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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백제 토론방 백제의 한성 변천과정과 부아악
자이수 추천 0 조회 588 13.07.07 01:07 댓글 1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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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7.07 01:47

    첫댓글 간단히 정리해 보면
    온조 원년(BC 18년) 한수이북에 위례성 도읍을 세우다,
    온조 14년(BC 5년) 한수이남(한산)으로 천도. 하남위례성
    개루왕 5년(132년) 광주(북한산성)로 천도
    근초고왕 371년 한산으로 천도
    개로왕 475년 공주로 천도
    성왕은 538년 사비로 천도
    의자왕 660년 백제 멸망

  • 13.07.07 08:09

    수고하셨습니다.그런데 특이한것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현지의 여건들이 전연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첫째 동쪽으로 낙랑이 있다는 기록인데 만약 서울지역(하남포함)을 백제의 초기 건국지로 본다면 광주 이천방향이 됩니다.그럼 광주 이천방향에 낙랑이 있었다고 볼 수 없으니 이를 부정하는것입니다.애써서 서울지역을 백제의 초기 건국지로 주장하고 싶은 심정에서 합리화시키려고 하다보니 자꾸만 동쪽이라는 기록이 북쪽의 오기라고 주장하고 싶지요.사료분석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처음부터 예리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다음부터 등장하는 기록들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 작성자 13.07.07 08:32

    반갑습니다 구산님.
    동쪽으로 낙랑이 있다는 기록에서 만약 서울지역(하남포함)을 백제의 초기 건국지로 본다면 이곳은 광주 이천방향이라기 보다는 강원도 춘천방향 정도 되지않을까 생각됩니다. 춘천에 낙랑의 잔재가 있었다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방향이 오기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구산님께서 사료분석을 통하여 예리하게 분석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 13.07.07 11:03

    서울동쪽의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하면 경기도의 양평과 강원도의 횡성방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당시 백제강역의 한계는 100여리밖에는 되지못합니다.왜냐면 마한으로부터 허락받은 땅이 마한의 동북쪽 100여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참고로 양평은 서울에서 정 동쪽으로 42키로로서 백제의 동쪽 한계에 속합니다.님께서는 방향의 오기일것이라는 말씀을 자꾸만 하시는데 기록과 일치하는 지역이 다른곳에 있었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정확한것입니다.

  • 13.07.07 14:17

    다시 부아악(負兒岳)이란 이름은 틀림없이 아기를 업은 형상을 가진 바위라는 뜻이 일반적인 해석일텐데 유감스럽게도 북한산에는 그러한 상을 닮은 바위가 없으니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궁핍한 변명을 찾게 됩니다.하지만 그럴듯한 논문도 이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이 문제를 억지로 해결한다 하더라도 또다시 일반 상식으로는 해석이 되지않는 기록은 계속하여 이어지게 되니까요.

  • 작성자 13.07.07 14:48

    부아악(負兒岳)은 바위가 아니라 바로 북한산입니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여 북한산을 부아악이라 불렀고, 백제때는 온조왕이 한산을 차지하고 그곳 산을 횡악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문으로 산은 뫼고, 악은 큰산이란 뜻인데,
    삼국시대에 산은 마을 또는 고을을, 악은 산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다를 대해라고 했는데, 대해는 큰바다란 뜻이 아니고 그냥 바다의 의미이고, 소해는 작은바다가 아니고 강(江)또는 하(河)를 의미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 13.07.07 16:08

    산은 봉우리를 여럿 품고 있는 넓은 범위로 지리산에 삼도봉. 반야봉. 영신봉. 토끼봉. 제석봉등을 품고 있습니다.

    북한산의 경우도 국망봉. 염초봉. 원효봉. 의상봉. 보현봉. 기린봉, 등 많은 봉을 품고 있지요. 그래서 봉은 산보다 좁은(작은) 의미로 해석 됩니다.

    악은 한자로 큰산악자인데 실제로는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처럼 큰산에는 악자를 붙이지 않고 북악. 관악. 설악. 치악. 삼악. 화악산과 같이 다소 바위가 많아 험준한 산에 악자를 붙이고 있습니다.그러나 금강산에도 악자는 붙지 않은걸 보면 크게 악자를 큰산으로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그리고 瀆.江.河.海는 제각기 쓰임이 다릅니다.

  • 작성자 13.07.07 17:32

    네~ 현재의 봉 산 악 독 강 하 해등은 나름대로 구분이 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에 무슨 의미로 쓰였냐 하는 것입니다.
    산과 악인 경우, 신라때까지는 부아악이라고 하였으나 고려때부터는 부아악을 부아산으로 잠시 부르다가 삼각산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해, 소해 또한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는 대해는 바다 소해는 배가 다닐정도의 강이나 하(河)를 의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13.07.07 20:33

    소해나 대해는 모두가 중국의 당나라 이후 시대에 등장하는 사료상 용어입니다.우리의 삼국시대지요.당시에도 중국에는 작은 바다같은 장강(양자강)과 황하가 있었지만 이를 사료상에 소해나 대해로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제가 너무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지요.

  • 작성자 13.07.07 22:47

    百濟, 扶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 而 贏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 新羅也.
    百濟는 扶餘의 別種이다. 京師에서 곧장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 越州을 경계로 하고, 남쪽으로 倭, 북쪽으로 高麗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갈수 있다. 그 동쪽으로 新羅가 있다.

    윗 글에서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고구려를 갈때도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백제에서 고구려를 갈때 바다는 아니지만 패하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는 거 같습니다. 이 경우 패하는 소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작성자 13.07.07 14:53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池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
    여기서 한산은 지금의 서울이고, 부아악이 바로 북한산입니다.

  • 13.07.07 16:36

    구산도 九山이라는 아호를 쓰고 현재도 산자가 붙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어떠한 명칭을 상징적으로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산이야 규모가 크던 작던 말입니다.삼각산을 왜 삼각산이라고 하였을까요.저는 부아악도 그러한 의미에서 애기를 업은 바위가 상징이 되엇을것이라고 보는것입니다.어디까지나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비록 바위지만 전체 산을 상징할만한 특이한 형상의 바위말입니다.

  • 작성자 13.07.07 17:29

    현재의 북한산은 백제 31년 횡악을 시작으로, 신라때 부아악, 고려때 부아산을 잠시 부르다가 삼각산으로 산명의 명칭이 변경된 것으로 보입니다. 삼각산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바라보았을 때 세개(三)의 뿔(角)이 솟아나서 삼각산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삼각산이 조선시대 후기에 북한산으로 불리운 것으로 보입니다.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업고있는 산이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려때 개성 천마산에 부아봉이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부아봉을 인수봉이라고 불러 이 부아봉 즉 인수봉이 아이를 업고있는 바위라고 잘못 전달된 것으로 보입니다.

  • 작성자 13.07.07 18:14

    조선시대 1745년경 성능이 편찬한 북한지에 따르면 三角山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보여주는 문구입니다.

    山有 仁壽, 白雲, 萬景 三峰. 屹立巑岏 如三角焉 故名 一名 華山, 又稱 華嶽,
    산에 인수 백운 만경 세봉우리가 있다. 우뚝솟아 높고 가파르며 삼각처럼 생겼다. 고로 삼각산으로 불리운다. 일명 화산 또는 화악이라 한다

  • 작성자 13.07.07 18:13

    我東之山 起於白頭 至平康之分水嶺 西出一支 連峰疊嶂 起伏迤邐 至楊州西南 爲道峰山 又爲此山 實 京城之鎭山也.
    우리 동쪽의 산은 백두에서 일어나 평강의 분수령에 이르기까지 서쪽으로 한가지가 나와 연이어 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거듭 솟아나 일어났다 업드렸다 하여 잇달아 뻗어 양주 서남에 이르러 도봉산이 되고 또 이 산이 되니 실로 경성의 진산이다

    백제시대에 한산이라 부른 지명은 고려시대에는 양주로 변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은 한산과 양주를 합한 지명이라고 합니다.

  • 13.07.08 01:11

    百濟, 扶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 而 贏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 新羅也.
    百濟는 扶餘의 別種이다. 京師에서 곧장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 越州을 경계로 하고, 남쪽으로 倭, 북쪽으로 高麗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갈수 있다. 그 동쪽으로 新羅가 있다.

    ***<皆踰海乃至>이 대목을 해석하는데 왜 그렇게 미련을 가지고 변명을 하고 싶으신가요.물론 한반도 내륙 즉 한강 이남에 백제가 있었다고 하는 통설을 지키기 위해서이겠지요.그러나 한강 북쪽에서 고구려땅에 도착하는데 어디에 바다로 부를만 한 패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 13.07.10 11:31

    다른 건 둘째치고, 본문에서 자이수님이 언급하신 4번 부분, 즉 청담사 유물과 최치원의 청담사 기록 이야기는 부아악 = 북한산에 대한 너무 강한 근거가 됩니다. 이걸 물리칠 정도의 더 강한 반박근거가 나오지 않는 한 부아악을 북한산이라고 이해하는 게 합당합니다.

    이 근거 앞에서 다른 논의를 더 한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지경입니다.

  • 13.07.11 18:41

    >>이 근거 앞에서 다른 논의를 더 한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지경입니다

    ***청담사 유물과 최치원의 청담사 기록 이야기가 부아악과 일치한다고 하여 부아악이라는 아이를 업고있는 형상의 바위를 발견하였다고 볼 수 는 없습니다.부아악을 확인해보려고 하는 이유는 백제 건국의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대방고지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주변 여건들이 너무도 상이하니 그럼 특징적으로 제시한 부아악이라는 형상을 가진 산이나 바위라도 확인할수 있을까 하여 궁여지책으로 추적해 본것인데 이를 미주가효님께서는 이상하게 보인다 하시니 의외입니다.위에 올린 《신당서 》<백제전>을 참조하면 서울을 대방고지로 보기 어렵습니다.

  • 작성자 13.07.10 18:34

    대방고지를 말씀하시니 생각나는 것이 구태백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온조백제는 부아악은 북한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산이라 지명도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로 바뀌어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 한산지역은 백제때 한산이라 불렀고 475년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이곳을 점령하여 북한산 일명 남평양성이라고 지명을 바꿉니다.
    신라는 이곳을 차지하고 북한산주로 바꾸고.. 나중에 또 한주로 바꾸면서
    백제때의 한산과 비슷한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양주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한양은 한주와 양주를 일부분 합한 개념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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