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습관 나쁜 습관(약 5:7-20)
* 오늘은 야고보서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지난 몇 달 동안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 든 생각은 야고보뿐만 아니라 사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보낸 서신들의 공통점은 새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었을까라는 것이다. 기독교인, 크리스챤은 당시 기준으로 혁명적인 새사람이다. 당시 기준 뿐만 아니라 조선말 천주교가 소개될 때도 왕이나 유림 세력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주장을 하는 집단으로 여겨졌다.
* 바울은 야고보서 4:22-24에서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의 규범을 제시한다. 1.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 2.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 3.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 4.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 5.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 6.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런 삶의 변화가 있을 때 비로서 크리스챤, 기독교인이라는 새이름에 걸맞는 새사람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권면일 것이다.
*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에 의해 몇 가지 삶의 변화가 요구된다. 먼저 야고보는 인내를 요구한다. 그리고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 다음은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는 요구가 이어진다. 이런 일반적인 생활윤리를 강조한 야고보는 이어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첫 번째는 기도와 찬송이다.
* 고난을 받을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권면에 이어, 앓을 때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권면한다.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아야 하므로,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도 이어진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내기 때문에 그 기도를 통해 나음(육체적 회복, 영적 회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 즉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이라는 권면으로 (5장으로 구성된) 야고보서가 마무리된다. 에베소서처럼 여러 규범들이 나열되지는 않지만, 인내와 기도의 중요성과 원망과 맹세를 하지 않는 태도 등이 강조된다.
* 야고보는 이외에도 말씀을 들음과 실행함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2:14-26의 권면은 야고보서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빈부 격차에 의한 차별, 말의 실수, 시기심과 파당심, 비방과 심판, 허망한 생각 등에 대한 경고도 야고보서의 주제이다. 문제는 이런 내용들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위해 읽는 책이기 때문이다.
* 요즘 식으로 쉽게 말하면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기독교인으로의 깨달음에 입각한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성경을 읽는 기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은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삶의 변화 없이 구원의 은총만을 바라며 교회에 다니곤 한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라는 프로테스탄트의 표어는 본래 의미가 망각된 채 말로만 믿음으로 주어지는 값싼 은총을 강조하는 것처럼 왜곡된다.
* “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이고 모든 실패한 사람들의 하인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사실 내가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도 사실 내가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또한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 나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이득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멸을 맞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아무런 상관없지만, 만일 내가 필요하다면 나를 훈련시켜라. 엄격하게 대하라. 그러면 나는 이 세상을 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너무 쉽게 대하면, 당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 여기서 ‘나’는 누구일까? ‘나’는 바로 ‘습관’이다. 위 글은 이재준의 <습관 1%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진다>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습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주는 글이다. 습관에 대한 명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교육자 호레이스 만은 “습관은 작은 실로 엮은 밧줄과도 같다. 한 가닥씩 엮다보면 어느새 끊어지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비디우스는 “시냇물이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나쁜 습관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바다같이 커진다”라고 말했다.
* '습관(habit)'이라는 단어는 원래 의복이나 옷감을 의미했는데, '승마복(riding habit)', '복장(habiliment)'과 같은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즉 습관은 우리의 인격이 입고 있는 의복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습관은 생각지도 않은 일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에게 딱 들어맞고 편하기 때문에 옷처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몸에 맞고 편한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면 불편하기 마련이다. 새 옷도 얼마 지나면 몸에 익숙해지면 편해지겠지만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 그래서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해마다 새로운 목표를 세워놓지만 작심삼일로 끝내기가 일쑤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쳐야 하는 나쁜 습관은 생각만 한다고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습관을 바꾸는 일은 개인에게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고,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일은 튼튼한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 맥스웰 몰츠 박사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면 어른의 경우 최소한 21일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가 강조한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7가지 단계>는 21일 동안 노력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 첫 단계는 결심하는 일이다.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겠다고 결단하는 일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첫 번째 단계이다. 이런 결단이 없다면 옛 습관을 버릴 수도, 새로운 습관을 만들 수도 없다. 고쳐야 한다는 자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 영어로 결단이란 단어는 ‘decision'이다. <에센셜리즘>의 저자 그렉 맥커운은 결정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decision'의 라틴어 어원은 '자르다' 혹은 '죽이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결국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잘라내고 거절하는 일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베리(Barry, 오바마의 별명)’에서 친구들과의 대화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오바마가 “대학은 배우는 곳이 아니라 훈련하는 곳이래”라고 말하자 한 친구가 “뭘 훈련해?”라고 묻는다. 그러자 오바마는 “필요 없는 걸 원하는 이전의 나를 버리는 거”라고 대답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배움으로서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곳이 대학이라는 말이다.
* 나는 교회도 비슷하다고 본다. “필요 없는 욕망과 아집을 버리는 훈련을 하는 곳”, 그래서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곳.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란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불필요한 욕망과 아집을 버려야 가능하다. 그러지 못한다면 자기 길을 가는 것일 뿐이다.
* 그런 훈련은 마치 우리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는 노력과도 같다. 화가와 조각가의 차이는 뭘까? 화가는 아무 것도 없는 캔버스를 채우며 그림을 그린다. 반면 조각가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들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깍아내어 원하는 형상을 만든다. 어떤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감탄하면서 물었다. "보잘 것 없는 돌로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 형상은 처음부터 화강암 속에 있었죠.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들만 깎아냈을 뿐입니다"
*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일, 즉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익히려는 노력은, 바로 원래 있던 우리의 본모습, 즉 우리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깍아내려는 노력과 같다. 맥스웰 몰츠 박사는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7가지 단계>를 언급하지만,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첫 번째 단계 즉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겠다고 결단하는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부분은 소용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또는 내가 속한 조직이 변화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인식하는 일이다. 지난 주일 총회를 통해 새 운영위원장이 선출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교회의 한계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새 운짱이 선출됐으니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문제가 봉합된 것일 뿐이니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서로 다른 두 생각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 오늘 주보에는 ‘울둘목’이라는 시를 소개했다. 울둘목은 전라남도 해남군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있는 명량해협(鳴梁海峽)이다. 길이 약 1.5km이며, 폭이 가장 짧은 곳은 약 300m 정도가 된다. 밀물 때에는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서해로 빠져 나가 조류가 5m/s 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이를 이용하여 정유재란당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고도 불린다. 오늘 시에서 문숙 시인은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라면서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라고 표현한다. 시인의 표현처럼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섞는 일은 전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 그럼에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한다. 여기서 못 섞으며 다른 곳에 가서도 못 섞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필요 없는 욕망과 아집을 버리는 훈련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마음을 섞는 훈련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서로 변해야 한다. 서로 자신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익히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상대만 변하하고 하면 안 된다.
* 나는 몽돌해변을 좋아하는데, 몽돌해변에 가면 뾰족하고 모난 돌이 없다. 그런데 그 몽돌들도 처음에는 모두 뾰족하고 모난 돌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맨들맨들한 몽돌인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돌은 둥글게 되었는데 어떤 돌은 모난 채 있는 경우는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뾰족하고 모난 부분이 둥글어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까? 우리가 마음을 섞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우리가 마음을 섞는 일이나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이 몽돌처럼 되는 일은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도태되고 말 것이다. 왜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라는 한탄이 존재했다. 우리가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고, 상대가 변하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상대도 자신은 변하지 않고 우리가 변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데, 우리가 그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 중고등학교 때부터 ‘학문은 여역수행주하여 부진즉퇴’라는 논어의 구절을 좋아하는데, 학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나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배움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바로 물러나는 것처럼, 세상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바로 퇴보하게 된다. 제자리 걸음조차 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우리 교회의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
* 어느 회사에서 '회사를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브레인스토밍 기법을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도 마땅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럼 반대로 '회사를 망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토의해 보자고 제의했다. 이번엔 많은 의견들이 나왔다. "근무시간에 주식만 한다." "사우나로 출근한다." "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제공한다." 등등의 의견이 계속 나온 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회의를 지켜보던 한 간부가 입을 열었다. "회사를 지금 이대로 둔다."
* 변화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노를 젓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런 개인이든 조직이든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변화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로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는 누구도, 또는 어떤 상황도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일치되게 행동하려고 한다.
* 예컨대, ‘난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은 항상 내성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내성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성적인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꾸는 것이다. 즉,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혹은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다’라는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이를 적용하면 ‘우리 교회는 원래 이런 교회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중간고사를 앞에 두고 시험공부 대신 산행을 선택한 중학생들이 공부하는 게 더 어려운지 산을 타는 게 더 어려운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동안 격렬하게 진행되던 논쟁은 그 가운데 가장 덩치가 작은 1학년 남학생의 우문현답으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야 당연히 산을 타는 게 더 어렵죠! 공부는 하는 척할 수도 있지만, 산은 타는 척할 수 없잖아요?" 물론 공부를 하는 척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힘들다.
* 당연히 산을 타지는 않고 타는 척만 해서는 결코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기독교인척하는 자세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 길을 가겠다고 모인 사람들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약자/소외된 자에 대한 태도와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중시한다. 나는 그런 자세를 예수에게서 배웠다.
* 청룡영화상을 수상한 76세의 배우 나문희 씨는 "어머니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문희의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간단한 수상소감으로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본 수상소감들 중 가장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손석희 앵커의 말대로 그야말로 종교 대화합적인 상생의 멘트였다. 손 앵커는 앵커브리핑의 말미에 “Let's agree to disagree(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시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습관은 나쁜 습관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일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좋은 습관을 익히기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처럼 어렵다는 마음 섞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기쁘게 수행하며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교회를 만들어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