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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맥문학 동인회에서 발간한 사화집 제15호에 수필[2000년 고도 익산]이
게재되었기에 보내드리오니 보일독 후 남길 말씀이 있으면 기록으로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二千年 古都 益山
一松 韓 吉 洙
까마귀라는 새는 뭇 사람의 사랑을 받지도 않고 보기 좋은 길조가 아닌데도 까마귀조차 고향 까마귀를 보면 반갑고, 여우도 首丘初心이라 했거늘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마는 고향하면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고 또한 사랑의 원천으로서 인자하신 어머니의 품속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정서는 아니렷다.
더구나 어릴 적에 동무들과 뛰어놀던 아련한 생각을 하노라면 저절로 눈물이 두 볼을 적실 때도 있으니 이것도 나만의 정서는 아닐 것이다.
자랑스러운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재경 익산향우회라는 조직이 있다.
2014, 6, 21. 재경 향우회 임원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고향 익산에서 벌리고 있는 잔치 <서동축제>행사에 참석하려고 아침 일직 서울을 떠난 것은 07;20이었다.
차내에서 정하연 향우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작은 행사를 가진바 있다. 박종길 회장의 간단한 인사말씀과 사무국장의 오늘 행사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는 동안 우리 차는 경부 고속도로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달려 익산 요금소에 이르니 익산시 이종걸 부시장이 우리를 맞이하려고 나와 있다.
우린는 여기에서 잠간 숨을 돌려 익산시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2千年古都 益山! 나라에서 지정한 4대 고도로 익산, 경주, 공주, 부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1역사가 깊은 곳이 바로 이곳 익산이다.
기자조선-마한-백제-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역사인데 마한을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무강왕(애왕)이 금마에 와서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金馬는 이곳에 있던 마한을 백제 온조왕이 병합한 뒤에 金馬渚(금마저)라고 불렀다. 신라 문무왕은 패망한 고구려 왕자 안승이 부흥운동을 하려고 하니 이를 맞이하여 이곳에 報德國을 세우도록 도와주고 문무왕의 누이동생과 짝을 지어 정착하도록 주선까지 했다.
그 뒤 이곳은 고려 제28대 충혜왕 5년에는 益州로 승격하였고 성종 14년에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강남도 금마군이라 칭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익산군으로 개편하여 1911년 8월 익산군청 소재지가 금마면에서 남일면으로 이전하였다, 1914년 4월 1일 익산군, 용안현, 여산현, 함열현을 익산군으로 통폐합하였고 익산군 남일면과 동일면이 익산면으로 통합하여 익산면 裡里에 군 治所를 두었다.
전라감사를 지낸 李書九(1754-1824)가 짓고 신재효가 곡을 부친 판소리 단가의 하나인 호남가에 일렀으되 [인심은 함열인데 용담의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이며 여산에서 칼을 갈아 남평루에 꽂았으니 만장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한 익산]이라 읊었다.
현재의 益山市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한 복합도시이다. 호남선과 전라선, 장항선 철도의 분기점이면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고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와 익산-광양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호남 지방 교통의 관문이며 호남평야의 대문이다. 호남 지방을 관할하는 익산지방 국토관리청과 한국철도공사 전북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익산은 여산 宋씨, 익산 蘇씨, 익산 李씨, 우주(익산 왕궁면) 黃씨, 함열 南宮씨의 본향으로 예로부터 뿌리가 깊이 박힌 고장이다.
금마면에는 백제시대 문화재인 미륵사지가 있고, 왕궁면 일대에는 국가식품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다.
익산시는 면적 507,1km²에 인구는 306,000명이 살고 있는데 행정구역은 1읍 14면 14동이다. 익산은 호남평야의 관문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뒤에는 4개 군현이 모인 거대조직이었으나 연무읍인 황화면을 충남에 넘겨주어 너무나 아쉬움이 큰데 설상가상으로 이 나라 공통현상으로 농촌 인구가 여름에 얼음이 녹듯 날로 줄고 있음으로 市勢가 가늘어져 가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익산시 직원의 안내로 우리가 맨 먼저 도착한곳은 왕궁 터와 왕궁 5층 석탑이 있어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유적지이다.
이 글은 문화 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외에 문헌을 찾아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곳 유물전시관은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서 문화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왕궁리 유적지 남쪽에 설립된 전시관으로 2008년에 개관하였다.
연면적 2,250㎡에는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영상실 등의 전시시설이 갖춰져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백제 왕궁 유적, 백제 건물, 왕궁의 생활상,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과정으로 나누어 전시하였다. 또한 공방에서 생산된 금 유리 등의 세공품과 왕궁 지붕의 연꽃무늬 수막새, 首府라고 찍힌 기와, 토기와 도가니 외에 왕궁화장실에서 휴지대용으로 사용했던 뒤처리용 나무막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부근에 있던 제석사 터에서 나온 [관세음 음험기]라는 책에 백제 무왕이 이곳에 왕도를 건설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왕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자세한 내용은 기록이 없다.
왕궁리 5층 석탑은 국보 제289호로 높이 약 8,5m이다. 이 탑은 1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기단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올려놓은 단층 구조이다. 현재 露盤(노반)· 覆鉢(복발)· 仰花(앙화)· 寶輪(보륜) 등이 잘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형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나 백제계 석탑의 전통을 이은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1965년 12월 탑을 해체, 수리할 때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의 심초석 위에 있는 品字形 舍利孔에서 사리 장엄구를 비롯하여 금제 금강경 판 19매, 청동 불 입상, 청동요령 등이 발견되었는데 국보 제123호로 지정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에 도착한곳은 미륵사 터이다.
이곳에 도착하니 해설사가 나와서 친절하고 자세하게 안내를 해 주었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곳은 미륵산의 남쪽 자락 너른 터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 터다. 이 절터에는 국보 제11호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탑, 보물 제236호인 당간지주 두 기, 목탑 터, 금당 터가 세 곳, 회랑과 강당, 승방의 흔적, 그리고 남문과 중문 터가 남아 있다. 또 석등 지붕돌, 연꽃잎이 새겨진 석등 받침, 그리고 원래의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석재들이 많이 널려있었다.
이때 내가 질의하였다. “서탑은 한국의 미를 자랑하는 예술성을 지녔는데 동탑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것처럼 어색한 모습인데 아마도 석공이 연마한 것이 아니고 기계로 자른 것 같다”고 하자 해설사 왈 “그렇다. 예산이 너무나 깎이다 보니 공사비를 줄이려고 기계를 사용했다” 이 말을 잘 들을지어다. 이 말을 잘 듣고 또 현장에 나와 복원한 실물을 보면서 예산을 틀어쥐고 있던 나리들께서는 천추에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자책을 하여야 할 것이다. 산모가 영양이 부족하면 기형아를 낳는 다는 것을 전연 모르는지 이곳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도깨비 같은 탑을 복원이랍시고 세워놓았으니 우리가 부끄러웠다.
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인데 조선 중엽에 무슨 사유인지 모르지만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절터만 남아 있어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 11호인 서 석탑은 백제 석탑의 최초형식이라고 하는데 여러 면에서 한국석탑의 시원점이라 할 수 있다. 철거하기 전 남아 있던 탑의 높이는 14.2m로 원래는 7층 내지 9층이었다고 추정되는 한국 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목조탑이 석탑으로 전환하는 백제의 목탑 모습을 잘 보여주는 탑으로 해체작업 중에 금제사리봉안기가 나와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하였다.
2009년 1월 14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륵사지 서 탑을 해체 정비하다가 心柱 위쪽 중앙의 사리 공에서 금제 사리 호. 금제사리 봉안기 등 사리장엄을 발견하였다.
작은 병인 금제 사리 호를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이 2중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리 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금제 사리 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넓이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을 해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여기에는 백제 왕후가 淨財를 희사해서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施主,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금제 봉안기에는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8대 귀족 중 하나인 沙宅씨의 딸로 기록돼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선화공주 이야기는 허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좀 장황하지만 당시 왕비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는데 참고가 될까하여 봉안기를 옮겨보았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根機(근기)에 따라 感應(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舍利(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五色으로 빛나는 舍利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원 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善根(선근)을 資糧(자량)으로 하여 大王陛下(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蒼生(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 하옵나니, 王后(왕후)의 身心(신심)은 水鏡(수경)과 같아서 法界(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不滅(불멸)하시어 七世의 久遠(구원)까지도 함께 福利(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미륵산에 있는 사자사에 가던 도중에 못 가운데에서 미륵 삼존이 솟아올라오는 것을 보고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절을 세워줄 것을 부탁하니 법사가 신통력으로 연못을 메우고 큰 절을 세웠으니 미륵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륵산 중턱에 있는 사자사에 가려면 튼튼한 석성이 보이는데 이것이 평양에서 망명한 기준왕이 쌓았다는 기준성이다.
2010, 11. 익산시장이 제작한 [재미있는 익산 이야기 2]의 <미륵산성과 기준왕 이야기> 편에 보면 마한의 건국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조선(기자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이 연나라에서 쫓겨 온 위만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여 이들을 받아드렸더니 위만이 배신을 하였기 준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배로 서해를 건너 도착한 곳이 지금의 금마였다. 이곳 뒤에는 미륵산이 있고 앞에는 만경강, 옆에는 금강이 있어 방어하기가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넓은 들이 있어 넉넉한 천혜의 요지인 이곳에 BC 194년에 마한을 세운 준왕은 무강왕이라 칭했다. 마한은 이후 7대 원왕이 세분의 아들을 두었는데 鮮于 씨 韓 씨 奇 씨로 분성이 되었기에 지금까지 이 3성이 합동으로 무강왕 대제를 모시는데 일명 익산 쌍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늘 다시 미륵사 터를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다.
필자가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이 되면 용진면의 선친과 자별하신 황 씨 어른 댁을 들려서 걸어서 집에 가려고 봉동을 거쳐 황등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이 미륵사 터를 지나노라면 마을의 어른들이 시원한 석탑안의 1층 너른 공간에 모여 피서 겸 짚신도 삼고 멍석도 만들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제는 그 흔적이 사라져서 너무나 아쉽다.
그 당시에는 절터 입구에는 물이 고여 있는 상당히 큰 웅덩이가 있었고 4만 여 평이나 되는 너른 벌판에는 잡초만 무성하더니 오늘에 와보니 파란 잔디가 융단 같이 보드러웠다.
옛날 만경강 물이 절 밑까지 넘나들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편리하였기에 이 절이 더욱 번창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우리 익산에는 4大 종교에 관련된 역사와 현장이 고루 갖추어져 있어 시티 투어를 이용하여 한번 둘러봄직 한 곳이다. 자, 한반 시티투어에 올라 현장을 살펴보자.
첫째 이곳에서 창설된 종교로 원불교가 있다.
원불교는 우주의 근본진리를 깨달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소태산 대종사의 개교지표에 따라 생활 속에서 실천함을 가르친 종교로 1916년 소태산 朴重彬 교조가 창시하였는데 익산에는 중앙 총본부인 영모전을 비롯하여 금강원, 대종사 탑과 원불교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원불교는 익산에 있는 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는 敎區와 敎堂을 두고 있으며 宗法師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각종 연구소가 있고 교육기관으로 圓光大學校와 영산선학대학교 등의 종합대학 외에 전문대학 1개교, 중고등학교 6개교 외에 양로원 고아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현지법인으로 미주 선학대학원 대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한편, 문화 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圓光] [원불교 신문]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20개의 국내 교구에 520여 교당과 미국 일본 캐나다 중국 유럽 일본 등 6개 해외교구에 60여 개의 해외 교당과 기관이 있으며 신도 수는 100여만 명에 이른다.
두 번째로는 불교시설로 미륵사 터, 왕궁리 절 터, 제석사 터 등 큰 절터 외에 여러 곳에 사찰이 있지만 필자의 단골 소풍자리였던 웅포면에 있는 崇林寺로 향한다.
74만 여 평의 부지에 36홀을 운영하는 골프장 베어리버 부근에 있는 숭림사는 웅포 관광단지나 충남에서 넘어 오는 웅포대교를 건너 올 수도 있다. 절에 들어가는 입구가 벚꽃 터널로 장관을 이뤄 때를 맞춰서 도착하면 이목구비가 모두 호강을 하는 곳이다.
숭림사는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충목왕 원년(1345)에 선종 사찰로 중건되었다는 기와명문이 나왔다. 보광전 중수기에 의하면 조선 순조 19년(1819) 중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절은 다포계 양식으로 건립된 맞배집인데 보물 제825호다.
寶光殿이라는 현판은 만석꾼 부자 李培源의 장남 李集阡 거사의 글씨로 명필이라는 칭송을 듣던 분으로 우리 초등학교 동문 李琪榮의 부친이시다.
건물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안치하였는데 복장기문에 의하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목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성연대가 확실하다. 불상 위에는 용과 봉황이 조각된 섬세한 닫집(보개)이 있다.
숭림사는 중국 하남성 숭산에서 달마대사가 9년 만에 득도하여 세운 최초의 선종사찰이 소림사인데 숭산의 崇자와 소림사의 林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또한 이곳 웅포에는 백제시대 왕족이나 유력인사의 무덤에서 나온 금동 관모, 금동 신발, 곡옥 등이 무더기로 나와서 전시관을 세워 일반인이 관람토록 하고 있다.
세 번째로 들릴 곳은 성당면에 있는 기독교 두동교회이다.
1929년에 건립한 두동교회는 남녀7세부동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남녀유별의 유교사상 흔적이 배어 있는 ㄱ자형 건물로 양방향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교탁이 있어 목사 주도로 예배를 보도록 했으며 출입문도 각각 따로 있어 동선을 남녀 따로 완전히 분리해 놓은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예배당을 연애당이라고 놀린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교회 내부에는 지하로 통하는 굴이 있어 6.25 전란 때 신자들이 이곳에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고 한다.
교회 안마당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부챗살처럼 펴져있어 교회 지붕을 덮고 있는데 교회 창립당시 심은 것으로 교회와 같이 나이를 먹고 있다. 이곳은 한국교회 사적지 제4호로 보전중인 곳이다.
마지막으로 들려야 할 곳이 있으니 사적 제318호인 화산 나바위 성지로 천주교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금강 가에 위치한 화산이라는 산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송시열 선생이 華山이라는 이름을 자어 주었다고 한다.
나바위 성지는 조선 헌종 11년(1845)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던 중 황해를 건너오다가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던 중 금강의 밀물에 따라 이곳까지 떠밀려와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의 교구장 뮈텔주교가 광무10년(1906) 나바위 위에 본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첫발을 내디딘 유서 깊은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 성지로 지정된 이곳에는 서구식 건축양식과 우리 전통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성당건물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호남지방에 진입하는 교두보로 1929년에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있는 천주교 공소 24개소를 관할하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도수가 3.200여명이나 된 때도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1908년 계명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 서 왔으며 농민들의 건강을 검진하고 시술도 하는 시약소를 운영하였다. 그 외에 심신수련원인 피정의 집도 운영하고 있는데 1981년 조선교구 창립 15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을 순례성지로 지정하니 순례 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는 이름다운 성지다.
우리들은 이종걸 부시장의 안내로 미륵사 터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 서동공원에서 거행하는 <서동축제>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아직 개막시간이 일러 우리는 서동공원 초입에 있는 馬韓館에 들렸다.
마한관에는 마한의 성립과 마한의 발전, 마한의 생활문화 그리고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 과정을 테마별로 전시하고 있었다.
마한의 주거지로 움집터와 부뚜막이 전시되어 있고 무덤 터 발굴현장을 전시 하였으며 영등동 유적에서 나온 삼각모양 돌칼과 돌낫, 가락바퀴 외에 철기시대 사용하던 동검과 청동 거울도 전시되어있다.
또한 마한의 덧띠 토기와 검은 간토기, 뚜껑 있는 두 귀가 있는 단지 그리고 율촌리에서 출토한 마한의 독 널도 전시되어 있다.
마한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단계인 굽다리 접시와 목이 짧은 항아리와 귀걸이도 전시 중이었다.
14;00 정각 이한수 시장의 개막선언으로 1박2일 <서동축제>의 막이 열렸다. 백제의 숨결, 천년의 사랑을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축제는 주제성과 역사성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시민의 안녕과 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 무왕제례 다음에는 익산시립무용단이 아름다운 군무를 펼치며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초청 인사를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맨 처음으로 우리 재경 익산 향우회장인 박종길 차관을 소개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 시민의 날 기념 시상도 함께 있었는데 수상자들은 백제 의상을 입고 무왕제례에 함께 참여해 축제의 의미를 배가시켰다.
또한 국악신동 이연우 양이 들려주는 전통음악을 감상하였으며 서동으로 선정된 전북대 신민 군과 선화공주로 선발되어 익산시를 홍보하게 될 경주여고 정소윤 학생에게 300만원씩 지급하는 장학금 수여식도 병행하였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검술과 풍물, 무용, 합창 등이 뮤지컬 형식으로 펼쳐져 화려한 볼거리로 관람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또한 서동공원 내 서동무대에서는 시민 열린 공연과 익산무형문화재인 익산지개목발노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인 기 세배놀이와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이리농악 공연은 평소에 접하기 힘든 무형문화재 공연으로 관람객에게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익산문화재단이 주관하는 꿈의 오케스트라와 가족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꿈의 서동요”도 진행되었다.
서동공원 내 각 부스에서는 나름대로 먹거리, 볼거리, 자랑거리 등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마을인 웅포 부스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조금 섭섭하고 아쉬웠다.
탑 마루 쌀로 빚은 막걸리 부스에 들어서니 서울에서 내려온 일행이 모여 있기에 빈대떡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난 뒤 이한수 시장, 정헌률 부지사, 6, 4 지방선거에서 당선 된 여성 시의원인 김민서, 한동연 씨 등과 재회를 기약하는 악수를 나누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상경 길에 올랐다. 정을 두고 떠나는 내 고향, 내 고향에서 펼쳐지는 서동축제가 성공적인 축제가 되어 잘 마무리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2015년 서울 시우문학 제6호에 게재
첫댓글 익산이 우리나라 4대 고도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무지를 용서하시기 바라며
그런데 보통 지명에는 익 (益)자가 잘 들어가지 않는걸로 아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여줘보아도 실례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