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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3회 후쿠오카(福岡)①
후쿠오카는, 규슈는 ‘선구’를 사명으로 한다.
선구의 길은 결코 순풍은 아니다.
거센 바람 속에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뚫고
미지의 드넓은 바다를 향해 도전하는 용기 없이는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규슈에는 도전하는 마음이 불타고 있다.
그렇기에 즐겁다!
그렇기에 인간혁명할 수 있다!
이러한 기개가 후쿠오카의, 규슈의 벗에게서 불타오르는 혼이다.
후쿠오카의 동지는 광포의 스승과 함께
어떠한 간난신고(艱難辛苦)도 이겨낸다.
자, 오늘도 용감한 선구의 첫걸음을!
내 뒤를 잇는 사람이 바로
규슈 여러분이기 바랍니다
동양광포는 우리 손으로!
창가학회에는 각지에서 탄생해 전국으로 넓혀진 애창가가 있다.
교토에서 탄생한 ‘위풍당당의 노래’와 ‘신세기의 노래(도호쿠 건아의 노래)’ ‘약진의 노래(주고쿠 건아의 노래)’ 등이 전국으로 넓혀진 배경에는 이케다 선생님이 “좋은 노래입니다. 앞으로 이 노래를 전국에서 부르도록 하면 어떨까요.”라며 진심을 담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규슈에서 탄생해 넓혀진 ‘동양광포의 노래’도 그 중 하나로, 본디 제목은 ‘규슈제패(制覇)의 노래’였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경위는 소설 <신·인간혁명> 제3권 ‘불법서환’에 상세히 나와 있다.
1954년 규슈의 애창곡 ‘동양광포의 노래’가 탄생할 무렵, 규슈의 슬로건은 ‘규슈제패는 우리의 손으로’였기에 노래 제목도 ‘규슈제패의 노래’가 되었다. 올해는 노래가 탄생한 지 65주년에 해당한다.
“‘제패’란 무시무시하고 전투적인 표현이긴 하나 거기에는 전 규슈에 묘법을 넓혀 사람들의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의지와 용기가 담겨 있었다.”(제3권 ‘불법서환’)
1957년 4월, 도다 선생님을 모시고 의기 드높이 개최한 제1회 규슈총회에서 단상 위에 올라간 발표자들이 입을 모아 ‘규슈제패’를 부르짖었다. 모두 ‘도다 선생님이 규슈의 기개를 기뻐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의 말씀은 의외였다.
“조금 전부터 ‘규슈제패는 우리의 손으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소견 좁은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래도 규슈에는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듯하다.
예를 들면, 규슈에서는 곧잘 ‘규슈 남아’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그런 표현을 그다지 쓰지 않는다. ‘홋카이도 남아’나 ‘간토 남아’ ‘오사카 남아’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규슈제패’라 하는 것도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듯해서 스케일이 작다. 이왕이면 ‘동양광포는 우리의 손으로’라고 하면 어떨까.”(제3권 ‘불법서환’)
엄애(嚴愛)의 지도다. 규슈에서는 도다 선생님의 지도를 계기로 가사와 노래 제목에 들어간 ‘규슈제패’라는 부분을 ‘동양광포’라고 바꿨다.
이케다 선생님은 규슈를 생각하는 은사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도다 조세이는 예부터 대륙과 교류가 깊었던 규슈에 동양광포에 대한 크나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서거(逝去)하시기 반년 전, 규슈 총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한 도다는 아시아의 실정에 대해 언급하며 창가학회의 사명을 말하고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바라건대, 오늘의 의기와 패기로 일본 민중을 구제하고 동시에 동양 민중을 구제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도다가 규슈에서 한 마지막 지도였다.”(제3권 ‘불법서환’)
활약할 무대는 세계!
세월은 흘러 1961년 1월 8일, 후쿠오카의 고쿠라에 있는 미하기노체육관에서 규슈의 3개 총지부 결성대회를 열었다.
야마모토 신이치의 아시아 방문을 이달 28일로 앞두고 개최한 결성대회에서는 시작 전부터 ‘동양광포의 노래’의 힘찬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장 야마모토 신이치의 아시아 지도에 발맞추어 동양에 행복과 평화의 빛을 보내려는 벗들의 결의가 담긴 합창이었다.”(제3권 ‘불법서환’)
지도에 나선 신이치는 규슈의 동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도다 선생님의 제자답게 여러분의 선구로서, 동양 민중을 위한 ‘행복의 다리’ ‘평화의 다리’를 구축해 갈 결의입니다. 그리고 저의 뒤를 이어 그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바로 ‘동양광포는 우리의 손으로’라고 자각하고 계신 규슈의 동지 여러분이시기를 염원하는 바입니다.”(제3권 ‘불법 서환’)
광포의 스승이 구축한 행복과 평화의 다리를 그 진열의 선두에 서서 건넌다. 광포의 스승이 개척한 동양광포, 세계광포의 길을 후계의 제자가 나아갈 길로 여겨 어느 곳보다도 앞장서서 끝까지 달린다. 그것이 규슈의 위대한 사명이다.
선구의 길에 방설임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두려움이 있으면 선두로 달릴 수 없다. ‘선구’는 사제불이(師弟不二)의 혼을 불태우며 겁쟁이의 마음을 물리치고 벗과 지역 그리고 사회를 위해 용기 있는 첫걸음을 내딛는 사자(師子)의 투쟁이다.
그리고 신이치는 3개 총지부 결성대회에서 ‘동양광포’의 의의와 나아가야 할 길을 힘주어 말했다.
“동양광포란 바꾸어 표현하면, 인간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며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휴머니즘 정신의 종자를 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활약할 무대는 일본만이 아니라 아시아, 세계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크나큰 이상을 안고 또 현실의 대지를 단단히 밟고 다져, 신심즉생활의 승리자로서 한 걸음 한 걸음 기반을 다지며 전진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위대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제3권 ‘불법서환’)
결성대회가 끝난 뒤에 신이치는 규슈의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거기서 “규슈에서 탄생한 ‘동양광포의 노래’를 전 학회에서 애창하여 동양의 평화 건설에 매진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하고 제안해 모두 기쁨과 찬동의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동양광포의 노래’는 일본 전국으로 파동친다. ‘선구의 규슈’에서 전국으로, 동양으로 그리고 세계로 ‘환희와 승리의 천과(千波), 만파(萬波)!’를 일으키기 바라는 광포의 스승이 거는 기대는 지금도 변함없다.
후쿠오카에 보낸 지도 마지막까지 언제나 선구로
“드디어 규슈의 시대가 왔습니다. 광선유포는 도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사이도 일어서고 상승(常勝)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학회는 크게 비상했습니다.
이번에는 규슈의 차례입니다. 규슈가 일어설 때가 왔습니다. 앞으로는 영원히 ‘규슈가 있어 학회가 있다’ ‘규슈가 있어 광포가 있다’가 되어야 합니다.
규슈의 사명인 ‘선구’의 뜻은, 마지막까지 언제나 ‘선구’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기세 좋게 선봉에 서서 달려 나가도 도중에 지쳐 뒤처지기 시작하다가 마지막에는 꼴찌가 되고 만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의 기세만으로는 ‘선구’를 계속 달리 수 없습니다. 지속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치밀한 계획성에 바탕을 둔 착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선구’는 ‘견실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25권 ‘훈풍’)
광포의 영원한 길을
여는 것은 청년부입니다
남자부·여자부 총회
청년이 광포의 선두에 서야 차대(次代)가 열린다. 규슈는 그 모범이다. 제4권 ‘청엽’에는 청년을 생각하는 신이치의 깊은 마음이 나와 있다.
“어떠한 단체라도 청년에게 기세가 있고 또 청년이 유감없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영원히 정체에 빠지는 일은 없다.
학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광포의 영원한 길을 열어 가는 것은 청년부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청년을 지금보다 더 한층 본격적으로 육성해 가고자 한다.”
그리고 신이치는 각 방면에서 개최하는 남녀청년부 총회에 모두 참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1961년 5월 7일, 규슈 후쿠오카에서 청년부 방면총회의 막을 열었다.
오전에는 여자부총회, 오후부터는 남자부총회를 후쿠오카 스포츠센터에서 개최해 신이치는 잇따라 지도하고 격려했다.
남자부총회에는 무려 규슈 남자부의 70퍼센트 이상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 결집의 중핵이 된 규슈의 남자부 리더가 총회를 향해 활동에 힘쓰면서 멤버들에게 외친 말을 <신·인간혁명>에 쓰셨다.
“이번 청년부 방면총회의 선구를 끊는 것은 우리 규슈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전국의 승패를 가름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먼저 규슈가 승리하면 다른 방면도 규슈에 질소냐 하며 전력으로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규슈 남아의 열(熱)과 힘을 전국의 청년부에 보여 주고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그를 위해서는 철저하게 가정 방문을 하고 신심 지도를 해 가는 것 외에 없습니다. 저는 모든 남자부원들을 야마모토 선생님의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조직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마모토 선생님께서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신심은 물론 일이나 식사에 대한 것까지 걱정하며 매일 찾아가 격려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 동생이 근행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철저하게 대화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각 조직을 들여다보면 근행도 하지 않는 멤버가 꽤 있습니다. 그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것입니다. 물론 개인 지도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불법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여 신심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중에서는 큰소리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두 선생님의 소중한 동생이라는 생각으로 끈기 있게 대화해서 전 규슈 남자부원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일기당천의 인재로 육성시켜 이 총회에 결집시키고자 합니다.”(제4권 ‘청엽’)
이 기술(記述)은 제자의 말을 빌린 스승의 진심이 아닐까.
‘청엽’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부원이었을 때부터 광선유포에 대한 도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학회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려 했다. 그 지각은 반장 시설에도, 청년부 실장 시절에도 항상 변하지 않았다.
물론 위치나 역직에 따라 책임 분야나 역할은 달랐다. 그러나 내면의 자각에 있어서는 도다의 제자로서, 스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하여 학회의 일체를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도다의 훈도를 살릴 수 있었고 커다란 성장도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한다. ‘스승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진지하게 기원하고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 여기에 승리를 여는 생명력과 지혜를 용현하는 근본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족을 잃은 벗을 격려한다
‘청엽’에는 규슈제1총지부의 부인부장 시바야마 미요코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들은 신이치가 남겨진 가족을 직접 격려하는 장면이 씌어 있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잃는다는 것은 남성에게 가장 괴롭고 슬픈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약해지면 가장 슬퍼할 사람은 아마도 돌아가신 부인일 것입니다. 부인은 당신도 아이들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강한 마음으로 이 슬픔을 이겨 주십시오.”
세 딸에게는 “어머니는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당신들이 평생 자랑할 수 있는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괴롭고 슬픈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식들이 구김살 없이 무럭무럭 자라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생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진력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염원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더 괴롭고 힘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본존님에게서 떠나지 말고 신심을 관철해 간다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지 말고 신심을 끝까지 관철해 가는 것입니다.”
소설에는 신이치가 가족이나 동지를 잃은 벗을 격려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신이치는 언제나 벗의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남겨진 가족이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일이 고인의 염원’이라고 강조하고, 불법의 삼세(三世) 영원한 생명관(生命觀)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을 제시했다.
<기고> 후쿠오카에서 ‘반전공세’의 봉화를!
소다 도시카즈 총후쿠오카장
우리에게는 절대 내리면 안 되는 깃발이 있다. 그것은 광선유포의 깃발, 절복(折伏)의 깃발이다.
우리에게는 절대 꺼뜨리면 안 되는 불꽃이 있다. 그것은 신심의 불꽃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39년 전, 이 ‘사제의 혼백’을 세계 어느 곳도 아닌 우리 후쿠오카에서 사자후(師子吼)하고 반전공세(反轉攻勢)의 봉화를 올리셨다.
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상) ‘웅비’에는 당시 정세가 모두 씌어 있다.
1980년 제5차 중국 방문의 여정을 마친 야마모토 신이치는 규슈로 갔다. 4월 30일에는 후쿠오카로 가서 이튿날인 5월 1일에 규슈평화회관(현재 하카타평화회관)에서 개최한 후쿠오카현 지역장회에 참석해 힘주어 외쳤다.
“광선유포를 위한 가슴속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절복이라는 수행의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일생성불의, 신심의 불꽃을 꺼뜨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시는 이케다 선생님이 제3대 회장을 사임하신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사제를 말하지 마라’ ‘세이쿄신문에 지도를 싣지 마라’며 사제의 유대를 갈라놓으려는 종문과 반역자들의 비열한 모략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모략 따위는 바람 앞의 먼지처럼 날려버릴 기세로 후쿠오카의 땅에 발을 내디뎠다.
“사자(師子)가 왔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음성을 들은 동지는 얼마나 기뻤을까.
선생님은 달려오는 동지들과 악수를 나누고 차례로 기념촬영을 했다.
“소중한 제일선의 동지를 누가 지킬 것인가!” “이렇게 해서 회원을 지켜야 한다!” “사제를 분단하는 마(魔)와는 단연코 싸워 물리쳐야 한다!”며 벗 한 사람 한사람을 끌어안듯 격려했다.
5월 2일까지 사흘 동안 선생님이 직접 만나 격려한 벗은 무려 2만명이 넘었다. 그날 그때 후쿠오카에 사제직결의 인재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는 마음은 끝이 없다. 이때 격려 받은 멤버의 자식과 손주가 사제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 후쿠오카 천지에는 수만 명이 넘는 젊은 이케다 문하가 활약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영원히 선생님과 함께 광선유포의 깃발, 절복의 깃발을 드높이 내걸고 나아간다. 세계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신시대 후쿠오카의 대행진은 지금부터가 본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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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