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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수리치 골 성지
도로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수리치골의 정확한 위치와 주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수리치골은 지금의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인 것으로 나타나 있고 특별히 다른 정확한 고증이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 성심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하권)에서 수리치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 후 다블뤼 안 주교가 쓴 편지에서는 성모 성심회가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는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일날에 성모 성심회의 교우들이 조선말로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고 상쾌하여,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 나라말로 성모를 찬미하고 죄인을 회두케 하시는 은혜를 갈구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인자하신 성모 마리아여, 많은 지방에 허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과 같이 우리 지방에도 베풀어 주실지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순교사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수리치골 교우촌과 성모 성지가 확인 개발되기까지는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를 설립한 정행만 신부의 특별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 수차례 답사를 통해 위치를 확인한 정 신부는 1986년부터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성직자들을 위한 성모성심 봉쇄수도원을 1990년에 완공하고 천주성삼상을 제막하였으며, 1993년에는 성모 칠고상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1997년 봉쇄수도원이 다른 곳으로 옮긴 후 현재 이곳에는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본원이 들어와 한국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뿌리를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수리치골, 둠벙이, 진밭, 황모실 - 감추어진 공소 · 본당의 중심지
성지 광장의 승리의 성모상.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이 회의 설립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교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입 교우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들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6-137면).
성지 입구. 왼쪽으로 가면 겟세마니 동산, 오른쪽으로 가면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본원이 있고, 표지석 뒤로는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광장이 있다.위의 기록을 볼 때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주일마다 신자 몇 명이 이곳에 와서 하느님의 어머니 성화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이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공주 - 유구 간 국도의 중간 지점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만 하며, 국사봉을 뒤로하고 있는 막다른 골짜기의 궁벽한 곳이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성모 성심 수도회'가 1984년에 정식 인가를 받은 뒤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한편 국사봉 너머 북쪽으로는 또 하나의 유서 깊은 교우촌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조평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수리치골에서 직접 갈 수가 없고, 유구 쪽에서 들어가야만 한다.
성모 성심회를 창립할 무렵에 다블뤼 신부는 주로 둠벙이를 거처로 삼고 있었는데, 1854년에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심한 뇌염에 걸린 쟝수(Jansou, 楊) 신부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쟝수 신부는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854년 6월 18일 둠벙이에서 선종하여 그 곳에 안장되었다. 또 그 무렵에는 '진밭' 교우촌(공주군 사곡면 신영리)도 공소로 설정되어 있었다.
1861년 이래 둠벙이에 새로 입국한 죠안느(Joanne, 吳) 신부가 거처하면서 이곳은 본당 중심지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병으로 1863년 4월 13일 둠벙이 교우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때마침 진밭에 거처하던 리델 신부는 그에게 성사를 주고 난 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였다.
부활 축일 전날 죠안느 신부가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종부 성사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 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한 갈망의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에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녁 7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리델 신부의 1863년 9월 9일자 서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 죠안느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은 둠벙이 마을의 동쪽 골짜기에 안장하였다.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 그 곳 산 중턱에 남아 있는데, 이름 없는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 몇 기가 그 아래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 둠벙이 교우촌과 같이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승격되고, 그 곳에 거처하던 선교사 2명이 선종한 또 하나의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신앙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합덕에서 덕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 마을 '황모실'(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이 그 곳이다. 이곳에서는 1858년에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1863년에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선종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30일 두 선교사의 유해가 합덕 성당 경내로 이장되면서 황모실은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적지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페레올 주교와 조선으로
라파엘호, 죽음의 폭풍우 헤치고 기적적으로 제주 표착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 11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8월 31일 상해에서 출항해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사진은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을 기념해 조성된 용수성지로 바다에 보이는 섬이 라파엘호가 표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귀도이다.
상해에서 출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조선 선교사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대건 신부와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상해에서 귀국길에 오른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 온 라파엘호의 수리도 모두 마무리됐다. 폭풍우를 만나 부러진 돛과 키는 새것으로 교체됐지만, 조선 배에 중국식 돛과 키를 단 라파엘호는 마치 한복 차림에 양복 윗도리를 걸친 양 볼썽사나웠다. 돛은 황포가 아니라 거적 여러 개를 엉성하게 꿰매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갑판도 없고, 닻이나 돛을 올리는 밧줄은 반쯤 썩은 풀로 만든 것이어서 벌써 버섯이 돋아 있었다. 배 바닥은 거적과 서로 전혀 맞물리지 않은 채 그냥 잇댄 널빤지들이 깔려 있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라파엘호를 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우리 목숨이 이 배에 달려 있다니”라며 기함을 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출항일을 1845년 8월 31일로 정했다. 프랑스는 1844년 10월 24일 청과 ‘황포조약’을 맺고 프랑스인의 치외법권과 안전 보장, 교회 설립 허가 등을 받았지만, 청에서의 선교 자유를 완전히 얻지 못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감시 대상이었다. 더욱이 상해에 불쑥 나타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는 삼엄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청 관헌들의 감시를 피해 상해를 몰래 빠져나갈 묘안을 짰다. 감시자들의 경계를 흩트리기 위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베시 주교가 생활하던 남경교구 주교관에 먼저 가 있고, 8월 마지막 밤에 김대건 신부 일행이 배를 몰고 이곳으로 와 선교사들을 태워 상해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1845년 8월 31일. 드디어 예정일이다. 해 그림자가 황포강에 길게 드리우는 저녁 무렵 라파엘호는 썰물에 실려 미끄러지듯 정박지를 빠져나왔다. 배는 양자강을 따라 조용히 주교관으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 작은 배 한 척이 보일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라파엘호의 뒤를 밟았다. 어선으로 위장한 감시선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미행을 간파했지만, 계획대로 배를 주교관 맞은편에 댔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 주교관으로 들어갔다.
베시 주교는 얼마 전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를 환대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에게 사목 방문 중에 아프지만 않았어도 자신도 사제 서품식에 참여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둘은 이미 친분이 있었다. 1842년 9월 세실 함장의 변심으로 뜻하지 않게 에리곤호에서 하선하게 된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그에게 신세를 진 바 있다. 이날 김대건 신부와 베시 주교의 짧은 회우는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밤 10시가 지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시 주교는 라파엘호가 있는 데까지 이들을 배웅했다. 서로 뜨겁게 포옹하고 짧은 기도와 축복 속에 이별을 고했다. 이들이 배에 오르자 라파엘호는 최대한 속도를 높였다. 날이 흐린 데다가 어두워져 라파엘호는 감시선을 쉽게 따돌렸다.
중국배의 예인으로 라파엘호는 다음 날 해 뜰 무렵 황포강 어귀에 도착해 중국 요동으로 가는 중국 배 옆에 몸을 숨겼다. 신자인 이 배의 선주는 라파엘호를 밧줄에 묶어 산동 앞바다까지 예인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배에는 프랑스 라자로회 몽골 선교사 페브르 신부가 타고 있었다.
9월 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페브르 신부가 있는 예인선에 올랐고, 김대건 신부는 조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출항했다. 8~9월 동중국해는 바람 방향이 남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바뀌는 때이다. 바다의 물흐름도 당연히 역풍의 영향을 받아 거칠어지고, 날씨도 바람 탓에 변덕이 심할 때이다. 두 배는 바다로 나아간 지 얼마 안 돼 폭풍우를 만나 오송으로 대피했다.
거친 파도로 배끼리 부딪히거나 항구 시설물에 받쳐 파손될 염려가 있어 조선 신자들은 라파엘호를 뭍으로 끌어 올린 다음 닻 2개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거센 파도는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닻줄을 끊고 라파엘호를 바다로 끌고 갔다. 떠내려가는 라파엘호를 본 영국 선원들이 소리를 치자 그제야 조선 신자들이 이를 알아채고 놀라 소스라쳤다. 파도가 너무 거세 바다로 뛰어들 수도 없었다. 신자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기도 덕분인지 라파엘호는 파도에 휩쓸려 수많은 배들 사이로 이리 쓸리고 저리 흘러도 단 한 번 부딪히지 않고 말짱했다. 한 참이 지나서야 겨우 조선 신자들은 라파엘호를 뭍으로 끌어 올려 다시 닻으로 고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라파엘호는 대여섯 차례 항해를 시도했으나 30, 40, 60㎞를 가는 동안 날씨가 계속 나빠져 상해 북쪽 숭명도 인근 작은 만에 다시 정박했다. 이곳에는 이미 100여 척의 배가 대피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곳에서 9월 17일까지 발이 묶였다. 그동안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는 다른 배의 중국인 신자 40여 명과 함께 네 명의 사제들이 각각 연이어 미사를 봉헌했다. 물론 조선인 신자 모두도 성체를 모셨다. 네 사제는 이날 아침 미사를 위해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다블뤼 신부는 이날을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보상받았다”고 회고했다.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조선 공동 교우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 대비해 고해성사 9월 18일 바다가 드디어 잠잠해졌다. 순풍도 불었다. 라파엘호는 예인선과 함께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라파엘호에 함께 탔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9월 21일 새벽 4시부터 풍랑이 일더니 집채만 한 높은 파도가 라파엘호의 돛을 갈랐다. 모두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배를 꽉 붙잡고 버텨야만 했다. 페레올 주교는 중국 배를 향해 “우리를 태워달라”고 소리쳤다. 위험을 감지한 예인선 선원들은 라파엘호 탑승자들을 구하기 위해 배를 가까이 대려 애를 썼다. 그때 갑자기 두 배를 묶고 있던 굵은 밧줄이 뚝 끊어졌다. 두 배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예인선은 배를 잇기 위해 세 차례나 라파엘호 가까이 와서 구명줄을 던졌으나 물살이 거세 조선 신자들은 그 밧줄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 배는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뱃사람 출신 신자들은 라파엘호 침몰을 막기 위해 두 돛대를 잘랐다. 얼마 안 가 키조차 파도에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또 한 번 라파엘호를 탄 신자들은 조난을 당했다.
“험한 바다에서 돛대도 없이 키도 없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물을 계속 퍼내야 하는 우리에겐 하느님에 대한 희망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 망망대해 가운데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다블뤼 신부의 앞의 편지 중에서) 김대건 신부 일행은 눈에 띄는 모든 배에 “우리를 산동까지 데려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들을 도우러 다가온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일행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죽음을 대비해 모두 고해성사를 했다.
바람따라 해류따라 도착한 곳 밤이 되자 마침내 폭풍우가 누그러졌다. 다음 날 아침에는 풍랑도 그쳤다. 신자들은 기운을 차려 자른 돛을 다시 세우고 키도 새로 만들었다. 하루 반이 걸렸다. 다행히 사흘간 날씨가 평온해 모든 게 정상화됐다.
9월 25일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약간 거셌지만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순풍이었다. 26일 밤 3시께 별빛 너머로 아슴푸레 섬 하나가 보였다. 섬을 발견한 이가 흥분해 모두를 깨우며 살았다고 외쳤다. 신자들은 모두 “한양에서 가까운 조선 땅”이라고 했다. 이 소리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즉시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서양 구두는 바다에 던져 버렸고 의심받을만한 모든 것을 배에서 치웠다.
그러나 바람은 라파엘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역풍이 다시 불어 라파엘호를 남쪽으로 떠밀어냈다. 속절없이 라파엘호는 물 흐르는 데로 실려가 작은 섬에 도착했다. 9월 28일 섬에 내려 주민들을 만나고 돌아온 한 신자는 “이곳이 제주도”라고 모두에게 알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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