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문학관 뉴스레터 제 6호 (2019년 7월)
2019년은 신동엽 시인이 작고한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에 이르렀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가 치열하게 떨쳐내고자 했던 껍데기들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신동엽 시인의 시정신이 현재진행형인 이유입니다.
50주기를 맞이하여 신동엽기념사업회, 신동엽학회 그리고 신동엽문학관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신동엽문학기행을 개최하고, 다섯 번째 시비가 건립된 6월을 중심으로 소식을 공유합니다.
다음 뉴스레터는 9월에 발간됩니다. 신동엽 50주기 공식 기념식이자 매년 개최되는 문학제가 펼쳐지는 9월 28일과 29일 이후 발송될 예정입니다.
신동엽의 서울시대: 신동엽의 자취를 따라 걷다
지난6월15일 아침10시. 하루쯤 늦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토요일 오전. 성신여대입구역 근처 한 골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한국전쟁 직후 신동엽 시인이 단국대에서 공부를 하며 소위 “알바”를 했던 책방이 있던 자리입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하려고 준비 중이던 인병선 여사가 즐겨 찾던 책방이기도 합니다. 신동엽과 인병선, 두 사람은 여기서 만나 평생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됩니다. 토요일 이른 아침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신동엽학회가 기획한 <신동엽의 서울시대 - 서울지역문학기행> 참가자들이었습니다.
이번 기행은 한국전쟁 후 신동엽 시인이 인병선 여사와 만난 장소 (성신여대입구역 7번 출구 인근)에서 출발하여 신동엽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 가족이 지냈던 장모님네 집터 (동소문로26다길), 결혼 직후 잠시 거주했던 개울가 집터 근방 (성북구청 앞), 신동엽 시인이 숨을 거둔 성북동 옛집 (성북구 동선동 5가 45번지), 시 <종로오가>의 배경인 종로5가 (세운상가), 신동엽 시인이 8년간 근무한 명성여자고등학교 터 (종로구 관수동 102번지), 시집 <아사녀> 출판기념회를 했던 부근 (반도호텔 부근) 등으로 이어지며 신동엽의 삶과 문학의 행적을 쫓아 진행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행선지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록이나 기억을 토대로 옛 장소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착하는 장소마다 유족과 문인, 전문가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시인의 시를 함께 낭송하며 시인을 “소환”,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시인의 모습을 꼭 닮은 장남 신좌섭 교수(위 사진 오른쪽)와 시인으로 분하여 기행을 이끌어 준 배우 김중기 씨(위 사진 왼쪽)의 노력으로 오로지 기억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시인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른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35명이 이번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긴 시간동안 진행 되었지만 8살 남짓의 어린 참가자도 끝까지 씩씩하게 함께 했습니다. 6월 1일부터 참가자 신청을 받았는데 순식간에 최대 참가자 수에 도달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행사에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중간 중간 버스로 이동해야 했기에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유가족 대표 신좌섭 교수 외에도 시인의 친구인 원로 평론가 구중서 선생을 비롯하여 신동엽학회 회장 정우영 시인과 신동엽 전문가 김응교 교수, 맹문재 교수, 제20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자 최종천 시인 등이 참여하여 각각의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가족과 함께 지낸 성북동 옛집 앞에서
<신동엽의 서울시대 – 서울지역 문학기행>은 신동엽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신동엽학회가 주관하며, 문화체육관광부, 창비, 한국작가회의의 후원으로 이뤄졌습니다. 다음 신동엽문학기행은 9월 28일 부여에서 개최 될 예정입니다. 이번에도 부득이하게 참가인원수는 제한됩니다. 신청 접수 관련 사항은 추후에 좀 더 자세하게 안내 될 것입니다.
신동엽 시인이 1960년대에 약 1주일 간 여행했던 제주도에서도 문학기행이 이어집니다. 신동엽학회 학회장 정우영 시인은 문학기행이라는 실증적 연구와 답사를 거쳐 올 연말쯤에 <신동엽문학지도>를 출간한다고 합니다. 서울기행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신동엽의 거주지와 근무지 등 작품구상의 주요 활동무대들은 대체로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인근 주민들조차 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아 격돌하는 신동엽 문학과 정신을 이어가고자 설립된 신동엽기념사업회와 신동엽학회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고 지역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기여하고자 <신동엽문학지도>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올 말까지 이어질 신동엽문학기행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신동엽 시인의 다섯 번째 시비 건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허회태 서예가, 신좌섭 교수, 박종덕 화백, 정우영 시인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이하 동대부여고)에서 신동엽 50주기를 맞이하여 교정에 시인의 시비를 세웠습니다. 1970년 부여읍 나성터 금강 기슭에 세워진 첫 번째 시비 이후 신동엽 시인의 모교인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1990)와 부여초등학교(1999), 그리고 전주교육대학교(2001)를 거처 세워진 다섯 번째 시비입니다.
시비 제막식은 동대부여고 개교기념일인 6월20일 오전에 있었습니다. 동국대 이사장 자광 스님, 김형중 동대부여고 교장, 유가족 대표 신좌섭 교수, 정우영 신동엽학회 학회장을 비롯하여 추미애 국회의원, 김선갑 광진구청장 등이 참석했으며 시비를 만든 허회태 서예가와 박종덕 화백과 더불어 교내 직원과 재학생 총 200여명이 자리한 가운데 개최되었습니다.
시비의 앞면과 뒷면에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껍데기는 가라>가 새겨졌습니다. 교정 등나무 쉼터에 자리한 시비는 잠시 머리를 식히려 쉼터를 찾은 학생들에게도 무심코 학교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높이에서도 잘 보입니다.
시비 제막식. 자광 스님, 추미애 국회의원, 정우영 시인, 신좌섭 교수 등이 보인다
제막식에서 신동엽 시인의 장남인 신좌섭 교수는 간암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시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금강>을 낭독한 명성여고 학생들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동국대 이사장 자광 스님은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의지 등이 응집된 시인의 정신을 교정에서 느낄 수 있는 시비가 세워져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김형중 동대부여고 교장은 “신동엽 시인을 기리는 마음을 모은 시비를 통해 시인의 정신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동대부여고가 불교 종립 학교인 만큼 이날 시비 제막식은 법보신문과 불교방송 BTN에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되었습니다. 파란 글씨를 누르시면 기사와 방송을 다시보기 하실 수 있습니다.
명성여고 문예반 학생들과 함께 (동대부여고 제공 사진)
동대부여고는 신동엽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8년간 교편을 잡았던 학교입니다. 야간부 국어 선생님이었던 신동엽 시인은 “별밭”이라는 이름의 문예반도 지도하였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내성적이고 입이 무거운 성격이었지만 자식들이나 학생들에게는 매우 자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고,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문예반 출신 학생 중 일부는 유가족과 연락을 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신동엽문학관 수장고에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존경하는 시인을 잊지 못하는 옛 학생이 가져온 졸업앨범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동대부여고는 1930년에 세워졌으니 거의 100년에 달하는 역사를 지닌 학교입니다. 지금은 광진구에 있지만 원래는 조계종에서 2년제로 설립한 명성학원이 현 동대부여고의 전신입니다. 1933년 명성여학교로 인가를 받고, 1945년 종로구 관수동으로 교사를 이전했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근무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1951년 명성여자중학교와 명성여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을 하고, 1971년 지금 학교터인 광진구 구의1동으로 이전했습니다. 2003년 동대부여고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현재 32 학급에서 792명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매우 내성적이었던 신동엽 시인은 서울로 이주한 이후 첫 직장이었던 교육평론사를 그만두고 교사 자리를 물색하던 어느 날 명성여고 교장을 찾아가 자신의 시를 스크랩한 공책을 주고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포트폴리오를 내밀고 취업의사를 밝혔던 것이지요. 시인이 하필 명성여고에 취직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김형중 현 교장의 학교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단서를 발견합니다.
“본교는 1930년 만해 한용운 스님의 수제자이시며 독립운동의 비밀결사단체인 만당을 결성한 독립운동가 최범술 선생님께서 여성의 교육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건학이념으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불교 교육기관입니다.”
독립운동가로서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대종교의 정신을 지키고 조국 분단을 보며 민족의 동질성을 젊은이들에게 교육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범정 장형 선생에 의해 설립된 단국대 사학과로 신동엽이 진학을 한 이유와 일맥상통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한 가지 단서는 교장 심태진 선생입니다. 심태진 선생은 문교부 장학관으로 재직하면서 광복 이후 우리나라 교육쇄신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그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문학, 과학, 예술, 스포츠 두루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삼선중고등학교가 신설되어 초대 교장을 지내면서 우수한 교사들을 직접 섭외한 일은 유명한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시인 정성수의 블로그 참조). 당시 교육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던 심태진 선생은 1960년대에 삼선고등학교 교장이면서 명성여고 교장을 겸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심태진 선생이라면 자신을 알아주고 채용해 주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심태진 교장의 제안에 의해 1968년 명성여고 학생들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레타 <석가탑>이 만들어집니다. 신동엽 시인과 백병동 작곡가의 콜라보로 탄생한 이 작품은 올해 9월 시인의 50주기 특별기획으로서 동대부여고 학생들에 의해 입체낭독극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이 공연을 기획한 신동엽학회는 신동엽의 라디오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를 2018년 팟캐스트로 제작하면서 이 학교 학생들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오페레타 <석가탑>의 작곡가 백병동 선생과의 조우
뒷줄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 이대성, 신좌섭, 정민아, 백병동, 맹문재
지난 6월15일(금요일), 서울 봉천동에서 작곡가 백병동 선생(서울대 명예교수)과 함께 신동엽 시인과 <석가탑>에 대한 추억을 나누는 자리가 펼쳐졌습니다. 오페레타 <석가탑>에 작곡가로 참여하였던 백병동 선생을 자택 근처 작업실에서 만났습니다. 신동엽 시인 50주기를 맞이하여 올해 9월 전 명성여고, 현 동대부여고 학생들이 다시 무대에 올릴 <석가탑>을 계기로 백병동 선생을 만났습니다. 유가족 대표 신좌섭 교수와 함께 맹문재, 이대성, 정민아(9월 공연 음악감독) 선생 등이 다녀왔습니다.
백병동 선생은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작곡가로서 1961년 신인 예술상을 필두로 대한민국 작곡상(1977, 1990),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상(1982), 서울시 문화상(1983), 한국 음악상(1995), 올해의 예술상(2006) 등을 수상하셨습니다. 지난 50여 년간 독주곡, 실내악곡, 관현악곡, 오페라, 칸타타 등 거의 100여 곡을 작곡했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백병동 선생은 1936년 출생으로 신동엽 시인 보다 6살 아래입니다. 당시 백 선생은 서울여상에서, 신 시인은 명성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술을 한다는 공동분모 덕에 일찍이 친분을 쌓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지만 신동엽 시인의 첫 번째 시비를 설계한 정건모 화백의 소개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백병동 선생은 셋이서 통금시간을 핑계로 자주 술자리를 가졌던 이야기부터 시인이 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았던 마지막 모습 등에 대한 회고를 풀어놓았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장남인 신좌섭 교수를 찬찬히 바라보며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며 반가워한 백병동 선생은 50여 년 전 일을 상당 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까지 기억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백병동 선생의 회고와 신동엽문학관 소장 자료, 그 밖의 조사를 토대로 오페레타 <석가탑>의 탄생 배경과 당시 공연, 이후 신동엽 시인과의 협업계획 등에 관한 내용을 엮어봅니다.
<석가탑> 팜플릿 표지
1968년에 초연된 신동엽 & 백병동의 <석가탑>은 명성여고 교장 심태진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연극 잘하는 학교로 알려져 있던 명성여고 학생들에게 문학과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를 종합예술작품 형태로 직접 무대에 올려 체험케 하는 이른바 융합교육을 염두에 두었던 듯합니다. 공연 팸플릿에 보면 <석가탑> 제작에 대본과 작곡, 지휘와 연출은 물론 무감, 안무, 음향, 미술, 의상, 조명, 분장, 반주, 무용 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 되어 있습니다. 예술 전 분야와 함께 이 분야들의 실용적 적용을 폭넓게 체험해 볼 수 있는,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교육을 시도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성여고에도 음악교사가 있기는 했지만 (임주택은 백병동과 동문으로써 <석가탑>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성악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건모 화백을 통해 서로 알고 지내던 신동엽과 백병동의 협력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야심찬 젊은 작곡가에게 무대작품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확률은 극히 작습니다. 서양음악이 보편화 된 지금보다 당대에는 더욱 그러했겠지요. 그래서 백병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레타를 작곡해 보는 이 실험에 기꺼이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도 청탁이면 청탁이니 신동엽 시인이나 백병동 작곡가가 사례비를 받고 작품을 썼냐고요? 그 당시에는 모든 참여자들이 금전적인 사례보다 좀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며 창작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석가탑> 팜플릿
공연 팸플릿에서 교장 심태진은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행사가 비단 학교내의 발표회에만 그칠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넓혀 민족의 문화향상에 이바지될수만 있는 일이라면, 이것은 지역사회에 있어서의 학교의 역할을 보다 값있게 높일수있는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공연하는 오페렛타 석가탑은 여러가지의 교육목표 가운데 한자락을 차지하는 이와같은 꿈의 문을 노크해 보기위하여, 새로운 창작대본에 새로운 작곡을 의뢰하여 얻은 작품입니다.”
심태진이 기획의도에서 밝힌 학교의 사회적 기여와 재학생들의 문화예술체험활동은 당대의 교육이념과 시대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태진을 포함한 당대의 교육개혁자들은 지식과 학생의 경험을 중시하는 교육을 지향했습니다. 또한 당대에는 대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도 사회적 의식과 참여가 매우 강했던 시대입니다. 예컨대 1967년 부정선거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학교에는 고등학교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육개혁자 심태진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석가탑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 신동엽과 백병동은 1967년 여름방학부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해 12월 공연을 목표로 했었지만 결국 해를 넘겨 5월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사실 서양식 무대작품은, 더욱이 종합예술작품으로 모든 예술분야를 총망라하는 작품은 참가자 모두에게 첫 도전이자 모험이었습니다. 각자 직면한 문제도 달랐습니다. 오페레타가 무엇인지 모르는, 희극 한 번 써본 적 없는 작가가 대본을 맡았고, 짧은 성악곡 외에는 문학에 기반 한 작곡을 해본 적 없는 작곡가가 음악을 맡았으며, 성악을 전공했을 뿐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져 연주하는 관현악단 수장을 맡아본 적 없는 음악교사가 학생들을 연습시키며 공연을 지휘했고,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회를 한번이라도 들어봤을까 싶은 어린 여학생들이 소위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노래를 부르며 남자와 여자 역할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났지만 결과물의 완성도 보다는 모험의 취지에 더 큰 의미를 뒀던 작업이었습니다.
<석가탑> 출연진
총5경, 19곡으로 구성된 <석가탑>은 신동엽이 오래 전부터 작품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던 소재였습니다. 삼국유사에 한자 몇 마디로만 기록되어 있는 아사녀와 아사달의 설화를 스토리로 삼은 작품입니다. 신동엽은 이 무렵 <껍데기는 가라>라는 강렬한 사회비판적 시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그에 앞서 발표한 시들과 1963년에 출간한 시집 <아사녀>, 1967년에 발표한 서사시 <금강>을 통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창작의 토대로 삼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탑의 초연이, 한국 작곡가들에 의한, 한국 시인들에 의한, 한국 고유의 ‘흥’을 찾아내려는 어떤 운동에 다소라도 자극제가 되어준다면 그건 또 전혀 의외의 소득이라고 얘기하는 게 옳겠씁니다.“라고 말합니다. 백병동의 음악을 봐도 우리 고유의 언어와 음악이 가진 리듬을 살리려 한 흔적을 뚜렷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동엽의 대본은 다행히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백병동의 악보는 피아노 반주에 멜로디만 얹힌 초고만이 남아있기에 전도유망한 작곡가가 “한국고유의 ‘흥’”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서양음악에 접목시켜 재해석했는지를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없음이 아쉬울 뿐입니다. (<석가탑>의 음악은 풀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고 또 그렇게 공연 되었습니다만, 각 파트의 악보를 총망라한 악보는 안타깝게 유실되었습니다.) 오페레타에서는 무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스토리가 전개되고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노래를 통해 각 상황의 분위기와 해당 인물의 감정이 음악으로 표현됩니다. 백병동은 작곡할 때 노래 가사를 어떻게 음악으로 전달하느냐 또는 가사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하느냐 등에 중점을 두었다기 보다는 각 상황의 분위기를 표현해 내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백병동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육필 악보
백병동에게도, 신동엽에게도 <석가탑>은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실험을 토대로 우리 고유의 것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한번 해 보자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포부를 갖고 후속작품으로 오페라 <아사녀>를 만들기로 합니다. 1969년 초 신문기사들에 의하면 같은 해 12월 공연을 목표로 작업 중이였다고 하니 학생들을 위해 타협해야만 했던 <석가탑>을 전문가들을 위해 보완하고 확장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할 계획이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석가탑>이 무대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동엽은 간암 투병을 시작하고 이듬해 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백병동은 같은 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가까웠던 세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동양적 요소를 자신만의 독특한 작곡기법으로 승화시켜 서양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윤이상 선생의 제자가 됩니다. 백병동은 <석가탑> 외에도 천상병 시인의 <곡(哭)! 신동엽>에 음악을 붙였고, 신동엽 시인 1주기에는 <석가탑>에서 발췌한 2곡 ("새 성인 나시네", "멀고 먼 바람소리")을 합창으로 편곡하여 서울여상 학생들과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청구자 민병산 선생이 쓴 천상병 시인의 <곡(哭)! 신동엽>
백병동이 <석가탑>을 위해 작곡한 음악은 오늘날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 부르고 소화하기에도 어렵습니다. 학생들이 그 당시 악보를 보며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수업시간에 악보 읽는 법을 배웠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병동은 학생들 연기가 매우 뛰어났다고 회고합니다. 50년이 지나서도 기억 될 정도로 우수했던 걸 보면 혹여 음악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학생들의 빛나는 연기로 상당 부분 커버되었던 것 같습니다.
1968년 드라마센터에서 무대에 오른 <석가탑>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연출은 배우 문오장이, 음악은 당대 가장 뛰어난 연주단체 중 하나였다는 공군교향악단이 연주했습니다. 이틀간 총 4번 공연 되었는데 500석 규모의 객석을 명성여고 학생들이나 학부모만이 채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잊혔지만 신동엽 & 백병동의 <석가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레타입니다. 음악계에서는 적지 않은 센세이션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생공연이라는 사실이 너무 전면에 서 있었기에 당대 언론이나 전문가들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한 듯하여 이 작품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쉬울 뿐입니다. 명성여고, 현 동대부여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때 그 공연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몇 장으로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김창예 어르신이 기억하는 고향친구 신동엽
신동엽 생가 마루에 앉아 인터뷰를 하고 계신 김창예 어르신 (왼쪽에서 두 번째)
지난 6월, 신동엽문학관에 반가운 손님이 오셨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초등학교 동창 김창예 어르신입니다. 대전작가회의는 오는 9월 부여에 위치한 신동엽문학관에서 전국작가대회를 개최할 예정인데요, 신동엽 시인 50주기를 맞이한 해인만큼 신동엽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신동엽 시인의 옛 고향 친구인 김창예 어르신을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6월 4일, 이 인터뷰가 신동엽문학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창예 어르신은 신동엽 시인과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백마강에서 운수업을 하셨다고 하니 당시에는 부여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결혼할 때까지 간호사로 일하셨다고 합니다. 아들이 신동엽문학관 시설관리담당 정용구 씨와 친구라고 하니, 이렇게 신동엽 시인과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김창예 어르신, 김형수 시인
김창예 어르신은 고령이었지만 매우 정정하셨고 그 오래전 일을 비교적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신동엽이 참 잘 생겼었다고 말하며 웃는 모습이 소녀 같았습니다. 어르신은 신동엽과 ‘부서국민학교’ (공식 명칭은 부여공립보통학교; 부여초등학교 전신) 동창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여학생이 전교에 81명 있었다고 합니다. 남학생들은 당연히 더 많았지만 구체적인 숫자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지금처럼 법으로 정해진 의무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조금 늦게, 9살이나 10살이 돼서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병원에서 일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번쩍 손을 드는 바람에 졸업 이후 8년을 간호사로 일하셨다고 하네요. 그 옛날에는 보통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에 속하는 편이었습니다. 신동엽도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에 중등 교육기관으로 진학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남에서 유일하게 내지성지참배단에 뽑혀 보름간 일본에 다녀올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학교 선생님들의 강력한 권유로 공주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고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시인은 공주가 아니라 전주로, 중학교가 아닌 사범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사범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거의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인 교사를 배출하는 초등교원 양성기관이었으며 등록금도 수업료도 없었기에 주로 뛰어나지만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이 선택하는 진로였습니다. 경쟁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신동엽도 재수하여 입학하였지만 10여명의 부여 인근 학생 중 유일하게 합격했습니다. 남학생의 경우 5년 과정을 마치고 나면 바로 교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왼쪽부터: 김형수 시인, 정용구 씨, 김창예 어르신
김창예 어르신은 시인에 대한 특별한 추억과 고마움을 마음에 담고 계십니다.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이기에 학교에서 일본어로 수업하였습니다. 인병선 여사는 책을 읽다가 모르는 한자가 나오거나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을 때 신동엽 시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1930년에 태어난 신동엽 시인은 6년 늦게 태어난 인병선 여사와 달리 전주사범에 진학하고 나서야 한글을 배운 듯합니다. 시인과 동갑인 김창예 어르신은 초등학교만 졸업했기에 일본어만 읽고 쓸 줄 알았답니다. 아직까지도 일본어를 다 읽으실 줄 안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여름방학, 신동엽이 직장으로 찾아와서 한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답니다. (당시에는 병원장의 엄격한 보호(?) 아래 병원에서 생활하며 근무했다고 합니다.) 일부러 찾아가서 설득한 걸 보니, 신동엽 시인과 김창예 어르신, 두 분 어릴 때 ‘썸’ 좀 탔던 사이가 아니었을지..... 아무튼 일부러 찾아온 성의가 고마워서인지, 아니면 잘 생긴 신동엽의 얼굴을 보러 갈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김창예 어르신은 신동엽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시인의 생가 사랑채에서 한글 공부를 했는데, 어르신 외에도 여러 명이 함께 배웠다고 합니다. 어떻게 가르쳤는지, 혹시 교재는 있었는지와 같은 디테일을 기억하지는 못하셨지만 언제나 웃음꽃을 피우며 즐겁게 공부했고 다 같이 백마강변으로 놀러가기도 했답니다. 여름 한철 아름다웠던 이 추억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기 때문에 신동엽 시인을 한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다고 하십니다.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신동엽을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전주사범 시절 신동엽 시인 (맨 오른쪽)
어릴 적 친구 신동엽이 시인이 될지도, 그렇게 빨리 세상을 등지게 될지도 모르셨겠지요. 언젠가 한번쯤은 다시 볼 줄 알았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는데, 집구석 어딘가에 분명 사진 한 장 굴러 다녔던 것 같은데…… 신동엽 시인을 다루는 방송은 놓치지 않고 봤다는 김창예 어르신. 신동엽문학관 근처 음식점에서 식사 겸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서빙을 하던 주인장이 깜짝 놀라며 방금 말한 김창예 어르신의 동료 아무개가 자신의 작은 고모라고 합니다. 어르신이 반가워하며 옛날에 숲속에 있던 집에 놀러갔던 기억이 있다고 하자, 그 옛날 숲속의 집을 허물고 들어선 새 건물에 음식점을 차린 것이라는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김창예 어르신 기억 속에 살아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습니다. 기억 속 울창한 소나무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고, 시인의 생가나 동료의 집처럼 본 모습은 사라지고 터만 남거나 새로 지은 건물이 들어선 곳이 대부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창예 어르신의 기억에 생명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그 장면, 그때 그 느낌, 그때 그 목소리.... 다 생생합니다. 서사시 <금강>에 보면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 썩고 사라져도 정신은 영원합니다. 신동엽 시인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같이 학교를 다니며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김창예 어르신, 이제는 아들의 친구를 통해 신동엽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가는 어르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신동엽 시인을 만나며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이렇게 몇 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고 노래한 시인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여가 나은 또 다른 예술가 임옥상 신동엽 문학관 방문
임옥상 화백의 <시의 깃발>
신동엽문학관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촬영한 사진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문학관 앞뜰에 무심히 서있는 <시의 깃발>일 것입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을 형상화 한 이 작품은 사철 변함없이 꼿꼿이 서서 비, 바람, 햇빛, 안개, 눈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섬세하게 반응합니다. 매년 1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가는 이 깃발은 임옥상 화백의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금속으로 만든 설치작품을 촬영하지만 사진에 담아가는 것이 임옥상의 작품인지 아니면 임 화백의 글씨로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신동엽 시인의 시구들인지... 생각해 볼수록 애매하고 곱씹어 볼수록 감탄하게 됩니다. 임옥상 화백의 친구인 승효상 선생은 신동엽문학관을 설계할 때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는 건물”을 목표로 삼았다고 하는데 임 화백의 <시의 깃발> 또한 스스로를 드러내기 보다는 시인을, 시인의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보게끔 합니다. 이 작품은 한신대 교정에 서있는 문익환 목사 시비를 많이 닮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각 시인의 작품에서 구절을 따와 임옥상 화백의 글씨체로 형상화 시켰습니다. 민중의 언어를 시어로 끌어올린 문익환 목사의 시비가 들판의 수풀을 닮았다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신동엽 시인을 위한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위로,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임옥상 화백이 문익환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형상화 한 시비
신동엽문학관에는 임옥상 화백의 또 다른 작품 한 점이 숨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이 작품은 바로 생가 “시인의 방” 문 위에 달린 현판입니다. 생가를 복원하면서 쓴 신동엽의 부인 인병선 여사의 시 <생가>를 신영복 선생이 붓글씨로 썼는데, 이를 임옥상 화백이 금속 소재로 본을 떠서 만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즉 인병선 여사의 시가 시간이 지날수록 녹이 슬면서 조금씩 더 선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뚜렷해지는 기억처럼.
임옥상 화백의 또 다른 작품: 신동엽 생가 "시인의 방" 위에 걸린 현판
임옥상 화백은 지난 6월1일, 오랜만에 신동엽문학관을 찾았습니다. 부여문화원에서 주최한 “명사 임옥상과 함께하는 백제역사문화탐방”에 참여하는 전국에서 온 40여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백제 유적지를 탐방하는 도중에 이뤄진 방문이었습니다. 신동엽문학관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신동엽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김형수 시인의 안내로 생가는 물론 승효상 선생이 설계한 박물관을 꼼꼼히 살펴보고 제1전시실의 신동엽 유품 상설전시와 제2전시실에서 다시 공개되고 있는 신동엽 제주기행 전시까지 세심히 살펴봤습니다.
부여문화원에서는 매년 명사와 함께하는 백제역사문화탐방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정의 참가비를 지불하면 선착순으로 참가가 가능한 이 프로그램에는 유홍준 교수나 김용택 시인 등이 명사로 초대된 바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김용택 시인이 참가자들과 함께 신동엽문학관을 방문했습니다. 명사와 함께하는 백제역사문화탐방에 관심 있는 분들은 부여문화원의 공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임옥상 화백의 <시의 깃발> 앞에서 백제역사문화탐방 참가자들과 함께. 가운데 왼쪽이 김형수 시인, 오른쪽이 임옥상 화백이다.
나의 아버지 - 신동엽
올해는 시인이 작고한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여 유족이 기억하는 신동엽 시인에 대해 들어보는 기회를 가져봅니다. 그 두 번째 순서로 신동엽 시인의 장녀인 신정섭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 신동엽을 만나봅니다. 신정섭 씨가 1979년에 처음 발표하였던 글로 <신동엽, 그의 삶과 문학> (온누리 1994), 217-224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신정섭 씨가 그린 신동엽의 초상화
대지를 아프게 한 못 하나 아버지 얼굴가에 그려넣고
내가 가끔 떠올리곤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사진첩 속에서 코스모스와 함께 젊고 맑은 얼굴로 웃고 계신다. 이는 아마도, 내가 갓 여중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따라서 생시(生時)의 아버지를 대하기보다는 사진과 시집(詩集), 묘소 등을 통해 더 많이 아버지를 뵌 때문인 듯하다.
아뭏튼 내가 청탁받은 글이 <시인 신동엽>이 아닌 <나의 아버지 신동엽>임을 우선 다행으로 여긴다. 내 조각진 기억 속의 <신동엽씨>는 시인이 아니라도 좋은, 그저 자상하고 정다운 아버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인 신동엽>이 아닌, 그가 지닌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과연 남에게 이야기되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가 잠시 망설였으나, 내가 읽은 몇 편의 「xxx 론(論)」에서 그들의 가정생활도 결코 사소하지 않게 다루어지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또 옛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챙겨 보는 것은 내게 언제나 즐겁고 소중한 일이므로, 서투르나마 이어모으면 기억의 조각보쯤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배를 쓸어주시던 넓고 따스한 손이 그립다.
우습게도, 아버지에 관한 내 첫 기억이라 생각되는 것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다투고 있을 때 내가 마구 울어대자 날 캐비닛 위에 번쩍 올려 앉힌 일이다. 아버지는 크지 않은 체구였다고 누구나 말들 하는데 그 기억 속의 아버지는 굉장한 거인으로 떠올려진다.
그때가 아마 내가 세 살이 채 못 되었을 무렵이고, 아버지는 주산농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던 듯하다. 듣기로는 그 사이 아버지가 심한 디스토마를 앓으셨다고 한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고, 곤궁한 형편 속에 큰 동생 좌섭이 태어났으며, 이후 2년 가량 돈암동서 서너 군데 셋방을 전전하였다. 그 중 돈암동 개천가, 지금도 식구들 사이에서 <동원네 집>으로 통하는 그 집에서의 기억은, 따듯한 코코아 주전자와 커다란 버드나무, 엄마의 분홍빛 아사 원피스와 함께 마치 샤갈의 그림인 양 생각키워진다.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종종 찾아 오셨고,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이끌고 집 앞 가로수 우거진 길로 나와 산책을 하거나, 흙바닥에 포도송이니 강아지 따위를 그려주시곤 하셨다.
안채에 여승 두 분이 살던 어느 집엔 전화가 있어, 아버지가 전화받기 위해 드나드시던 기억이 난다. 그 집 일하는 아주머니가 부치던 밀지짐의 냄새도...
[전문 읽기]
문학관 이모저모
왼쪽부터: 김형수 시인, 에너지우 씨와 동료
사랑스런 부여여행의 시작: 부자 되는 여행 (부여) TV 부여군 유튜브에 소개된 신동엽문학관
우리는 정말 부인할 수 없는 유튜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50주기 특별기획으로 신동엽문학관에서는 문학관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신동엽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김형수 시인의 이름을 딴 <김형수의 문학난장>이라는 채널을 개설하여 매주 2편의 동영상을 공개하고 있는데요, 이와 별개로 부여군에서도 부여 홍보를 위해 <부여TV>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였습니다. 이 채널 4번째 동영상에서 신동엽문학관이 소개됩니다.
지난 5월초, 유튜버로 활동하는 에너지우(예명) 씨가 촬영을 담당하는 동료와 함께 신동엽문학관을 찾았습니다. “부여 군청 공식 유튜브 페이지”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에너지우 씨는 게스트하우스 <마당>을 촬영하러 왔다가 우연히 문학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대충 둘러보고 “잠깐” 촬영하러 들어왔다가 김형수 시인의 해설까지 다 듣고 족히 1시간 넘게 작업하다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촬영시간이 길었던 만큼 어떻게 편집이 될지 정~말 궁금했는데.... 아, 유튜브에서 공개 된다는 점, ‘유튜브 세대’는 빠르고 짧은 편집을 선호 한다는 점을 너무 과소평가 했나 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듯이, 한 시간 분량이 3분으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핵심은 다 들어 있습니다. 직접 한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기
위에서 아래로 시계방향으로: 태안 원의중 학생들, 정읍 신태인고 학생들, 금산 금산여중 학생들, 수원 유신고 학생들
유독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방문한 신동엽문학관의 6월
신동엽 50주기를 맞이하여 4월부터 5월 중반까지 전국에 있는 국문과,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신동엽문학관을 찾았다면, 5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 단체가 두드러지게 많이 방문했습니다. 지난 8주간 동안 총 22개의 학교에서 830여명이 다녀갔습니다.
북카페에 삼삼오오 둘러 앉아 핸드폰만 응시하고 있기에 문학관이 재미없어 게임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저마다 시구상을 하고 있었던 태안에서 온 원의중학교 학생 70여 명, 동학을 주제로 방문하여 신동엽의 제주기행까지 빠짐없이 보고 간 정읍 신태인읍에서 온 신태인고등학교 학생 50여 명, 유독 순해 보이고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해설을 듣던 수원에서 온 유신고등학교 학생 60여 명, 다양한 포즈로 기념촬영하기에 바빴던 장난 끼 가득한 금산여자중학교 학생 100여 명 등등 수많은 학생들이 신동엽을 마음에 담고 돌아갔습니다.
신동엽문학관을 찾은 일본인 방문객들
백제의 도시 부여는 예전부터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였습니다. 최근에는 많이 뜸해지기도 했고, 개인 관광객들이 더 많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1970년대 신동엽 시선집이 <껍데기는 가라>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되기는 했지만 신동엽을 아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동엽문학관은 분명 부여가 자랑하는 명소입니다. 승효상 선생이 설계한 문학관 건물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신동엽문학관을 찾는 일본인 방문객이 조금 늘었습니다.
오사카에서는 고령의 어르신 10여 명이 단체로 왔다 가셨습니다. 일본인 인솔자가 자체적으로 준비한 해설을 들으며 생가와 문학관을 둘러보고 방명록에 이름도 남기고 가셨습니다. 일본인 친구와 함께 방문한 일본어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이미 몇 번 문학관을 방문했다는 이 선생님은 앞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여행상품을 개발해 볼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해설을 요청하지 않고 친구와 함께 전시를 둘러본 이 선생님은 신동엽 시인의 다양한 유품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이 모든 것을 이리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을까, 시인을 많이 사랑한 부인이 수집하지 않았을까라는 대화를 친구와 나눴다고 합니다.
신동엽문학관에서는 올해 문학관 홈페이지에 외국어 안내문을 추가하고 간단한 안내책자를 비치할 수 있도록 준비 중에 있습니다. 2020년부터는 외국 손님들도 불편 없이 신동엽문학관을 둘러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신동엽 단국대 졸업 증명서
신동엽 관련 새로운 자료들
지난 5월과 6월, 신동엽 관련 새로운 자료들이 신동엽문학관에 전달되었습니다. 사진, 졸업장, 토지대장, 신문기사 등등 입니다.
졸업장, 토지대장, 신문기사 등은 임의수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입니다. 임의수 선생은 신연순 옹이 세상을 떠난 이후 생가를 지켰던 교사 중 한 분입니다. 평생 신동엽 시인의 정신으로 살아온 미술 교사 임의수 선생을 초청하여 작년에 신동엽문학관 기획전시실에서 <솔 밭길 넘어>라는 특별전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임의수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는 생가를 정리하면서 나온 것들인데 너무 오래 전에 맡게 되었기에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 다시 찾아서 문학관에 가져오셨습니다. 신동엽 시인과 누이들의 졸업장, 1992년에 발급 받은 토지대장 등과 함께 새로운 신문 기사 몇 개가 이렇게 추가 되었습니다.
전 명성여고, 현 동대부여고 권오정 선생께서는 학교에서 찾은 신동엽 시인의 사진을 여러 장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번 시비 건립을 계기로 교지에 신동엽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신동엽문학관을 찾은 권오정 선생은 시인이 교직원증을 발급 받기 위해서나 학생들 졸업앨범에 싣기 위해 매년 찍었던 사진들의 사본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신동엽문학관과 동대부여고가 교류하며 자료를 공유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길 기대합니다.
신동엽문학관에 들어온 풍금
얼마 전 조순정 씨를 통해 풍금 2대가 신동엽문학관에 들어왔습니다. 조순정 씨는 커피전문가로서 매년 신동엽문학제에서 자원봉사로 커피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밖에도 자주 문학관을 방문하는 부여 주민 중 한 분입니다. 지난 5월, 버려지는 풍금이 있다는 연락을 주셔서 신동엽문학관으로 풍금 2대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상설전시실 앞 공간에, 또 하나는 세미나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릴 때 학교 음악수업 시간에 늘 울리던 풍금이 기억했던 것보다 많이 작아서 놀랐지만 두 발로 바람을 일으켜 건반을 누르자 들려오는 소리는 추억 속 풍금 그대로였습니다. 어린 방문객들을 위해 비치해 둔 풍금이지만 요즘 학생들은 그냥 피아노인 줄로 압니다. 건반을 두드려 보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고장 났다고 생각합니다. 두 발로 페달을 번갈아 가며 밞아야 소리가 난다고, 피아노가 아닌 풍금이라고 설명해 주는데 무척 생소해 합니다. 잊혀 가는 또 하나의 옛 것이 이렇게 신동엽문학관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손자의 편지
지난 5월, 신동엽문학관 바로 옆집 할아버지가 뜻밖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손자는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신동엽문학관 입구 옆에 부착된 칠판에 편지를 썼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로 아이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너에게
나 돌아 가는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 터
새순 돋듯
허구많은 자연 중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창작과비평 1970년 봄호
신동엽학회에서 알립니다
신동엽학회 8월 정기 모임과 9월에 있을 50주기 특별 행사 등 새로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모든 모임과 행사에는 별도의 참가비가 없습니다. 문인과 연구자는 물론이고, 이제 막 문학에 관심 갖기 시작한 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신동엽학회에서는 매년 새로운 기획을 통해 살아있는 신동엽 문학과 정신을 대중과 함께 나누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이었던 2018년에는 새로이 발굴된 신동엽의 방송대본을 동대부여고와 함께 팟캐스트로 제작하여 큰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2017년에는 시낭송버스킹을, 2016년에는 문학콘서트를 진행하였는데 아래 푸른 글씨를 누르시면 지난 3년 동안 진행된 신동엽학회의 프로젝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18 신동엽문학팟캐스트 “내 마음 끝까지”(1967)
2017 신동엽 시낭송버스킹 -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2016 신동엽문학콘서트 -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신동엽학회는 모든 연구모임과 행사에 별도의 참가비를 받지 않고 회비, 후원금, 단체 지원금 등을 통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학회 활동을 격려해 주실 분들께서는 아래 메일주소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poet-shin@hanmail.net
신동엽과 함께 책 읽기 25회차 - 막심 고리끼 『어린시절』
* 일시: 2019년 8월 19일(월) 오후 7시
* 장소: 신동엽학회 사무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133-1 복지빌딩 5층)
* 텍스트: 막심 고리끼 『어린시절』(역자가 몇 있습니다. 자유 선택 가능 / 추천: 이항재 옮김, 이론과실천, 1996)
※ 신동엽학회에서는 2016년 7월부터 신동엽이 읽었던 책을 따라 읽는 목적으로 “신동엽과 함께 책 읽기” 모임을 매달 1회 진행해 왔습니다. 오는 8월, 올해 마지막 독서 모임을 갖습니다. 푸슈킨,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리끼 등의 저서를 읽어온 연장선상에서 10월에는 <러시아의 역사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정세진 선생님(한양대)을 모시고 강연을 듣습니다. 추후 안내 드리겠습니다.
문의: poet-shin@hanmail.net
2019 신동엽문학 입체낭독극 <석가탑>
* 일시: 2019년 9월 6일(금) 오후 7시, 9월 7일(토) 오후 3시, 7시
* 장소: 여행자극장(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인근)
* 참가비: 무료(매회 선착순 100명)
* 신청방법: 8월 1일부터 사전 예약(구글폼), 당일 잔여석에 한해 현장 선착순 입장 가능
* 주최: (사)신동엽기념사업회
* 주관: 신동엽학회,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동엽 시인이 대본을 집필하고 백병동 작곡가가 곡을 입힌 창작 오페레타 <석가탑>은 명성여고 학생들이 배우로 열연하여 1968년 5월 10~11일 이틀 동안 공연되었습니다. 신동엽 50주기를 맞아 신동엽학회 소속 작가, 연구자, 배우, 뮤지션이 뜻을 모아 신동엽 시인이 재직했던 명성여고(현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입체낭독극’(낭독극에 춤, 마임, 노래, 가야금 연주 등을 결합)으로 51년 만에 다시 공연합니다.
입장료는 없지만 선착순 100명만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8월 1일부터 신청을 받을 예정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공지하겠습니다. 미처 관람을 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공연실황을 녹화하여 온라인으로 게시할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문의: poet-shin@hanmail.net
신동엽의 부여시대-부여 지역 문학기행
지난 6월 <신동엽의 서울>이라는 제목 아래 큰 사랑을 받은 신동엽학회의 문학기행이 부여에서 이어집니다. 9월 28일, 신동엽 50주기 공식 기념식이자 신동엽문학제가 있을 9월 28일 신동엽 생가 및 문학관, 시인이 즐겨 찾았던 부소산의 낙화암, 시인이 다닌 부여초등학교 등에서 진행됩니다. 9월 1일부터 사전예약을 받기 시작하는데 관련 안내는 추후에 공지하겠습니다. 이번에도 큰 관심 부탁드립니다.
* 일시: 2019년 9월 28일(토) 오전 11시부터
* 장소: 신동엽 생가 및 문학관, 낙화암, 부여초 등(서울 양재역 9번 인근 9시 출발)
* 참가비: 무료(선착순 35명)
* 신청방법: 9월 1일부터 구글독스로 신청(링크 주소는 추후 공지)
문의: poet-shin@hanmail.net
신동엽 시인 관련 학술논문 리뷰 모집
신동엽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신동엽학회에서는 시인 신동엽에 관한 연구논문 리뷰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모집개요
신동엽을 연구한 논문 (학위논문이나 소논문)을 요약하고, 문화사적 의미와 한계까지 정리
분량
A4 2장 내외
참가자격
신동엽과 신동엽문학에 관심 있는 연구자
(대학원생 포함)
* 동일인 반복 (2회에 한함) 리뷰 가능
마감
매달 20일
원고료
소정의 심사를 거쳐 신동엽문학관 홈페이지에 리뷰를 게시하고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 등재학술지에 게재된 소논문 1편 (5만원)
- 학위논문 1편 또는 소논문 2-3편 (10만원)
접수방법
poet-shin@hanmail.net
리뷰 1편과 간단한 약력, 연락처를 적어 이메일로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신동엽학회 편집이사 김진희 : gmlang@hanmail.net
5월의 논문 리뷰에는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김동규 님의 글이 선정되었습니다. 조강석 님의 논문 두 편 (조강석, 「신동엽 시의 민주주의 미학연구」, 「신동엽 시의 이미지-사유 연구」)을 읽고 정리한 글로, 유기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6월의 논문 리뷰에는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강은진 시인의 글이 선정되었습니다. 이경수(2011)와 공현진(2018)의 논문을 리뷰 한 글로 '사람의 시선'에 의해 공간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논문리뷰와 더불어 신동엽학회원의 작품해설, 일화 등이 신동엽문학관 홈페이지 “담벼락”에 정기적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특히 6월부터 연재되고 있는 신동엽 시인의 장남 신좌섭 교수님과 맹문재 교수님의 대담이 흥미롭습니다. (계간지 푸른사상 2019/27(봄호)에 실린 내용과 동일합니다.) 많이 알려진 내용도 있지만 신동엽 시인에 관해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바로 잡는 계기도 될 것입니다. 유익한 글을 주신 두 분 선생님과 푸른사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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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안내
사진: 한겨례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의회에서 낭송한 신동엽의 詩
지난 6월 14일(현지시간), 스웨덴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의회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신뢰>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는 도중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 1>을 낭송하였습니다. 349자로 축약한 버전이었지만 대통령 연설에서 시가 이렇게 길게 인용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신동엽 시인이 주목한 스칸디나비아는 시인이 꿈에 그리던 “중립의 초례청” 즉 평화의 중립지대가 실현된 곳으로 묘사됩니다. 아래 <산문시 1> 전문을 공개합니다.
산문시(散文詩) 1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 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고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년 11월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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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문학관은 시인을 함께 추억하고, 그와 함께 노래하며 더 넓고 향그러운 흙가슴을 만들어 나갈 모든 사람들의 내면의 쉼터가 되길 희망하며 유가족들의 생가 및 모든 유품의 기증을 기반으로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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