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II(군자사~천왕봉)
▣ 일 시 : 1610년(광해 2) 09월 02일~09월 08일
▣ 대상산 : 두류산
▣ 동 행 : 박여량[57세](전世子侍講院文學), 정경운[55세](남계서원임), 박명부[40세](합천군수),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안국사 승려(처암, 운일), 악공(윤걸), 종[박여승의 종(혜금연주), 신광선의 종(피리연주), (박여량의 종(옥로, 손득)]등외(15명외)
▣ 일정&코스
• 9/2 : 함양 병곡면 도천리-어은정-목동 박춘수의 집
• 9/3 : 목동(함양군 휴천면 목현리)-탄감촌(휴천면 문정리)-용유담-군자사(마천면 군자리)
• 9/4 : 군자사-백모당-하동암(우리동)-옛제석당터-제석당
• 9/5 : 제석당-향적사(서천당)-중봉(제석봉)-천왕봉-천왕당
• 9/6 : 천왕봉-증봉(甑峰)-마암(중봉샘)-소년대(하봉)-행랑굴(현 마암)-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쑥밭재)-상류암
• 9/7 : 상류암-초령(?)-방곡촌(方谷村)-신광선(愼光先)의 정자-최함씨의 계당
• 9/8 : 최함씨의 계당-엄뢰대(嚴瀨臺)-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뇌계(㵢溪)-도천 감수재(感樹齋)
9월 4일 아침 박여량은 군자사를 출발한다. 목동에서 길을 안내한 첨지 박춘수의 아들 유향소 좌수(?) 박대주와 기생과 악공을 데리고 온 별감 박대일과 작별을 한다. 실덕탄(국립공원 함양 분소 앞 냇물)을 건너 백모당을 향한다. 「두류산일록」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추수를 앞둔 다랭이 논의 벼와 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곱게 단풍이 든 백무동으로 들어가는 산촌의 풍광이 떠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산촌 마을의 풍경은 아름답다.
우리는 승려에게 업혀 실덕탄(實德灘)을 건넜다. 실덕탄의 좌우에 실덕∙마촌(馬村)∙궁항(弓項) 등의 마을이 있었다. 곳곳에 감나무가 서 있는데, 감이 한창 익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산 속에 사는 백성들이 이 감을 따서 생계를 꾸려간다.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였다. |
백모당에 들어가 차를 마시고 안국사 승려 승혜가 술과 과일을 대접한다. 백모당의 위치는 현재 느티나무 산장 본채 건물터로 추정한다. 우리동(于里洞)과 공달비산(蚣達飛山)에서 내려오는 물이 한신계곡과 만나는 합수점이다. 하늘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다. 느티나무 산장 본채 터에서만 와편이 나온다고 하니, 三水一川의 양달을 백모당터로 본다. '지리산 백무동(2020, 최석기)'의 저자 최석기 교수님은 천왕당은 상당(上堂), 제석당은 중당(中堂), 백모당은 하당(下堂)으로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산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여량은 백모당까지 따라온 자들에게 방곡촌에서 만나기로 하고 돌려보내고 산행을 시작한다. 우리동(于里洞)은 하동바위와 참샘 부근인 듯하다. 지난밤 폭음으로 힘들어하는 박명부에게 “예전부터 ‘하동암’이라 불러왔지만, 이제는 ‘합천암(陜川巖)’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좋겠네”라고 놀리기도 한다. 겨우 겨우 옛 제석당터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소지봉을 지나 소나무 군락과 바위가 어우러진 조망 바위이다. 이곳에 오르면 서쪽으로 지리산 주능선과 중북부 능선이 조망된다. 임진왜란 뒤에 영원암과 도솔암을 새로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몇 년 전 함양군수 윤아무개가 얼마나 청렴하였던지 녹봉을 한 푼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낼 때에도 말을 팔아 혼수를 장만하였다. 도솔암에 붉은 깃발을 꽂아두고 발자취가 동구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인오(印悟, 청매선사)가 그 말을 듣고 지은 시에
昔時得聽留黃犢 : 옛 사람이 송아지를 두고 갔다 들었는데,
今日更看賣玉蹄 : 오늘 이 분 말을 팔아 딸 시집 보낸다네.
山僧無計贊淸德 : 山僧이 맑은 덕으로 도울 길이 없으니,
獨對金爐祝香西 : 향로 앞에 홀로 서서 극락왕생 축원하네.
무릇 비석을 세워 칭송하고 입으로 전하여 사모하는 것은 이 고을 백성들이 할 일이다. 세상 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혼자 외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까지도 우러러 흠모하는 정을 바쳤으니,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함께하는 것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아줄 수 있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겠다. |
박여량은 명언을 남긴다.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아줄 수 있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 하물며 세상 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도솔암에서 외롭게 사는 인오(印悟, 청매선사)까지도 우러러 흠모하는 정을 바쳤다. 박여량이 함양군수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윤아무개는 1606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윤인(尹認, 1555~1623)으로 추정한다. 박여량은 심한 피로감을 잊기 위해 종들에게 춤을 추게 하고, 악공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한다.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하기도 한다. 곳곳에서 매를 잡는 움막이 설치되어 있으나 매를 잡은 사람 수를 물어보니 한두 사람에 불과하다. '욕심을 가진 놈은 제압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욕심에 대하여 경계한다.
움막을 엮고 덫을 설치하여 만리 구름 속을 나는 매를 엿보니, 높고 낮은 형세로 말하자면 현격한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매가 끝내 덫에 걸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제압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됨을 어찌 돌이켜보지 않으랴? 또한 기구를 설치해놓고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끝내 매를 잡는 사람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잡히는 매의 수도 알 수 있겠다. |
날이 어두어질 무렵에야 제석당에 도착한다. 온 골짜기에 안개가 깔리고 바람이 불었다. 피곤에 지쳐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저녁을 먹는다. 이곳은 새로 지은 제석당으로 중당(中堂)이다. 사철 석간수(甘露水, 감로수)가 흐른다. 제석당 당집이지만 지리산을 유람하는 유람객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가운데 삼 칸의 넓은 대청이 있고 좌우에 방이 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판자로 둘러놓았다. 대들보의 길이가 거의 23~24尺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제석당을 완성했다고 한다.
두류산일록 9월 5일 기록에 따르면, 제석당에서 1박을 한 박여량은 전에 서천당과 향적사를 다녀왔기 때문에 나머지 일행들을 보낸다. 감수재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서천당은 산희샘 목책을 넘어 약 60m를 가면 서천당 터가 있다. 좌표 N35.3325, E127.71752, 고도1663, 당터 5m×10m, 축대 중단 22m, 하단 26m로 향적사와 길은 연결되어 있다. 자신과 정경운은 제석당에서 제석봉(중봉)을 향한다. 이 구간의 박여량 길은 현재의 등산로가 아니며 지금의 등산로가 나기 이전 70년대 중반까지는 그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그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박여량 선생은 지금의 제석봉을 지나며 중봉이라고 한 것은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따른 것이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 제석봉)에 이르렀다. |
박여량은 석굴(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에 도착한다. 젊었을 때 두 번이나 천왕봉에 올랐지만 신선 세계의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천왕봉에 대한 박여량의 인식은 특별하다. '하늘에 닿은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아 천왕봉이라고 일컬어졌다.' '두류산의 이름도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오령(五嶺)∙팔령(八嶺)이 되고, 남쪽으로 죽령(竹嶺)∙조령(鳥嶺)이 되었다. 다시 구불구불 이어져 영호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 방장산에 이르러 두류산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두류산의 유래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천왕봉’이라는 명칭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건대, 이 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철령(鐵嶺) 등이 되었고, 다시 뻗어내려 동쪽으로는 오령(五嶺)∙팔령(八嶺)이 되고 남쪽으로는 죽령(竹嶺)∙조령(鳥嶺)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이어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르러 그쳤다. 이 산을 ‘두류산’이라 한 것이 이런 연유 때문에 더욱 극명해진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
천왕당의 무녀는 진주 사람으로 함양 사람인 화랑(함양 무당의 남편)과 당집 소유의 타툼이 있어 화랑을 무고하여 함양의 감옥에 갖히게 하였다. 분쟁 중인데 함양 사람들이 몰려오자, 무녀는 솥을 숨기고 물통을 없애 밥을 짓지 못하게 한다. 따라온 승려에게 자세한 내용을 듣고는 후에 진주 병마절도사에게 함양 감옥에 갇힌 그를 풀어달라고 편지를 보낸다. 다음날 아침에도 똑같은 곤란을 겪는다. 천왕당에 들어와 거적으로 성모상을 덮고 앉아서 쉬다가 밖으로 나가 일몰을 맞이한다. 일몰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따라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가 지려 합니다. 나가서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천왕당을 나와 서쪽 바위 위에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떠가던 구름 한 떼가 서쪽 하늘가에 길게 뻗치고 석양에 봉우리와 골짜기가 천만 가지 기이한 형상을 자아냈다. 다시 붉은 구름 한 줄기가 검은 구름 밖으로 길게 드리우더니 그 모양이 끝없이 변해 예측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해가 엄자산(崦嵫山)으로 넘어가니,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별과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바람도 거세어졌다. 마치 혼돈(混沌) 속에 있는 것처럼 어슴푸레하였다. |
끝.
▶ 1610년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군자사~천왕봉)
○ 9월 5일(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조선시대 성균관 소속의 임원]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제석봉]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 9월 4일(을사).
맑음. 박대주와 박대일이 고을 수령의 일 때문에 두 기생을 데리고 절의 문밖에서 작별하였다. 우리는 승려에게 업혀 실덕탄(實德灘)을 건넜다. 실덕탄의 좌우에 실덕∙마촌(馬村)∙궁항(弓項) 등의 마을이 있었다. 곳곳에 감나무가 서 있는데, 감이 한창 익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산속에 사는 백성들이 이 감을 따서 생계를 꾸려간다.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였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겨우 백모당(白母堂)에 도착했다. 차를 마신 뒤에 안국사의 승려 숭혜(崇惠)가 술과 과일을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말을 놓아두고 나막신을 신고서 따라온 자들에게 단단히 일러 방곡(方谷)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비로소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올라 지나온 곳을 굽어보니 점점 높고 멀게 느껴져, 이른바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비탈길을 따라가는데 해를 가린 나무들이 거의 수십 리나 늘어서 있었다. 바로 우리동(于里洞)이었다. 우리동 중간쯤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은 조금 움푹하였는데 ‘하동암(河東巖)’ 이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하동태수가 이곳에 이르러 지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이 바위 아래서 묵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매우 피곤하여 열 걸음에 한 번씩 쉬었는데, 쉴 때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함께 간 승려가 쉴 적마다 재촉하기를 “해가 서쪽으로 지려 하는데 갈 길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도 이 바위 밑에서 자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장난 삼아 말하기를 “예전부터 ‘하동암’이라 불러왔지만, 이제는 ‘합천암(陜川巖)’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 박여승이 합천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한 농담이었다. 하동암에서 겨우 5, 60보쯤 오른 뒤 스스로 안도의 숨을 쉬면서 “우리들은 하동암을 지나 꽤 멀리 올라왔네”라고 하였다. 이른바 “50보 달아난 자가 1백 보 달아난 자를 비웃는 꼴”이었다.
겨우 겨우 옛 제석당(帝釋堂)터 에 도착하였다. 올라서 좌우의 바위와 골짜기를 조망하고,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온 산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회나무가 아니면 붉게 물든 나무였으며, 붉게 물든 나무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푸르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이 뒤섞여 서로 비추어서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印悟)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佛經)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몇 년 전 윤 아무개가 함양군수로 나왔을 때, 청렴한 정사를 베풀어 작목(作木)으로 받은 녹봉은 한 푼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낼 때에도 자기의 말을 팔아 혼수를 장만하였다. 인오가 그 말을 듣고 지은 시에 “옛날 사람 송아지를 두고 갔다 들었는데, 오늘 이분 말을 팔아 딸 시집 보낸다네”라 하고, 마지막 연에 “산승이 맑은 덕을 도울 길 없으니, 향로 앞에 홀로 서서 극락왕생 축원하네”라고 하였다.
昔時得聽留黃犢 : 옛 사람이 송아지를 두고 갔다 들었는데
今日更看賣玉蹄 : 오늘 이 분 말을 팔아 딸 시집 보낸다네
山僧無計贊淸德 : 山僧이 맑은 덕으로 도울 길이 없으니
獨對金爐祝香西 : 향로 앞에 홀로 서서 극락왕생 축원하네
무릇 비석을 세워 칭송하고 입으로 전하여 사모하는 것은 이 고을 백성들이 할 일이다. 세상 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혼자 외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까지도 우러러 흠모하는 정을 바쳤으니,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함께하는 것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아줄 수 있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겠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풀을 깔고 둘러앉아 물을 마시고 밥을 먹기도 하고 술을 따라 마시기도 하였다. 다시 억지로 일어나 산을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동만큼 길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반 이상 올라와 정상이 머지 않은지라 다리의 힘이 빠져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절감하였다. 젋은 두 종으로 하여금 단풍나무를 꺾어들고 앞서가며 춤을 추게 하고, 악공들로 하여금 계속 피리를 불게 하였다. 이는 대체로 심한 피로감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였다. 두 종 가운데 하나는 관청에 딸린 관동(官童) 옥로(玉老)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온 손득(孫得) 이었는데 모두 내가 데려온 종들이다.
* 박여량이 데리고 온 종 관동 옥로와 손득
제석당을 향해 오를 때 길이 매우 가팔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기도 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하기도 하였다. 내가 “비록 달아나려 해도 달아날 수 없겠구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전 분이 “도망친 죄인을 잡아오는가?”라고 농담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보이는 곳곳에 매를 잡는 움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매를 잡은 사람 수를 물어보니 한두 사람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아! 움막을 엮고 덫을 설치하여 만리 구름 속을 나는 매를 엿보니, 높고 낮은 형세로 말하자면 현격한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매가 끝내 덫에 걸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제압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됨을 어찌 돌이켜보지 않으랴? 또한 기구를 설치해놓고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끝내 매를 잡는 사람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잡히는 매의 수도 알 수 있겠다.
제석당 앞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온 골짜기에 안개가 짙게 깔리고 바람소리가 윙윙거렸다.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막막하고 어렴풋한 세계에 허다한 생물들이 은연중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할뿐, 인간의 지혜로서는 세세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곳에 올라보니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쪽∙서쪽 방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곤히 한숨 자고 난 뒤 저녁밥을 먹었다.
제석당의 규모는 제법 넓어 들보의 길이가 거의 23~4자 정도나 되었다. 좌우의 곁방을 제외하고 가운데 삼 칸의 대청이 있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흙을 바르지 않고 판자로 둘러놓았다. 다시 지은 연유를 물었더니,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약한 노파의 힘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순식간에 큰일을 이루었으니, 미혹되긴 쉽고 이해하긴 어려운 사람 마음에 대해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 9월 5일(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조선시대 성균관 소속의 임원]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제석봉]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몇 리를 가서 석굴[통천문]을 빠져나왔는데,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다시 올라 정상에 도착하니 이곳이 바로 천왕봉(天王峯)이었다. 각자 바위를 부여잡고 비탈길을 올라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아련히 세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왔다는 생각과 유쾌히 낭풍(閬風)과 현포(玄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낭풍(閬風)과 현포(玄圃) : 閬風瑤池의 준말. 신선이 산다는 곳, 玄圃積玉의 준말. 사물의 정수가 한데 모인 것을 비유하는 말. 곤륜산 신선이 산다는 현포에는 옥이 많이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함. 신선의 거처 현포에는 기이한 풀과 괴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다고 함.
[천왕봉 유래] ‘천왕봉’이라는 명칭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건대, 이 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철령(鐵嶺) 등이 되었고, 다시 뻗어내려 동쪽으로는 오령(五嶺)∙팔령(八嶺)이 되고 남쪽으로는 죽령(竹嶺)∙조령(鳥嶺)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이어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르러 그쳤다. 이 산을 ‘두류산’이라 한 것이 이런 연유 때문에 더욱 극명해진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봉우리 위의 판잣집이 있는데, 이 또한 전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다. 전에는 단지 한 칸으로, 지붕은 판자를 덮고 돌로 눌러서 비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한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규모를 넓혀 세 칸 집을 지었는데, 판자에 못을 박고 판자로 둘러친 벽 바깥에 돌을 에워싸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사람들이 백에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죽어 마을이 쓸쓸해져서 다시는 옛날의 모습이 아닌데, 세상 밖에 사는 무당이나 승려 같은 무리들은 옛날에 비해 더욱 번성하고 있다. 사찰로써 말한다면 금대암∙무주암∙두류암 외에 영원암∙도솔암∙상류암(上流庵)∙대승암(大乘庵)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 사당으로써 말한다면 백모당∙제석당∙천왕당(天王堂) 등은 모두 옛날에 화려하게 지은 것이고, 용왕당(龍王堂)∙서천당 등은 새로 지은 것이다. 노역을 피해 숨어든 무리와 복을 비는 백성들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여들어 봉우리와 골짜기에 낱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도 나라에서 금지할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따라온 승려들에게 저녁밥을 지으라고 하였더니 솥이 숨겨져 없다고 하였고, 샘을 찾으라고 하였더니 물통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없다고 하였다. 이 모두 한 늙은 무녀가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솥을 숨기고 물통을 떨어뜨려, 배고파도 밥을 해먹을 수 없고 목이 말라도 물을 떠 마실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이유를 캐물었더니 승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봉은 진주와 함양의 사이에 있어서 지역으로 말하면 천왕봉 중앙이 경계가 되고, 천왕당으로 말하면 사당의 중앙이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판자를 덮은 사람은 함양의 화랑(花郞)이었고, 못을 박아 견고하게 한 사람은 진주의 늙은 무녀였다. 진주는 병영(兵營)이 있는 곳이고, 함양은 그 병영에 속한 군이다. 화랑과 무녀가 이익을 다투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이 봉우리의 사당이 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무녀는 사당을 진주의 것이라고 여겨 다른 일로써 화랑을 무고하여 함양의 감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리고 사당에 있던 솥을 숨기고 물통을 없애 유람하는 사람들과 시인들이 먹고 마실 수 없게 하였으니 무녀의 죄는 이것만으로도 매우 크다.
* 花郞 : 무당의 남편
병마절도사는 한 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사람인데, 도리어 하찮은 무녀의 무고만을 믿고 허튼 소리를 들어 무녀를 도운 것은 어찌된 일인가? 나는 화랑이 죄도 없이 무거운 형벌에 처해진 것을 가엾게 여겨 절도사에게 편지를 보내 함양의 감옥에 갇힌 그를 풀어달라고 하였다. 사당에는 돌로 만든 신상[성모상]이 있었는데 북쪽 벽 아래에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거적으로 신상을 덮은 뒤에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라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가 지려 합니다. 나가서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천왕당을 나와 서쪽 바위 위에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떠가던 구름 한 떼가 서쪽 하늘가에 길게 뻗치고 석양에 봉우리와 골짜기가 천만 가지 기이한 형상을 자아냈다. 다시 붉은 구름 한 줄기가 검은 구름 밖으로 길게 드리우더니 그 모양이 끝없이 변해 예측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해가 엄자산(崦嵫山)으로 넘어가니,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별과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바람도 거세어졌다. 마치 혼돈(混沌) 속에 있는 것처럼 어슴푸레하였다.
* 崦嵫山 : 중국 甘肅省 天水縣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곳으로 해가 져서 들어간다고 한다.
천왕당에 들어가 각자 잠자리를 잡고서 이불을 끌어안고 두 줄로 마주 앉았다. 등불을 매달고 향을 피운 뒤 한두 순배 잔을 돌렸다. 다시 악기를 연주하고 따라온 승려와 종들에게 번갈아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추게 하였다. 어떤 자는 화상체(和尙體)를 추기도 하였는데 그중에서 안국사의 승려 처암과 운일의 춤사위가 가장 빼어났다. 온 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피리 부는 악공 윤걸은 계면조(界面調)를 잘 연주하였는데, 후정화∙영산회상∙보허사 등은 각각 질박한 맛이 있었다.
* 안국사 승려 처암, 운일, 악공 윤걸
* 계면조(界面調) : 계면(界面)이라고도 한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속악조(俗樂條)에서 “계면이라는 것은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허균(許筠)도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서 “김운란이 아쟁을 잘 타서 사람의 말처럼 하였다. 그 계조를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기록하여 계면이 슬픔을 나타내는 곡이라고 하였다.
출처 : 박여량의 두류산일록(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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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강대 일출 사진을 보니
장터목 마당바위 산그리메,
향적사 물맛이 그리워집니다.
엄자산(崦嵫山)은 반야봉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상류암에서 초령 길 정립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2007년 10월 13일 제석당 일몰입니다.
하동바위를 경유했다면 지금 등산로와 동일합니다
옛 제석당터도 이해가 될 겁니다.
@도솔산인 그만한 조망이 있는곳은 한곳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