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뜻을 위하여! 누가복음 22장 39-46절/김병삼목사 “39. 그분께서 나아가사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매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더니 40. 그분께서 그곳에 계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41. 그들에게서 물러나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가사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더라. 44.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분의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45.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자기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슬픔에 지쳐 잠든 것을 보시고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자느냐?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22:39-46 KJV) ◈ 1. 그 산으로 가자!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나누어 볼 ‘산(山)’ 들의 이야기는, 삶의 현장을 떠나, 그 산에 가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펴 볼 7개의 산들은 모두가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인 사건들이 과거의 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산(山)’을 향해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홍 목사가 쓴 [하나님이 내시는 길]에 보면, 신대륙을 발견했던 콜럼버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콜럼버스와 선원들 중에 육지로부터 3백 마일이상 떨어진 대양으로 항해를 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이 밟고 있던 땅을 출발해, 자신이 출발했던 곳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산으로 가자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과거와 작별을 하고 미래로 나아가자 는 선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8년전 여러분들과 함께 올라갔던 산들을 ‘다시’ 올라가려고 합니다. 물론 설교의 내용들이 조금 다르겠지만 동일한 산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것이라면 다시 반복하고 기억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기억되어야 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너무 단편적으로 본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홍해를 가르고 그 바다를 건넌 일에 열광하지만 홍해를 건넌 후에 다시 바다가 합쳐졌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닫으시므로 이스라엘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승부를 보아야 합니다. 순종하며 가나안 땅으로 가든지, 불순종하며 광야에서 죽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그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인생의 승부를 거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그 만남의 장소로 인해 우리 인생에서 결단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산’ 이야기를 하면서 ‘홍해’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한홍 목사의 글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홍해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길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가장 큰 문제 속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기회인지 모른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 을 믿고 순종하여 우리의 두려움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산. 비록 높지 않은 올리브 산이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중 올라야했던 가장 높고 힘겨운 산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사명을 지고, 방법과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올라가셨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고 씨름해야 했던 곳이 바로 ‘올리브 산’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길이 보이지 않고, 씨름하지 않고는, 처절하게 기도하지 않고는 해결이 되지 않는 삶의 순간과 인생의 산이 있지 않을까요? 길이 보이지 않는 곳, 그래서 너무 답답해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곳 말입니다. 그곳이 바로 올리브 산입니다. 벌써 수년이 지나가면서 잊어져 가는 일이 되었나요? 아프카니스탄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순교했던 일,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지탄 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일들 말입니다. 배형규 목사의 장례식에서 송정미 사모(師母)가 자청해서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 품 안에서 영광스럽게 안겨있을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아니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많은 역사 속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헌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고 살았던 사람들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실 때, 그 분은 외로우셨습니다. 때로 무섭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향해 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사명의 산에 오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면서, 인생에서 넘어야 하는 산을 하나하나 넘어 가려고 합니다. 송정미 찬양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할일 힘이 들고 낙심될 때, 주저앉고 싶을 때, 아무리 치열해도 기뻐하라 고난당할수록, 기뻐하라 싸움 치열할 수록-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낙원에 이르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들이나 지옥에 가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행한 자들이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산’에 오르며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 특히 하나님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 하지만 그 뜻을 따라 오른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있다면 ‘낙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게 품에 안겨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차례로 하나님의 뜻에 오르는 산을 하나하나 정복하며 우리 의 믿음을 키워가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결정의 순간, 여러분들의 뜻을 꺾는 순간이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산에 오르기 위해 많은 준비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코 그 산이 정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지나며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기에 만족할 수 없는 산이고, 하지만 그 산을 하나하나 오를 때 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인생의 사막 가운데서 만나는 그 산들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르는 만족감과 기쁨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 번째 산 올리브 산(הר הזיתים) (감람甘藍)산에 오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올리브산과 겟세마네 동산이 조금 혼동되어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올리브산은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산으로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은 이곳에서 당신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1장12절에 보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승천하신 곳이 바로 올리브 산입니다. 올리브 산은 4km에 걸쳐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39. 그분께서 나아가사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매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던 올리브 산의 봉우리 중에 하나가 겟세마네로 불리는 곳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도 그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은,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장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산,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겟세마네’동산의 뜻은 “기름을 쥐어짜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전신을 쥐어짜듯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기도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사명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Victor Frankle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협을 견뎌냈던 사람입니다. 그가 경험한 수용소에서는 생명의 의미를 손상시키거나 생명을 해하는 한 방법으로 고의적으로 의미 없는 일을 맡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무 목적 없이 이쪽 방향에서 저쪽 방향으로 하염없이 흙을 옮기는 것같은 일말입니다. 일이 힘든 것보다 의미 없는 고통이 사람을 견딜 수 없이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왜’가 주어지는 한 어떤 종류의 ‘어떻게’도 극복할 수 있다.” 오늘 여러분들이 몸을 쥐어짜며 ‘왜’를 발견한다면, ‘어떻게’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이 잡힐 것이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고통과 시련이 아 니라, 목적과 방향입니다. ◈2. 뜻을 위하여 죽는 곳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죽어야할 이유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멋지게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과정이 그렇게 쉽지 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는 육체적인 만족과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만족 사이에는 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분이 트위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올려놓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입니다. 1. 과음 과식하면서 위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우리는 수없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말씀에 나와 있는 ‘잔’ 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축복’의 잔 (시 16:5)으로, ‘승리’의 잔 (시 23:5)이라는 긍정적인 뜻을 지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분노와 진노, 책임과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셨을 때, 여기에서는 순교와 십자가의 형벌을 의미하지요.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셔야 하는 잔이 있습니다. 때로는 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거운 책임과 죽음의 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잔을 내가 원해서 질 수만 있으면, 내가 선택하는 대로만질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잔과 하나님이 주시는 잔이 일치하지 않을 때, 신앙적인 고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지요. 아니 신앙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해야 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면 너무나 가혹한 것 입니다. 명예로운 죽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굳이 흉악범들이 지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같은 죽음이라도 한 번에 고통이 끝날 수 있으면 좋은데, 긴 시간을 십자가에서 인내하며 참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마셔야 하는 잔이지만, 피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올리브 산은 예수님께서 이 갈등을 안고 올라 가셨던 산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을 오르면서 함께 사역하며 데리고 다니던 제자들과 함께 가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뇌하며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45.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자기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슬픔에 지쳐 잠든 것을 보시고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자느냐?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45-46절)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잔은 누구도 같이 져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과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는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자리에 같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누군가 조언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따라 결단하고 움직이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저는 당혹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잔을 놓고 저에게 상담을 요 청하는 경우들입니다. 때로는 제 뜻을 묻는 경우들입니다. 물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다른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잔임을 아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 영광’ 때문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몇 년전 여름, 단동에서 샘 의료선교 팀들을 위해 집회를 인도하며 저 자신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박세록 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거기에 와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은 모두가 자비량입니다. 한 나라의 국립대학에서 의학을 가르치던 사람도, 삼성이라는 걸출한 기업에서 사장단에 일하던 사람도, 미국에 수백만 달러가 넘는 집을 놔두고 그 땅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노고를 누구도 잘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며 목숨을 걸고 돕기를 원하는 북한 사람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으러 오셨습니다.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로 오셨습니다. 기록된 대로 사셨고 기록된 대로 죄 값을 갚으셨고 기록된 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다 나와 상관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역사로 기록된 사실과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시간 성경의 모든 기록이 나와 상관이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