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후 22세의 나이로 어머니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수행
⊙ 1998년 4월 대구 보궐선거 당선으로 정치권 입문, 천막당사 지켰던 ‘선거의 여왕’…
경선 두 번 도전 끝에 대통령 당선
⊙ 경제민주화·복지·일자리 확대 등 대선공약 경제에 집중
⊙ 배신에 민감, 측근은 ‘親朴 신주류’·멘토와 가신그룹 등 방사형으로 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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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31일에 찍은 박근혜 당선자의 어린 시절 사진. 박 당선자와 동생 근령, 지만씨(오른쪽부터) 남매가 눈이 쌓인 청와대 뒤뜰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놀고 있다. |
2006년 5월 20일,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신촌에서 지방선거 유세를 하던 중 피습을 당했다. 커터에 오른쪽 뺨이 11cm 가량 찢어지는 큰 사고였다. 그때의 상황은 박 당선자의 18대 대선 광고에도 등장했다. 박 당선자가 오른쪽 얼굴을 연신 움켜쥐는 장면에 그가 직접 녹음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날 입은 상처는 저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남은 인생 국민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상처’. 박 당선자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다. 많은 국민이 박 당선자를 ‘비운의 퍼스트레이디’로 기억한다.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 피살 이후 22살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다 5년 뒤에는 아버지마저 총탄에 잃었다. 청와대에서 보낸 15년, 은둔 생활, 정치계 입문과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박 당선자가 지나온 삶의 궤적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라 할 만하다.
박근혜가 살아온 길
전차로 통학하던 평범한 여중생
박근혜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첫딸로 출생했다. 두 살 무렵, 군인 박정희의 가족은 서울로 상경해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의 셋집을 거쳐 1958년 신당동의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했다. 박 당선자는 1958년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 시절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좋아했던 책은 삼국지, 좋아한 등장인물은 조자룡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2년 뒤인 1963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아버지를 따라 그의 가족은 청와대에서 살게 된다. 이때부터 박 당선자는 ‘큰 영애(令愛)’로 불리게 된다. 육영수 여사는 청와대에서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염려하여 그와 동생 근령을 신당동의 외할머니 댁에 잠시 맡기기도 했다. 검소한 육 여사의 방침은 박 당선자가 청와대에서 생활할 때에도 바뀌지 않았다. 점심 도시락 반찬도 보리가 섞인 잡곡밥에 감자조림, 계란말이나 깍두기 정도로 또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육 여사는 딸이 또래와 같이 평범하게 학창 시절을 보내기를 희망했기에 박 당선자는 자가용 없이 용산에 있던 학교(성심여중·고)와 청와대를 오갔다. 중학교 2학년의 박근혜는 통학 길을 오가는 전차를 탔다. 대통령의 딸이 전차를 이용한다는 소문은 이미 전차 차장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성심여중 배지를 본 차장이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너희 학교에 대통령의 딸이 다닌다면서?”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라고 물었지만 그는 “글쎄요.” “잘하나 봐요”라며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성심여중과 성심여고를 거치는 동안 그의 성적은 늘 1등이었다. 어머니는 사학과에 가기를 원했지만 그는 “산업사회의 역군이 되고 싶다”는 포부로 1970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다. 4년간 평균 학점은 4.0점 만점에 3.82점이었다.
미혼인 그는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선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배를 좋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빈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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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가족들이 고 육영수 여사 묘소에서 분향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 전 대통령 빙모, 지만씨, 박근혜 당선자, 박 전 대통령, 근령씨, 육인수 의원.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을 향해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첫 번째 총탄은 대통령을 비켜 갔고 이어 날아온 두 번째 총탄은 대통령이 아닌 영부인을 맞혔다. 이날 저녁 7시, 육영수 여사는 일본 여권을 지닌 간첩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으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때 박 당선자는 고국이 아닌 프랑스에 있었다. 교수가 되겠다는 꿈으로 떠난 유학길이었다. 급히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우연히 알았다. 가판대의 신문을 보니 ‘Madam Park, Assassinated’(육 여사 암살되다)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회상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그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년 11월 10일자 일기 중)
그는 22살의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피살 사건 후 단 엿새 만에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어머니를 대신해 참석한다. 그는 이 시절을 두고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기록했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청와대에 날아오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하고 잠이 들었다. 그는 6년간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외국 사절을 만날 때 수행했고 전국 각지의 학교를 돌며 새마을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였다. 카터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과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의 인권 문제를 놓고 갈등했다. 이때 박근혜는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인권 문제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몸이 아픈 사람이 조깅을 하면 오히려 건강이 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경제발전에 주력해야 하는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주한미군 철수는 예정에 없던 일이 되었다. 로잘린 카터는 이후 매체 인터뷰를 통해 박 당선자와 나눈 대화를 남편에게 전달해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10·26, 다시 비극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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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자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6년 8월 30일 어머니배구대회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
고교 생활기록부에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것이 흠>, <지나친 신중성 때문에 과묵한 편>이라는 평가가 적혀 있다. 박 당선자의 사촌오빠 박재홍(朴在鴻) 전 국회의원은 7년 전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성격에 대해 “내색을 잘 안하는 성격이다. 강하다. 설사 그 순간 감정을 못 추스르더라도 얼굴을 금방 바꾸어서 내색을 안 한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비슷하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김계준 비서실장에게 아버지의 피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입을 뗀 그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시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옷깃을 걷어 보았더니 온 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의사는 이를 두고 “갑작스런 충격에 피가 몰려 생긴 현상”이라고 했다.
1979년 11월 27일, 박 당선자는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그의 청와대 시절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그때부터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10·26 후부터 1998년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박 당선자의 행보를 두고 흔히 ‘은둔 생활’, ‘칩거’ 등의 단어로 일컫는다. 그러나 그는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영남대나 육영재단, 경로복지원 운영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철학과 종교에 관한 많은 책을 탐독하며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열반이란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라고 한다.>(1981년 5월 31일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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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27일 박근혜 당선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16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고 있다. |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절하가 여론의 물길을 탔다. 그는 “때로는 고문받는 느낌이었고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10·26 뒤 공화당 정치인들이 유신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며 배신감을 느꼈다.
<유신 시절에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들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자신이 진실로 나쁜 체제라고 생각했다면 왜 그때 자리를 물러나지는 않았었는가를 묻고 싶어요. 그렇게 판단력이 시대에 따라 변질되고 흐린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공직을 맡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여성동아》 1989년 1월호)
박 당선자는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였다. 부모님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부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조국의 등불> <사랑의 등불>, 책 《겨레의 지도자》를 제작했다. 1989년 10월 26일, 6년간 열리지 못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무려 15만명에 이르는 참배객이 찾아왔다. 그는 일기에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찾기 힘들었다. 분양하고 내려오는데 장군 묘소까지 빽빽이 들어선 추모 인파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최태민 목사가 그의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의혹을 받으며 동생 근령과 육영재단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그는 동생에게 이사장직을 위임하며 물러났다. 이 기간 동안 다시 외부 활동을 중단한 채 두 권의 수필집을 펴냈다. 1995년에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았다가 2005년 물러났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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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3일, 전날 있었던 대구 달성 지역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당선자가 달성군 화원읍에서 유권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1997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박 당선자에게도 IMF 사태는 충격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처럼 어이없이 무너지나 하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해 12월 10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8년 4·2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를 ‘달성대첩’이라고 불렀다. 선거 전날까지도 모든 방송과 신문에서 20% 이상 차이로 진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 당선자는 내리 4선에 성공한다.
2002년 이회창 총재 1인지배체제에 대응하며 각을 세웠다. 그는 정치개혁의 방안으로 집단지도체제, 국민참여경선 실시 등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왕따가 되더라도 신념은 지키겠다”는 말을 남기며 2월 탈당을 결행,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나라를 위해 이회창 후보를 다시 한 번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며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2004년 봄, 박 당선자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의 대표로 취임해 구원투수가 됐다. 그는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천막을 세우고 개혁과 쇄신 의지를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로 ‘천막 당사’를 단행했다. 기존 당사 건물의 현판까지 떼어 가져왔다.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겠다”고 호소했다. 그 결과 2004년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으며 기사회생했다.
2004년 총선 이후 ‘위기에 강하다’는 평가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에서 얼굴이 찢기는 피습 사건을 당해 대수술을 한 후, 병실에서 눈을 뜬 그가 가장 먼저 “대전은요?”라고 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피습 당시 대전시장 후보 지지유세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지지층을 단결시켜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2006년 6월 대표직을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재·보선 등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여당 대표 8명을 갈아치웠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는 동안 박 당선자가 수첩을 들고 각종 공식석상에 나서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었다. 2004년 말, 4대 법안 협상을 위해 4당 대표가 모여 협의를 할 때 그의 손엔 수첩이 들려 있었다. 그는 수첩에 중요한 사안을 꼼꼼히 기록한 것을 참고해 발언했다. 그리고 협상이 어려운 마지노선을 지켰다. 이후 여당은 “박근혜는 협상이 불가능한 ‘공포의 수첩’을 들고 다니며, 수첩에 적힌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공격했다. ‘수첩 공주’라는 별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별명이 싫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는 자신의 수첩을 두고 ‘소신의 수첩’, ‘원칙의 수첩’이라고 하며 “내 수첩의 주된 용도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두 번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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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4일 박근혜 당선자와 당직자들이 당현판을 떼어내 임시 천막당사로 옮기고 있다. |
2007년 8월, 박 당선자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2000여 표 차이로 패배했지만 그는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2008년 총선 공천에서 김무성(金武星) 의원 등 그의 측근들, 이른바 ‘친박’이 대거 낙천된 후 박 당선자는 이명박 정부와 대립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의 인기를 업고 친박연대라는 정당이 만들어져 14석을 얻기도 했다.
2009년 그는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원칙을 사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정부와 선을 그었고, 이는 한나라당 내 친박과 친이의 격한 대립으로 외부에 비쳤다. 그러던 중 2011년 10월엔 한나라당이 ‘친이’ 후보(나경원 전 의원)를 내세웠다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패배한 이후 ‘박근혜가 당을 구원할 유일한 인재’라는 당내 여론이 일었다. 같은 해 그는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이미지 변신을 단행한다. 그리고 2012년 총선 공천을 거치면서 박 당선자는 새누리당이 사실상 ‘박근혜 오너 정당’이라 불릴 만큼 자신의 입지를 완벽히 굳힌다.
마침내 2012년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이 치러졌고 박 당선자는 김문수·김태호·임태희·안상수 등 다른 후보들을 83.97%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누르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대선 기간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MBC와 부산일보의 정수장학회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발언한 녹취를 발단으로 정수장학회 논란이 이슈가 됐고, 대선 레이스 막판에는 국정원 여직원 선거운동 논란과 신천지(종교) 연루설 등 야당의 네거티브 공세가 있었지만 박 당선자는 이겨 냈다.
박근혜의 친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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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21일, 박근혜 당선자가 5・31 지방선거 직전에 피습당한 이후 처음으로 얼굴 상처 부위에 붙였던 반창고를 떼고 당 의원총회에 참석했다. 오른쪽 뺨에 흉터가 선명하다. |
18대 대선을 2주일 남짓 앞두고 미국의 주간지 《타임(TIME)》 아시아판 표지에 박근혜 당시 후보의 얼굴이 실렸다. 표지의 영문 제목은 ‘The Strongman's Daughter’였다. ‘Strongman’이란 우리말로 ‘독재자’, ‘철권 통치자’라는 뜻을 지닌다. 새누리당은 ‘강력한 지도자’로 번역했다.
‘독재자’와 ‘강력한 지도자’ 사이. 영문 제목의 오역은 차치하고서라도 두 명칭의 간극은 한국 국민이 박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과도 같다. 그에 대한 평가는 박 당선자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의 60년 삶은 한국의 현대 정치사와 함께 흘렀다. 《타임》은 <박근혜의 정치적 족보는 축복만큼이나 저주다>라고 했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가족은 거대한 친인척 관계와 복잡한 대소사에 얽혀 있다. 박 당선자 역시 인터뷰에서 “나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름이 나와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에게 부모와 가족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아버지 박정희에게 정치 수업
1961년 5월 15일 월요일, 오후 10시경. 육군 제2군 소장 박정희는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설 준비를 하며 권총을 챙기고 있었다. 이때 아내로부터 “근혜 숙제 좀 봐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어린 박근혜는 방바닥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박 소장은 딸의 숙제를 굽어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근령, 지만 두 아이를 살펴본 다음 집을 나섰다. 이튿날 아침 라디오에서는 ‘쿠데타 성공’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아버지에 대해 <가족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분>이라고 썼다. 1979년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간 이후, 80년대를 지나오며 그는 추도식 추진, 영화 제작, 인터뷰 등 여러 대외 활동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비방과 잘못된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아버지의 생(生)은 곧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큼 큰 기둥이다.
재임 시절, 박 전 대통령은 어린 자식들에게 가끔 “너희가 만약 어느 정부 부처의 장관이라면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지 말해 보거라”라는 질문을 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박 당선자는 자연스레 공직에서의 감각을 익혔다. 퍼스트레이디 시절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정치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딸과 정치 현안에 대한 기사를 읽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큰딸이 지도자로서의 재능과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70년대의 경제발전을 주도한 인물이다. 수출주도 공업 전략과 도로건설,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빠른 경제발전을 꾀했다. 반면 유신헌법 제정, 인혁당 사건 등 민주화 원칙에 어긋나는 독재 정권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선 레이스 기간 중 박 당선자는 과거사와 관련해 ‘5·16은 4·19의 정신을 계승한 것’,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 등의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가 이사장을 지냈던 정수장학회는 최필립 이사장의 녹취록과 함께 ‘장물’이라는 야권의 공격을 받으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 당선자는 아버지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1990년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책 《겨레의 지도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과일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나무를 보면서 저 열매들은 혼자 잘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저렇게 탐스러운 결실을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듣기에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그는 자서전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청와대를 떠나 정치인이 되기 전까지 문화유적 답사를 하는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그의 뒤를 따라오며 말을 건넸다. “난 자네가 누군지 알아. 돌아가신 육 여사님을 똑 닮았네. 그 양반이 좋은 일도 많이 했지. 남들은 까마귀 고기 먹은 것처럼 다 잊어도 나는 못 잊네. 이 깡촌에 전기 넣어 준 사람이 자네 아버지 맞지?”
성실을 가르친 어머니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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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9월에 찍은 박근혜 당선자의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생 지만, 근령, 육영수 여사, 뒷줄 박 당선자. |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고쳐야 할 단점은 일기장뿐 아니라 수첩에 따로 적어 둔다. 이런 습관을 들이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컸다.>
박 당선자가 자서전에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교육방침이 어떠했는지를 밝힌 내용이다. ‘수첩 공주’라 불리는 그의 습관은 이때부터 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당동 사저에 있을 때부터 육 여사는 자식들이 낮에는 마음껏 뛰어놀게 했지만 밤에는 일기를 쓰며 하루를 돌이켜 보고 반성하게 했다.
육 여사는 ‘청와대의 귀’가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청와대 야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71년, 식생활 개선을 목표로 전국에서 모인 3000여 명의 주부들과 결의해 혼·분식을 제도화하는 행정조치와 분식품에 대한 과세율 인하 등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보냈다. 박 당선자는 어머니가 생전 중요시했던 화두를 ‘성실’로 꼽았다. 어린 박근혜의 기억 속 어머니가 있던 집무실의 불빛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새벽녘에 어머니 침대에 가 보면 언제나 이불이 말끔히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육 여사는 특히 봉사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나병 환자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 병에 걸린 마을 사람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을 위해 목욕탕 건립기금을 보냈다. 1966년 패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을 위해 ‘사랑의 열매’ 운동을 추진하며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배지를 직접 달아 주기도 했다. 1970년 어린이회관을 건립하는 등 어린이들을 돕는 데에도 힘썼다. 과학관, 예술부 등 어린이들의 놀이터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의 모습을 두고 “올바름, 지혜, 성실성을 자신의 마음에 담고 이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행하신 어머니”라고 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사는 제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두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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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4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박지만씨 결혼식. 왼쪽부터 박근혜 당선자, 지만씨, 신부 서향희씨. 박 당선자 왼쪽이 동생 근령씨다. |
<근령이는 예술감각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안이 있었다. 나는 첫째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면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자랐지만 근령이는 좀 더 창조적인 아이였고, 그만큼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박 당선자가 자서전에서 여동생 박근령씨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부분이다.
그런데 자매는 1990년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인다. 근령씨를 지지하는 측은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해 전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당선자는 “어머니가 생전에 세워 놓으신 어린이회관이 자매 사이에 분란을 낳은 것처럼 비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기에 동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밝혔다. 후에 근령씨는 2001년 성동교육청으로부터 이사취임승인 취소 처분을 받았다.
삼남매 중 둘째인 근령씨는 1982년 류찬우 풍산그룹 창업주의 아들 류청 씨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열네 살 연하인 신동욱 전 백석문화대 교수와 재혼했다. 신 전 교수는 2009년 5월 인터넷을 통해 박 당선인을 비방하는 글을 퍼뜨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 당선자 삼남매 중 막내인 지만씨는 현재 철·에너지 생산기업인 EG 회장이다. 박 당선자는 지만씨가 2004년 결혼해 낳은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세현 군에 대해 “불러줄 자장가를 연습했다”고 할 정도로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만씨는 1989년 코카인 흡입 혐의로 처음 불구속 입건된 이래, 2002년에도 마약을 흡입한 사실이 적발되어 총 6차례의 전과를 남겼다.
박 당선자는 근령씨의 이혼과 지만씨의 마약 상습 복용 문제를 두고 어느 측근에게 “부모 두 분을 다 총탄에 잃은 상황에서 방황하는 내 동생들이 어떻게 보면 정상적이고, 오히려 내가 비정상적인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화려한 친인척들… 사촌 이내만 50명
5남2녀 중 막내인 박 전 대통령과 1남3녀 중 셋째인 육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박 당선자는 친가와 외가에 걸쳐 사촌 이내 친척만 50명이 넘는다. 친가 쪽에는 박 당선자의 사촌 오빠이자 4선 국회의원을 지낸 박재홍 전(前) 민자당 의원이 있다. 박준홍(朴埈鴻) 전 대한축구협회 회장 또한 박 당선자와 사촌지간이다. 박준홍씨의 누나 박영옥씨는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의 부인이다. 박 당선자와 친인척 관계로도 잘 알려진 방송인 은지원씨는 박 당선자의 고모 박귀희씨의 손자다.
외가에서는 육인수(陸寅修) 전 의원(6~9대)이 박 당선자의 외삼촌이다. 어머니 육 여사의 오빠인 육 전 의원은 6~10대 국회에서 내리 5선을 지낸 국회의원 출신이다. 육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陸寅順) 혜원학원 설립자는 남편 홍순일씨와의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는데, 사위들의 이력을 주목해 볼 만하다. 맏사위는 농수산부 장관 출신인 장덕진 전 의원, 둘째 사위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 셋째 사위는 유연상 전 영남대재단 이사장, 넷째 사위는 경수종합금융 회장을 지낸 정영삼 한국민속촌 회장, 막내사위는 대한선주협회장을 지낸 윤석민 전 의원이다.
공약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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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6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 6층 회의실에서 서병수 사무총장,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 권영세 상황실장(왼쪽부터) 이 대선후보 3차 TV토론을 시청하고 있다. |
새누리당 대선공약을 총괄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2012년) 10월 말 공약을 완결해 박근혜 후보에게 제시했지만 박 후보가 공약을 일일이 따져 가며 실현 가능성 여부를 검토했고, 공약발표가 늦어졌다”고 말했다. 또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공약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당선자는 2012년 12월 10일 398쪽의 공약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를 내놓고 ‘국민행복 10대 공약’을 공개했다. 공약집은 20대 분야 201개 정책으로 구성됐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당선자는 국민통합, 정치쇄신, 일자리와 경제민주화, 중산층 재건을 4대 국정지표로 삼았다.
경제민주화로 성장동력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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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2012년 12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당선자의 ‘중산층 70% 재건 프로젝트’를 실현할 정책공약집을 발표하고 있다. |
10대 공약에서는 ‘중산층 70% 재건 프로젝트’라는 구호 아래 ▲가계부담 덜기 ▲확실한 국가책임 보육 ▲교육비 걱정 덜기 ▲창조경제를 통해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일자리 늘리기 ▲근로자의 일자리 지키기 ▲국민안심프로젝트 추진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의 경제민주화 ▲지역균형발전과 대탕평 인사 등이 주요 내용이다.
박 당선자 측은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부문 간 격차가 확대되고, 성장잠재력을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모든 경제주체들이 상생을 목표로 한 ‘경제민주화’ 정책 추진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무엇보다 그의 경제민주화 공약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대기업의 불공정행위 근절이다. 박 당선자는 “대기업집단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되, 잘못된 점은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그 방안으로 순환출자금지 등의 직접적인 규제보다는 공정거래의 원칙을 준수하도록 이끄는 방향을 선택했다.
박 당선자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침은 대기업의 순환출자구조에 대해 ‘신규’만 규제하고 기존의 것은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개혁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기존 순환출자는 허용하면서 불법행위에 대해 사후 제재를 가하는 것을 두고 “재벌의 불합리한 구조를 개혁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박 당선자는 “합법적으로 인정되던 과거의 의결권까지 제한한다면 기업이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며 “경영권 방어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쓰도록 하는 게 국민경제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금산분리에 대해서는 산업자본의 은행자본 보유한도를 축소하고, 금융·보험회사 보유 비금융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상한을 단독금융회사 기준으로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5%까지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대기업집단의 불법행위와 사익편취행위를 근절하는 방안으로는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형량을 강화하고, 사면권 행사를 제한하며, 부당내부거래를 강력히 금지하는 동시에 부당이익은 환수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원활한 공정거래를 목표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 고발권 폐지 시행을 약속했다. 또한 비지배주주들이 독립적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 다중대표소송제도 등의 방침을 내놓았다.
복지, 의료비와 교육비 지원이 핵심
박 당선자의 주요 복지 공약은 의료비 지원,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등 근래 화두가 되었던 의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4대 중증질환(암, 심장병, 중풍, 난치병) 의료비 100% 국가부담, 만 5세까지 국가 무상보육 및 무상유아교육 시행, 고등학교 무상교육, 셋째 자녀 등록금 지원을 포함한 대학등록금 부담 절감 등이 핵심이다.
박 당선자 측은 현재 75% 수준인 4대 중증질환의 보장률을 비급여 부분을 포함해 오는 2016년까지 100%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2013년 85%, 2014년 90%, 2015년 95%로 확대하는 점진적 개선방안이다. 새누리당은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국가 중 27위로, 환자가 내는 본인부담 금액이 선진국에 비해 높은 수준”이라고 설명하며 “특히 중증질환은 환자가 전액 부담해야 하는 건강보험 비급여가 많다”고 지적했다.
노인층을 대상으로 한 의료비 지원 범위도 넓힌다. 65세 이상 노인층을 대상으로 임플란트 건강보험을 단계적으로 적용하고, 노인층의 간병비용을 지원하는 ‘사회공헌활동 기부은행’ 설립, 장기요양등급 4등급과 5등급 신설을 통한 독거노인 지원, 노인장기요양보험에 치매환자 우선 편입 등의 방안을 약속했다.
박 당선자는 보육 공약으로 ‘국가완전책임제’를 내놓았다. 만 5세의 아이까지 국가가 무상보육과 무상유아교육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0~2세 영아에 대한 보육료를 국가가 전액 지원할 뿐만 아니라 양육수당 증액, 양육유형의 선택권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3~5세 아이에게는 누리과정 지원 비용을 확대하며, 중·저소득계층에게는 방과 후 교육 비용을 추가로 차등 지원한다. 여기에 매년 50개씩 국공립 어린이집을 세우고, 100개씩 기존 운영시설을 국공립으로 전환한다.
교육 공약에서는 고등학교 무상교육 공약이 눈에 띈다. 박 당선자는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해 왔다”며 매년 점진적으로 지원을 확대하여 2017년에는 전면 고교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외에 <공교육정상화촉진특별법>을 제정해 각종 학교와 대학 입시에서 교육과정을 넘어선 문제 출제를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무상교육을 선언한 보육, 고교교육 분야와는 달리 대학 등록금은 소득에 연계해 차등 지원한다. 소득 하위 80%까지 ‘소득 연계 맞춤형 국가장학금’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액 지원부터 최소 25% 지원까지 실질적인 반값 등록금을 실현한다는 구상이다. 다만 다자녀 가정의 교육비 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침 아래 셋째 아이의 대학등록금은 전액 국가에서 부담한다.
스마트뉴딜 등 새로운 경제모델 제시
박 당선자는 경제회복을 위해 ‘창조경제론’을 새로운 경제모델로 제시했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T)을 기반으로 첨단산업 일자리를 대규모로 창출한다는 ‘스마트 뉴딜’을 구상하고 있다. 박 당선자 측은 “기존 제조업 중심의 전통산업은 ‘고용 없는 성장’ 추세에 따라 일자리 창출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과학기술과 IT의 육성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당선자는 농업, 제조업 등 기존 전통산업에 정보통신기술이 포함된 과학기술을 융합하고, 서비스업에도 이를 적용·융합하여 새로운 서비스와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 육성에 관한 국정운영을 전담하는 ‘미래창조과학부’를 신설하고, 국가연구개발 투자를 2017년까지 5% 확대한다. 과학기술인연금 재원 확충, 비정규직 문제 제고, 육아 출산으로 경력 단절이 발생하는 여성과학자에 대한 지원 등 과학기술인들의 처우도 개선할 방침이다.
이외에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기획사’ 설립 ▲능력중심 사회를 위한 ‘직무능력평가제’ 도입 ▲해외인력채용 데이터베이스 구축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청년 일자리 확대 ▲공공부문 청년층 일자리 확대 ▲고용안정 및 정리해고 요건 강화 ▲최저임금 인상 등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방안에 포함되었다.
IT 산업 육성으로 고용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두고 실효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나온다. 기술집약적인 IT 산업의 특성상 고용창출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서는 2010년 IT 분야의 순이익이 국내 기업 전체 순이익의 약 15%를 차지하는 반면 고용의 비중은 2.2%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박근혜의 파워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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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자가 2012년 11월 6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정치쇄신안을 발표하고 있는 가운데 안대희 정치쇄신위원장이 배석했다. |
<배신하는 사람의 벌은 다른 것보다 자기 마음 안에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점, 그래서 한 번 배신을 함으로써 배신을 하지 않으려는 저항감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 그럼으로써 두 번째 세 번째 배신이 수월해진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1981년 9월 30일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박 당선자의 용인술은 그가 중요시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쉽게 사람을 믿지 않으나 한 번 신뢰관계를 공고히 다진 사람은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의 측근들도 의리와 충성심이 강하기로 알려져 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박근혜 당선자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도 좀체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안정의 리더십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며 “아버지에게 보고 배운 이런 면이 그의 최대 장점이며,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이를 유지하고 극대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선 레이스에서도 수년째 함께해 온 기존의 지지세력, 즉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캠프의 인사들이 대거 일을 도왔다. 그의 보좌진 4명은 그가 정치계에 입문했을 시기부터 14년간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특정 인물을 밀어 주거나 2인자를 만들지 않는 박 당선자의 리더십 스타일 때문에 캠프 인사들은 방사형(放射形)으로 포진해 있다.
친박 중에서도 ‘신주류’가 대세
박근혜 당선자의 주변인은 ‘친박’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맞붙으면서 새누리당은 ‘친이(親이명박)’와 ‘친박(親박근혜)’으로 갈렸고, 이명박 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되기 전까지 두 세력의 대립은 계속돼 왔다.
특히 2008년 총선 공천, 2010년 4월 세종시 수정안 투표 등을 거치며 친이와 친박은 극렬하게 대립했다. 대표적인 친박 의원으로는 홍사덕 김무성 이경재 허태열 서병수 이성헌 이혜훈 구상찬 이정현 김선동 유정복(劉正福) 이학재(李鶴宰) 유승민 의원(18대 기준)이 있었다.
그러나 2011년 12월 박 당선자가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새누리당을 박 당선자가 완전히 주도하게 됐고, 당 지도부는 황우여 대표와 이한구 원내대표, 서병수 사무총장에 이르기까지 친박으로 구성됐다. 이때부터 사실상 새누리당은 ‘친박’이라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박근혜 정당’이 됐고, 친이의 선봉에 섰던 일부 의원들만이 ‘비박(非朴)’으로 존재하는 정도였다.
2012년 10월 출범한 중앙선거대책위원회도 물론 기존 친박세력 중심으로 꾸려졌다.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과 권영세(權寧世) 종합상황실장, 유정복 직능본부장, 홍문종(洪文鐘) 조직본부장, 이학재 비서실장, 이상일(李相逸) 대변인은 모두 친박이다. 김무성 본부장은 PK(부산·경남)의 좌장 격으로 2007년 박근혜 경선 캠프의 핵심이었으나 현 정권 들어 박 당선자와 관계가 틀어진 바 있다. 그러나 2012년 4월 총선에서 김무성 본부장은 지역구를 내놓고 백의종군하며 새누리당을 지원했고, 2012년 대선에서는 선대위 총괄본부장으로 박 당선자를 도왔다.
김무성·홍사덕 의원 등 중진급 의원을 제외한 친박의 핵심으로는 최경환(崔炅煥) 의원이 꼽힌다. 한때 “친박계의 모든 것은 최경환으로 통한다” 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박 당선자의 영향력 있는 복심(腹心)으로 평가된다. 경선 직후 후보자 비서실장을 맡았으나 “친박 일색인 인적 구성을 쇄신하라”는 여론에 밀려 중도에 사퇴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로 분류되고 있고, 이른바 ‘최경환계’로 불리는 신주류의 힘이 확고해졌다. 선대위에서 활동한 유정복 직능본부장, 이학재 비서실장, 이정현 공보단장, 윤상현 수행단장 등이 그들이다.
박근혜의 멘토와 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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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자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왼쪽)가 2012년 12월 16일 밤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열린 대선 후보 3차 TV 토론회에서 토론 시작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박근혜 당선자가 정책 자문을 구해 온 참모 그룹의 핵심 인사들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시절의 인연에서 출발했다. 이른바 ‘5인 공부모임’으로 불리는 김광두(金廣斗) 힘찬경제추진단장, 신세돈(申世敦) 숙명여대 교수, 김영세(金泳世) 연세대 교수, 안종범(安鍾範) 의원, 최외출(崔外出) 기획조정특보가 그들이다. 박 당선자는 2007년 무렵부터 이들과 분야별 정책과 현안에 대해 스터디를 하고 의견을 청취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돈 교수는 박 당선자가 1998년 국회의원이 될 때부터 정책 조언을 해 왔고, 김영세 교수는 친박 인사인 이혜훈 전 의원의 남편이다. 김광두 단장은 2007년 당시 박 당선자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며 법질서는 세우기)를 입안한 인물이다. 최외출 교수 또한 한국미래연합 대표 시절부터 박 당선자의 정책 자문에 응해 온 인물로,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두터운 인맥 관계를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2010년 12월 ‘국가미래연구원’을 출범시키며 명실상부한 ‘박근혜 싱크탱크’로 일해 왔다. 2011년 말 박 당선자가 비대위원장으로 선출되자 잠시 모임을 중단했지만, 비대위원장직을 내려놓자 공부모임을 다시 시작했고 박근혜 당선자에게 조언을 해 왔다.
외곽 조직으로는 국민희망포럼과 청산회가 대표적이다. 친박 진영의 최대 외곽조직으로 알려진 ‘국민희망포럼’도 50만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성헌(李性憲) 전 의원 주도로 생겨난 국민희망포럼은 전국에 16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서울지역 25개구, 경기지역 30개 시군에 모두 조직이 구성돼 있다. 청산회는 서청원(徐淸源)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표 시절 만든 산악회 모임으로, 2007년 경선을 계기로 친박 외곽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전국 회원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또한 박 당선자가 중용하거나 수시로 만나 조언을 듣는 그룹에는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인사가 많았다. 김용환(金龍煥)·김용갑(金容甲) 새누리당 상임고문, 강창희(姜昌熙) 국회의장, 최병렬(崔秉烈) 전 한나라당대표, 안병훈(安秉勳) 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기춘(金淇春) 전 법무부 장관, 현경대(玄敬大) 전 의원 등이 모인 ‘7인회’가 그들이다. 그러나 유신체제 인사에 5공화국 하나회 출신 등 자문그룹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박 당선자의 ‘가신그룹’으로 분류되는 이재만 전 보좌관, 안봉근 전 비서관, 정호성 전 비서관은 박 당선자의 용인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들이다. 이들은 1998년 정계에 입문하던 시절부터 보좌진으로 활동해 왔다. 이 전 보좌관은 정책, 정 전 비서관은 메시지, 안봉근 비서관은 수행을 맡아 활동했다. 2012년 12월 교통사고로 숨진 고 이춘상 비서관도 이들과 함께 ‘4인방’으로 분류되는 핵심 보좌진이었던 인물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70년대 아버지 시대의 경험이 작용한 탓인지, 참모형보단 자신이 편하고 믿을 수 있는 비서형 인재를 가까이에 두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외부 영입파, 비박, 원로… 보수진영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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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자가 2012년 12월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광장 유세에서 유권자들의 손을 잡으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박 당선자가 직접 영입한 인사들도 대선 캠프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인(金鍾仁)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안대희(安大熙)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1987년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은 김종인 전 보건사회부 장관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김 위원장은 경제민주화 부문의 정책개발을 주도하며 새누리당 측이 경제민주화 의제를 선점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지만, 박 당선자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다소 멀어졌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국민검사’로 떠오른 안대희 전 대법관도 경선 직후 영입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 밖에 김성주(金聖株) 공동선대위원장, 한광옥(韓光玉) 국민대통합위수석부위원장도 비중 있는 영입파 인사들이다.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비교적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영입돼 박 당선자를 도왔고, ‘동교동계’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遺志)인 동서화합을 위해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고 밝혔었다.
이준석 전 비대위원, 손수조 당 미래세대위원장, 청년특보 김상민 위원은 2012년 4월 총선을 통해 박 당선자로부터 많은 영향과 지원을 받은 이른바 ‘박근혜 키즈(kids)’로 분류된다.
비박근혜계 인사들도 캠프에 참여해 정권재창출을 도왔다. 김무성 전 원내대표는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기용되면서 안형환·조해진 의원, 박선규 전 청와대 대변인, 정옥임 전 의원 등 비박 인사를 대거 캠프에 투입했다. 박 당선자와 갈등 관계였던 정몽준, 이재오 의원도 박 당선자 지지에 합류했다. 대선 레이스가 격화되면서 박 당선자를 지원하는 보수 진영이 총 결집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 이인제 의원 등이 박 당선자 지지를 선언했다.
문화계 인사들의 박 당선자 지지 행보도 이뤄졌다. 특히 김지하 시인이 박 당선자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화제를 불러 모았다. 김지하 시인은 ‘타는 목마름으로’ 등으로 70년대 민주화를 이끄는 시대정신의 역할을 했던 작가이기에 그의 이러한 지지 선언은 눈길을 끌었다.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유명 격투기 선수인 최홍만, 개그맨 심현섭, 재미 방송인 자니윤, 전 야구 감독 백인천, 탤런트 최불암·이순재·선우용녀, 가수 설운도·주현미씨 등이 박 당선자 지지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