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단편은 다양한 커피 아트를 통해 엉뚱한 상상을 마구 패러디한 ‘커피 판타지’임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커피 애호가이자 인디애나 존스를 꿈꾸는 콩슨이
즐겨 마시는 커피는 바로 이 ‘마야 수퍼 다크(Maya Super Dark).’
화려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흔적을 많이 남기지 않고 전설처럼 사라진 마야.
그런 문명이 있던 곳에 커피가 없었을 리 없다며 관련 지역을 수년간 탐색하던 중
드디어 과테말라와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불에 탄 커피의 화석을 발견한 콩슨.
검게 그을리고 기름의 흔적이 분명한, 강한 불로 볶아진 원두의 모양…
앗! 그러고 보니 20진법을 쓰던 그들의 숫자 ’0′은 조개 모양으로 알려졌지만,
가만 보면 원두의 타원형과도 닮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런 사실을 학회에 발표했다가는 칼디의 커피 발견을 맹신하는 많은 이들에게 공격당할 것이 뻔하기에
일단 커피 화석을 들고 검증할 곳을 찾아 보기로 하는데…
며칠 후,
과테말라에서 수대째 커피 농사를 짓던 가족이
미국 LA에 수상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리카락이 한순간 삐죽 서는 콩슨.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급히 LA의 안티구아(Antigua)라는 카페로 향한다.
느닷없이 길모퉁이에서 튀어나오는 묘한 담벼락 페인팅.
헉!
저 그림은!
마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벽화와 커피나무가 아닌가!
때마침 조경 작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콩슨을 향해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 보이는데…
카페에 들어서니 마야 분위기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힙합 차림의 한 청년이 술렁술렁 커피 한잔을 내어 준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가족이 운영하는 과테말라 농장에서 커피체리를 땄던 손이라며
거친 손을 내어 보이던 그는 천천히 구석구석 둘러보고 가라며 씨익 웃고는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한창 중이던 페이스북을 마저 들여다본다.
‘아…순수한 커피 청년이 벌써 LA문화에 물들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설렁설렁 추출한 커피치고는 무척이나 달고 깔끔한 커피 맛에 놀라는 콩슨.
한 분위기의 카페에 앉아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을 사로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한 귀퉁이의 커피체리 펄핑 기계(커피 체리의 과육과 씨앗을 분리해주는 기계)!
요즘 쓰이는 여느 기계들과 다를 바 없는 이 골동품 같은 자그마한 기계는 과연 언제쯤 만들어진 것일까?
화석을 찾았던 유적지를 떠올리며 가방 속 커피가 화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머릿속 필름을 거꾸로 돌려본다.
그렇게 넋 놓고 있던 콩슨에게 ‘화장실도 한번 들렀다 가라’며 말하고는 다시 한번 씨익~ 웃는 청년.
화장실이라…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일단 가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미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다.
귀엽기만 한 상형문자로 장식된 화장실 입구.
당연히 해독 불가.
‘설마 이걸 내가 해독할 거라 생각하고 보란 건 아니겠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군…’
애써 태연한 척하는 콩슨. 화장실 안에 들어가니 뭐 별다를 건 없어 보인다.
‘쳇. 나 역시 너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야…’
라며 일이나 보고 나가려는 순간 머리 위로 보이는 익숙한 그림!
‘헉!
마야의 피라미드다!
그리고 저 울창한 나무들은 서…설마…커피나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한 콩슨.
잠시 호흡을 고르고 변기에 눌러앉아 생각을 정리하는데…
‘쿵, 쿵, 쿵-’ 갑자기 누군가 거칠게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통에 심장이 터질듯이 벌렁거리는 콩슨.
신변의 위협을 영화적 본능으로 느끼자 액자 속 그림을 재빨리 말아 들고 창문을 통해 탈출.
그대로 LA 공항에서 뉴욕의 한 커피연구실을 향해 날아간다.
맨하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카운터 컬쳐(Counter Culture) 커피랩.
커피 화석을 검증해 줄 수 있으리란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는 지금부터 생각해보거나 임기응변에 맡겨야 할 상황.
하필 점심시간에 도착해 홀로 초조히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콩슨.
하지만,
이상하게도 분명히 혼자 있는 그 곳에서 혼자가 아니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순간 흔들리는 눈동자를 느낀 콩슨.
‘헉!
저 그림 속 네 개의 눈!
엘살바도르의 파카마라 커피를 패러디한 저 포스터 속 네개의 눈동자 중 하나가 방금 흔들렸다.
지금 난…추.적.당.하.고.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
‘지금 당장 그곳을 빠져나오세요.
그리고 보스톤행 버스를 타고 북역(North Station) 에서 나와 근처 공정무역 카페로 오세요.
거기서 뵙겠습니다.
아참 전 콩부인이라고 합니다.’
어느덧 보스톤의 북역을 빠져나와
한눈에 바로 보이는 이퀄 익스체인지(Equal Exchange) 카페에 들어선 콩슨.
커피 한잔 시켰을 뿐인데 점원이 말없이 웃으며 함께 내어준 작은 프린트 하나.
‘스케치 좋군…어? 근데 이거 커피 찌꺼기로 그린 거잖아.’
땀을 한 춤 닦아내는 듯한 싸이클리스트의 모습이 커피로 한숨 돌리는 콩슨과 오버랩 되는 순간.
그리고 프린트 뒷면에 짤막하게 적혀있는 메시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커피 한 잔 대접할 테니 잠시 들렸다 가시죠.
제 주소는요….’
보스톤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진동하는 커피 향.
그 향에 취해 따라가니 활짝 열린 문 안에 동글동글 원두 모양으로 생긴 한 여인이 반갑게 맞는다.
요상한 커피 아트가 가득한 그녀의 집.
그리고 그녀가 내어주는 커피 한잔.
콜롬비아와 우간다 커피가 적절히 섞인 향기로우면서도
흙 향이 나는 커피 한잔을 받아 들고 지구 평화(Peace on Earth)라는 커피 포장지를 보고 있으니,
지난 몇 주간 커피 화석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이 한순간 녹아내리는 듯한 콩슨.
그리고 나지막히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 일을 왜 시작하셨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귀한 화석이 힘없고 약하기만 한 그들에게 어떻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지,
혹시 되려 피해가 가진 않을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어떻게 커피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저 한잔 한잔을 어떻게 의미 있고 맛있게 마실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커피 한잔에 녹여낼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농부들의 삶, 예술, 역사와 과학, 번뇌와 사랑… 무엇을 녹이든 간에 그 종착역은 ‘평화’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포장지처럼 말이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콩슨의 손엔 이제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커피 화석도, 마야의 피라미드 그림도…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될 때,
위키리크스에 보내달라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모두 맡기고는 그간 소홀했던 본인 자신과 가족의 평화를 찾기로 한 콩슨.
당신의 커피에 항상 평화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