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天文·별·十二支 관념
<金石文>
1)北斗七靑
(長川 1號墳 ;금석문1권 p.107)
백1-5) <裏面>(武寧王 誌石 ;금석문1권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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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 ꠐ ꠐ 亥
丁 ꠐ ꠐ 壬
午 ꠐ ꠐ 子
丙 ꠐ ꠐ 癸
巳 ꠐ 戊 己 ꠐ 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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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 乙 卯 甲 寅
*무녕왕 지석의 裏面은 方位圖 혹은 方位表, 陵域圖라고 하는데, 十干 十二地支 일부가 기입되어 있다. 이에 대한 견해로 ①먼저 冥卷이라 하는 입장인데, 명권은 神들의 위력으로 묘지가 邪精, 厲鬼 등에 의해 干犯되어 그 棲家로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堂塔의 礎石 가운데에 둔 鎭壇具와 같이 묘의 안전을 지키는 護符라고 본다. ②또한 일반 墓誌의 체재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석이라기보다는 神에게 묘의 安護를 기원하고 묘지 소유권을 확인하는 매매계약문서인 買地卷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3면만을 기입하고 上部인 서쪽 방위를 기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①가운데에 뚫린 구멍을 사방의 중앙으로 정할 경우 石材 자체가 정방형이 아니고 또 구멍을 위쪽으로 치우쳐서 뚫었기 때문에 서쪽 방위 표시는 비워두었다는 견해와 ②卜筮관계 혹은 陰陽方位사상에 의해 일부가 절단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2) 式占天地盤
(王盱墓(평양 石巖里 205호분) 출토 漆器 銘文 ;금석문1권 p.226)
*현재까지 알려진 漢代제작 칠기는 대부분 낙랑지역에서 출토된 것들이며, 또한 대부분 木槨墳(귀틀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紀年銘 칠기는 대력 B.C 1세기- A.D 2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본 王盱墓(石巖里 205호분)에서 출토된 式占天地盤은 칠기는 아니지만 여러 칠기들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圓形과 方形 2매의 얇은 판으로 되어 있다. 그 圓盤 위에는 北斗七星을 그리고 그 둘레에 12월 神名·10干·12支의 문자를 墨書하였고, 方盤에는 8卦·10干·12支·28宿를 배열하였다. 漆製式占天地盤 殘缺이 石巖里 201호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漢代에 수입된 이런 천문 지식이 이후 고구려의 천문 발달에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문·성수도 해석에 좋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三國史記>
3) 九年 春三月 有星孛于王良 /十四年 夏四月 有星孛于參 /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孛于河鼓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9년(전 49) 3월에 孛星(혜성)이 王良(28宿 중 西方 제1 奎宿圈에 있는 별자리로 현재 카시오페아 α, β를 포함한 5星)에 나타났다. 14년(전44) 4월에 패성이 參(28수 중 서방 제7 宿로 현재 오리온 자리의 7星)에 나타났다. /24년(전 34) 6월 그믐날에 日蝕이 있었다. /30년(전28) 4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32년(전 26) 8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43년(전 15) 2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54년(전 4) 2월에 패성이 河鼓에 나타났다. /56년(전 2) 정월 1일에 일식이 있었다. /59년(서기 2) 9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
4) 十四年 春正月 入唐宿衛大奈麻德福傳 學曆術還 改用新曆法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4년(674) ······ 정월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하던 대내마 德福이 曆術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서 새로 역법을 개정하였다.>
5) 元年 八月 高僧道證自唐廻 上天文圖.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효소왕)
<원년(694) 8월 高僧 道證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와서 天文圖를 올렸다.>
6) 八年 春三月 暴風拔木 三月 置天文博士一員ⓐ漏刻博士六員.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경덕왕)
<8년(749)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天文博士 1명과 漏刻博士 6명을 두었다.>
7) 二年 五月壬戌朔 日當食不食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애장왕)
<2년(801) 5월 1일 일식날을 당하여도 일식하지 아니하였다.>
8) 十五年 夏四月十二日 流星起天市 犯帝座 過天市東北垣 織女 王良 至閣道分爲三 聲如擊鼓而滅 秋七月 雪.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5년(823) 4월 12일에 유성이 天市에서 일어나서 帝座를 범하고, 천시의 동북垣과 직녀성 王良星을 지나 閣道에 이르러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소리가 북치는 소리와 같더니 없어졌다. 7월에 눈이 내렸다.>
9) 六年 九月九日 王與左右登月上樓 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風雨順 歲有年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헌강왕)
<6년(880) 9월 9일에 왕은 좌우군신과 더불어 月上樓에 올라서 사방을 관망하였는데, 서울의 민옥이 서로 줄지어 늘어섰고 가악소리가 연하여 일어났으므로, 왕은 시중 민공에게 말하기를, ‘내 들으니 지금 백성들이 집을 기와로 덮고 띠집으로 덮지 아니하고, 밥을 짓는데 숯으로 하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 하는데 이게 정말인가?’ 하자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일찍 이와같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하고 상주하기를, ‘폐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천지의 陰陽이 잘 조화되고, 풍우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 변경은 조용히 안정되었으므로 시정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이는 성덕의 소치입니다.’ 하니 왕은 흔연히 말하기를, ‘이는 실로 경 등이 도운 힘이지, 어찌 짐의 덕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10) 四年 夏四月丁卯晦 日有食之 五月 五星聚於東方 日者畏王之怒 誣告曰 是君之德也 國之福也 王喜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차대왕)
<4년(149) 4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5월에 五星이 동방에 모였다. 日官은 왕이 노할까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아뢰기를, ‘이는 임금의 덕이요, 국가의 복이 될 징조입니다’ 하자, 왕은 기뻐하였다.
11) 十三年 春二月 星孛于北斗 夏五月甲戌晦 日有食之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차대왕)
<13년(158) 2월에 패성이 북두칠성에 나타났다. 5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12) 六年 秋七月辛未晦 日有食之.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개루왕)
<6년(B.C.13) 7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13) 六年 秋七月辛未晦 日有食之.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개루왕)
<6년(B.C.13) 7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14)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一.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개루왕)
<10년(137) 8월 庚子에 熒惑星(火星)이 南斗를 범하였다.>
15)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干角亢.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26년(191) 9월에 蚩尤旗가 角亢에 나타났다.>
<三國遺事>
16)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善德王과 知幾三事)
<別記에 이 왕때에 돌을 다듬어 瞻星臺를 쌓았다 한다.>
17) 第二十八 眞德女王卽位 自製太平歌 織綿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現慶前 春秋已登位 現慶庚申 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 在現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雞林國王 其詞曰 ······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진덕왕)
<제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스스로 太平歌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使臣을 보내여 唐主에게 바쳤다. ‘······ 四時는 玉燭과 같이 고르고 七曜는 널리 만방에 돌아다닌다. ······’>
18) 虎力伊干之子 舒玄角干 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姊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禀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김유신)
<虎力伊干(武力 伊湌)의 아들 舒玄 각간 김씨의 장자는 유신이요, 아우는 흠순이다. 맏누이는 寶嬉니 小名은 阿海요, 妹弟는 文姬니 소명은 阿之였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에 출생하였는데 七曜의 精氣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七星의 무늬가 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되던 임신년에 劍術을 닦아 國仙(花郞)이 되었다.>
<中國正史朝鮮傳>
19) 歲時伏臘, 同於中國
(<舊唐書> 東夷列傳 백제)
<歲時와 節氣는 중국과 같다.>
20) 用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周書> 異域列傳 백제)
<宋元嘉曆을 채용하여 寅月로 歲首를 삼았다.>
21)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北史> 列傳 백제)
<송나라 元嘉曆을 사용하여 寅月을 歲首로 삼았다.>
22)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
23)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후한서> 동이열전 예)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日本六國史>
24) 所以隔年度日 天轉律移 想尋修之舊貫 近周廻之星紀 酌展親於古典 遵繼好於前章
(<日本三代實錄> 권2 淸和천황)
<貞觀 원년(859) 5월 10일 을축, ··· (발해국왕이 아뢰기를) 해를 걸러 日域을 건너는 까닭입니다. 天律이 바뀌어 옮겼으므로 옛 관례를 지킬 것을 생각하고, 星紀가 한바퀴 도는 데 가까워졌으므로 옛 전적에 보이는 친밀한 관계를 펼치며 옛 章程에 보이는 우호를 계속 따릅니다.>
25) 天皇之旨 年滿一紀 後許入覲 ··· 今者天星轉運 躔次過紀 覲覿之札 ··· 亦悉往五臺覓靈仙 送金之時 靈仙遷化 不得付与 其金同陷沒 以此其後文矩入覲
(<續日本後紀> 권11 仁明천황)
<承和 9년(842) 3월 병신 초하루 신축, ··· 발해국왕 大彝震(831-857, 발해 11대왕)이 아룁니다. ··· 천황의 뜻을 말로 전하기를, 햇수가 아직 12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다음에 찾아와서 인사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彛震은 천황의 뜻하심이 빈번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삼가 말로 전하는 것에 의거하여 전날의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지금 하늘의 별자리가 운행하여 12년이 지났으므로 예를 갖추어 찾아 뵙습니다. ··· 또 다른 서신에서 “彛震의 祖父(10대 宣王) 재위시 高承祖를 뽑아 찾아 뵈었을 때 천황이 당나라 五臺山에 머물고 있는 승려 靈仙에게 황금 100량을 보내주기를 주문하여 承祖에게 부쳤다. ··· 또한 五臺山에 가서 靈仙을 찾아 금을 보내려고 했을 때 靈仙은 이미 죽었기(遷化) 때문에 전해줄 수 없었고 금도 함께 바다에 빠졌음을 상세히 알게되었습니다. ···”>
26) 豊御食炊屋姬(推古)天皇十年十月 百濟國僧觀勒始貢曆術 而未行於世 ··· 貞觀元年 渤海國大使烏孝愼新貢 長慶宣明曆經云 是大唐新用經也 眞野麻呂試加覆勘 理當固然
(<日本三代實錄> 권5 淸和천황)
<貞觀 3년(861) 6월 16일 기미, 長慶宣明曆經을 처음으로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이에 앞서 陰陽頭 종5위하 겸 行曆博士 大春日朝臣·眞野麻呂가 “삼가 살피건대 豊御食炊屋姬(推古)천황 10년(602) 10월에 백제국 승려 觀勒이 처음으로 曆術을 바쳤으나 세상에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高天原廣野姬(持統)천황 4년(690) 12월에 칙명을 내려 처음으로 元嘉曆을 사용하였으며, 다음에는 儀鳳曆을 사용하였습니다. 高野姬(稱德)천황 天平寶字 7년(763) 8월에 儀鳳曆을 그만 두고 開元大衍曆을 사용하였는데, 그후 寶龜 11년(780)에 遣唐使 錄事 故 從5위하 行內藥正 羽粟臣翼이 寶應五紀曆經을 바치면서 ‘大唐은 이제 大衍曆을 그만두고 오직 이 경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天應 원년(781)에 칙령이 있어 이 경에 의거하여 曆日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를 익히거나 배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 업을 전할 수 없어 오히려 大衍曆經을 사용한 지 이미 100년이 되었습니다. ··· 貞觀 원년(859)에 渤海國 大使 烏孝愼이 새로이 長慶宣明曆經을 바치며, ‘이는 大唐에서 새로이 쓰는 曆經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眞野麻呂가 시험삼아 살펴보았는데, 이치가 분명하였습니다. 이에 저 새로운 曆을 大衍·五紀 등 두 曆經과 비교하고, 또 天文을 살피며 時候를 참작하니, 두 曆經이 점차 치밀하지 못하게 대며 朔日과 節氣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 大唐 開成 4년(839)과 大中 12년(858) 등의 曆經을 교감하니 저 新曆이 다시 서로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曆書에서 말하기를 ‘陰陽의 운동은 움직임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므로 曆과 어그러지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大唐은 開元(713-741) 이래로 세 번이나 曆術을 고쳤습니다. 本朝에서는 天平(729-748) 이후로 오히려 한가지 경만을 사용하면서도 조용히 사물의 이치만을 말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옛 曆法을 그만두고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여 天運을 공경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조칙을 내려 이를 따랐다.>
27) 百濟僧觀勒來之 仍貢曆本及天文地理書 幷遁甲方術之書也 是時 選書生三四人 以俾學習於觀勒矣
(<日本書紀> 권22 推古천황)
<10년(602) 겨울 10월, 백제 승려 觀勒이 왔다. 이에 曆本과 天文·地理書 및 遁甲·方術書를 바쳤다. 이 때 書生 3, 4명을 선발하여 관륵에게 배우도록 하였다.
28) 僧隆觀還俗 本姓金 名金財 沙門幸甚子 頗涉藝術 兼知算曆
(<續日本紀> 권3 文武天皇)
<3년(703) 겨울 10월 갑술, 승려 隆觀이 환속했다. 본래의 성은 金이고 이름은 金財(신라인)로, 沙門 幸甚의 아들인데, 자못 예술에 뛰어났고 아울러 算術과 曆術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