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나마 항해기를 올립니다.
선배님들의 inspiration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inspiration이 되기를 기대하며.
Day 1 6/11
작년 초 KK에 입항할 때 입항신고를 못한 채 입국하고 마리나 사무실에 업무를 맡겨 두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져 선장은 오도가도 못하고, 사무실은 작업을 잊어버리고. 타라와디 입항신고를 출항할 때가 되어서야 일년반만에 하느냐는 항만청의 질책에 사과의 의미가 담긴 사유서까지 제출하고서 힘들게 체크아웃 도장을 받았다. 에이전트 알빈에게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냐니 내일 정오까지 24시간이란다. 마지막 비어타임에서 ‘내일까지 떠나라니 아침에 가겠다’고 했더니 피터가 항만청 친구 통해서 뒤를 봐줄테니 하루 더 있으라 한다. 로이와 그래험은 금요일에 항구를 떠나지 않는 게 뱃사람들의 불문율이라고. 피터는 영국인 아버지와 중국계 말레이인 어머니를 두었고 딜리버리를 하는 친구다. 아버지가 영국 사립학교에 넣어줬지만 학교에서 불링을 당하고선 영국 국적을 포기했단다.
‘아침에 거기 항만청 다녀왔다. 그 친구들도 나 알거다. 행정 문제로 스트레스 받기 싫고, 너까지 욕먹을 일 벌이고 싶지 않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알려줘. 작업은 별거 아냐. 행여나 쿠닷까지 가는 길에 문제 생기면 해경 보낼테니 연락 하고.’
데럴 어머니(사업하는 중국인답게 매사에 길시, 흉시를 따지심)께서 운세를 봤는데 7시가 좋단다.
5시 기상. 샤워하고 물 가득 채우고 칵핏 청소하고. 6시반이 되니 한둘씩 모인다. 데럴에게 아이스커피만 좀 사다 달랬더니 현지음식 누들과 볶음밥까지. 다들 모여서 사진도 찍고. ‘아차 어머니가 출항 전에 배에 술 뿌리라고 하셨는데’. 외가쪽이 뱃사람 집안이라 어머니도 미신 추종자시다. 독일인 알폰소 어른이 타이거 맥주 한 캔 주셔서 데크에 고루 뿌린다.
7시 정각 출발. 빈센트가 계류줄 도와준다. 빈센트는 필리핀 친군데 형 벤과 함께 마리나 온갖 허드렛일 하는 성실하고 양심적인 젊은이다.
이별은 짧게. 한사람씩 눈 맞추며 감사 인사. 출발.
1마일쯤 나와서 세일을 올리는데 잘 안올라간다. 지난번 테스트에선 괜찮았는데. 땀 반바가지. 가야섬까진 완전 뒷바람이라 버터플라이. 섬을 돌아서 방향을 잡는데 하늘이 컴컴해지며 거스트. 겨우 올린 메인을 다시 내리고 집세일만. 뒷바람 타고 6,7노트. 메인 올릴 필요 없이 오후 내내 집세일만 펴고 순항. 저녁이 되자 바람은 잦아들고 하늘이 맑아진다. 대럴이 갖다준 현지인식 볶음밥으로 저녁식사. 두세 시까지 말똥말똥하다.
Day 2 6/12
말레이시아 최북단 쿠닷을 지나고 일출 즈음에 필리핀 해역 진입해서 국기를 교체했다. 엔진룸을 보니 보조냉각수통이 비었다. 큰 냉각수통에 물이 모자랐나 싶어서 가득 넣고 조금 더. 바람이 조금씩 살아난다. 엔진을 끄려고 하는데 안꺼진다. 이럴수가. 저번 수테라마리나에서도 이랬던 적이. 연료를 차단하고, 흡기구를 막는 등 별 시도를 다하다가 결국 저 스스로 연료 다 태우고 꺼짐. 그 후 다시 켜려다가 실패하고 결국 한국으로. 요번에 한스가 와서 분명히 고쳤는데 또 고장이라니. 야속한 한스. 한스가 안꺼질 땐 뒷쪽 빨간버튼을 누르는 방법도 있다고 가르쳐줬다. 끄는 건 그렇다 치고 다시 켤 수 없다면. 망망대해 표류. 엔진 켠 채로 수빅까지 갈까. 아니다. 50마일만 되돌아가면 쿠닷. 한스도 그 근처에 산다 했다.
배를 돌린다. 오만 생각이 다 든다. 금요일에 출발하는 게 아니었어. 로이와 그레엄에게 되돌아간다고 알리고 빠꾸. 도착예정 저녁 6시.
쿠닷과 필리핀 사이의 해협은 떠다니는 통나무로 악명 높다더니 어젯밤엔 몰랐는데 밝은 날에 보니 천지가 지뢰밭이다. 타라와디도 한번 쿵. 꾸벅꾸벅 졸다가 당했다. 문명사회로 돌아오니 카톡도 되고. 출발 잘 했냐는 배선장님께 사정 말씀 드리니 쿠닷에 다시 들어가면 재입국이나 출국 연장인데 상당히 복잡하단다. 피터를 떠올린다. ‘쿠닷까지 가다가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해라’. 그레험에게 피터 수배 하랬더니 곧 비어타임에 온단다. 행정문제는 잘 될테고 문제는 다시 엔진. 한스에게 왓츠앱을 보냈더니 지난번 고장은 스타트모터의 볼트가 느슨해서 끼워넣은 것 밖에 없다. 걔가 도로 빠졌나 살펴봐라. 살펴보니 볼트 빠진 건 없는데 연결 되었어아 하는 걸로 보이는 선 두 가닥이 보인다.
‘한스, 이거 끼워서 엔진 죽으면 다시 살릴 수 있는 거 확실하지?’
‘당연이지’.
선을 연결하고 빨간 버튼 누르니 엔진이 꺼진다. 조마조마 실버 버튼. 부르릉. 이렇게 간단한걸.
하루를 꼬박 허비하다니. 허탈하지만 무식이 죄이다.
로이가 놀린다. ‘금요일에 항구를 떠나는 거 아니랬지’. 다음부턴 수리할 때 꼭 참견해야겠다. 겸사겸사 한스에게 감사 및 작별 인사를 하고. KL 로지 아주머니 댁에도 인사드리고. 엔진 켜고 지뢰밭 다시 지나려면 배가 다칠 수도 있으니 세일 올리고 천천히 통과. 약한 바람이 두어 바퀴 돌더니 바람이 돌변한다. 스콜. 부랴부랴 엔진 켜고, 세일 걷고 출력을 높이니 배는 진정되는데 날씨는 도무지. 비바람이 거세다. 오토파일럿에게 맡기자. 잠시 후 삐삐 소리와 함께 오토파일럿도 항복. 비바람을 맞으며 마른 옷 아끼려고 맨몸으로 버티며 훨을 잡았다. 진정되자 오선생에게 다시 맡기고 캐빈으로. 갤탭으로 플로터를 보며 주변을 살피던 중 삐삐 소리. 인근에 선박 등장. 조금 빨리 타라와디를 교차해서 지나가겠지만 행여나 싶어 주시하던 중, 그 선박으로부터 무전이 왔는데 지직 소리에 묻혀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투덜거리며 후래쉬 들고 비바람 콕핏으로. 비에 가려 적녹등도 제대로 보이질 않고. 그래 내가 피하자. 기어 중립 넣고 머무르자 그 배 불빛이 멀어진다.
Day 3 6/13
어제 기름을 많이 소비했으니 기름 넣는다. 히빙 투 해두고 피터가 준 30킬로 말통을 들고 나와 기름 넣으려니 힘들다.
필리핀 국기도 다시 달고. 오늘 조식은 일빵빵 짜장비비밥.
2일차에 목적지를 향해 이동한 거리는 고작 30마일. 오늘은 바람이 좋아야 할텐데. 좋지만 너무 뒷바람이라 브로드리치로, 자이빙하면서 가기로. 여기 동남아는 갑자기 스콜이 오니까 미리 리핑하고.
속도는 느리지만 안전하다. 8년 동안 관리 못해서 썩은 배를 수리하고 있는 프렌치 장 프랑소와 왈.
‘천천히 다녀. 우리가 레이서 아니잖아. 배 많이 기울이지 말고 리핑해서 편안하게 다녀. 하루 이틀 빨리 가야 무슨 소용’.
맞다.
오후가 되어 바람이 떨어진다. 남풍이 들어와야 하는데 팔라완 섬에 가려 그런 듯 하다는 윤예보관의 분석. 섬에서 좀 멀어지면 나을라나. 엔진 온. 2,000rpm에서 5.8노트. 신경 쓰이게 하던 인근 배 두 척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구름 끼어 별도 달도 없는 적막강산.
싱글핸들러 최대의 적은 수면부족. 그로 인해 온갖 환청과 환시를 경험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도 그런가? 이상한 음악소리가 들린다. 라디오가 켜젔나? 아니다. 어제는 빌리 할리데이 비슷한 노래소리가 들리더니 오늘은 80년대 뉴워이브 음악.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Day 4 6/14
팔라완 서쪽, 필리핀과 중국 간에 소유권 다툼이 인다는 지역을 통과한다. 듣기로는 국경 분쟁뿐 아니라 연안 가까이는 필리핀 어선, 멀리는 중국 어선이 많다는 얘기도 들었고, 너울 파도도 심하니 주의해야 한다던데 너무 조용하다. 본 것이라곤 상선 세 척. 그리고 신양리 해수욕장만큼이나 평탄한 바다. 바람도 없는지라 밤새 기주로 달리는 사치도 부린다. 이럴 때가 아닌데, 바람이 불어야 기름 아끼는데. 오늘은 바람이 불어주겠지. 기름 30리터 더 넣고 물바가지 만들어 바닥 미끄러운 기름 청소도 했다.
바람 5노트. 배는 3노트. 윤예보관에게서 10~15란 예보를 듣고 잠시후 7,8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거기서 끝. 더 이상 올라가지도 않는데 자이빙 하느라 시간 낭비 말고 택포인트를 길게 잡기로. 다니다 보니 이제 소나기 구름이 구별된다. 뭉게구름 아래 거대한 장벽이 쌓인 것처럼 비가 내리고. 엔진 켜고 항로 변경 도주. 바람 방향이 바뀌어 애초에 350도로 치고 올라갔던 각이 315까지 멀어진다. 이거 곤란한데. 자이빙하면 각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멀리 가려던 계획 변경하여 도로 남동으로. 역시나 각도 좋고 속도도 더 나온다. 밤바람도 평균 8노트를 새벽까지 유지해줘서 약풍에도 80마일. 만족한다.
2단 리핑 시트에 상처가 보인다. 행여나 해서 세일을 접고 살펴보니 1/3쯤 잘려있다. 가슴 철렁.
바다에서 물 아끼라는 건 뱃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소중한 원칙이지만 그래도 사나흘에 한번 샤워는 해야겠다.
Day 5 6/15
밤 두시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만 하다만 세 시가 되면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20분 알람 맞추고 자다 깨다 하면 된다는 선배님들의 말씀도 아직 잘 통하지 않는다. AIS보고 주위 살피고 아무도 없으면 그냥 눕는 것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알람도 울리다 지쳤는지 꺼져있고 시간은 두세 시간 경과.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기온 수온이 오를 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엔진으로 가자. 드리프팅 하면서 낭비할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
간밤에 할머니가 많이 걱정하신다는 아들 문자에 마음이 편치도 않다. 여럿이 맥주 마시고 놀다 파할 때면 로이는 꼭 한잔 더하자고 꼬드긴다. 캐빈에서 치즈도 만드는 릴리라는 페루 출신 참한 부인과 항해중인데, 술 먹고 늦게 들어가면 릴리는 어떻게 하냐니까,
‘내가 행복하면 릴리도 행복한거다’.
정확히 나와 반대. 나의 행복은 주위 여성들의 우려, 한심함, 분노를 유발한다. 매만 맞다가 14살에 학교를 관두고 40년을 바다에서 살았던 로이. 코로나만 아니면 로이는 나와 같이 제주까지 항해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부산 텍사스도 다시 가고.
조류가 필리핀 서부를 북상하며 흐르니 도움을 받을 거란 선장님들 말씀처럼 rpm 2000에 5.2를 유지하다가 5.9까지 올라간다.
오늘도 수평선 안에서 배 한 척 보이지 않는다. 이 넓은 바다가 열려 있지만 나는 배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요트는 열린 감옥인가 아니면 갖힌 천국인가? 어디서 들은 말 같기도 하고.
상승된 수증기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모양의 구름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식사는 여전히 일빵빵.
Day 6 6/16
비비스틱 메신저에서 어제 종일 문자가 오지도 가지도 않길래 전원 끄고 다시켜기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더니 메시지 봇물이 터진다. 첨단장비도 바닷물 습기엔 별 수 없다. 50년 전, 첫 세계일주 레이스에서 가족과 미디어에게 보내는 편지꾸러미를 줄에 매달아 새총으로 지나는 상선에 쏘아 보내는 사진이 떠오른다.
Day 7 6/17
해뜰녁, 루손섬이 보인다. 마닐라 앞바다 트래픽 조심. 의외로 조용하다. 방카가 신나게 달려와 손을 흔들길래 봤더니 백인 청년. 미군 청년이 바람 쐬러 나왔나보다. 마닐라를 지나 저녁 무렵. 포트쪽에 세 척, 스타보드 스턴에 한척이 다가오면서 갖힌 형국. 한쪽으로 확실히 꺽어 의사표시를 하니 그들도 방향을 튼다. 또다시 조용한 야간항해.
Day 8 6/18
엔진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몇 시간 항해가 가능한지 테스트. 42시간까지 일단 확인하고 재급유. 2000rpm으로 5노트 나오니까 대만은 너끈히 건너겠다.
오후 세 시경 루손섬 북서 핀젯 도착. 일주일만에 앵커링. 비치 곳곳에 백여 척의 방카가 펼쳐있고 입출항이 잦아 분주한 곳이다. 어민들과 접촉을 최소화 할 수 있어 보이는 곳에 앵커를 내리고 샤워. 해가 떨어지고 저녁 준비를 하려는 순간, 한 무리의 청년들이 탄 방카가 온다. 자신들은 경찰이다. 이곳은 제한구역이라 앵커링이 불가하다. 옆 항으로 옮겨라. 지금? 그래 지금. 이 밤중에? 1마일 거리다. 지금. 싸워봤자 지는 건 뻔한 상황. 그들이 떠나고 앵커를 올리는데 체인이 엉겼다. 손으로 나머지를 올리긴 했는데, 이 상태로는 옆 항으로 옮겨도 앵커링을 못하고, 다시 이곳에 내리지도 못하고. 가자. 애초에 봐뒀던 최북단으로 가자. 지금 출발하면 새벽에 도착하니 밝을 때 앵커 체인 엉킨 건 수리하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서럽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Day 9 6/19
어젯밤 8시경 핀젯을 떠나 50마일 거리의 루손섬 최북단 앵커리지 입구에 아침 6시경 도착했다. 남서풍이 강하게 불고 파도는 높아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 좁은 앵커리지 입구를 통과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간밤에 표선장이 알러준 다른 앵커리지로 향했다. 30마일 6시간 더. 밤새 항해하고 지쳤지만 이 날씨에 대만으로 건널 수는 없고, 피항지로 가는 수 밖에. 거스트가 27까지 올라간다. 클라베리아 도착. 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섬이 파도를 막아주고 바닥은 모래라 앵커링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그 인간은 이런 곳을 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냈는지. 섬 뒤에 배를 숨기고 앵커 체인을 살펴보니 분해해서 정돈만 해도 될 것 같다. 6각 렌치로 분해하니 체인이 주루룩. 해결.
그런데 법적인 절차는 어떻게 되나? 해경에 알려야 하지 않냐고 표선장에게 톡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는 사이 한 청년이 카약을 저어 온다. 여기 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자기가 해경이라 한다.
들어오는 거 보고서는 무전 쳤는데 왜 안받느냐고. 미안하다. 꺼져 있었다. 안그래도 관공서 찾고 있었다. 해경 파출소가 비치에 있었던 거다. 장사 포기한 민박집 같이 보이는. 총까지 든 졸개 둘도 따라 왔다. 이모저모 선실도 살펴본다.
‘서류, 여권 다 보여 달라. 가져가서 카피해도 되겠나?’
‘슈어.’
‘이민국에 이런 경우 얼마나 머물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 식량은 충분하냐?’
‘땡큐.’
시골에 근무하는 초급간부가 야무지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 표선장에게서 답이 왔다. 들어가면서 해경을 부르거나 도착해서 어민들에게 해경에게 알려달라고 하는 게 맞다. 무작정 쳐들어 갔으니 북한 같았으면 총 맞았다. 수심 5미터. 늘어진 체인이 선명하게 보이지만 앵커가 제대로 박혔는지 확인. 물안경 끼고 자맥질해서 보니 모래속에 단단히 묻혀 있다. 어스름 저녁이 되자 주위가 부산해진다. 저녁 조업 나가는 어부들, 물놀이 하는 아이들. 여자 아이 셋이 깔깔대며 카누 저어 온다. 두유 노 BTS? 라고 묻길래 엄지척하며 아는 척을 했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깔깔. 남자애들이 오더니 두유 노 블랙핑크? 제니? 또 아는 척을 했다.
‘아저씨, 아들 있어요?’
‘하나 있긴 한데... 우리가 또 만들면 안될까?’ 소리를 하려다 말았다.
가까이 패들링해서 오길래 거리두기 때문에 접촉은 안되니 미안하다고 했다. 간만에 안식. 냄비에 편안히 물도 끓이고. 그래험이 알려준 라디오가든 이라는 앱. 전세계 라디오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데 한국껀 종교방송, 지역 커뮤니티 뿐. 체코의 클래식 음악 채널을 찾았는데 아나운서 없이 음악만 24시간.
Day 10 6/20
이곳 어부들의 방카는 대부분 엔진이 없다. 모두 노를 저어 조만치 가서 낚시하고 조개 잡고. 스쳐가는 방카에 손을 흔들면 노젓기를 멈추고 답한다. ‘웰컴 투 필리핀스.’ ‘빅 피시’ 외치며 답한다. 아침저녁으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40년 전 우리처럼. 해경 초소가 빤히 보이는 곳에 있으니 든든하다. 해맑게 웃고 소박한 모습이 어둠의 필리핀과는 전혀 별개의 세상이다. 도밍고 대장은 별 문제 없는지 안부 무전을 준다.
‘문제 있다. 맥주가 필요하다.’
일기예보 보니 닷새 후 금요일에나 바람이 잦아질 것 같은데.
Day 11 6/21
수테라마리나에 한국 배가 타라와디를 포함 네 적 있었다. 그 중 타망고호 배선장님이 오랜 준비를 하고 말레이시아에 오셨는데 공항에서 2주 격리 저분을 받고서는 곧장 한국으로 귀국하셨단다. 대만도 상황이 녹녹치 않을텐데. 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본 바로는 마리나에 8주 머무를 수 있다는데. 그래도 다시 확인 차 마리나 관계자에게 이메일로 문의했더니 마리나에서는 외항선을 받을 수 없고, 보급이 필요하면 카오슝이나 화렌으로 가라는 답장. 그럴 바에 이시가키로 갈란다고 계획 변경하는데 다시 이메일이 왔다. 우리 마리나는 진입하기가 위험하니 등대 사이로 법당을 보며 들어오시라며 지도까지 첨부해서 환영 메시지를 보낸다. 대만 만두 유명하던데 잘됐군.
Day 12 6/22
럼, 진, 브랜디, 맥주 20캔, 커피 12캔, 랍스터 한바가지, 바나나 3송이, 고구마, 망고, 수박, 옐로테일 2마리, 로스트 치킨, 생닭, 삼겹살. 얼음.
술, 커피, 과일 좀 사다 달랬더니 해경 팀이 사다준 것들.
Day 13 6/23
운동삼아 무로함도 해결할 겸 헐 청소 3일째. 그새 자랐던 해초들 거의 제거.
이곳 어업 방식은 40년전 고향에서 봤던 모습을 아직도 하고 있다. '후리'라고 하는데 그물 한 끝을 해변에 두고 배가 해변을 나가면서 반원을 그리며 그물을 놓는다. 그러면 해변 양끝에서 그물을 좁히며 당기면 해변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다. 동네 남녀노소 수십 명이 모여 하루 두 번 작업하는데 팀웤이 볼만하다.
타라와디 바로 옆에 청년이 뗏목을 타고 와서 잎이 무성한 대나무 뭉치를 물에 빠뜨린다. 뭐냐고 물으니 스퀴드란다. 저걸로 오징어를? 오징어가 대나무 더미를 집으로 여긴다나.
다음날 그 청년 몇 번을 잠수해서 빈손으로 나오면서 푸념한다.
‘No fish no money no woman’.
Day 14 6/24
05:30을 출발 시각으로 잡고 05시부터 준비한다. 엔진 시동. 시트 점검. 플로터, 오토. 혼자 하는 앵커링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체인이 또 엉키며 살짝 당황. 그래도 정시 출발. 5.5노트 무난한 속도. 대만 최남단 호비후마리나를 목적지로 잡고 윤예보관이 찍어준 쿠로시오해류 정류장으로 향한다. 스피드가 점점 올라간다. 대만 200마일. 30시간이면 가능한 거리. 내일 점심은 만두. 10시간쯤 지났을 때, 호비후마리나로부터 메시지 한통..
'높은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마리나 입항은 불가하니 카오슝이나 화렌으로 가시오. 그곳에서 필요한 서플라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젠장. 메신저 번호를 괜히 가르쳐줬네. 웟 사람 명령 따르는 그 양반 탓하면 무엇 하리. 이시가키로 가자.
이 쿠로시오 익스프레스는 이시가키로도 간다.
루손 해협은 해저 지형이 거칠어 파도가 높단 얘기를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파도가 거칠게 달려와서 들었다 놨다를 반복. 풍속은 15-20 정도라 견딜만 했는데 밤 9시경 27,30,35까지 올라간다. 다행이 뒷바람이라 집세일을 신문지만큼 남겨서 간신히 방향만 유지하도록 하고 엔진 출력을 올린다. 염려스러운 건 오토파일럿. 한차례 강풍에 항복하는 모습을 본 후라 미덥지 못하다. 조마조마 두 시간을 보내니 바람이 잦아든다. 오토도 잘 버텨 줬고. 몇 시간 더, 파도에 시달리지만 그럭저럭 밀고 나가는데.
Day 15 6/25
새벽 세 시 다시 35노트. 한 시간쯤 버티다가 뒷일은 오토에게 맡기고 캐빈으로. 졸음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다. 마지막 필리핀 영토 섬을 지난다. 05시30분 출발 후 24시간 160.5마일. 훌륭하다. 란워섬 동쪽 20마일을 웨이포인트로 잡고 달린다. 8노트 9노트. 어쩌다가 11도 찍히지만 평균 8.5내외. 대단하다. 오후 세 시경, 엔진이 덜덜덜 하더니 멈춘다. 볼 줄도 모르지만 살펴보는 시늉을 하는데 벨트가 낭창하다. 출발 전에 KK 기술자 알룩이 단단히 조이는 걸 봤는데.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어 조여 놓고 시동 거니 부르릉. 오후 다섯 시에 벌써 90마일을 넘겼다. ’12시간에 94마일은 찍겠군‘ 생각하는 사이 엔진이 다시 멈춘다. 벨트는 짱짱. 뭐가 문제지? 냉각수? 냉각수통에 물을 조금 채우고 시동을 거니 걸리긴 한다만 엔진룸에서 연기가. 놀라서 내려가니 불 탄 연기는 아니고 수증기다. 엔진을 끄고, 뭘까? 엔진을 식히며 범주로 간다. 집세일로만 5,6노트가 나온다. 해가 지고 다시 수리 도전. 냉각수통을 채우고 시동. rpm 2000. 또다시 수증기. 뿐만 아니라 탄내도 나며 일이 점점 커진다. 파도와 어둠 때문에 확실치 않지만 해수 냉각수 배출이 헛방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정이 넘은 시각. 오늘은 여기까지. 맥주나 하나.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올려둔 캔이 바닥에 떨어져 거품 분사.
Day 16 6/26
해뜨기도 전에 다시 하나하나. 임펠러 분해. 깨끗하지만 스페어로 바꿔보자. 그런데 스페어가 기존 것과 모양이 다르다. 이딴 걸 스페어라고 믿고 들고 나온 내가 잘못이지만, 스페어라고 고이 보관된 것이 모양이 다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도로 닫고, 해수 배출 확인하니 역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임펠러 방향을 혹시 거꾸로 끼웠나 싶어 다시 열어보는데 물이 방울로만 떨어진다. 이 속에 물이 있어야 그걸 마중물로 해서 해수를 끌어당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럼 어떻게 채우지? 파이프 위에 필터통이 보이길래 물을 채운다. 부르릉. 시동은 잘 걸린다. 또 수증기가 끓어오르면 수건으로 덮으려고 냉각수통을 노려보는데 아래 투명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해수 냉각수 배출구 확인. 콸콸. 된건가? 기어 빼고 출력 상승 이상 무. 기어 넣고 출력 상승 이상 무.
처음에 벨트가 느슨해지면서 해수를 충분히 끌어올리지 못해서 냉각 파이프가 비어있는 상태. 거기에 계속 엔진을 돌리니 과열. 청수 뿐 아니라 해수도 확인해야 한다는 간단한 문제 때문에 15시간 속을 썩고 데일리 기록도 놓쳤다. 처음에 안 될 땐 대만 해경을 부르나 일본 해경을 부르나 등 온갖 생각이 다 들더니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못난 주인 만난 엔진에게 휴식을 주고 오늘은 범주로 가자. 일찍 도착하면 이시가키에 오밤중에 입항하는 상황이라 오히려 천천히 가서 밝을 때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
Day 17 6/27
이시가키 가까이 잔잔한 바다로 진입하는 중에 날이 밝는다.
문명사회로 진입을 위해서 샤워하고 게 중 깨끗한 옷을 골라 입고 해경에 무전을 넣는다. 받지 않아 vts에도 무전을 넣지만 묵묵부답. 그냥 들어가지 하는 순간 해경의 무전. ’4번 부이 근처에서 대기하면 패트롤을 보내겠다‘. 잠시 후 ’1,3번 초록 부이 사이에 앵커링 하라‘. 가서 보니 큰 선박을 위한 자리지 작은 요트가 앵커링 하기에는 위험한 장소. 맴돌던 중에 패트롤이 오길래
’여기는 앵커링 하기에 위험한 곳이다. 지나는 선박도 많고 남서풍이 바로 들이치는 곳이다‘ 라니 따라 오란다.
해경 배들이 빙 둘러 정박한 곳의 틈바구니. 타라와디가 외항에서 맴도는 사이 배선장님이 연락해 두신 현지 요티께서 엔진에 문제가 있는 선박이니 안전한 곳에 정박하도록 해야 한다고 작업을 하셨던 거다. 사실 엔진 문제로 어제 두 번, 외항에서 정박지까지 엘 번 넘게 엔진이 꺼졌다가 살아났다. 마침 수리하러 나간 해경선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일본의 서류 작업 시간이다. 열댓 명이 도열하고 있다가 차례로 종이를 들이댄다. 첫 순서는 코로나 팀. 코타에서 받은 검사 결과서 보여주고 정박지 없음으로 싸인 몇 번 하고 패쓰.
다음은 세관 인스펙션. 빌지, 약주머니, 양말주머니, 쓰레기봉투까지 다 뒤진다. 다음은 해경. 플로터의 항적 조사. 규정상 입국 24시간 전에 통보를 했어야 했는데 비상 상황이라 특별히 받아 준거다.
무슨 소리냐. 비상시 입항 하겠다고 국토교통성에 서류 보냈다고 이메일 보여 주니, 공유가 되지 않았다고,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다음 누군가 와서 또 종이 들이대고 싸인 하라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타라와디를 수십 번 쓰고 싸인 하고. 시스템의 역설이다. 서류 작업 하느라 코로나 컨트롤 타이밍 놓쳤다는 말이 실감난다.
두 사람이 끝까지 기다리다가 와서는 관세청 직원이란다.
’기름 등의 물품을 구입하려면 자기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양상은 하선할 수 없으니 사무실에서 그 작업을 해 줄 에이전트가 필요하다. 마침 외항선 입출항 관련 일을 하는 한국인이 있으니 소개시켜 주겠다‘.
’그 일을 꼭 사무실에서 해야 하나? 여기서 내가 싸인 하고 지인에게 물품 조달 시키면 되지 않냐?‘
’규정상 업무는 사무실에서 해야 한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그래 알았다.
오후 늦게 최사장님이 오셨다. 당진 출신으로 이시가키에서 일본인 아내와 게스트하우스 하시고 선박 입출항 업무를 하신단다.
필요한 게 무엇이냐길래 기름, 물, 맥주, 다꽝.
’식량은요?‘
’그거면 됩니다. 저처럼 한국 요트가 들어온 적이 있었나요?‘
’십년 동안 세 번째 이십니다. 맥주는 아사히로?‘
’좋지요.‘
Day 18 6/28
엔진 냉각수 흡출수 문제를 해결한 이후로 한동안 잘 오다가 꺼지는 문제 발생. 꺼졌다가도 시동은 또 잘 걸린다. 꺼지고 살아나기를 반복.
벨트가 느슨해진 걸 조이려고 한나절 씨름했지만 엔진 구조상 더 이상 조일 수가 없어 작은 사이즈 새것으로 교체하는 수 밖에.
최사장님이 기름은 내일 아침에, 벨트와 엔지니어는 모레 보내겠단다.
Day 19 6/29
필리핀에서 기름 3말을 실었다. 말레이시아는 그런대로 믿을 수 있지만 필리핀은? 로이선장님은 필리핀에서 다섯 말을 샀는데 필터로 걸러보니 물이 3리터였다고 한다. 필리핀 기름은 뒀다가 비상시에 쓰거나 한국 가서 필터링 하기로.
배에서 무료한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는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의 한 일. 빈 캔 고무망치로 납작 만들기. 칼, 레더맨, 손톱깍기 녹 제거. WD40 만든 분에게 노벨상 비슷한 상이라도 줘야지 싶다.
엔진 벨트가 낭창한 것이 문제의 시발이라고 확신하고 수배에 들어갔다. 에이전트 최사장님이 얀마 대리점에는 없고 공구점에서 찾았다고 들고 왔다. 꼭 맞아서 시동 부르릉 이상 무. 그런데 잠시 후 제너레이터 충전이 안된다. 수테라의 전기 전문가 그래험선장이 전기 계통 문제가 발생했다면 사포와 wd40을 들고 나타나는 걸 떠올린다. 접속 불량이 전기 문제의 대부분이라고.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결선 발견. 연결하니 정상 작동한다. 운이 좋았고 생각했다. 동중국해 한가운데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이.
타망고 배선장님으로부터 소개 받은 이시가키 세일러 마에다상께서 비닐 봉다리 가득 식량을 채워 들고 오셨다. 막내아들과 세계일주 하시고 지금은 청소년 세일링스쿨 하신단다. 한국산 김치와 삼겹살, 계란, 우유, 과일. 많이, 멀리 다니신 분이라 나의 고충을 읽고 계시다. Sailors are Sailors. 상륙해서 사케 한 잔 나누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서 필리핀산 진 한 병으로 답례한다.
정박한 곳은 해경 배들 틈바구니지만 육상 쪽 게이트는 오픈되어 아침저녁으로 지역 주민들이 운동하러 드나든다. 대부분 타라와디를 흘깃 보고 지나치지만 가끔씩 눈이 마주치는 분들께는 손을 들어 곤니찌와 인사한다. 그러면 그들은 깍듯이 고개 꾸벅 인사. 들어 올린 손이 머쓱해진다. 상대에 대해 적의가 없고 반긴다는 표시로 손을 들며 헬로 라고 하는 게 보편적 표현이 아니었나?
지나다가도 어디서 왔나? 뭐하는 인간이냐? 라고 호기심에 질문을 던질 법도 한데 전혀 없다. 관광으로, 술 마시러 일본을 다녀봤지만 이곳은 다른 방향의 일본 접근이라 오히려 생살을 보는 느낌이다.
Day 20 6/30
윤예보관으로부터 일요일 출발 반대, 목요일 출발 강력 추천이란 얘기를 듣고 최사장께 포트 클리어런스를 요청했다. 편의점에서 터보 라이터 사는 길에 벤또도 챙겨주신다. 배에 식수는 충분한데 샤워할 물이나 설거지 할 물이 아쉽다. 최사장은 몇 톤이 필요하냐고 한다. ㅋ 정박한 곳에서 7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수도꼭지가 있지만 배를 옮기기도 번거롭고 호스도 없다. 며칠 샤워 안 해도 되니 냅둬라. 그런데 오후에 항만청 직원 네 명이 새로 산 물호스 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호스 포장을 뜯고 굴려서 기어코 타라와디에 호스를 갖다 댄다. 일본인의 직업정신은 훌륭하다. 마에다상께 감사인사도 드리고 해경에 출항한다는 이메일도 보내고.
Day 21 7/1
July morning. 대럴의 어머니께서 길한 시간이 5시 이전이라는 얘길 듣고 4시 45분을 출발 시간으로 했다. 남풍이 다소 강하게 불어 이안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그래도 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지나는 운동객에게 쓰미마생 하니 흔쾌히 도와준다. 해경 함정의 불빛이 있지만 칠흙 같은 어둠. 플로터를 보며 입항 때의 항적을 그대로 따라 나간다. 등대 세 쌍을 차례로 지나니 어둠이 걷힌다. 섬 끝자락을 돌며 최사장께 무사 출항 신고. 해경에게 전달 될 것이다. 냉각수가 잘 뿜어 나오는지 살피는데 연기가 나온다. 정오가 지나도 검은 연기는 계속 나오고 엔진의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가 신경 쓰인다. 만약 엔진이 멈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30마일을 엔진 없이 맞바람 맞으며 돌아가긴 힘드니 일본 해경을 부르나? 아니면 범주로 계속 가나? 하던 중 진짜로 엔진이 쿨럭 대더니 멈춘다. 점검. 이상 무. 왜 꺼진 거냐? 다시 시동을 걸어도 끼익 소리만. 예전과는 달리 심각하다. 윤선장은 엔진이 붙은 것 같다는 사망 선고를 내리고.
가자. 쿠로시오 해류 타고 기다가 200마일이면 제주. 충전은 쏠라 패널도 잘 한다. 해경은 마지막에 부르자. 그런데 무풍. 밤이 되어야 바람이 터진단다. 오후 두 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그냥 표류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낸 후 10노트 중반대의 바람. 새벽까지 잘 불어줘서 출항 후 24시간 동안 90마일.
Day 22 7/2
오전 내내 이어지는 바람에 쾌속 해류. 엔진은 옵션이었나? 오후가 되어 바람이 잦아들어도 해류 덕에 5.5노트 유지. 제주 입항 타이밍에 관한 윤예보관의 설명. 장마철이라도 내가 입항 예정인 월요일과 화요일 사이는 날씨가 괜찮다는 소식. 의외로 잘 풀리는 듯 보인다.
Day 23 7/3
오키나와 나하와 아마미섬 상단을 지나는 동안 바람은 15노트 내외에 조류는 든든하다. 편안한 앵커리지로 유명한 아마미를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
Day 24 7/4
루손에서부터 쿠로시오해류 종점까지 찍어둔 Way point 13개. 동중국해를 가로 지르는 대신 대륙붕에서 조업하는 중국, 한국 선단을 피하고 안전하게 오키나와 열도 가까이 붙어서 가기로 했었다. 12에서 13으로 가려면 바람을 런으로 타야 하기에 50여 마일 앞둔12에서 제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밤과 오전까지 20내외의 바람, 오후부터는 10내외의 바람이 며칠간의 패턴이다. 우려했던 중국 어선은 보이지 않는다.
Day 25 7/5
역시 오전까지는 넉넉한 바람으로 쾌속. 한낮이 되면서 10내외로 떨어져 속도 4. 표선장과 윤예보관이 심상찮은 예보를 보낸다. 제주 동부에서 밤부터 오전까지 30대의 거스트.
지금 스피드라면 꼭 말려들 타이밍이다.
새벽 5시경 우도를 통과하여 구좌 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바람이 덜하니 통과하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엔진 없이 어선들 조업하는 구역에 강풍 속으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 스피드를 늦춰 아예 강풍 뒤를 안전하게 따라가기로. 메인을 접고 집세일도 최대한 리핑 하여 스피드를 3이하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곧 바람이 강해지며 떠밀려서 스피드가 4. 이럴 바엔 그냥 제 속도로 가서 부딪히자. 해가 지자 드디어 중국 어선이 보이지만 다행이 선단 바깥으로 지나간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3시경 30노트. 우도 동쪽 3마일 지점을 waypoint 잡고 오토파일럿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강풍에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노고존으로 빠지기를 반복한다. 아무래도 메인 세일을 올려서 각도를 확보해야겠기에 메인을 올리다보니 갑자기 펑. 메인헬리어드 컷.
메인세일 없이 우도를 지나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방향을 신산리로 잡는다. 마을 어선의 도움을 얻기로.
편안한 코스를 잡고 캐빈으로 들어가서 휴식. 이 날씨에 조업 나온 제주 인근의 어선은 없을 것이기에. 파도가 헐을 타격하는 소리가 쿵쾅거리지만 캐빈 속은 평안하다.
날이 밝고 제주도에 10여 마일 접근하자 표선장으로부터 방향을 김녕으로 잡으라는 권유. 풍향을 보자면 힘들겠지만 집세일만으로도 가능해 보이는 각도. 제주도가 남서풍을 가려주는 위치로 들어가자 모든 것이 끝난 느낌이다.
우도 주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우도와 성산 사이의 강풍과 강한 조류. 하지만 우도 외곽에서 스턴을 집어삼키는 뒷파도와 삼각파도는 처음이다. 2마일 남짓 동안 잇달아 배를 감으러 덤비는 뒷파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어갈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밤에 이 구역에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종달리를 지나니 간밤의 풍랑을 피해서 앵커링한 어선들이 보이고 완전한 무풍. 멀리서 타라와디를 토잉하러 오는 한라 21호가 다가오고.
첫댓글 실감나는 항해기 잘읽었습니다. 정말 수고많으셨어요
그 동안 글 올린 것도 몰랐었다니... 아주 오랜만 아주 흡족하게 세일ㄹㅇ 대리만족합니다. 그리고 매 회 마지막 멘트들에서 글 솜씨를 엿봅니다.ㅋㅋ
ㅎㅎㅎ 답장도 안 달고 있었네...
단숨에...너무 잼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요트여행해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