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영혼의 매개
2)의지의 힘(Blue)-신의 의지에 순명
인체의 목에 해당하는 비슈다 차크라는 창의적인 표현과 관계가 깊은데 언어를 통한 소통으로 혹은 다른 소통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느끼고 신념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며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Deborah, 2009/2016). 신체적 위치로 보면 양육을 위해 음식과 공기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수용을 배우는 곳이고 존재의 근원에 확고한 신뢰감이나 자연스런 유대감을 갖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초월적인 근원에서 돌봄을 받는 경험을 하고 신의 사랑을 경험하는 곳이다(박미라, 2020).
영원과 찰나와 천상과 지상을 생각하며 반복적으로 비슈다 차크라를 활성화시키는 동작을 하는데 뻣뻣한 목이 우두두둑 뚜둑 하는 소리를 계속 내어 잠깐씩 멈추어야했다. 목이 곧은 백성이라며 탄식하시던 그 탄식에 나도 타인을 비판하며 마음으로 거들었는데 이제보니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는 울림이 오고 속 쓰린 탄식이 나왔다. 나의 다소 무모할 수 있는 확신에 찬 날카로운 칼날이 목소리에 입혀져 얼마나 많은 횡포를 부렸는지, 싸매어야 할 아픈 상처를 어설픈 손재주로 난도질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목이 조금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였다.
이런 감정이 몰려오면 위축되고 부끄러워지고 의기소침해지며 주눅 들어 작아진 마음으로 치료사로서 나의 하는 일들에 대한 회의가 오고 무기력해지며 온 몸이 아프기를 반복했었다. 온 몸으로 퍼지는 통증은 심리적인 진통제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언제나처럼 처연한 태도로 스스로를 세우고 다시금 일어나기를 종용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사명을 잊지는 않고 있었지만 다시금 거듭난 것은 오직 나의 의지만은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소리를 내어 음성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것이 가능한 다섯 번째 차크라는 우리가 의지를 내보내는 것과 수용하는 것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Deborah, 2009/2016). 그러나 나의 태도는 타인의 언어에는 예리한 판단을 하고자 날을 세웠고 나의 언어는 꼬리를 감추느라 분주했었다.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고자 하지만 항상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나의 불안정한 의지는 많은 오류와 상처를 남겨왔다. 예술치료사로서의 반성과 숙고는 물론이고 한 개인으로도 미성숙함과 온전하지 못한 언행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강한 책임의식이 긍정적 분노감으로 가슴속이 가득 매워졌었다.
진실성을 잃어버린 영혼 없는 위로와 텅 빈 공감들이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되어 좁디좁은 마음의 크기와 어깨를 가지고 겨우 살아가는 나에게, 낮고 진실된 음성으로 다가왔다. 신이 부여한 나의 나됨에 관한 메시지는 오래전에 퇴색되었고 지금은 현실만이 나의 동력이 되어가고 있으며, 소명은 동기였을 뿐 살아가는 목적에 사명감이란 항목은 절반쯤 지워져있고 사방에서 날아 온 청구서만 가득하다.
의식적인 삶의 가치에 합당한 이유와 목적성을 부여하며 잊고 살았던 근본적인 목적을 되찾아야할 때가 된 줄 알지만 여전히 나의 목은 힘겹게 사느라 딱딱하게 굳어있고 마음속에서는 항상 화가 나있었다. 내가 화를 내는 이유를 보니 내가 옳고 상대나 상황이 옳지 않다는 나의 자만과 피해의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검붉은 분노가 파란색으로 전환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여러 번 목 차크라를 도와주는 음악을 들었다. 나만의 논리와 타당한 이유들이 쉽게 잦아들지 않음을 느꼈지만, 비슈다 차크라 색채명상을 통하여서는 변화보다 확실한 나의 상태에 대한 목격과 현재 나의 상태와 의식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었다.
의식은 인식과 분화를 통해 우리 정신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통합하여 당면한 상황에 보다 잘 적응하게 한다. 개별적인 외부상황만 아니라 무의식의 여러 가지 내용들까지 통합하여 인간의 활동영역과 정신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진교훈, 윤영돈, 2003).
다음 표Ⅳ-5는 비슈다 차크라 색채명상의 치유과정을 제시하였다.
목 차크라인 비슈다 차크라는 수용을 배우는 곳이고 존재의 근원에 대한 확고한 신뢰감과 자연스런 관계가 있으며 신의 사랑을 경험하고 돌봄을 받는 곳이다(박미라, 2020). 아나하타 차크라가 타인을 도와주고 보살피고 사랑을 베푸는 곳이라면 비슈다 차크라는 초월적인 근원에서 즉, 신으로부터 보살핌과 은총을 받는 경험을 하는 곳이다.
언어가 가진 에너지는 인간의 삶과 죽음과 삶을 채워가는 모든 여정에 관계하는 중요하고 위대한 능력이다. 그 능력은 지식의 전달과 감정의 소통에 탁월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내기도 하며 그 상처에 특효약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은 몹시도 슬프고 외롭고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절망을 견디어 낸 사람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자신의 옷조차도 싫어할 거라는 그의 탄식과 절망은 실제로는 신과의 동행 길에 고통과 연단 받는 통과의례를 지나는 과정이었다.
그림 Ⅳ-24는 비슈다 차크라 색채명상 후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슬픈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기도밖에 방법이 없는 그 상황을 시각화하였다. 막상 신과의 소통도 사람과의 소통도 제대로 못하는 정지된 상태의 슬픔을 파란색의 커다랗게 부서지는 눈물방울로 표현하였다. 지상에 살면서 천상에 의지를 두고 살고 있다는 나의 믿음은 번번이 실패하였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신의 의지에 대해서는 불신하며 분노하였다. 나의 탄생에 주어진 의미는 점점 더 퇴색되어 가고 신의 돌봄은 나의 권리인 것처럼 마땅하고 내 마음대로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신앙으로 채워져 있고 강한 신념을 가진 이들로 가득하여 때로 나는 삼켜지는 경험을 하며 파란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그림Ⅳ-25는 에너지의 중심에 존재하며 무한한 가능성으로 극대화될 신의 섭리가 나에게 임재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공(空) 차크라 색채명상 이후에 그렸다. 항상 선한 영향력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유의지를 허락한 우주의 파랑색 에너지로 내게 존재한다는 것이 목에 가득 찬 격한 감격으로 채워졌다. 때로 직관적인 에너지가 동원되어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에 하나가 될 때 나누는 선한 마음은 영적인 각성과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슬픔에서 벗어나 비슈다 차크라의 색채명상을 하는 동안에 마음의 캔버스에 떠오른 하늘은 바다와 혼재된 그저 파란색이었다. 조용히 머물러 있는 동안에 구름 같고 파도 같은 움직임들이 신선한 바람으로 페퍼민트향을 머금고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파란 바람이 부는 하늘은 구름으로 하얗게 가려지다가 물결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며 시원해진 기분을 정화 차크라 색채명상 후에 그려 본 것이 그림 Ⅳ-26이다. 내 마음의 창문은 반듯하지 않고 마음대로 그려진 네모였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바라보다가 코로나로 세상이 마비되어 얼어붙은 지난 겨울에 차 안에서만 바라보고 돌아온 바다여행이 생각났다.
"강릉이다. 특별한 여행. 차안에서 창문만 내리고 바다를 보고 있다. 이번 이 몇 번째일까? 바다는 여전히 파랗고 짠 내가 난다. 바다는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고 시린 바람은 보낸다. 소금에 절여진 나를 던져 넣어도 바다는 침묵으로만 나를 대하고 모르는 척한다. 정말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다행이지.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2021년 1월 23일, 연구자의 메모장)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서문여고 시절 옥상에 올라가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시작된 나의 놀이였는데 지금까지 가끔씩 바다와 함께 드넓은 하늘을 보러 동해안에 가곤 한다. 정말로 파란색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시간이 좋았고 침묵의 바다가 편안한 것은 나의 꺼내지 못하는 마음속의 궁시렁거림을 파도소리에 적셨다가 하얗게 부서트리며 끝없이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명상하지 않아도 수 없이 올려다보았던 하늘은 언제나 바다처럼 나의 마음을 식혀 주었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비타민이었다. 어쩌면 파란색은 내가 내담자를 지켜보듯이 날 지켜보고 있으며 스스로 해답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행동을 개시하기를 기다려 주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비슈다 차크라가 균형적일 때 신의 가르침에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그 열매로 몇십 년 묵은 감정을 녹여 내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비슈다 차크라 색채명상을 하면서 소통과 관련하여 되뇌이게 되는데 그림 Ⅳ-27은 아름다운 언어들이 모인 자리를 표현한 것으로 진실된 마음들을 내려놓고 파란색으로 사유하며 소통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많은 일들이 익숙해지고 쉬워졌지만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것은 잘 말하고 잘 듣는 것이다. 실제로 점점 듣기도 어렵고 말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다만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긍정의 언어를 나누고 싶다는 것을 파랑은 언제나 속 깊게 그 자리를 지키며 기다려 주고 있다.
가면은 사람과 동물, 신의 얼굴을 본떠서 머리에 쓰고 특정한 목적과 용도를 가지고 사용되는 것으로 역사의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보편적 물건으로 세계의 여러 문화에서 특정 장소에 대한 관심과 표현, 경외심을 담고 있다(전순영, 2011). 인류 초기의 제 의식에서 볼 수 있는 가면을 Jung은 착용함으로써 영혼이 깃들어지며 살아있는 착용자와 신화적인 존재가 결합하는 것이라 하였다. 가면을 쓰는 것은 자아와 본래의 원형 사이의 교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이원향, 2006).
일상생활에서 나의 페르조나는 몇 개나 될지 궁금해졌고 그것의 불균형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정신적인 갈등과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의 상황에 수시로 노출되는 위태로운 현실에서, 여러 개의 의미와 상징을 부여한 가면을 만들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그림 Ⅳ-28은 나는 이 가운데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비슈다 차크라 색채명상을 한 후에, 생명이 있는 동안에 지속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것이다. 다양한 모습의 페르조나는 여전히 사회적 관계에서 미숙함과 부족한 모습이지만 내 모습을 진정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마음을 여러 개의 가면으로 표현하며 얻은 해답은 그저 '나는 나'라고 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가면을 착용하는 자체가 상징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어떤 가면을 사용하는 지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으며 그 역할에 따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면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그것을 쓰고 벗는 과정에서 외적실체와 내적실체를 직접적으로 규명하여 준다(전순영, 2011).
자기실현의 과정은 자기인식(self-knowledge)의 과정으로 인식이란 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통찰이라는 면에서 의식화하는 깨달음과 관계가 있다. 이런 면에서 종교에서의 자기인식과 Jung(1984/2001)의 자기실현의 개념은 유사한 면이 많다. 자기실현의 실제과정은 고통과 상실 없이는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외부대상에 투사하며 긍정적인 부분을 잃어버리고 페르조나가 되어버린 가짜 감정들을 직면하며 진행된 작업의 소산물이다. 여러 개의 얼굴들이 모두 쓸쓸하고 창백하게 느껴지며 나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전체인격이 되려는 내적 충동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어져 있어 자기는 인격전체이며 곧 원형이다(이부영, 2003a).
가면 안에 있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많은 신화 속 여신과 민담의 주인공을 떠올려 보며 아직도 정체 모를 내 모습을 고민한다는 것이 자기원형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며 자기실현의 도중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려웠지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런 소통의 가면으로 관계와 성장의 가면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깊은 심연의 영적인 성장을 향해 매개가 되어주는 잠재성을 발견하였다. 고맙게도 현실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다리가 되어 준 나의 비슈다 차크라 작업은 영적인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크라 색채명상을 통한 예술치료사의 자기실현에 관한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전진옥 건국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치료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