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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성시조특집 원고
조선시대 파주 여성 문학
이동륜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조선조 사회에서 여성의 문학 활동은 더욱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부 상류층 여인이나 기생. 천민.무명씨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 국문학사의 실상이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고을에 불과했던 파주의 여성문학은 그 질質과 편수篇數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월등했던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첫째, 지리적 배경이다.
파주는 우리 국토의 허리부분에 위치하여 의주대로를 통한 남북육로교통은 물론 ,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로 흐르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당시 중국이나 서역을 통해 들어오는 문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파주였다.
둘째, 역사적 배경이다.
파주는 고려와 조선 양조의 약 1000여 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영항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다. 특히 고려 말과 조선 500년 동안 정치적 변혁기마다 많은 인물들이 부침을 거듭하며 파주를 근거지로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 조광조의 기묘사화는 성수침, 백인걸 등이 파주에 은거하며 후학 교육에 정진하는 계기가 되어 명실 공히 교육의 중심지가 파주였다.
셋째, 학문적 배경이다.
파주는 기호학畿湖學의 태동지로 당시 정치 문화 학문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율곡, 성혼을 비롯한 대학자들과 그 후학들의 문학작품이 우리 국문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파주 여성문학은 상류층인 신사임당과 영수각 서씨, 하류층인 기생이나 소실의 신분이었던 이옥봉, 홍랑 ,황진이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범위를 삼고자 하며, 가능한 문헌에 근거해 소개하려 한다,(무순)
임 그리워 自述
이옥봉李玉峰(조선 중기) .
요사이 당신은 어찌 지내십니까
달 밝은 창가에 저의 한이 깊어만 갑니다
만약에 꿈길에도 오가는 흔적 있다면
당신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랫길 되었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絲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이 시는 ‘몽혼夢魂’ 이란 제목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원 제목은 ‘자술自述’이다. 혼자 하는 ‘넋두리’ ‘한탄’ 이런 뜻이 아닐까요? 아무튼 이렇게 간절한 ‘사랑 시詩’를 받아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으나 결국은 쫓겨난 신세가 된 여인,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집 앞 돌길이 모랫길이 될 때까지 수 없이 오고 가다 마침내 절절한 사랑시를 온 몸에 감고 한강물에 투신한 가련한 여인 ,그녀가 바로 조선 선조 때 여인 이옥봉李玉峰이다. .
어느 날 시조시인 이종문 교수님의 전화를 받았다.
“파주에 승지 벼슬을 한 조원이란 사람의 묘가 있다는데 어디인지 아느냐?” 전화를 놓고 곧 바로 『파주시지』를 검색했으나 조원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다만 아들 조희일 손자 조석형의 묘가 파주 광탄면 용미리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산 어딘가에 조원의 유택도 있을 것이다.
그날부터 ‘파주향토사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조원이란 영감을 찾아 산속을 헤맸다. 때로는 행상으로 때로는 특정 종교 전도사로 오해를 받으며 이 마을 저 마을 가가 호호 방문하던 중, 마침 후손 한분을 만나 조원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아서 단정했을 그의 인품인양 잘 정돈 된 무덤가엔 산비비추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흰나비 노랑나비가 어지럽게 맴돌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무덤 앞에 음료수 한잔을 놓고 목례를 올렸다. 도도한 그 양반 거들떠나 볼까마는-, 그 때까지 조선의 여성시인 이옥봉을 울린 조원이란 영감이 파주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이종문 교수님께 보고하고 ,파주 지역신문에도 기사를 올렸다.
조원趙瑗(1544-1595)은 어떤 사람인가.
조원의 자는 백옥伯玉이요 호는 운강雲江이다.
7살에 사예 司藝 서엄이란 사람의 문하에서 글을 익혔으며, 1561년 조식曺植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조원을 처음 보고 “참 아름다운 선비다.”라고 칭송했다 한다. 1564년 진사시에 율곡 이이와 함께 장원급제하고 사간원정원, 괴산군수, 삼척군수, 성주군수,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익翊이며, 아버지는 황해도사공 응공應恭 인데 승지공 응관應寬의 양자로 입적했다. 조원의 집안은 대대로 서을 효곡孝谷,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서 살았는데 , 임천 조씨趙氏가문에서 쌍효자가 나서 유명하였기 때문에 ‘쌍효잣골’ ‘효잣골’로 불러온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쌍효자雙孝子란 조원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이 임진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남하하며 왜적으로부터 어머니를 구하고 죽었기 때문에 효자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지금도 이들이 살던 집터인 서울 경복고 교정에는 '운강대雲江臺'와 ‘효자유지孝子遺址’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이곳은 장안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옥봉은 어떤 사람인가
「해동역사인물고」에
이름은 이숙원李淑媛 호는 옥봉玉峰이다, 아버지는 선조 임금의 생부 덕흥 부원군의 후예로 옥천 군수를 역임한 이봉의 서녀이다. 옥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잘해 자라서는 서울로 올라 와 당시 문사로 이름을 떨쳤던 정철 ,유성룡 ,유희경 등과 수창酬唱하였는데, 그때 조원을 만나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부실副室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선비의 법도에 철저했던 조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조원의 장인 이준민 공이 나서서 두 사람을 맺어주려 하자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조원의 소실이 되었다.그러나 그들의 인연도 옥봉이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김으로써 끝이 났다.
이에 대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있는 글이다.
조원의 첩 이씨는 글을 잘 지었다. 하루는 파주 광탄에 있는 조원의 선산 산지기 아낙이 이씨를 찾아왔다. 그의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으니 파주 목사에게 소장을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에 옥봉이 그를 위하여 시 한수를 써 주어 풀려나게 된다.
「위인송원爲人訟寃」이란 시이다.
얼굴 씻고 세숫대야 거울삼고 洗面盆爲鏡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는구나 梳頭水作油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닐진대 妾身非織女
어찌 낭군이 견우가 되오리까 郎豈是牽牛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시어詩語는 견우牽牛이다. 견牽은 ‘끌 견’자이고, 우牛는 ‘소 우’ 즉 언뜻 직녀와 견우라는 하늘의 별을 소재로 놓은 듯하지만 이는 부부지간을 말하고 있다. 즉 아내인 내가 직녀織女가 아닌데 어찌 남편이 ‘견우牽牛’ 즉, ‘소를 끌고 가는 도둑’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견우’를 소 끌고 가는 도둑으로 묘사했으니 ,절묘한 비유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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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한편으로 산지기는 풀려났지만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조원이 왜 옥봉을 내쳤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조원의 인품과 행적으로 미루어 보건데 여자가 관청 일에 관여했던 일에 몹시 화가 났던 게 아니었을까?. 조원은 원래 품성이 단아하고 공명정대하여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니. 옥봉을 소실로 맞이할 때도 시詩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하니, 송사에 관여한 여인의 치맛바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리라. 하여튼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조원이 다시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가련한 여인 옥봉은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였다. 현재 옥봉의 시는 32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같이 조원에 대한 사랑과 이별의 정한情恨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음은 옥봉에 대한 문헌 기록이다.
「이옥봉사적」에
비록 쫓겨났어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단속해서 전란-임란-속의 어려움을 이기고 보전하여 마침내는 천하 사람이 아름답다 하였다. 그의 삶은 불행했으나 그의 죽음은 불후하였다.
허균의 「성수시화」에
나의 누님 허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指粉의 태가 없다. 조원의 첩 이 씨가 천고의 절창이다.
『가림세고嘉林世稿』에
1704년 후손 조경망은 조원, 조희일, 조석형 등 삼대의 시와 옥봉의 시 32편을 부록으로 엮어 『가림세고嘉林世稿』를 발행하였다. 이 책에는 서종태의 서문과 조정만의 발문跋文이 있다.
이러한 옥봉의 시 몇 편이 중국의『황명열조시집』에 수록 된 경위에 대하여 근래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다.
조선 인조 때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중국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중국의 원로대신이 “조선의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저의 부친입니다.”라고 대답하니,『황명열조시집』 한권을 서가에서 꺼내 보여주는데, 그 책 속에 옥봉의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연을 말해 주었다. “40여 년 전 중국 산동성 바닷가에 이상한 시신이 떠다녔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수 백 겹 종이로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인의 시신이었는데, 종이 안쪽에는 빽빽하게 시가 적혀 있고 ‘해동조선국조원첩이옥봉海東朝鮮國趙瑗妾李玉峰’이라 써 있었다. 시를 읽어보니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어서 중국여류시집 속에 넣었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이 같은 이야기는 다소 소설적 허구성이 가미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조원의 아들 조희일의 행적에 정식으로 중국 사신으로 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당시 옥봉은 혀균의 누이 허난설헌과 아주 절친한 관계로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친교를 맺고 살았다. 그런데 허균이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중국에 간일이 있고, 이때에 중국의 문인 오명제에게 『조선시선』 한권을 준 일이 있는데, 이 책에 옥봉의 시가 들어갔을 수 있고, 또 1606년 중국에서 주지번과 양유년이란 사람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이때 허균과 조원의 아들 조희일은 중국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함께 이들을 맞이한 일이 있다. 통상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영접사들이 의주까지 영접을 나가고 이들이 사신을 맞아 함께 한양으로 온다. 그때 경치 좋은 명승지에서 연회를 베풀고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환영하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옥봉과 허난설헌의 시가 사신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근래 대학교에서 이옥봉의 시가 교재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소설『나비야, 나비야- 저자. 은미희』가 출간 되었다.뮤지컬로도 공연 되었다.
이렇게 조원과 이옥봉의 삶과 문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2017년 봄 임천 조씨 종중에서는 조원의 묘역에 옥봉의 가묘를 조성하고 시비를 세웠다.
다음은 조원의 시이다.
강행江行
강가 어느 집 벽옥 난간에 江上誰家碧玉欄
봄 생각에 젖은 미인 눈썹에 시름겨워 美人春恨鎖眉端
머리 숙여 선골 낭군과 속삭이려는데 低頭欲共仙郞語
가벼운 배는 무정하게 여울을 떠나가네無賴輕舟下急湍)
조원 묘소 사진 넣을 것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75-15 )
번방곡飜方曲
최경창崔慶昌(1539-1583. 호-고죽孤竹)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보소서
(折楊柳寄與千里 人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妾身)
기생 홍랑이 쓴 시조를 받고 최경창이 한시로 의역한 시가 「번방곡飜方曲」이다.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 파주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연가戀歌 한편이 있으니 바로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이다. 원래 최경창은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송순, 기대승 등에게서 학문과 시를 익히고 1568년 과거에 급제하고 당시 이이, 송익필과 함께 8대 문장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573년 최경창이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인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해 가는 길에 홍원 기생 홍랑을 만나게 된다. 최경창에 대해 박세채가 쓴「최고죽시집후서」에 이런 글이 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호협하고 준매하였으며 풍채가 우뚝 솟아났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신선가운데 있는 사람을 보는 듯 황홀해 하였다.” 기생 홍랑 역시 용모도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시도 잘 짓고 음률에도 뛰어나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기생과 관리의 사랑은 순조로울 수 없었으며 거주지를 자유로 옮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최경창이 임기가 끝나 경성을 떠날 때 홍랑은 따라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으로 함흥까지 배웅하며 ,시조 한수를 써 주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준 가장 귀중한 선물이 사랑이라 말들을 한다. 그러나 얄궂은 하느님은 또 이별이란 아픔도 주었으니, 어느 시인은 말했던가? 이별 뒤에 사랑은 더욱 성숙한다고.
홍랑의 전송을 받으며 떠난 최경창이 임지에 도착하니 그곳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이선삼이란 사람이었다. 이선삼은 병약하여 군무를 수행하는데 소극적이었고 따라서 최경창의 부임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경창은 해이해진 군기를 바로잡고 군사를 훈련시키는데 앞장서 독려했다. 마침 양명곤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군대를 혁신하고 강하게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군대란 지취관의 지휘 능력에 따라 막강한 군대도 될 수 있고 허약한 군대도 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최경창의 인격과 능력에 감화 받은 군사들이 강력한 군대가 되어 있을 무렵, 오랫동안 잠잠했던 오랑캐들이 이웃 부령지방을 침공하여 많은 피해를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즉각적인 반격을 가하고자 상관인 이선삼에게 허락을 청했으나 그는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군대 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랑캐가 부령을 침공했다고 해서 우리 고을까지 온다는 법은 없지 않소. 전쟁이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이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병마절도사의 대답이 이러했다.
그러자 잇달아 들려오는 소식은 오랑캐들이 이미 지척까지 쳐들어 왔다고 아우성인데, 명령권자는 아무 대비도 없이 천하태평이니 최경창은 밤을 새워 고민을 했다.
“군령을 어겨서라도 오랑캐를 물리치자.” 비장한 결심을 하고 뜰에 나섰다. 하늘엔 수없는 별이 반짝이고 깊은 산 속의 군막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때 최경창은 멀리 남쪽 하늘을 우러러 임금님께 시 한수를 지어 바친다. 이튿날 새벽, 예하 군대를 이끌고 적진에 나가 혁혁한 전과를 세우니 적장 누루하치는 혼비백산 달아났으나, 아군의 전사자 역시 너무 많아 상심하고 있던 중, 설상가상으로 퇴각하던 적군을 추격하던 양명곤 장수가 전사한다. 최경창은 양명곤의 시체를 안고 흐느껴 울며 시 한 수 읊는다.
「과양조묘유감過楊照廟有感」이란 시이다
어두운 밤 횃불 들고 산을 밝히며 日暮雲中火照廟
오랑캐 녹루관에 쳐들어 갔네 單于已近鹿頭關
장군 혼자 오랑캐 천명을 휘몰아치고 將軍獨領千人去
강 건너간 그대는 오지 못 하네 夜渡蘆河戰未還)
이렇게 최경창은 오랑캐는 물리쳤지만 사랑하던 부하를 잃고 군령을 어겼다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1575년 벼슬이 바뀌어 한양으로 옮겨 오고 그 후 큰 병을 얻어 눕게 되자 ,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밤낮으로 일주일을 걸어 와 최경창을 문병하고 온갖 정성을 다 하는데, 이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최경창이 면직된다. 그 후 최경창은 파주 월롱 현재의 통일로 변 ‘다락고개’- 누현樓峴.혹은 자곡紫谷 -산장山庄에서 살게 되는데, 이 때 삼당三唐 시인의 한사람인 이달이 찾아 와 쓴 시가 있다.
「심최고죽파산장尋崔孤竹坡山庄」
-상략-
반가운 낯빛으로 마당 풀 위에 앉아怡然坐庭草
나를 위해 거문고를 뜯어주네爲我奏鳴琴
거문고 다하면 다시 헤어져야 하니琴盡卽還別
슬픔만 서러움만 가슴 가득 하여라恨恨恨彌襟 )
그 후 최경창은 경성절도사로 임명되어 막중한 국방의 책임을 지고 함경도로 떠나게 된다. 그곳은 우리나라 최북단으로 여진국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글자 그대로의 국경지대였다. 따라서 홍랑과 오랫동안 만날 수 없어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 최경창이 절도사 부임 2년 만에 철통같은 군대를 만들어 놓고 국방태세를 완비해 놓은 후, 성균관 직강의 벼슬, 즉 오늘날의 국립대학 교수로 제수되어 오던 중 자객의 칼에 죽으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의 비통함이 어떠했으랴. 그녀는 사랑하는 최경창의 무덤을 지키며 하얀 갈대꽃처럼 시들어 갔다. 그렇게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시도 읊으며 떠나간 임의 영혼을 위로하기 몇 년, 때마침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주를 거쳐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고 홍랑도 최경창의 시고詩稿를 가지고 난을 피해 떠나니, 그의 시들이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 후 홍랑은 “내 유해를 남편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
2000년 11월 4일자 조선일보에 한양대 정민교수가 조선 중기 학자인 남학명의 문집「회은집」에서 최경창과 홍랑에 관한 글을 찾아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守墓於坡州。壬癸之亂。負孤竹詩稿。得免軼於兵火。死仍葬孤竹墓下。有一子 -
살아서 그토록 사랑했던 최경창과 홍랑은 죽어서도 함께 있다. 원래 최경창의 묘는 파주 다락고개 아래 -현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으나, 이곳에 미군 부대가 들어오게 되자 교하 청석초등학교 옆 다율리로 이장하면서 홍랑의 묘도 마련했던 것이니, 그녀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산 해주 최 씨 문중의 아름다운 배려가 아니겠는가.
1981년 전국문인들이 시비를 세웠는데 전면에는 최경창의 시「번방곡」, 후면에는 홍랑의 ‘시조’가 새겨 있어 이들이 평범한 남녀의 애정을 넘어 시우詩友로 사랑했음을 기리고 있다.
(사진 넣을 것)홍랑 시조
대관령에서 친정집을 바라보며 踰大關嶺望親庭
신사임당 申師任堂신사임당(1504-1551)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떠나는 마음
이따금 머리 들어 고향을 보나
흰 구름 떠 있는 곳 저녁산만 푸르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坪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이름은 인선仁善, 사임당師任堂은 그 당호이다.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1504년 조선 연산군 때 신명화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강릉 바다의 풍부한 풍물을 접하고 자랐다. 비록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으나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심성이 곱고 착했으며, 특히 글 짓는 재주와 그림, 서예, 자수에 재능이 뛰어났다.
7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산수도山水圖, 포도도葡萄圖, 화조도花鳥圖에 뛰어나 그 유품들이 자운서원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수백 년 전 그림이 어쩌면 색채가 그렇게 선명할 수 있을까? 꽃 앞에 서면 꽃 향이 풀풀 날리는 듯, 새 그림 앞에 서면 새가 지저귀며 퍼덕이는 듯, 벌 나비 앞에 서면 벌이 날고 벌레가 꾸물거리는 듯 우리를 황홀하게 하니, 실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이에 대해 아들 이珥가 쓴 「선비행장」에 있는 글이다.
자당께서는 묵적墨迹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렸는데 지극히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으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慈堂平日墨迹異常. 自七歲時, 倣安堅所畵, 遂作山水圖極妙, 又畵葡萄. 皆世無能擬者. 所模屛簇, 盛傳于世.-
여성이 글공부하는 것도 배타시했던 당시에 그림공부까지 시켰던 신사임당의 부모 역시 자녀 교육의 선각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부모에 사임당이 있고, 사임당에 율곡 같은 아들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초충도草蟲圖나 화조도花鳥圖에 비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임당의 포도 그림은 지극히 드물다. 이 포도 그림은 현재 우리가 서용하고 있는 오만 원 권 지폐에 도안화되어 있다. 이 같은 사임당의 예술적 소질은 딸 이매창의 매화도梅花圖, 외손자 조영의 군산이우羣山二友圖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사임당은 열아홉 살 때 이원수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양반집 아들이었으며 집안이 곤궁하여 학문적으로는 신사임당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사임당은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의 학문적 성숙을 위해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한양으로 올라가 공부를 더 하도록 하고 자신은 강릉에 남아 친정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러한 내조의 덕으로 남편 이원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의 벼슬을 하게 된다. 사임당이 21세 때 한양으로 올라와 장남 준濬을 낳고 다시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파주, 강릉, 봉평 등으로 옮겨 살게 되는데, 이 때 율곡을 잉태한 곳이 강원도 봉평 -백옥포리白玉逋里 또는 판관대리判官臺里.라 하여 조선조 말 이곳 유생들의 소청으로 봉산재蓬山齎를 건립하여 재향을 모시고 있다.
다음 시는 사임당이 친정살이를 마치고 한양으로 갈 때 대관령에서 읊은 시이다.
산 첩첩 내 고향은 천리나 먼 길 千里家山萬疊峯
꿈에서나 생시에나 가고픈 마음 歸心長在夢魂中
한송정 호숫가에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 앞바다에 바람이 이네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위로 흩어졌다 모였다가 沙上白鷺恒聚散
고깃배는 파도위에 오고 또 가는데 波頭漁艇各西東
언제나 강릉 땅을 또 밟을까 何時重踏臨瀛路
색동옷을 입고서 바느질 하리 綵服斑衣膝下縫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야 어찌 동서고금에 다르랴. 영원을 통해 가장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이 모성애가 아닐까. 오늘 날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모든 여성의 선망의 대상인 신사임당은 한 시대를 가장 소중하게 살다 간 여인이었다.
사진-5만원권 신사임당 사진
박연폭포 朴淵瀑布
황진이黃眞伊 (1506-?)
한줄기 긴 하늘을 바위 끝에 뿜어내니폭포수 백길 물소리 우렁차구나.
나는 물줄기 거꾸로 쏟아져 은하수 되니 성난 폭포 달래는가 흰 무지개 환하다
( 一派長天噴壑壟 龍湫百水仞叢叢
飛泉倒瀉疑銀漢 , 怒瀑橫垂宛白虹 )후략-
파주 임진각 야외 공원에는 조선 중기의 기생 황진이의 가비歌碑가 있다. 박연폭포의 장관을 읊은 시이다. ‘박연폭포’는 개성 천마산 기슭에 있는 높이 37m , 너비 1.5m의 폭포로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황진이는 스스로 자신과 박연폭포. 서경덕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다.
그럼 일절 一絶 황진이는 어떤 여인인가
원래 황진이는 개성 서민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맹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506년에서 1560년대 까지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녀의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또는 진랑眞娘이라 했으며,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하여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특히 시.서.음.률詩書音律에도 뛰어나 당시 총각들은 물론 사대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연유에 대해서 조선 후기 김택영의 『소호당집 』 에 있는 이야기이다.
황진이가 15-6세시 옆집에 한 서생書生이 황진이의 미모에 매혹되어 상사병을 앓았다. 그러다가 병이 깊어 죽었는데, 장례식 날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진이가 자신의 옷을 관에 덮어주니 그때야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황진이는 기녀가 되었다. 자신은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松都三絶 중의 하나라며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사람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 해 줄 것과 관을 쓰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 달라" 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파주 장단 구정현口井峴- 입우물고개-(현재는 비무장지대)- 에 황진이의 무덤이 있다.
이절二絶 ‘박연폭포’는 얼마나 절경인가?
서거정의 『사가집』에
개성의 천마산 기슭에 있는 박연폭포는 옛날에 박 진사라는 사람이 이 폭포에 놀러 왔다가 못 위에서 피리를 불자, 용녀龍女가 이에 감동하여 그를 남편으로 삼았다 하여 박연폭포라 이름 했다 하며, 박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 폭포에서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여기고 슬피 울다가 자신도 폭포 아래 깊은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그 못 또한 고모담姑母潭이라고도 한다.
채수의 「유송도록遊松都錄」에
박연은 개성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두 산은 높다랗게 서로 대치하여 칼과 창을 꽂은 듯 바라보기에 그림과 같고, 산이 끊어져 형세가 막히자 급한 벽이 동떨어져 깎은 듯이 천 길이나 솟았다. 그 위에 석담石潭이 있어 물이 모여 못이 되었는데, 넓이는 수십 자나 되며 형상은 쇠괭이钁와 같고, 물빛은 맑고 푸르러서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으나, 그 밑바닥이 보일만한 한 복판에 돌이 우뚝 솟아서 수십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못물이 넘어서 폭포가 되어 절벽에 떨어지는데, 완연히 은하수가 거꾸로 걸린 것 같으며, 구슬을 뿜고 눈을 날리어 바위 골짝을 들썩이니, 소리가 성낸 우레와 같아서 해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다.
삼절三絶 서경덕은 어떤 사람인가?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1519년 현량과에 추천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국을 유람한 후 산림에 묻혀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개성 오관산 아래 화담 옆에서 살았으므로 ‘화담花潭’선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이기일원설理氣一元說을 체계화하였으며, 수학, 역학도 깊이 연구하였다. 황진이와의 관계에 대해 허균의『성옹지소록』에 있는 이야기이다.
황진이는 평생에 화담 서경덕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農墅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지족선사知足禪師가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다음은 서경덕의 시조이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넌들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좇아다니다 남 웃음 될까 하노라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요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긴가 하노라
이 밖에 황진이의 일화는 여러 문헌에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 그 중에서 다음 두 사람과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먼저 소세양과의 관계이다.
조선 중기 대제학을 역임한 소세양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성품이 깨끗하고 고매한 사람으로 시와 송설체 글씨를 잘 썼다. 임방의 『수촌만록』에 있는 이야기이다.
소세양이 매양 색에 미혹되는 인간은 사나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친구들에게 “송도의 황진이라는 기생이 재주와 인물이 더없이 좋다고 하나, 내가 그 여자와 30일간 동숙하고는 미련 없이 끊고 돌아 오겠다 .하루라도 더 머물면 너희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하고는 송도에 갔다. 황진이와 한 달 한정으로 사귀었다. 이별 전날 황진이가 써준 한시에 반해 “나는 사람이 아니다” 하며 더 머물렀다.
이 때 소세양과 작별하며 쓴 황진이 한시이다.
달 밝은 밤에 오동잎은 지는 데 月下梧桐盡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란 들국화 霜中野菊黃
다락은 높아서 하늘에 닿고 樓高天一尺
사람은 취해서 자꾸 마시네 人醉酒千觴
흐르는 물소리 거문고 소리 流水和琴冷
매화향기 피리소리 향기로운데 梅花入笛香
오늘 우리 헤어지면 언제 만나리 明朝相別後
그리움은 저 물처럼 끝이 없으리情與碧波長)
다음은 임제林悌와의 관계이다.
이덕형의 『송도기이』에 있는 글이다.
나주 사람 임제는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일찍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송도를 지나다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글을 지어 진이眞伊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글이 호방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외워지고 있다. 임제는 일찍이 문재文才가 있고 협기俠氣가 있으며 남을 깔보는 성질이 있으므로, 마침내 예법을 아는 선비들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이 겨우 정랑正郞에 이르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찍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애석한 일이다.
이 때 임제가 황진이 무덤 앞에 바친 시조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가고 백골만 누웠는고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황진이의 시는 한시 7수, 시조 6수가 전하는데 모두 절창이다.
특히 다음은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시조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사진 넣을 것)
황진이 가비( 파주 임진각)1982년 전국 국어국문학 시기비 건립 위원회
둥근 달을 바라보며 望月
영수각 서씨 令壽閣 徐氏 (1763-1823-)
둥근 달이 밝고 밝은데
저 달빛 예나 이제나 똑 같네
넓은 세상에 저 달 바라보면서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리
(亭亭新月最分明 一片金光萬古情
無限世界今夜望 百年憂樂幾人情)
영수각 서씨는 조선 후기 여성시인이다. 그냥 여성시인이 아니라 남편 홍인모와 아들 석주, 길주 .현주 딸 원주까지 온 가족이 다 시를 쓴 시인가족이다. 이는 우리 국문학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이다. 그럼 영수각 서씨와 파주는 어떤 연관이 있기에 ‘파주여성 시인’이라 하는가? 큰 아들 홍석주가 쓴 「선비묘지명」에 의하면, 자당의 묘지가 ‘장단부남오리공덕지원長湍府南五里功德之原’ 종중묘역에 있다 하였다. 현재의 장단 비무장지대 남쪽 민통선지역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단은 파주의 행정관할 지역이기 때문에 파주여성 시인으로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수각 서씨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서형수와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흡의 증손녀인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자질이 뛰어나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특히 시를 좋아하여 늘 도연명의 「전원으로 돌아가리歸田園」를 암송하였다 . 이를 본 외할머니는 “여자가 너무 글을 잘하면 팔자가 안 좋은데” 하며 걱정을 했다 한다. 그녀는 비록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입은 옷이 헐렁할 정도로 허약했지만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일이나 웃어른을 모시는 일에 소흘함이 없었다. 14세에 홍인모와 결혼하여 5남매를 낳아 키우며 살림살이 10여년이 넘어서야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꽃 피우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홍인모가 읊은 시율에 대구對句하는 것을 보고 부인의 재질에 놀라 이수而壽인 자신의 호와 맞추어 영수각令壽閣이란 호를 선물하였다. 이들 부부는 아들 딸 등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시를 짓고 토론하는 모임을 자주 가지며 , 장차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자녀들을 위해 경전이나 격언 등을 들려주었는데, 활민活民 즉,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정치가 정도라고 가르쳤으며 무릇 공직자란 검소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일렀다.. 한편, 영수각 서씨는 당시 남성들도 접하기 어려운 개평방開平方 방정식, 삼각형 등 난해한 수학 공식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가르쳤는데,. 이에 대해 홍석주가 쓴 「선비가장先妣家狀」에 있는 글이다.
어머니는 수학을 잘 하시어 「주학계몽」에 나오는 나눗셈, 분수계산, 가감법 등을 쉽게 계산해 내었는데. 훗날 중국의 「수리정온數理精薀」이란 책과 비교해 보니 그 이론이 똑같았다.唯頗好籌數。甞閱籌學啓蒙。見其平分約分與正負句股和較之𧗱曰。若是其煩且晦耶。卽自爲法以籌之。後得中國人所纂數理精蘊。
이처럼 뛰어난 시인이자 수학자인 영수각 서씨의 시와 산문은 남편 『족수당집』 부록에 192편이 전한다.
다음은 이들 가족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가능한 파주와 연관된 시를 찾아보았다.
남편 홍인모洪仁模(1755~1812)는 호가 족수당足睡堂이다. 정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홍낙성의 아들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평양서윤,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세도가문 혜경궁 홍씨의 친척임에도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학문과 시 짓기를 즐기며 경사와 제자백가, 음양과 병법에 통달하였다.
진서문루에 올라 登鎭西門樓
저물녘 다락에 오르는데 성곽에 햇살이 반짝인다 向晩登臨碧。 斜暉照片城。
산봉우리 줄지어 솟고 누각 밖에는 푸른 강줄기樽邊衆山出。 樓外一江平
꽃그늘에 말을 매니 새소리가 시를 읊는 듯하고 繫馬移花影。 吟詩緩鳥聲。
가까운 논과 들 색은 곳곳이 햇보리 빛이로구나 最憐田野色。 處處麥初生
진서문鎭西門은 『대동지지大東地志』 에
‘임진 臨津의 남안南岸에 있으며 영조 41년에 별장別將 연강緣江을 설치하고 관성關城을 쌓았는데, 좌우의 길이가 133보이며 진서문鎭西門이라고 불렀다.’ 파주에서 장단으로 가려면 진서문을 통과하여 암짐도臨津渡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지금은 군사시설이 있어 접근이 통제되고 있다.
장남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호가 연천(淵泉이다 , 1795년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하고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사옹원직장을 제수 받았다. 1807년에는 이조참의 양관대제학을 거쳐 좌의정 벼슬을 했으며, 항상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모든 일에 겸손하였다. 특히 도학가적인 문학론을 전개해 “심외무부心外無父요 도외무심道外無心”이라 주장하였는데 ,그 뜻은 ‘글文’이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어서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써도 읽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즉 글은 마음의 거울이다’ 라는 말이다.. .
장단 가는 길 長湍道中
성했다 쇠했다 옛 고을 가는 길은 가는 곳마다 가난한 마을浮沉城市久 到處怯崎嶇
돌길은 높았다 낮았다 인가의 연기도 오르다가 말다가 石逕頻高下 人煙遞有無。
저무는 산모퉁이 돌아가니 홀연히 봄 강물의 외진 마을纔廻暮山口 忽在春江隅
겹겹이 험한 곳 거치지 않고 어찌 평탄한 길만 있으리오 不歷重重險 何由得坦途)。
장단長湍은 홍석주의 부모 선산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조상들에게 성묘하러 가며 마음을 새로이 다짐하는 시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사는 일이 설사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참고 견디고 노력하면 반듯이 아름다운 길이 나온다는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시이다.
차남 홍길주 洪吉周 (1786- 1841)는 호가 항해沆瀣이다. 정조 때의 문장가이자 경학자이다. 180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삼국지연의』를 읽는 법이나 대인관계에 필요한 예의 등에 관한 글을 비롯하여 박지원 ,이익 등 당대 실학자들에 대한 평까지 다양한 글을 남겼다.
우물에 떨어진 나뭇잎石井落槐
조용히 앉아 푸른 홰나무를 바라보니坐愛綠槐樹
맑고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 같구나淸佳勝賞花
우물 난간에 떨어지는 꽃 쓸어내지 말라井欄君莫掃
가을 단풍이 떨어져 쌓여질터이니 秋葉落來多
홍현주(洪顯周 (1793년~1865년)는 호가 해거재海居齋 또는 약헌約軒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조의 서녀 숙선옹주와 결혼하여 영명위永明尉가 되었다.
1830년 초의선사가 스승 완호의 삼여탑三如塔에 새길 명문銘文을 받기 위해 홍현주를 만났는데, 이때 초의에게 다도茶道에 대해 물었고 그 대답으로 쓴 시가 저 유명한 「동다송東茶」이다. 이들이 만난 곳이 동대문 밖 청량산방淸凉山房인데 이 때 초의선사가 오기를 기다리며 쓴 시이다.
초의선사草衣禪師-상략-
가마 타고 성 동쪽으로 가는데籃輿出東城 한참 가다가 솔숲으로 들어왔네.行行入松樹솔밭을 지나 또 솔밭 길을 가니松間復松間 아담한 암자 한 채가 있는데瀟灑置菴固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고待人人不來 하늘 끝에 나는 하얀 백로 한 마리 天末飛白鷺
2010년 홍현주와 숙선옹주의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으로 옮겼는데,
비석에는 형 석주가 쓴 『해고시집』 서문이 새겨져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밝도록 잠들지 못하고
두 분 어버이를 생각하라 하였고
또 다시 말하기를
일찍 일어나 학문을 닦고 늦게 자면서
너의 태어남을 욕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아아 ,우리 형제가
마땅히 머리 숙이고 부지런히 서로 북돋아 주고
힘써야 하는 바가 여기에 있지 아니 한가
여기에 있는 것이로다. -번역 須何堂홍기원-
석주,길주 현주 삼형제의 글을 모아 만든 책이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이다.
(사진 넣을 것)
홍현주와 숙선옹주의 묘(고양시 성석동) 풍산 홍씨 모당파 종중 글에서 옮김
다음 딸 홍원주洪原周(1791-?)는 호가 유한당幽閑堂이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청정하여 친정부모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여인으로서의 부덕과 규범 등을 읊은 시가 많다. 심의석과 결혼하여 양자를 잘 키웠으며 죽은 뒤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경기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매화梅花
천리 먼 집 가고픈 마음은 매화 때문이네千里歸心一樹梅
지금 쯤 담장 달빛아래 홀로 피어 있겠지墻頭月下獨先開
해마다 봄비는 누구를 위해 내리는지幾年春雨爲誰好
밤마다 담장에 핀 매화꽃 꿈속에서 보네 夜夜隴頭入夢來)
참고문헌
한국고전번역원 OB. 한국학중앙연구원OB. 한국여류시선-조두현. 한국국문학자료사전. 한국의 한시-허경진 . 가림세고 . 파주시지. 한국한시-김달진. 1997.7.17 한겨레신문 박은봉 역사 연구가 기고문 ). 풍산 홍씨 모당공파 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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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 연구하시는 학자 이동륜 고문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파주에는 참 인재가 많은데 이렇게 발굴ㅠ해 내심에 빛을 발하게 되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