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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0 연중5주간 목 – 133위 056° 정여삼 바오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사는]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마르 7,24).
133위 056° ‘하느님의 종’ 정여삼 바오로
이름 : 정여삼 바오로
출생 : 1822년, 천안 직산
순교 : 1866년 11월 26일 이후, 경기도 廣州
정여삼 바오로[1]는 충청도 직산 사람으로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생활하다가 용인의 삼배일 점촌(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의 삼배울[1.1])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모친을 모시고 조카 정덕구 야고보[1.2] 가족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였고, 11월 26일(음력 10월 20일) 廣州 포교 세 패가 점촌 삼배일로 쳐들어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할 때, 정여삼 바오로도 모친과 조카 정덕구 야고보와 정 마티아, 예비신자 이화실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교들은 이들을 모두 한방에 몰아넣고는 팔과 다리를 쇠사슬로 묶은 뒤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재촉하였으나, 모두가 “죽을지언정 신자들이 있는 곳을 밝힐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졸들은 정여삼 바오로와 이화실, 정덕구 야고보[2.4]를 심하게 때려 정신을 잃게 하였다.
이어 포졸들은 정덕구 야고보의 동생 정 마티아의 쇠사슬을 풀어 주고는 술과 고기를 사 오라고 하였다. 정 마티아는 술과 안주를 실컷 마시고 먹은 포교들이 잠에 빠지자, 가족들과 함께 도망쳐 뒷산으로 올라갔다. 한편 정덕구 야고보는 새벽에 깨어나 삼촌 정여삼 바오로와 이화실을 흔들어 깨웠으나 일어나지 못하자 혼자서 몰래 빠져나와 동생과 가족들이 숨어 있던 뒷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정여삼 바오로는 이화실과 함께 廣州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정여삼 바오로의 나이는 44세였다.[2][2.4]
[註]__________
[1] 『광영계록』에 나오는 정오복(鄭五卜)을 정여삼 바오로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각사등록》(4권), 『광영계록』, 1867년 1월 9일).
※ N.B. ① 광영계록(廣營啓錄) : ☞ 133위 041° ‘하느님의 종’ 이조여 요셉 [註] [1.1] 참조.
1860년(철종 11) 12월부터 1893년(고종 30) 3월 사이에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들이 재임 시 올린 계문(啓文)을 임기가 끝난 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날짜순으로 수록한 책이다.
② 각사등록(各司謄錄) : 임진왜란 이후부터 1910년 대한제국기까지 지방 관아와 중앙 관청 사이에 오간 공문서 각도별로 나누어 구성한 자료집이다. 통권 1-55책.
[1.1] 삼배울 : 비보풍수(裨補風水, 그 지역의 풍수적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를 주장하던 통일신라말 선승 도선(道詵, 827-898)이 이곳을 지나다 ‘큰 인물이 날 곳’이라며 세 번 절을 하고 지나갔다 해서 생긴 지명.
[1.2] 정덕구(야고보, ?-1867)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p.7527)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하느님의 종’. 일명 덕오. 용인 더우골(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에서 태어나 용인 삼배일 점촌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자 11월 26일(음 10월 20일) 광주(廣州) 포교 세 패가 몰려와 정덕구의 삼촌인 정여삼(바오로)을 비롯한 전 식구와 예비교우였던 이화실을 체포하여 이들 집에 가두었다. 이들은 심한 매질을 당하며 심문을 받던 중 포졸들이 술에 취해 이들을 묶고 있던 쇠고랑을 풀어주고 감시를 느슨히 하자 이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하지만 정여삼과 이화실만은 탈출하지 못하고 廣州로 끌려가 며칠 후 순교하였다. 집에서 빠져나온 정덕구는 식구들을 데리고 용인 국수봉으로 올라가 숨어 지낼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최 서방이라는 사람에게 연장을 빌려서 움을 팠다.
그들은 보름 동안 이 움에서 숨어 지내다가 다시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굴암 절골(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도 역시 움을 파서 몸을 숨기고자 했으나,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가 서로 찾을 길이 막막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전에 연장을 빌렸던 최 서방의 집에 가 보니 그곳에 헤어졌던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정덕구 일가는 다시 절골로 올라가 열흘 정도 생활하다 충청도 공주 국실 점촌(공주 반포면 국곡리)으로 가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실 점촌 역시 이미 병인박해의 여파로 많은 교우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굴암 절골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1867년 12월 5일(음 11월 10일) 죽산(竹山, 경기도 안성시) 포졸들이 와서 정덕구를 체포해 갔다.
정덕구는 체포 당시 가족들에게 “죽을 때까지 내 눈에 하나도 뵈지 말라. 만약에 하나라도 보이면 내 마음이 육정(肉情)에 이끌려 순교를 잘 못 할 듯하니, 부디 보이지 말라”고 말하며 순교의 의지를 굳건히 하였다. 결국 그는 심한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체포된 지 20여 일 만에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순교 당시 나이는 23세 혹은 25세로 알려져 있다.
[2]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2.1], 정리 번호 42.60.164번; 『병인치명사적』[2.3], 1권, 54·68면; 24권, 20-23면. 후자의 내용은 체포되었다가 도망한 정여삼 바오로의 조카 정 마티아가 공주 국실 점촌(현 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살 때 증언한 것이다.
[2.1]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丙寅迫害殉敎者證言錄) : 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분들의 순교 사실에 대한 목격, 혹은 구전 증인들의 증언을 모은 것인데,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뮈텔 신부, 블랑 주교, 르장로드 신부, 드보레 주교 등에 의해 수집된 후 드보레 주교에 의해 1차 정리되고, 드보레 주교 사후에 뮈텔 주교의 손에 넘어가 뮈텔 문서의 일부를 이룬 것이다. 이 자료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1865∼1866년경에 작성된 베르뇌 주교의 사목 서한 ‘환난을 위로하는 말이라’를 위시해서 ‘치명일기’와 관계된 증언자료, 시복 수속을 위한 교구 재판 및 교황청 재판과 관계된 자료, 그리고 기타 증언자료 등 시복 수속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은 각 증언자료들을 원문을 수록하고 있고 각종 자료를 보기 쉽게 인명과 지명의 색인을 수록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신앙을 지켜냈는가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아울러 선교 3세기를 맞이하는 한국천주교회에 순교자적 각오와 자세가 있는가를 묻고 있다.
[2.2] 치명일기(致命日記) : 병인박해 때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명단과 그 약전(略傳)을 수록한 책으로 뮈텔 주교가 1891년 2월부터 4년 동안 전국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1895년에 ‘치명일기(致命日記)’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인쇄하여 전국 본당에 배포하였다. 출판 목적은 병인박해 때 모범적인 순교자를 가려 뽑아 시성을 준비하고자 하려는 것이었다. ‘치명일기’는 순교 선교사 신자들의 출생지 및 신앙 상태, 체포·치명 날짜와 장소, 나이, 지역에 일련번호를 붙여 정리하였다. 최초로 체계적인 한국천주교회 순교록(殉敎錄, martyrologium)인 셈이다.
[2.3] 병인치명사적(丙寅致命事蹟) :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는 과정과 29위를 시복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순교자들의 행적과 그에 대한 증언을 모은 기록이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시복 조사는 박해가 일어난 지 10년 후인 1876년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예비 조사와 정보 수속(手續), 교황청 수속에 이르기까지 시복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기록했는데, ‘병인치명사적’은 바로 이 과정에 모은 역사 기록물이다. 「병인치명사적」에는 순교자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이 밖에도 그에 연관된 다양한 자료들도 수록돼있다. ‘병인치명사적’에는 박해 시기 베르뇌 주교의 사목교서, 1882년 갈매못 순교자 이장보고서 등 교회 측 자료와 순교자와 관련된 관찬기록(官撰記錄), 병인양요와 관련된 글, 일본인 학자의 한국천주교 관련 저술 등도 담겨 있다.
[2.4] 남한산성의 순교자(관찬기록 및 교회증언기록 자료)
1.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사학징의’에서 덕운(德運), 1801년 12월 27일 참수, 50세, 廣州 의일리 거주, 충남 홍주 태생.
▶‘사학징의’ 권1, pp.148-150
○포도청에서의 진술
“저는 본래 홍주(洪州) 사람으로 경술년(1790년) 10월에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指忠, 바오로)의 집에 갔다가 처음으로 십계에 대해 배우고 여러 해 동안 깊이 빠졌습니다. 저는 작년(1800년) 10월에 廣州 땅 의일리(義一里, 현 경기도 의왕시 鶴儀洞). ‘의일’의 한자가 본래 의일儀逸이지만, 문초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본래 경기도 廣州의 의곡면 의일리였다)로 이주하였으며, 교회의 동정을 살피고자 하여 지난 3월 사기그릇 행상인으로 꾸미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빈 가마니 안에 담겨 있는 시신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시체이냐?’라고 묻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홍낙민(洪樂敏, 루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교우들과 서로 사랑하던 마음이 지극하였던 관계로 이 말을 듣고는 아주 놀라고 비통하여 그의 원통한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등이 배교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부친을 따라 함께 죽지 아니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어 서소문 밖으로 가서 최필제(崔必悌, 베드로)의 시신을 염해 주었습니다. 이 마당에 이르러 만만코 배교할 마음이 없으며,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는 것 외에는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판결시의 진술
“윤지충에게 천주교 서적을 배워 밤낮으로 익히고 여러 해 동안 빠져 있었으며, 윤지충이 참수당한 뒤에도 두려워하거나 그만둘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도중에 홍낙민을 애도하였으며, 최필제를 살펴 염해 주었고, 홍재영의 배교를 도리어 질책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순조실록 순조 원년 12월 26일 무진
형조에서 사실대로 자백한 천주교 신자를 참수형에 처하도록 아뢰기를, “죄인 한덕운은 윤지충에게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배웠으며, 홍낙민의 원통함을 애도하였으며, 최필제의 시신을 염해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참수형에 처하되, 다른 도(道)에 사는 사람은 각각 해당 도로 압송하여 형벌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2. 김덕심(金德深) 아우구스티노
▶후손들의 증언자료
족보명 김만집(金萬集), 1841년 1월 28일 옥사, 43세. 廣州 구산 거주, 聖 김성우 안토니오 아우
그가 순교한 뒤, 시신은 큰아들 원희(元熙)가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3. 정여삼 바오로
관변기록명 정오복(鄭五卜), 1866년 10월 옥사(?), 45세, 용인 삼베일 거주, 천안 직산 태생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42번
정여삼은 본래 직산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三拜일, 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이화실과 함께 치명하니, 나이는 45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60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pp. 54·68
정여삼은 충청도 천안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년(1866년) 10월에 廣州 포교에게 잡혀 廣州로 가서 치명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4번
정덕구(야고보)는 정여삼(바오로)의 조카로, 삼촌과 함께 남한산성에 갇혀 있다가 동생 마티아와 함께 탈출하여 충청도 공주의 국실 점촌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1867년 11월 10일 죽산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죽산 관아로 끌려갔고, 20일 후에 옥사순교하였다.
용인 샘배울(삼배일) 점촌에 살았는데, 병인년 군난 때인 10월 20일 저녁에 廣州 포교 세 패가 들어와서 체포하였다. 그때 야고보의 삼촌(정여삼 바오로)과 조모와 동생(정 마태오) 등 식구 모두 잡혔으며, 영세 예비하던 이 서방(이화실)도 함께 잡혔다.
(포졸들은) 그들을 한 방에 넣고 이 서방과 야고보 두 사람의 다리를 함께 대어 쇠고랑으로 채우고, 손도 고랑으로 채운 뒤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돈을 내라”하고 “당도 대라”하였다. 두 사람이 대답하되, “돈은 내가 있는 대로 줄 테지만, 내가 죽더라도 당은 안 대겠다.” 하였다. (그러자 포졸들은) 대라고 하면서 더욱 두들겨 패니 정신이 아득하여 말도 못 하였다.
그 무렵에 포교들이 야고보 삼촌(즉 바오로)을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너도 당을 대라” 한즉, 대답하되 “나도 대지 못하겠다.” 하였다. 포교들이 더 두들기면서 대라 한즉 정신이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죽은 모양으로 있으니, 포졸이 할 수 없이 매를 놓고 그쳤다 ······ 야고보와 동생 마태오가 숨어 살 때 삼촌과 이 서방의 소식을 들은 즉 두 사람이 다 치명하였다고 하였다. 한편의 마음은 즐겁고 다른 한편의 마음은 슬프기 한량없었으나, 그것도 주님의 명이라 생각하고, 집안 온 식구가 공론하기를 ‘그 두 사람은 치명하였으니 남은 식구나 살아 보세’ 하였다······.
4. 이 화실
관변기록명 이장복(李長卜), 1866년 10월 옥사(?), 40세, 용인 삼베일 거주,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 관불산 태생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42번; ‘병인박해 치명 사적’ 권 1, p.53
본래 (공주시 유구읍에서 예산 신양면으로 넘어가는 차동고개 아래) 관불산(현 충남 공주시 유구면 녹천리 산 112의 옹기점 교우촌)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년(1866년) 10월에 廣州 포교에게 잡혀 廣州에서 치명하니, 나이는 40세였다.
5. 尹서방
1866년 11월 옥사(?), 45세, 이천 호법면 동산리 거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32번
윤 서방은 본래 이천 동산 밑(이천시 호법면 동산리) 살다가, 병인년(1866년) 풍파 때인 11월에 廣州 포교에게 잡혀 廣州로 가서 치명하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p.47
윤 서방은 본래 이천 동산 밑 살다가, 병인년 11월에 숙질 두 사람이 廣州 포교에게 잡혀 廣州로 갔는데, 그 조카는 석방되고, 윤 서방은 치명하였다.
6. 정은 바오로
관변기록명 정성재(鄭成才), 1866년 12월 8일 백지사, 63세, 이천 단내 거주, (갈매못성지 개발을 시작한 정규량 레오[1883-1952] 신부 증조부)
7. 정양묵 베드로
관변기록명 정원명(鄭原明), 1866년 12월 8일 백지사, 이천 거주, 정은(鄭溵, 바오로, 1804-1866)의 재종손(사촌 형제의 손자)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6번.
(정여삼) 바오로의 재종손이다. 베드로는 자원하여 그 재종조(할아버지의 종형제)와 함께 치명하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 160.
정(양묵) 베드로는 (정여삼) 바오로의 재종손이다. 저의 재종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관을 갖추어 가려 한 즉, 그 아내가 옷을 붙들고 간절히 만류함에 옷을 떨치며 이르기를, “재종조도 체포되셨거니와 이런 때를 당하여 예수의 표양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나가 자원으로 체포되었다. 바오로와 서로 권면하며 함께 치명한 사실도 전한다.
8. 오(吳) 안드레아
1866년 교수, 34세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8번
본래 양성 사람으로, 廣州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4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p.59-60
안드레아는 본래 양성 사람이었다. 부모의 교훈을 받아 성교 도리를 잘 배워 열심 수계하고, 농사로 생활하며 부모께 효도하였다. 병인년(1866년) 군난에 부모와 함께 피하였다가 잠깐 본 집에 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廣州 포교에게 잡혔다. ‘부친과 당을 대라’ 하며 혹형이 무수하였지만, 한 사람도 대지 아니하다가 혹형을 참지 못하고 유감을 입어 살 생각으로 굴복하였다. 그렇지만 본관으로 끌려가 (받은) 관장 문목(問目)에서는 이전의 뜻을 뉘우치고 죽기로 고복(告服)하여 설명하였다. 한 달 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교하여 죽으니, 나이는 34세였다.
9. 서(徐) 아우구스티노
관변기록명 서태순(徐泰淳), 1866년 2월(?) 장사, 38세, 경기도 廣州 양지 태생. (볼리외 신부 숙소 주인.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조여 요셉은 뫼룬리 자신의 집에 프랑스 선교사 볼리외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 ☞‘하느님의 종’ 이조여 요셉 참조)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9번
본래 양지 사람으로, 신부댁 주인하다가 廣州 포교에게 잡혀 매 맞아 치명하니, 나이는 38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p. 60-61
아우구스티노는 본래 경기 양지 사람이었다. 부모의 교훈을 받아 열심 수계하며, 산곡(山谷)에서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다. 廣州 땅에 살 때는 제집에 신부를 뫼셔 1년을 지냈고, 이웃 사람에게 타당히 수계하도록 권하였으며, 빈궁한 사람을 만나면 불쌍한 마음이 간절하여 많이 구제하여 힘입는 자가 많았다. 병인년(1866년) 군난에 신부는 먼저 경포에게 잡혔고, (아우구스티노는) 피하여 다른 동네에 가 있다가 廣州 포교에게 잡혔다. (포교들은) 신부댁 주인임을 알고 ‘혹 재물이 있는가’ 하여 죽이기로 결심하고 무거운 곤장을 때렸으나, 그는 이를 참아 받고 장폐(杖斃)하여 죽으니, 나이는 38세였다.
10. 이종여
관변기록명 이조여(李祖汝), 1866.2월(?) 장사, 24세, 진천 출생, 신부 숙소 주인.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조여 요셉은 뫼룬리 자신의 집에 프랑스 선교사 볼리외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 ☞ ‘하느님의 종’ 이조여(李祖汝) 요셉 참조)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0번
진천 사람이었다. 병인년(1866년)에 廣州 포교에게 잡혀 그 장인과 함께 매 맞아 치명하니, 나이는 24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 23, pp.61-62
종여는 본래 충청도 진천 사람이었다. 소년 시절에 문교하여 착실히 수계할 마음으로 처가로 들어갔으며, 열심 수계하고 본분을 지키며 날을 지냈다. 병인년 군난에 廣州 포교에게 온 동네 여러 교우가 함께 잡혔다. ‘책과 당을 대라’하였지만, (이종여는) 한 사람도 대지 아니하고, 본관 앞으로 가서 그 장인과 함께 장폐하여 죽으니, 나이는 24세였다.
11. 홍성국 요한
1867년 4월, 56세, 廣州 새말 거주, 양주 일담리 태생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1번
본래 양주 일담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으로, 廣州 정임 새말(지명 미상)에서 우거(寓居, 남의 집 살이)하다가 정묘(1867년) 4월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56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44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87쪽
홍 요한 성국은 본래 양주 일담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으로, 廣州 정임 새말에서 우거(寓居)하여 살다가 정묘 4월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56세였다.
12. 廣州부 옥사자 12명
1867년 1월 9일 이전 옥사
13. 廣州부 옥사자 4명
1868년 1월 4일 이전, 옥사
14. 이(李) 요한
1869년 2월, 50세, 순교형식 미상, 廣州 먹방리 거주, 포천 태생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77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87쪽
이 요한은 본래 포천에서 대대로 살던 사람으로, 廣州 먹방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기사년(1869년) 2월에 廣州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지. 그러나 치명일은 알지 못하며, 나이는 50세였다.
15. 이치재
1871년 9월 6일, 순교형식 미상, 40세, 廣州 새말 거주, 포천 솟다리 태생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2번
본래 포천 솟다리 사람으로, 廣州 정임 새말로 이사 가서 살다가 신미년(1871년) 9월 초6일(양력 10월 19일) 본읍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40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44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 p.144
이치재는 본래 포천 솟다리 사람으로, 廣州 정임 새말에 우거하여 살다가 신미년 9월 초6일 이정귀와 廣州 포교가 함께 와서 잡아 廣州에서 치명하니, 나이는 대략 40세였다.
16. 서(徐) 바오로
순교일자 ·형식 미상, 50세, 양지 정쇠 거주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108
서 바오로는 양지 정쇠(현 용인시 내사면 정수리) 사람이온데, 자원하여 廣州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며, 나이는 50세였습니다.
17.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
1845년 12월(혹은 1866년), 廣州 하우현 거주, 김선영 요셉(1898-1974) 신부 증조부. (김선영 요셉 신부는 만주에서 선교할 때 중국이 공산화하고 애국교회가 세워지자, 그 애국교회 가입을 거부하여 1951년 10월 9일에 체포되었다. 그 후 15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1966년 러시아 국경지 인룽허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8년간 강제노역과 투병 생활을 하였다. 1974년 2월 14일 77세에 수용소에서 선종하여 인근 야산에 죄수들과 함께 묻혔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와 역사’ 74호, 1981.10, p.쪽; 93호, 1983.3, p.5
하우현(下牛, 현 의왕시 청계동) 마을에 살던 김준원(아니체토)이 1845년 9월에 역시 廣州 포교에게 잡혀 그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치명하였다.
18. 김윤심(金允深) 베드로
족보명 김문집(金文集), 1868년 2월 15일, 68세, 廣州 구산 거주, 성 김성우 안토니오 아우
▶후손들의 증언자료
‘문(文)자 집(集)자’ 할아버지는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 옥에 계신 걸로 우리는 알고 있고, 그 ‘문자 집자’ 아드님이 ‘경(敬)자 희(熙)자’여요. 그리고 형님의 아드님, 맏형의 아드님, 그 사촌의 아드님, 이렇게 아들, 조카들이 병인박해 때에 붙잡혀 함께 있다가 순교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敎)자 익(翼)자’ 할아버지가요, 양가로는 안당(김성우 안토니오)이 할아버지이고, 친가로는 ‘문자 집자’가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병인군난 때 문자 집자 할아버지는 계속 옥에 계셨고, 그 아드님 ‘경자 희자’와 손자 ‘교자 익자’ 3대가 다 잡혀갔답니다. 같이 옥고를 치르는데, 형 집행하는 날이 닥쳐서 포교나 형리들이 우리 집안을 잘 안답니다. 근데,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한 날 한 장소에서 목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포교가 어린 손자 ‘교자 익자’의 등을 밀어제쳐서 순교를 못 했다. 이렇게 전해 옵니다. 그리고 ‘교자 익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참에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에 가책받으며 사시다가 돌아가셨답니다.
‘교자 익자’ 그 할아버지가 세 분의 유해를 사흘에 걸쳐 밤이면 몰래 한 사람씩 업어다 둘째 할머니네 마루 밑에 안치했다가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러니까, ‘교자 익자’ 그분의 직계만 시체를 모셔 왔지요. 당시 할아버지 ‘문자 집자’와 친아버지 ‘경자 희자’와 양아버지 ‘성 자 희 자’요.
19. 김성희(金聖熙) 암브로시오
1868년 2월 15일 순교형식 미상, 54세, 경기도 廣州 구산 거주, 聖 김성우 안토니오 외아들
▶후손들의 증언자료
1841년 부친인 김성우가 순교하자, 그 시체를 구산 가족 묘지에 안장하고,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한의학을 공부하여 약국을 경영하면서 약값이 없는 불우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였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족보에는 ‘약국 할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사촌 동생 차희. 경희. 윤희, 양자 교익과 함께 廣州 포교에게 잡혀 남한산성 감옥에 갇히었다. 관장은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는 굽히지 않고 옥에 갇혔다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53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20. 김차희(金次熙)
1868년 2월 15일 순교형식 미상, 40세, 경기도 廣州 구산 거주, ‘하느님의 종’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차남
21. 김경희(金敬熙)
1868년 2월 15일 순교형식 미상, 54세, 경지도 廣州 구산 거주, ‘하느님의 종; 김윤심 베드로 안칸타라 외아들
22. 김윤희(金允熙)
1868년 2월 15일 순교형식 미상, 35세, 경기도 廣州 구산 거주, ‘하느님의 종’ 김성희 암브로시오 6촌 형제
※ N.B. 이상 22명은 관찬자료인 ‘광영계록’에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아래 ‘홍색 명’은 교회자료에 나타난 순교자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1. 1867년 1월 9일 이전 廣州 留守府 옥사자 16명 : 서태순(徐泰淳), 이조여(李祖汝), 22″이학록(李學祿), 23″이정현(李正鉉), 24″엄쾌길(嚴快吉), 25″서상철(徐相哲), 26″이기좌(李奇佐), 27″권경보(權京甫), 김준원(金俊元), 28″오선장(吳善長), 29 김하상(金夏商), 정원명(鄭原明), 정성재(鄭成才), 30″한동원(韓東源), 31″이재금(李在琴), 32″한경조(韓敬祚)
2. 1868년 1월 4일 이전 廣州 留守府 옥사자 6명 : 이장복(李長卜), 정오복(鄭五卜), 33″윤재현(尹在鉉), 34″김상희(金尙喜), 35″송일지(宋一知), 36″송칠지(宋七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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