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삼국시대와 우리 삼국시대
1) 솥의 다리는 세 개 - 삼국지의 무대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삼국지통속연의를 읽은 적이 있습니까? 중국의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를 살았던 나관중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지요. 청나라 때 모종강이라는 사람이 다시 정리한 후로는 삼구지연의 혹은 그냥 소설 삼국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후한 영제의 중평 원년(184)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진 나라 무제의 태강 원년(280)가지 약 97년에 걸친 역사를 소설로 꾸민 책입니다.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를 저본으로 했으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삼국지통속연의의 장면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또 등장인물의 좋고 나쁨,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용기와 지략, 관용과 믿음, 천운과 무욕 등에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책 곳곳에서 펼쳐지는 정치술과 전략...전술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흥미 진진해 읽는 이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과장이 너무 심하며, 역사를 보는 시각도 매우 편파적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소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삼국지통속연의는 물론이고, 그 책의 저본인 삼국지는 위...촉...오 3국의 역사에 대한 책입니다. 위나라는 그 유명한 조조라는 가람과 그의 아들 조비가 세운 나라로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화북 지방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국이며, 촉나라는 후한의 왕족이던 유비가 양자강 상류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지금의 사천성과 부근 일대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손권이 세운 오나라는 양자강 남쪽을 다스렸습니다. 이처럼 세 나라가 중국 전역을 나누어 통치하던 시기를 가리켜 후대 사람들이 '삼국시대'라고 불렀고, 그 시대에 대한 역사서를 삼국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정립
세 나라가 공존했던 만큼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촉나라가 오나라를 거세게 공격하면 위나라가 오나라를 도와주고,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하면 오나라가 촉나라를 도와주어, 어느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만약 촉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켜 자기 땅으로 삼게 되면 촉나라의 국력이 배가되어 그대로 있던 위나라는 상대적으로 불리해지며, 또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망시키면 가만히 있던 오나라도 나중에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나라가 싸울 때 그중 약한 나라를 운운한 것은 자기 나라를 안전하게 보전하는 방책의 하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위...촉...오 3국은 후한인 멸망한 후 수십 년 간 서로를 경계하며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한자용어로 정립이라고 합니다.
솥 정, 설 립. '솥이 서 있다.' 즉, 솥의 다리처럼 세 개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솥의 다리? 그것도 세 개? 이렇게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둥그런, 둥그런 솥의 다리는 세 개였습니다. 예날 중국의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솥에는 모두 다리가 붙어 있는데, 세 개입니다. 그 세 개의 다리가 감각구도를 이루어서 솥이 쓰러지지 않게 버텨주는 것입니다. 만약 다리 하나를 나머지 두 개 중 어느 한쪽에 가까이 배치한다면, 솥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지거나 작은 충격에도 금방 넘어져 버릴 것입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정치가들이 한때나마 경쟁국가를 도와준 것은 바로 솥이 넘어지는 장면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하 은 주와 봉건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중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하 왕조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왕은 있었으나, 국가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단계였다고 합니다. 바로 3황 5제의 시대인 것입니다 3황은 보통 수인씨(백호통 등에 기록된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음식을 날 것으로 먹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일이 잦던 시절, 문득 어떤 성인이 나타나더니 나무를 부비고 부싯돌을 때려서 불을 피우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로써 사람들이 음식을 익혀 먹게 되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후 사람들은 그의 은혜에 감사하며, '불을 얻어 낸 가람'이라는 뜻으로 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와 같은 다른 기록에는 불을 발견한 사람이 복희씨로 기재되어 있다. 복희는 포희 혹은 포희로도 불렸는데, 그것은 '희생물을 부엌에 채운다' 또는 날고기를 익힌다'는 뜻이라고 한다.)...복희
씨(복희씨에 대한 전설은 지역과 기록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뱀 또는 용의 모습을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복희는 포희...포희...복희...복희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복희씨는 자연을 살펴 건(하늘)...곤(땅)...감(물)...리(물)...간(산)...진(천둥)...손(바람)...태(늪)로 이루어진 팔괘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사람들은 점을 쳐서 신의 의지를 알아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노끈을 짠 다음 그물을 만들어 고기 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그림에서는 부인인 여자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신농씨(백호통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먼 예날 사람들은 주로 고기를 잡아먹었으므로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어느 날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성인 나타나더니 사람들에게 밭 갈고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쳐 주어 사람들의 음식 걱정을 해결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 성인을 신농이라고 높여 불렀다고 한다. 신농씨는 또 태양이 충분히 빛나게 하여 사람들의 농사를 도와주었으므로 '태양의 신'이라는 뜻에서 염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의약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사천성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신농씨가 사람들을 위해 각종 약초를 일일이 맛보다가 단장초라는 독초를 먹는 바람에 창자가 끊어지고 썩어서 죽었다고 한다.)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서, 자신의 초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은 황제(염제 신농씨와 싸워 이겼다는 하늘나라 중앙의 상제이다. 황제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황제를 낳아 희수라는 물가에 키웠다고 한다. 황제는 4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사방을 살폈으며, 신들의 나라의 최고 통치자 그리고 신들의 싸움을 중재한 재판관으로 유명하다. 황제는 발명도 많이 했는데, 수레...솥...시루...축구와 집 짓는 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그중 특히 수레를 발명했다고 하여 황제를 헌원씨라고도 부른다. 황제라고도 하며, 서방 주나라에서 섬기던 상제로 전한다.)...전욱(황제의 손자(사기) 혹은 증손자(산해경)로서, 황제를 이어 하늘나라 중앙 상제의 지위에 오른 뒤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각종 재난 속에서 고통 받게 되었다. 또한 전욱은 질서와 예법을 중시했는데, 여자를 경시했기 때문에, 여자가 길에서 남자를 만나면 얼른 길을 양보해야 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빡에 전욱은 음악을 좋아했으며 죽은 뒤에는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한다.)...제곡(황제의 자손으로 인간세계를 다스렸다는 반인반신의 존재이다. 음악을 무척 좋아했으며, 하늘의 상제인 제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제준은 동방 은나라에서 섬기던 상제이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제곡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후직을 낳았고, 둘째부인은 설을 낳았으며, 셋째 부인은 제요 그리고 넷째 부인은 제지를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후직은 주나라의 시조이며, 설은 은나라의 시조이다.)...요(제곡의 아들오서 인간세계를 다스린 성인이며, 제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엉성한 초가에 살면서 거친 옷을 입고 흙으로 빚은 그릇에 거친 밥과 야채만 담아 먹었을 정도로 근검 소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매우 모범적인 왕으로 전한다. 요는 훌륭한 신하를 많이 두었는데, 사위인 순은 교육을 담당하는 사고였고, 설은 구사를 담당하는 사마였으며, 후지는 농가, 고요는 법을 담당했다고 한다. 아들인 잔주의 성품이 교만하고 포악하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왕위를 사위인 순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순(고수라는 눈먼 사람이 봉황의 꿈을 꾸고 낳은 아들로서 눈의 눈동자가 각각 두 개씩이었다고 하여 중화라고도 부른다. 고수는 순을 낳은 지 얼마 안가 아내를 잃고, 새 아내를 맞아 다시 상이라는 아들과 과수라는 딸을 낳았는데, 그는 성질이 고약한 후처와 후처의 자식만을 예뻐하여 순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으나, 순은 끝까지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켰다고 한다. 순은 농사와 고기잡이 그리고 그릇 만들기를 차례로 하는 동안 크나큰 덕행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킨 공이 인정되어 요임금의 두 딸 아황...여영과 혼인했으며, 요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수십 년 간 다스리다가 상균을 비롯한 9명의 아들 대신 홍수를 잘 다스려 큰 공을 세운 신하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등의 5제는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각종 문물을 마련하고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이 하왕조라는 것이지요.
하왕조를 처음 연 사람은 우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임금의 신하였는데, 홍수를 잘 처리해 신임을 얻고는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임금은 신하들 중 어진 사람을 뽑아서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이후 5백년 가까이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만들었습니다. 왕조를 연 것이지요. 하왕조는 서기전 1700년을 전후한 무렵에 동쪽에서 일어난 은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
중국의 옛 문헌에 동이적의 국가로 소개되기도 한 은나라는 원래 상이라는 국호를 사용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나라는 도시국가적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은이라는 명칭은 그 뒤를 이은 주왕조 때 붙여진 것입니다. 은나라의 수도는 몇 번에 걸쳐 바뀌었으나 멸망하기 전 3백년 가까운 기간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의 소둔촌 일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초에 그곳을 발굴하자 갑골문자를 비롯해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로 이해 소둔촌 일대를 은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중국사에서 은나라 이전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왕조가 존재했다는 시기의 대부분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왕조와 관련된 듯한 유적에서 정치체의 출현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확정지어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은나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대단히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갖춤으로써 국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허를 조사하는 과정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시국가적 성격이 강한 은나라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였으며, 은나라의 왕은 제사장적 성격이 강했다고 합니다. 신권정치를 한 것이지요.
서기전 1100년경에 이르러 은나라는 봉건제하에서 자주권을 쟁취하려는 부녀 세력들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방을 제패한 주 왕실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주왕조는 처음 약 300년간을 지금의 섬서성 위수지역에 있던 호경에 도읍했으나, 서기전 770년에 북방족 견융의 침입을 받아 국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자 도읍을 하남성의 낙양으로 옮겼는데, 호경에 도읍하던 시기를 서주시대라 하고, 낙양으로 천도한 후 약 550년간을 동주시대하고 합니다. 왕실의 권위가 실추된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됩니다.
춘추...전국시대와 통일왕조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제후들이 각자 패권을 추구하던 춘추시대는 진...제...진...초의 4강 구도로 진행되면서 약육강식에 의한 정복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춘추 초기에 170여 개국에 달하던 제후국이 춘추 말기에 이르자 10여개국정도로 정리되었고, 진이 자체 분열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전국시대에는 조...한...위...제...진...초...연 등 7국으로 압축되었습니다.
열국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사이에 중국의 정치...경제...문화는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각자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실리에 입각한 제도개혁이 이루어 졌으며, 영토를 비롯한 정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합종...연횡과 같은 외교정책, 관료제에 입각한 군현지배체제, 제자백가의 출현 등이 모두 이 무렵의 특징적인 요소들입니다.
전국시대는 상황의 변법이래 꾸준히 국력을 키워온 진나라가 나머지 6개국을 차례차례 멸망시킴으로써 서기전 221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왕은 정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통일하자마자 왕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첫 황제, 곧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또한 법가인 이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눈 다음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시행했으며, 도량형과 화폐...문자를 통일하고 사상조차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제도 개혁은 너무나 급격해 불만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 축조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히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이 매우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전 210년에 시황제가 죽자 정치 혼란마저 더해져 서기전 206년에는 결국 진나라가 멸망하고, 반란세력을 주도하던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대한 중국 - 한
농민 출신인 유방은 귀족계급을 이끌던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고 서기전 202년에 한나라를 세우니, 이 사람을 고조하고 합니다. 제국을 형성한 한나라는 진나나의 제도를 대부분 계승했으나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군현제의 경우에도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저의 봉건제적 요소를 덧붙임으로서 군국제도라고 하는 새로운 제도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는 실리를 추구하는 법가 위주의 정치에서 벗어나 유교의 통치이념을 채용하는 등 새로운 가치관과 관료제도 구축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무제 때에는 주변지역 정벌에 나서 남쪽으로 베트남 북부지역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정치 범위를 확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애제때인 서기전 1년경 신하인 왕망이 실권을 차지하더니, 급기야 서기 8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활제를 칭하고 국명을 고쳐 신이라 했습니다. 서기 14년 익구에서 일어나 반란과 북방의 대기근을 계기로 곳곳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고, 그 결과 왕망은 서기 23년에 전사했습니다. 홍란을 수습한 것은 유수라는 호족이었습니다. 그는 한나라의 왕족임을 내세우며 서기 25년에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후한의 첫 임금 광무제입니다.
국호에서도 드러나듯이 광부제가 세운 한, 곧 후한은 전한시대의 정치기구와 제고응 거의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다만, 징병제도를 폐지하고 전문적인 병사제를 두는 등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후한에서는 유교를 더욱 중시해 통치의 원리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후한은 건국된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외척과 환관의 득세로 부정부채가 만연하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 184년에 폭발한 농민봉기, 곧 황건적의 난은 후한 왕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권 없이 명백한 유지하던 후한 왕실은 결국 서기 220년에 마지막 왕인 헌제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써 종말을 고했습니다. 조비는 국호를 위로 고치고 낙양에서 즉위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와 서진...동진
서기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곧 조조가 이끄는 정부군에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비장에서 병사를 모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두에 소개한 삼국지통속연의의 주인공인 유비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서기 221년에 성도를 중심으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사람들은 이 나라를 보통 촉한 혹은 촉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회하 유역과 양자강 중...하류역에서 호족세력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한 손권은 건업에서 오나라를 세움으로써 삼국시대의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삼국 중 가장 강성한 국가는 중원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왕실은 얼마 안가서 군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마 씨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결국 서기 265년에 협박을 받은 원제가 사마염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진나라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263년에 촉나라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이미 멸망했으며, 280년에는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가 오나라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통일기간은 잠시였습니다. 300년경에 일어난 사마윤의 쿠데타를 계기로 왕실 내부의 골육상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틈타 흉노...선비...저...강...갈 등 북방의 이른바 5호가 반란을 일으켜 화북 지방을 경쟁적으로 장악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진나라는 서기 316년에 민제가 수도인 낙양에서 흉노족이 세운 한 나라의 공격을 받고 체포...살해됨으로써 멸망했는데, 다음해인 317년에 양자강 남쪽의 건업에서 사마씨의 일족인 사마예가 진나라를 재건하니, 이를 동진이라 부릅니다.
이상 간단하게 정리하는 가운데 드러난 바와 같이, 중국의 삼국시대는 불과 50년 정도의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그 기간에 삼국의 계속된 전쟁으로 인구는 크게 줄었으며, 경제...문화의 발전 역시 부분적으로 다소 저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국간의 치열한 경쟁은 각국을 국력 배양에 힘쓰게 했으며, 그 결과 중국의 정치...군사적 영향권이 외부로 크게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건으로는 서기 245년에 위나라의 관구검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환동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요동을 확보하고 고구려를 위축시킨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삼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의 분위기와 일부분 통하는 면이 있는 듯합니다. 한족의 활동범위가 중원지역을 벗어나 지금의 중국과 같은 광대한 지역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대 배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살아남기 위해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시대였다는 점에서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는 닮은꼴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