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을 걷다(1)/정동윤
서울의 청계천을 기준으로
백악산 아래 북쪽에 있으면 북촌,
서쪽 인왕산 아래 있으면 서촌,
남쪽 남산 아래 있으면 남촌인지라
서촌과 북촌은 우리의 옛 향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남촌은 일본이
할퀴고 간 뒤의 잔재들로 우리 고유의
모습들 보다 잊지 말아야 할 쓰라린
일본의 흔적들은 곳곳에 들춰볼 수 있다.
'남산골 샌님'은 과거 시험 소과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남산 아래 잠시 집을 구한 생원
또는 진사들이 지방에서 상경하여
몇 달간 머물렀기에 그들을 부를 때의
남산골생원님이 남산골샌님으로
변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 1차 합격한 고시촌의
사람들이겠죠
또 남산 딸깍발이라는 말은 남산
아래 충무로 쪽은 비만 오면 땅이
질퍽하여 진고개라 부르고 그런 길을
나막신 신고 다녀서 남산 딸깍발이
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은 가볍게 그 남촌을 걸어 볼까요?
용산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다시 두 권을 대출하여 가방에 넣고는
남산의 북쪽 자락으로 나아갔다.
난 집은 좁지만 두 개의 큰 서재와
잘 관리된 다양한 산책로를 가지고
있어 은퇴 후의 독서와 산책에 부족함을
모른다.
(남산, 용산 도서관이 내 서재이고
남산 공원이 내 산책로이다)
남산 도서관 앞에 자리 잡은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동상 뒤로
돌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나면
백범 광장으로 통하는 길이 보인다.
한양도성의 성벽이 보이고 주차장엔
키 큰 비술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백범 광장엔 김구 선생의 동상과
성재 이시영 부통령 동상이 남쪽을
향해 있고 그 아래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말을 타고 칼을 북쪽으로 향해
들고 달릴 기세로 위엄을 드러 낸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시청 앞에 있다가
1969.9.23 지하철 1 호선 공사를
하면서 이리로 이사 왔다.
백범 광장 동쪽의 한옥 기와집,
호현당은 어질고 좋은 사람의 동네라는
호현방서 이름을 따왔으리라 추측되며
한성의 행정 구역 5부 52방 중에
호현방은 뒤에 회현방으로 바뀌었고
오늘날 회현동의 옛 지명이다. 회현동은
선혜청 창고가 있어서 창동 또는
남창동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후암동은 삼판방으로 알고 있다
회현방엔 백사 이항복이 살았고
다산 정약용이 젊은 시절 거주하였고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 집안인
동래 정씨들이 모여 살았는데
회현동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우리은행 건물 주변이 동래 정씨
집성촌이었다
소규모 봉제 공장이 많은 남창동 일대
언덕의 일신교회 자리는 쌍회정이라는
정자가 백사 집 앞에 자리 잡았고
정자 앞에는 두 그루의 큰 전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백사 이후 순조때 서염순이
백사의 집을 구입하고 이 일대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정자 이름을
'홍엽정'이라 부르다가 철종 말에
이유원이 선조인 백사의 집 일대를
다시 구입했다.
이유원은 백사의 9대 후손으로
한양 3대 부자이며, 영의정을 지냈고
옛 백사의 집을 다시 수리하여
대원군 등을 초청하여 집들이를 하면서,
대원군에게 정자의 이름을 부탁하니
기꺼이 응하여 쌍회정이라는 이름을
받아 현판까지 달았다.
나중의 알려지기로
중국의 송나라 때에 미회라는 사람은
일회인데도 나라를 어지럽혔는데
두 그루 회나무(또는 전나무)를 보고
쌍회정이라 옥호를 지은 것은
두 배나 더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정적인 대원군의 조롱이라는 얘길
듣고 이유원은 즉시 현판을 내리고
전나무도 베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유원의 양자 이석영이 상속 재산을
모두 팔아(2~3조 원 추정) 독립운동
하는 바람에 이 집도 일본인에게
넘어갔다가 지금은 일신 교회로
남았다.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로
올 때 남의 땅을 밟지 않아도 될 만큼
땅부자였는데 흥선 대원군의 실각 후
영의정에 올랐으며 인천을 개항하자
주장하였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무산.
경주 이씨 육 형제 '6영'으로 알려진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 운동을 했는데, 백사의 10 대
손으로 조선 선비 가문의 품위를
지켰다. 백범 광장의 이시영 동상은
그들 중 다섯째이다.
집안의 전 재산을 서둘러 매각하고
만주로 떠나는 바람에 헐값에
재산을 처분하였다고 한다.
천천히 팔았으면 6~7조 원의 재산을.
일신 교회를 지나 남산 옛길을 따라
나가면 회현동 시범 아파트가
나오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9 층
아파트다. 1970 년대 와우아파트가
부실공사로 와르르 무너지자 당시
김현옥 서울 시장이 시범으로 단단하게
지었다고 하는 시범 아파트가 벌써
52 년이 지난 낡은 아파트가 되었으니
머지않아 새 단장을 하리라.
외국인 여행객 우즈베키스탄 부부가
남산 옛길을 걸어 가다 나에게
남산 케이블카의 위치를 묻기에
따라오라고 하여 알려주니 소파길의
옛 한양공원이 표시 비석이 보인다.
표시석의 '漢陽公園'은 고종 황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어떤 강좌에서 강사인 대학교수가
한성공원이라고 하기에 한양공원으로
얘기하였더니 한성공원이 틀림없다고
우겨서 입을 다물고만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남산 아래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회현 자락에.
케이블카 타는 곳을 지나 숭의여대
자리엔 경성 신사가 있었고
리라초등학교 내 남산원 자리엔
노기 신사도 있었으며 리라초등학교와 숭의 여대에 잠시 들어가서 현장의
터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 나왔다.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는 경성 통감부
자리였지만 이전엔 KBS 방송국이었으며
현재 공사중으로 이 일대에는 왜성대
공원이 있었다.
종로구 신교동의 전 국정원장 이종찬은
백사의 12대 후손으로 우당 이회영의
손자로 신교동 집에 우당 기념관을
설립해 유지했으나 이곳 예장동으로
이관하였는데 하필이면 고문으로
살 냄새가 난다는 안기부 6국(고문
현장)의 전시장과 조금 떨어진
공간에 공존하니 독립운동가와 모진
고문장소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안기부장 공관(문학인의 집)을 보고
그 옆에 작년 러시아로부터 기증 받은
톨스토이 흉상을 보며 잠시 쉬었다가
남산 유스호스텔(옛 안기부 본관),
소릿길 터널, 시청 남산 1별관(안기부
5국)을 거쳐 남산 북측 산책로로 올라
가기 전 소릿길 터널은 꽤 공포스럽던
곳이지만 왼쪽으로 육교를 넘으면
남산골 한옥마을로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 하였고 나중에는 수도방위
사령부로 바뀌었고 12.12 사건 중에
장태완 장군의 육성이 들리는 듯한
곳이 이제는 한옥마을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창덕궁은 일직선으로,
유사시 단숨에 궁궐로 진입하여
제압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일본
군인은 위협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