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답변입니다.
관념산수와 실경산수를 묻는 질문에서 출제 근거를 설명하며, 나온 질문이 단원의 화풍을 진경 산수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필자는 사경 산수로 분류하였다. 만약 임고에서 이를 묻는 질문이 나오면 어찌 대응해야하나?라는 질문입니다.
가. 출제 근거
관념 산수 | • 이상적인 자연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실 묘사가 아닌 역대 중국 화풍의 답습에 의한 산수 | 안견 |
실경 산수 | • 자연을 직접 관찰한 것을 재현 | 진경 산수 | 정선 |
사경 산수 | 김홍도, 변관식 |
• 점경 인물 : 산수화 속에 그려진 작은 인물로 화면의 생동감과 정취(현실감)와 몰입을 높임 |
1. 진경과 사경은 모두 실경 산수를 기반으로 한다. 진경 산수를 말함에 있어 겸제를 대표 작가와 작품으로 언급하는 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그런데 간혹 단원의 금강사군첩(금강산화첩)을 진경에 둔다면 겸제의 금강산도 역시 실경 혹은 사경 산수로 분류해도 될 터인데 그러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2. 겸제의 진경 산수는 실경을 재현하는 과정을 보면 사경을 거친 후 작가의 의도, 미학, 철학, 이를 구현하기 위한 강조와 강화, 예를 들면 수직준, 상악준의 토산과 미점의 암산 간 대비, 흑백의 조화 등으로 데포르마시옹이 가미된다. 겸제는 자신의 회화관을 관철하기 위해 금강산을 소재로 하였고 이를 위해 삼십대부터 칠십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찰과 그린 결과 겸제의 진경 산수라는 형식을 완성하였다.
3. 이후 단원은 겸제의 완성된 진경 산수의 형식을 이어 받았고 또한 남종문인화의 형식 또한 수용하여 단원의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하였다. 단원의 금강사군첩은 정조의 명에 따라 금강산 주변 사군의 실경을 사경하여 정조에 바친 것이다. 정조에게 금강산의 실경을 기록해서 보고해야 했기에 금강산사군첩에 본인의 회화관을 개입시키는 것은 어려웠고 사경이 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단원의 화풍, 여기서는 그의 전 화력에서 보이는 화풍은 진경과 사경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금강산사군첩을 사경에 무게를 두었다.
4. 임고에서 단원의 화풍을 진경이냐? 사경이냐를 묻는다? 물을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관건은 조건문으로 출제자는 답을 닫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단원은 겸제의 진경 산수 형식을 이어서 (가) 금강산사군첩을 그렸다. 그러나 (가)는 정조의 명에 따랐던 것으로 금강산의 실증을 입증해야 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이후 단원의 화풍인 (ㄱ 사경 산수)을/를 대변하는 작품이 되었다.>
참고가 되었길바라며, 올 해는 끝냅시다.
첫댓글 임고가 끝나면, 바로 복기답안 작성하셔서 보내주세요. 문제풀고 채점해서 보내드릴께요. 단, 칼채합니다.
3항에 대한 보완 : 진경 산수 형식이 겸제에 의해 완성되었을 때, 단원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추측이라도 해보자면 필자는 페르낭 레제를 언급하고 싶다. 일단 형식 혹은 형식미란? 압축하자면 큐비즘하면 피카소가 시작부터 완결지었는데 바로 큐비즘하면 연상되는 이미지와 그런 이미지가 패턴으로 반복적으로 양식화하는게 형식미이다. 이를 클레멘트 크린버그는 모더니즘의 형식미라 규정하였다. 따라서 당시 예술가들의 자기만의 스타일=형식을 갖추고자 고군분투하였는데 세잔도 그러하고 고흐, 고갱, 마티스 등 모더니즘에 포함되는 예술가는 싸잡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겸제 역시 진경산수라는 본인만의 형식미를 시작부터 완결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 세대이다. 큰 나무 아래 장송이 부재하듯 양식화가 완성된 후대에게는 형식미는 넘어야할 큰 산이 아닐 수 없다. 레제는 큐비즘에 경도되었다가 순수주의파와 포스터, 영화 등 대중 문화의 접목이라는 각고의 노력끝에 큐비즘과는 다른 본인만의 튜비즘을 창안할 수 있었다.
범관의 형식미는 거비파 구도로 압축되는데 후대인 이당은 범관의 <계산행려도>와 달리 <만학송풍도>에서 중경을 강조하였고, 소조는 <산요누관도>에서 변각구도로 일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원은 남종문인화를 수용하였다. 진경이 동국진경으로 조선이 변방이 아닌 중심이라는 주체에 대한 인식인데, 다시 중화를 중심으로 보겠다는 것은 스스로를 변방에 안주하겠다는 것이니 인식의 퇴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화원화가로서의 한계가 작용하였을 터인데, 이는 주문(예를 들어 정조의 명) 에 종속될 수 밖에 없으니 그의 자유 의지는 겸제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단원의 화풍을 진경에 위치하기가 꺼려지는게 필자의 의견이고 이는 여러 미술사학자와 이론가들의 주장을 근거로 하였다라는 점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