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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9,1-6
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4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 2,11-14
사랑하는 그대여,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찬바람 부는 한겨울에>
- 크리스티나 로제티, 박정은 옮김
"찬 바람 부는 한겨울에, 성에 낀 바람은 탄식이 되고
대지는 철갑처럼 단단하고, 물은 돌덩이 같은데,
눈은 내려, 눈 위에 또 눈, 눈 위에 또 눈,
찬 바람 부는 겨울, 오래 전에.
우리의 하느님, 하늘은 그분을 잡지 못하고, 땅도 더는 버틸 수 없어
하늘과 땅은 도망쳐 버리지,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찬 바람 부는 한겨울에, 마구간이면, 충분했어,
만능의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는.
천사들이 경배하는 그분께는,
넉넉한 젖과 포근한 목초면 충분하고,
천사들이 무릎을 꿇는 그분께는,
사랑스러운 소와 당나귀, 그리고 낙타면 충분하지.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거기에 모여서
날갯짓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어머니만은 순결한 기쁨 속에서
입맞춤으로 사랑하는 이를 경배했지.
가난한 난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내가 목동이라면, 양을 가져다 드릴 텐데
내가 동방박사 중 한 명이면, 나의 몫을 할 텐데
하지만,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 나의 마음을 드리지."
그러네요.
저도 이 추운 외진 양주골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고작 저의 이 작은 마음’ 뿐이네요.
이 시는 영국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년)의 작품으로, 영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성탄 성가의 가사이기도 하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양떼를 지키는 목자에게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곧 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와 야근하는 노동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루카 2,11)
이는 “구세주 그리스도 여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암울한 이 세상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약속이 실현되었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이사 9,5)
그러니 다른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단지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우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루카 2,12)
천사들은 목자들이 ‘구유’에서, 곧 마구간의 거주자인 짐승의 밥그릇, ‘여물통’에서 아기를 보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교부들은 이사야서(1,3)를 읽으면서 베들레헴 ‘구유 곁’에는 ‘소’와 ‘나귀’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그 짐승들은 ‘유다인’과 ‘이방인’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아기’가 되신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온 인류’를 암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짐승의 ‘여물통’이 ‘그리스도 자신’이고, 우리 마음의 참된 양식인 ‘빵이 놓인 제대’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제대에서 당신 자신을 얼마나 ‘작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빵 한 조각(성체)’의 모습으로 ‘작게’ 하신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표징입니다.
곧 우리를 위해 ‘작게 되신 아기’, 우리에게 ‘선사된 아기’가 그 표징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이요,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요, 우리를 다스리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드러나게 권위를 띠고 오지 않으십니다.
그토록 전능하신 분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기’로, 이길 자 없는 강력하신 분이 ‘연약하고 나약한 아기’로, 말씀이신 분이 ‘말못하는 아기 벙어리’로 오십니다.
그야말로 당신은 ‘무방비 상태’로, 오히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권능으로 사로잡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위대함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을 간청’하십니다.
그래서 ‘아기’가 되십니다.
‘사랑 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분의 생각과 뜻에 들어가는 법을 배워가고, 그분과 함께 사랑하며 사랑의 본질인 ‘겸손’을 익혀갑니다.
그토록 하느님께서는 ‘작게’ 되시어, 우리가 당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탄'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아기'로 내어주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양주골 우묵한 골짜기 여기 우고리에, “구원자 아기 예수 탄생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한 번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가득한 기쁨 성탄 맞으시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루카 2,11)
오늘밤, 우리의 아기! 구세주 나셨습니다.
왕방울의 소의 눈이 기쁨에 경악하고, 어린양의 떨리는 탄성에 잠들었던 만물이 깨어납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첫 울음 속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는 백인대장의 고백을 듣습니다.
포대에 싸여 있듯, 뭇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가 눕지도 않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세워질 연약한 아기,
내가 휘두른 채찍에 온몸이 부서질, 그러면서도 생명을 주시고자 저를 부르신 이여!
당신을 품에 안게 하소서.
안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묻고 새로 나게 하소서!
“목마르다”라고 외치는 당신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제 생명을 주신 이여!
당신은 남북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우리의 마음 속 투박한 담 벽이 세워진 이 곳에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여기, 다윗의 조그마한 고을 한반도, 가로막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아성을 부수소서!
오, 임마누엘, 저희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여!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마음의 구유 안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해 오신 모든 분께 축하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 양식을 충만하게 채웠으며,
성경 통독과 감사 노트 쓰기를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지길 노력했습니다.
주일 학교는 은총 잔치로, 젊은이는 음식 나눔을 통해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했으며,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그러기에 그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매사에 열성과 정성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더 큰 사랑을 담아서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리고 성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시길 바랍니다.
한번 불러보실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박대 하였을까요?
그분은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진 아기의 모습이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매번 차려져도 매일 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구유에 뉘어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하고 주님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마침내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양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의 구유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 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희망합니다.
매일이 거듭 태어나는 성탄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많이 주는 이만이 다 주는 이를 알아본다>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구유에 뉜 아기가 구세주이심을 볼 수 있는 눈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천사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표징을 볼 수 있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개는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까요?
모릅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
(시편 36,10)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인식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알아보려는 이가 사랑하고픈 의지가 없으면 어떨까요?
그래서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여기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착한 뜻”을 가진 이에게 평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착한 뜻은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됩니다.
의족으로 걸어야 하는 아들을 엄마는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라며 모질게 떠납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들은 학교 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엄마는 빨리 일어나 운동회에 가라고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운동회에 가라는 엄마가 밉습니다.
“엄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에게 걸림돌은 비탈진 골목길 계단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오르내리기 어려운 경사의 길을 매일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눈이 쓸려 있었습니다.
앞집 아저씨가 쓸어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하며 눈을 씁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달려간 아들은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 난 목소리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알아보고 말합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학교 가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그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혼자 일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했던 말과 “운동회라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럼 평생 숨어 살아!”라고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어머니가 사랑이셨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겉옷을 벗어서 열심히 눈을 쓰는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안아드립니다.
[출처: ‘치매 걸린 어머니가 한겨울에 눈을 쓸고 있었던 이유’, 유튜브 채널, ‘JTBC Voyage’]
만약 아들이 눈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눈 쓰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를 것입니다.
매일 아들을 위해 눈을 쓰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자신도 남을 위해 눈을 한 번쯤은 쓸어보았어야 합니다.
나에게 좋은 뜻이 없다면 하느님의 좋은 뜻을 볼 눈을 잃게 됩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대 주었다.”
이것은 성체에서 제가 들은 소리입니다.
만약 내가 내어 주는 일을 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 주시는 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많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다 주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빛이 없고 어둠만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도 ‘예수성탄’을 축하드리면서 저처럼 축하의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캐럴’이 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울면 안 돼,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사롭다.’와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구유와 트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매년 구유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1년 동안 잘 보관했던 구유 세트를 꺼내서 장식했습니다.
청계천 시장에 가서 ‘은하수 전구’를 사왔습니다.
별도 달고, 구슬도 달고, 빤짝이도 걸고, 전구를 연결하였습니다.
저와 동창 신학생이 기본 틀을 만들면 수녀님이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성탄카드’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같이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쓸 일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카톡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명동 거리에는 구세군 봉사자들이 종을 울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는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성당에서 ‘성탄 예술제’를 했습니다.
초등부 학생들은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은 멋진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넷째 왕의 전설’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연극입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한 박사들은 원래 4명이었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 조재형’입니다.
멜키올은 황금, 발타살은 유향, 가스팔은 몰약, 조재형은 다이아몬드를 준비했습니다.
조재형은 길을 가다가 굶주린 엄마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 주인에게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서 팔려가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를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써버린 조재형은 결국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년이 지났고, 노인이 된 조재형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30년 전에 경배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조재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이미 너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굶주린 엄마와 아이에게 준 것이, 강도당한 남자에게 준 것이, 팔려가던 노예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란다.’
조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넷째왕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갔습니다.”
연극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술이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천호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동창 신학생과 함께 그 남자를 택시에 태워서 천호동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에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사제로 32년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했던 작은 선행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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