못 멈추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는 벤치를 일어선다. 슬프고 화가 난다. 마음속의 도자기 하나가 풍비박산 난 느낌이다.
상처를 받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일찍이 누워 눈을 감았다. 사극 드라마를 보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온다. 주말이다. 모두가 모여 사극을 보고 있다. 사극은 모두에게 인기가 있다. 물을 마신다는 핑계로 거실을 에둘러 식당을 다녀왔다. 똥피리 옆에 앉아 잇는 그녀를, 확실히 보았다. 벤치에서… 가자고 손을 끌어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방귀 뽕 방귀 뽕 하는 똥피리의 익살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웃기만 했다. 그녀의 폭소를 본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이선에게 섭섭한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치매 환자를 볼 만큼 봐왔기에 그녀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다. 치매는 퇴행(退行)이다. 항문기의 유아들이 똥이나 그런 단어에 유달리 관심을 보이듯, 치매 환자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다. 분노가 이는 까닭은 그럼 병증을 이용한 똥피리 놈의 치졸한 행각이다. 예순다섯이나 나이를 먹고도 방귀 뽕을 외치며 궁뎅이 북을 치는 놈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저것도 인간일까?
잠이 오지 않는다.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훔치는 놈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일어나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선다. 백팔십이 넘는 키의 훤칠한 남자가 굳게 입을 다문 대 이쪽을 노려본다. 똥피리 같은 놈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몸이시다. 괜한 기분을 정리하기 위해 면도를 하고 스킨을 바른다. 이~일송정 푸른 솔은… 송씨의 목소리다. 드라마가 끝났는지 우르르 방으로 돌아가는 노인들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선 씨도 잘 들어갔으려나… 아니, 아니다. 문득 마음이 불안해져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불이 꺼지고 노인들은 들어가고… 이선은 혼자 남아 거실을 배회할 가능성이 크다. 똥피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놈이 만약 흑심을 품는다면… 계피떡 묻은 손가락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어둑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간다. 만의 하나 놈의 흑심이 발각된다면 더 이상의 인내는 없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했는데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거실에 딸린 공용 화장실로 발길을 돌린다. 나온 참에 방광이나 비워두자, 그래도 다행이지 뭔가… 기약 없는 소변을 기다리는데 아함, 하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한가가 웬일이냐? 너도 송씨한테 똥둣간을 뺐겼냐? 똥피리다. 하품을 해대며 들어선 놈이 또 바짝 내 곁에 다가선다. 아, 왜 이리 뒷골이 뻐근하냐? 뻐근하건 말건 저리 가 이놈아, 소리치고 싶지만… 명분이 없다. 소변기를 고르는 건 또 놈의 자유고… 그래도 어쨌거나 시원스런 소리가 부럽긴 하다. 나도 저렇게… 시원할 수 있다면… 나도… 헉
크, 크다!
잠을 설쳤다. 저것도 인간일까? 왠지 패배감이 일어 잠을 잘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심한 질투가 일었고, 순간 망령이라도 난 듯 놈이 이선을 유린하는 망상까지 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아침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부끄럽다. 바보 같은 궁뎅이 춤에도 악의가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이토록 나이를 먹고도 이딴 일에 번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없이, 부끄러운 것이다.
눈앞의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미역국을 뜨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치매란 게 얼마나 큰 다행인가. 천진한 얼굴로 밥을 뜨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고 보니 동필이가 보이지 않는다. 화단 작업이라도 나갔나 했는데 머리가 아파 누워 있다고 한다. 건강한 놈이 웬일일까… 잔머릴 너무 굴려 그런 게지… 아니다. 더는 추한 마음을 먹지 않아야 한다. 식탁의 끝까지 가을볕이 번져온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따뜻한 국 한 그릇을 엎질러 놓은 듯하다. 축복받은 날씨다. 저 볕 속에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같이 산보라도 가실까요?
어제와 다른 기분으로 우리는 가을을 만끽했다. 한 시간가량 햇볕을 쬐며 요양원의 잔디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얘기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어느새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좀 앉을까요? 티끌이 뽀얀 벤치 위를 손으로 쓸고 가비야운 깃털을 얹듯 그녀를 앉게 한다. 나는, 그냥 앉는다. 그런데… 노래를 정말 잘하시던데요. 예? 노래 말입니다. 어제 부르셨지 않습니까? 아이 참 선생님도… 전 노래 못해요. 아아, 살짝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소녀 같다. 예전에 문학제에서 말입니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셨어요.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그때 얼마나 그 시가 좋았던지… 그래서 제가 문예반에 들었던 겁니다. 뜻도 잘 모르면서 시를 정말 많이 외웠어요. 예, 이선 씨 눈에 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허허…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추억인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그나저나 가을이고… 이렇게 함께 벤치에 앉아 있으니 그 시가 떠오르는군요. 왜, 박인환이 쓴 <세월이 가면> 있잖습니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을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난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 희? 무언가 생각이 난다는 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가슴이 뭉클, 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박인희가 박인환의 시를 노래했었지요. 무릎을 치며 나는 박인희의 곡을 흥얼거렸다. 띄엄띄엄 아련한 표정의 그녀가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깜짝이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잔디 깍는 기계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낀 동필이가 삐딱허니 서 있었다. 동필… 이구나, 머리가 아프다더니.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내색을 않으려 애를 썼다. 뭐, 좀 누웠더니 괜찮더라고… 괜찮다고 말하는 놈의 표정이 괜찮지가 않다. 뭔가 배알이 꼴린 얼굴로 퉤하고 침을 뱉었다. 그나저나 노랠 부르려면 좀 똑바로 부르든가… 똑바로 부르라니 뭔 말이냐? 가사가 틀렸잖아. 가사가, 뭐가 틀렸는데?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에 덮여서 나뭇잎은 흙이 되고지!
이 무슨 생트집인란 말인가. 화가 치밀었지만 냉정해지자,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이선 씨가 보는 앞이다. 이런 놈의 트집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 안경을 고쳐 쓰고 나는 점잖게 말을 받았다. 내가 평생을 외운 시다 동필아…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가 맞아.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길을 막고 물어봐라.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도 나뭇잎에 덮이는 게 먼저지 흙이 되는 게 먼저냐? 인간이 상식이 있어야지.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뜬다.맑은 하늘이다. 빈 내처럼, 새털구름 몇 점 정박해 있고 깜박깜박, 어디선가 새들이 등대처럼 울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 상식이, 있어야지, 란 소리를 들었다. 듣고 말았다. 얼마나 더 살아야 번뇌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살아야… 그건 말이다 동필아 시적 자유란 건데 말이다, 하는데 놈이 또다시 이선에게 수작을 건다. 야, 이선아 니 생각에도 그렇지? 나뭇잎에 덮여야 흙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럼요, 그럼요. 그렇다니까 방귀 뽕 방귀 뽕.
그녀가 다시 폭소를 터뜨린다. 슬프다. 나는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을 아무리 바라봐도 한 점 부끄러움이 들지 않는다. 내가 맞다. 나뭇잎을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가 맞는 것이다. 이런 일로 시비가 붙는다는 게 슬프고 처량하다. 천천히, 두 무릎을 짚고 나는 일어선다. 왜, 틀렸다 싶으니 꽁무닐 빼고 싶냐? 이놈을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 참는다. 놈과 달리 나에겐 명예라는 게 있다. 서울 근교에서 언론사를 다닌 몸이시다. 네놈이 들이댈 만한 그런 수준이 아니란 게지. 하는 데 놈이 내 바지춤을 불쾌하게 주무른다. 기저귀 찼냐? 또 오줌 쌌냐? 이선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폭발한다.
이 거지새끼야.
있을 떼도 없어 겨우 공밥이나 먹는 주제에… 거, 거지? 먼저 멱살을 잡은 것은 똥피리였다. 틀린 말 했냐? 되레 멱살을 움켜쥐어 나는 놈을 가슴팍까지 들어 올린다. 페인트칠을 하던 인부 하나가 우릴 향해 뛰어온다. 불끈, 두 손에 힘을 가한다. 놈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범나비야, 너도 가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놈은 그 얘기다. 노인들을 붙잡고 앉아 누구 말이 옳냐며 삼십 분을 떠들어댄다. 상식적으로, 자꾸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라며 노인들을 구슬린다. 모름지기 자연의 순리란 게…에또… 나뭇잎에 덮이고 그런 다음 흙이 되는 게 옳겠네. 하모하모. 속 없는 노인 몇이 내 눈치를 보면서도 놈의 말을 거든다. 이토록 우매할 수가… 절로 한숨이 쏟아진다. 더욱 화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으앙 하고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뿔싸 후회가 치밀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내가 그녀를 울게 하다니… 인부들의 만류도 필요 없이 나는 털썩 벤치에 주저앉았다.
놈을 용서할 수가 없다. 휴게실로 내려가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웬일이세요? 하는 딸에게 다짜고짜로 용건만 털어놓았다. 박인환 알지? 모르면 적어라 박, 인, 환, 서점에 가면 그 양반 시집이 있을 게야. 시집을 사서 이리로 부쳐, 알겠지? 무슨 일이냐고 딸이 물었지만 무슨 일인지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튼 좀 수고를 해라. 그래, 최대한 빨리… 부탁하마. 거실로 돌아오니 놈이 여태 노인들과 희희덕거리는 중이다. 맘대로 까불어라, 니놈이 매장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앉은 채 나는 티브이를 본다. 영화 채널이 몇 번이었더라… 고전 영화를 자주 트는 채널이 있었는데.
박인환의 시집이 온 것은 사흘 뒤였다. 그러나 책을, 한 번도 펼치지 않았다. 펼칠 이유가 없었거니와, 펼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벤치에서 실랑이가 있었던 다음 날 동필이가 죽었다. 뇌졸중이었다. 그렇게 건강하던 놈이… 무릎을 쳤지만,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을 잠그고 들어가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 거지 운운 말을 뱉은 게 뼈아픈 후회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평생을 가난했던 친구가 아니었던가, 밥을 씹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넘길 수, 없었다.
녀석도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닐까,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선은… 모두의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생각이 미치자 놈의 트집을, 또 시비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친구야, 그래도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하나…시신을 인수하러 온 동필의 아들에게 나는 말없이 시집을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부친이 생전에 좋아하던 시집일세. 나뭇잎에 덮인 그늘진 표정으로, 동필의 아들은 두말없이 시집을 받아 넣었다. 한 장의 나뭇잎이 또 떨어졌다. 이제 곧 흙이 되겠지. 세월은 가고… 옛날은 남는 걸까, 나의 무엇이 이곳에 남을까,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 같은 게 과연 있기나 했을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자꾸만, 세상의 중력도 서쪽으로 작용하는 느낌이었다. 떨어지는 해처럼, 나도 떨어지겠지. 가겠지, 곧 가겠지.
시월이 와서야 한동안 삼갔던 외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나 혼자였다. 기분이 울적하기도 했거니와 천진한 이선의 눈을 마주치기가 차마 부끄러웠다. 잘 주무셨소? 때로 아버지 하며 다가서는 그녀에게도 통상의 인사를 제하고는 대화를 건네지 않았다. 별은 멀리 있어야 한다. 인간의 손을 탈수록 그 빛을 잃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녀를 울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녀를… 잃지 않을 것이다. 혼자 상념에 빠져 있다. 담을 넘어온 알밤 몇 개를 주워 현관을 들어설 때였다. 사무실이 시끌벅적했다. 누군가 심하게 원장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혀를 차는 김군에게 무슨 일인가 물어보았다. 김이선 할머니 문제래요. 왜, 이선이 왜? 사무실을 찾은 남자는 이선의 아들이었다. 김군의 얘기론 당장 보증금을 돌려달라며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보증금을 왜? 할머닐 데려갈 테니 보증금 천만 원을 돌려달라는 거예요. 원장님을 정부 보조 규정을 설명하는 중이시구요. 입소한 지 아직 일 년도 안 되셨잖아요. 그래서 지금…
눈앞이 캄캄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몸이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김… 이 선의 아들이라고, 자네가? 사십대 후반의 낯선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다. 막연히 도련님 같은 인상을 떠올렸는데, 의심이 많고 풍파를 많이 겪은 얼굴이었다. 자네 모친과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네. 한 마당에서 쭉 같이 자랐지. 오누이라 해도 별반 틀린 말이 아닐 걸세. 안 그래도 내 자넬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참견의 이유를 이런 식으로 둘러댔다. 아 예, 하며 목례를 받긴 했지만 잔뜩 끌어당긴 입꼬리에 이건 뭐야? 가 역력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혹 있을 까 해서… 우리 같이 한번 상의를 해봄세. 자네에게도 손해는 아닐거구먼.
답답한 현실이었다. 쥐구멍만 한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소소히 생계를 꾸려왔는데, 덜컥 빚을 지게 되었다. 어쩌다 생긴 빚인가? 아무튼… 그렇습니다. 말해보게, 그래야 방법도 찾을 거 아닌가. 하루 배달을 다녀오다 무심코 성인 오락실이란 델 가게 되었다. 처음엔 재미를 봤는데 결국 도박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이천만 원이 넘는 빚을 지고 말았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 보증금을 빼겠다는 건가? 방법이 없습니다. 원장의 설명은 이했다. 요양비를 다섯 달이나 체납해 변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엔 정부의 지원금도 변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원금을 내놓으란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가, 생각 끝에 의견을 제시했다. 내가 천만 원을 줄 테니 어머니 보증금을 내 명의로 돌리는 것은…그건 안 됩니다. 원장이 말을 덧대었다. 친권자가 아니면 보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연고가 없으면 차라리 전액 보조로 계시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만 더 고민해보자며 자릴 일어섰지만, 뾰족한 해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이선의 아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조건 없이 돈을 준다 해도, 언제 또 모친을 빼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장통의 반지하에서 부부와 두 딸이 산다고 했다. 이선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도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도박이다니… 답답한 마음에 거실로 나오자 어둠 속을 누군가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였다. 잠이… 잘 안 오시나 봅니다? 물어도 답이 없다. 답이 없던 그녀가 물끄러미 창밖을 보며 중얼거린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그녀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여기가 바로 집이에요. 아니에요, 아네요. 발음이 이상해서 보니 뭔가를 씹고 있다. 뭐지? 종이였다. 어디서 구한 걸까, 조심조심 그녀의 입에서 종이를 꺼내는데 왈칵 눈물이 치솟는다. 세상의 폭우는 여전히 쏟아지고, 나에겐 빌려줄 우산이 없다. 하지만 다시는 거짓말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방을 향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종이우산처럼 젖은 마음으로, 속삭인다. 우리 같이 집에 갑시다. 저희 집도… 같은 방향입니다.
여유만 있다면 자네도 어머닐 편히 모시고 싶지? 이선의 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로지 이유가 돈 때문인데… 지금 모친께서 집으로 간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일 걸세. 치매란 게 그렇다네… 앞으로 대소변을 받아내고 할 자신 있는가? 지금 임시로 변통을 한다해도 상황이 계속 나빠지면 그땐 어쩔 작정인가? 긴병에 효자 없고 돈 앞에 장사 없네… 내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조건 없이 내가 그 돈을 주겠네. 그리고 보증금의 명의는 내 앞으로 돌리는 게… 방법은 있네. 허위지만 모친과 내가 혼인신고를 하는 거라네. 그럼 나도 친권자가 되고… 매달 내는 요양비도 앞으론 내가 지불하겠네… 자네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만 내가 마음으로 원해서 하는 일이야. 잘 판단해보게, 모친이 살면 얼마를 더 살겠나. 자넨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우린 하루하루를 죽어가는 사람들이야.
이선의 아들을 정문까지 배웅한다. 그… 도박은 부디 그만두게나. 정말로 끊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진심인지 건성인지 감사합니다, 라며 이선의 아들이 인사를 한다. 집안 얘기를 묻긴 그런데… 물어도 괜찮을까? 예, 어떤 겁니까? 그러니까… 부친은 어떤 분이셨나?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어릴 때 집을 나가서… 오래전에 제주돈가 어디서 재혼해 산다는 얘길 듣긴 햇습니다만. 자네 어머니도 고생이 심하셨겠군… 그래, 어머닌 어떻게 살아오셨고? 어, 모르셨습니까? 모른다네. 젊으셨을 땐… 다방을 하셨습니다. 다방을? 예, 제가 좀 커서는 술집을 오래 하셨죠… 술집을? 예.
산길을 내려가는 이선의 아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스쿠터 소음이 노을을 더욱 진동케 한다. 자욱한 노을, 자욱한 어둠…자욱한 인생.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그 자욱한 속에, 그러나 아직은 두 발을 담그고 서 있었다. 경솔한 결정이었을까. 훗날 아이들의 원망을 사지나 않을까 고심했으나 후회는 없다. 평생을 희생해왔다. 내게도 한 번 쯤은 살고 싶은 삶을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
마지막 피운 담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는 기억이 난다. 투명한 플라스틱의 일회용 라이터였다. 가스가 전혀 없는데도 불꽃이 일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어나던 환한 불꽃… 지금의 내 삶이 마치 그런 느낌이다. 심부름을 나간 김군에게서 세 시쯤 도착할 거란 연락을 받았다. 김군이 오는 즉시 이선과 함께 요양원을 나서야 한다. 면도를 한다. 염색을 할 걸 그랬나, 중얼거리며 머리를 매만진다. 올드 스파이스의 향취가 팽팽한 범선의 돛처럼 마음을 부풀린다. 오늘만큼은… 기저귀를 차고 싶지 않다. 저기, 김군의 승합차가 올라온다. 그 소리, 미리 들린다.
이상하리만치 잔잔한 마음이었다. 십 분 만에 혼인신고는 끝이 났고, 이선 씨와 또 김군과 함께 동사무소를 나왔다. 김, 이, 선, 그 이름을 내 손으로 또박또박 서류에 기입했다. 수십 통의 러브레터를 썼다 구기면서 단 한 번도 쓰지 못한 이름이었다. K에게… 오십 년 전의 러브레터는 늘 그렇게 이니셜로만 시작했었다. 그리고 오늘, 그 K와 내가 부부가 되었다. 살을 맞대며 사는 부부는 아니지만, 돌아갈 집의 방향은 같은 부부다. 누구도 인생을 알 수 없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래도 그 정도를, 환갑을 넘기며 깨쳤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전화로 원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편의라니요, 한 선생님께서 힘든 결정을 해주신 건데… 달가워하는 원장에게 부러 농담을 섞어 부탁을 했다. 허허, 그래도 오늘이 신혼 첫날인데… 예, 김군이 너무 수고하기도 해서… 모처럼 요릿집이라도 들러 제가 저녁을 살까 합니다… 예, 그리고 김군 차로 들어가야죠. 예, 시내니까… 저녁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예, 예.
난생처음 해삼탕이란 걸 시켰다. 삭스핀이란 것도 시켜보았다. 맛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다! 강을 건너면… 죽은 아내에게 반드시 해삼탕과 삭스핀을 사주고 말테다, 결심을 했다. 천천히… 다 씹고 넘기세요. 옳지, 하나씩. 허겁지겁 손을 뻗는 이선을 달래가며 접시를 비웠다. 저녁을 먹고 일어서자 이래저래 여섯 시가 넘었다. 그리고 김군에게, 마다하는 김군에게 수고비조의 용돈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서 그러네, 고마워서. 물론 고맙기도 했거니와… 실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네. 함께 둘러보고만 올 테니 그리 늦진 않을 게야. 짧아진 해 때문에 이미 사위는 캄캄한 밤이었다. 이선의 손을 꼭 잡고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진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강당 평의 그 벤치, 그 나무 앞에… 이 나무 기억나세요?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어떤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은행나무를 올려 보았다. 달빛인지 가등인지 나무의 꼭대기엔 환(幻)이, 푸르스름한 빛의 환이 사라진 우리의 옛날처럼 희뿌연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선 씨… 하고 나는 속삭였다. 비로소 내 인생의,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 같은 것을 가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당신을 만났었지요… 그리고 줄곧… 그랬습니다. 아세요? 당신은 저한테 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왔다. 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길고 긴 세월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왔지만, 옛날은 이렇듯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거대하게 들려왔다. 떨어지고, 흙이 되고, 다시 나뭇잎에 덮이는 거대한 순환과 흐름 속에 나는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어지러웠다. 내 가슴에 있던, 그 눈동자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뿔싸
최악이다. 그만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이 무슨… 오늘만큼은 기저귀를 차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그만 가장 추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아아, 그 눈동자 입술 앞에서… 나는 울고 싶었다. 눈물보다 뜨거운 그 무엇이 바지를 적시고, 양말을, 구두를, 이 대지(大地)를 적시는 느낌이었다.
아뿔싸
최악이다. 그만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이 무슨… 오늘만큼은 기저귀를 차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 만큼은 … 참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그만 가장 추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아아, 그 눈동자 입술 앞에서… 나는 울고 싶었다. 눈물보다 뜨거운 그 무엇이 바지를 적시고, 양말을, 구두를, 이 대지(大地)를 적시는 느낌이었다.
죄…죄송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심각한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은…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확실히 이 냄새는 대변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수가…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즉 이만큼이나 고장이 나버린 겐가, 서러운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이선의 시선을 피해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더듬, 바지춤을 확인했다. 대변이… 없다, 그렇다면… 발소릴 죽여 나는 그녀의 등 뒤러 다가갔다. 하늘을 올려 보며 이선은 열심히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별 헤는 소녀처럼, 그랬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은 가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냄새는… 그녀의 것이었다. 뭐, 하세요?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며 내가 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대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기분이 좋은 듯 이선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면서 가사를 기억하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하기야, 신기한 게 한두 가진가? 다시 봄… 봄이 왔다. 거실에 가로 누워 나는 이선의 노래를 듣고 있다. 벌써 여섯 곡째다. 동그랗게 맴을 돌며 텅 빈 거실을 배회하던 그녀가 다가와 앉는다. 다리가 아프겠지, 나는 짐작한다. 시에서 마련한 경로잔치의 소음이 이곳, 삼층/가지 들려온다. 안 가세요? 하는 송씨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댔다. 아니 몸이, 안 좋은 게 사실이다. 봄감기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다. 훌쩍, 이선도 앉아 콧물을 훌쩍인다.
따뜻하다. 지나온 모든 날들이…옛날, 이란 사진 한 장으로 인화될 듯한 봄볕이다.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앰프의 진동을 느끼며 나는 노인들을 떠올렸다. 잘들 보고 오세요, 인사는 제대로 건넨 건가… 모르겠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겨울을 보내면서 나도 조금은 기억이 희미해졌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 한 후 살짝 이선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잡으려 했으나, 웬일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봄볕이다. 나른하고,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요새는 자꾸 낮잠이 온다. 오늘도 밤잠을 자긴 다 글렀군, 이선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나는 실없이 미소를 흘린다. 이선은 더욱 천진해졌고, 나도 조금은… 천진해졌다. 안 그런가 소년? 그런 목소리로 온몸을 쓰다듬는 듯한 봄볕이다. 나는 결국 눈을 감는다.
이보세요, 이렇게 훤한데 잠을 자면 어떡해요?
이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 참 우스워서… 이보세요? 눈을 뜨지 않아도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 그 눈동자 입술이 보이는 듯, 하다. 아버지… 일어나요, 예? 이선의 손이 어깨를 흔든다. 아주 잠깐, 그래서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잠깐 본 세상이 너무나 눈부셨다, 아름답다.
잠이 몰려온다.
이제는 정말 자야 할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