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혜] 12.동행(同行)
"그래요? 그럼, 저희와 동행하는 건 어때요? 북경(北京)으로 갈 참이거든요."
주은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문도에게 제안을 해본다. 그러다가 주은비의 시선이 점
차 몽롱하게 젖어간다. 덤덤하게 술잔을 쥐고, 골똘히 고민하는 사문도의 신비한 표정
탓일까?
아무리 봐도 매력적인 소년이다. 중원 어느 곳을 샅샅이 뒤져봐도 이만한 소년은 찾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주은비의 머릿속을 누르고 있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방랑이 목적인데다, 천비나 화운에게도 명 제국의 수도(首都)
구경 정도는 시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레 사문도에게서 답변이 떨어지자, 주은비가 흠칫하며 생각에서 깨어난다. 그리
고 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더니 억지 웃음을 짓는다.
"아... 새, 생각 잘 하셨어요. 고마워요..."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 사문도가 그를 못 알아챘을 리가 없다. 술잔에 국화주(菊花酒)
를 따라 마시고, 은근슬쩍 고소(苦笑)를 짓는다.
'정말, 이젠 신물이 나는군. 공주님께서 천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에 망정이지...'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하자, 사문도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주
은비에게 묻는다.
"북경까지는... 육로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 질문에 주은비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한다.
"꼭 정해진 건 아니에요. 육로로 가든, 수로로 가든, 해로로 가든... 상관은 없어요."
"그럼 수로가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주은비의 질문에, 사문도가 조향라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먹는다. 그리고 다시 국화
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잇는다.
"간단합니다. 육로로 가자니, 언제 습격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리할 것이고, 해로로
가자니 유능한 측량사가 필요하니 또 은자(銀子)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수로는요?"
"수로는 있는 길로 따라가기만 하면 될뿐더러, 수적(水賊)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따
끔한 맛을 보여주면 알아서 사라질 터이니 염려할 바는 아니잖습니까?"
간단명료하면서도 조리 있는 사문도의 답에, 주은비가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
로 되뇌인다.
'대영반 생각과 같구나... 대영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하지만 얼마 안 가 주은비의 안면에 난감한 빛이 떠오른다. 사문도가 그런 주은비의
안색을 보고 묻는다.
"뭔가... 염려되는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네. 다름이 아니라... 수로로 가자니, 배가 필요하잖아요."
"항주에 있는 관리에게 말해서 빌리면 되잖습니까?"
사문도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기에, 조금 의아한 표정이다.
"그, 그게... 3년 전에 조선(朝鮮)에서 끝난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로, 배라는 배는
모조리 쓸고 가 버리는 바람에..."
주은비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벌써 임진, 정유년의 전쟁이 끝난지도 3년이 넘었
는데, 관에 있는 배는 단 한 척도 없다니.
'탐관오리(貪官汚吏)들 탓이로군. 조정에서는 대체 뭘 했기에...'
주은비의 표정이 어둡게 물든 것을 보고, 사문도는 그걸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럼, 한 마디로 자금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 네."
말을 꺼내기가 미안했던지, 주은비가 말을 끝마치고 고개를 수그린다.
"뭐, 그럼 제 전표를 쓰면 되잖습니까?"
"저, 정말요?"
사문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안하자, 주은비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돈다.
"저는 무림인(武林人)이기 이전에 대명제국의 백성(百姓)입니다. 일개 백성이 황실(皇
室)을 돕겠다는데 이유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싱긋 웃으며, 사문도가 보따리에 손을 넣어 전표 30장을 꺼내어 주은비에게 건
네는 게 아닌가?
"이 정도라면, 배 한 척과 장비 정도는 살 수 있을 테지요."
"정말... 이래도..."
감격에 목이 메이는 듯, 주은비의 목소리가 떨려 온다.
"하하, 그럼 다음 얘기로 넘어 갑시다. 왜 항주에 계신 겁니까, 공주님?"
사문도가 곧바로 다음 화두(話頭)를 꺼낸다. 그러자 주은비가 기분을 가라앉히고, 명
랑한 목소리로 말문을 튼다.
"전 원래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라... 1년 전에 이곳 항주로 요양 차 내려왔어요. 그
때 호위대장으로 대영반께서 오신 거고요.
하지만 항주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의원의 도움으로 병이란 병은 몸에서 씻
은 듯 떨어지고, 체력도 붙게 됐어요. 그 때부터 대영반께 무공을 배워 오늘의 실력에
까지 도달하게 됐죠."
"잠깐만요, 공주님. 그때 공주님을 치료해 주신 그 의원의 성명과 인상착의를 알 수
있을까요?"
사문도가 주은비의 말을 끊고 묻는다. 주은비를 치료한 그 의원이 범상찮은 의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쉽게도, 대영반께서도 성명을 수 차례 여쭤 보셨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하셨어요
. 간단한 인상착의 정도야, 저도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 그럼, 그거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문도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다.
"음... 나이는 한 50 정도나 됐을까? 학창의(鶴 衣)를 입고 있었고, 청색 관건(關鍵)
을 쓰고 있었어요. 인상도 무척이나 따뜻했고요."
더 이상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듯, 주은비가 말을 끊는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 이을게요.
그러다가 한달 전, 누군가가 대영반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것도 교
묘한 방법으로 말에요.
몰래 뒷조사를 해 본 결과, 놀랍게도 만주(滿洲)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
치의 4남인 홍무극(洪武戟)이 대영반을 노리고 있단 걸 알아냈죠!"
"!!"
전에 상대했던 여진인에게 들은 말이 사실이란 것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란 게 확실시되자, 사문도의 안색이 어둡게 물든다.
"제가 최근 상대했던 자... 분명 여진인이었는데, 그놈도 그럼 홍무극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네. 누르하치에겐 '팔기군(八旗軍)'이란 정예부대가 있어요. 그 팔기군의 부제독이
바로 사 소협께서 상대한 자로, 종인황(宗人凰)이라 해요."
"팔기군의 부제독이 여기 와 있다는 건... 팔기군의 일부가 역시..."
"... 네. 한 5백 정도..."
사문도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여진이 강성해졌다고는 허나, 설마 명 제국의 대영반
을 노릴 정도로 대담해졌으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영반께서 쓰러지신다면, 우리 대명제국의 존망은...?'
장거정(張居正) 사후, 명 제국이 이 정도의 혼란으로 그칠 수 있었던 것도 다 대영반
이세혁 한 사람의 힘이었다. 그런 이세혁이 쓰러진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 분노와
불안감으로 인해 주먹이 떨린 것이다.
"대영반 나리를 여기서 쓰러지도록 놔두시면 절대 안 됩니다! 장거정 수보(首輔) 사후
로 우리 대명제국을 위해 제일 혁혁한 공훈을 세운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대영반 나
리 아닙니까?"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 소협께 도움을 청한 것이고요."
사문도의 움켜쥔 주먹이 탁자 위에 떨어지자, '쾅' 하는 소리가 주막 내에 울려 퍼진
다. 그러자 흘끗흘끗 사문도를 흘겨보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사문도 쪽으로 시선을 고
정시킨다.
"아... 제가 잠시 흥분했나 봅니다. 무례가 됐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하고, 이번엔 병 채로 국화주를 들이마시는 사문도를 바라보는
주은비에게서 간단한 미소가 일어난다.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소년이, 얼마나 명 제국을,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후훗, 괜찮아요. 사 소협이 명 제국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된, 기분이 좋군
요."
주은비의 발언에, 그제야 사문도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진다.
"아닙니다, 공주님.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처사입니다."
"만백성(萬百姓)이 사 소협과 같은 생각이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예요."
약간 쓸쓸하게 보이는 주은비의 눈동자. 그러자 사문도가 주은비에게 술잔을 내밀며,
국화주를 권한다.
"공주님, 술 한 잔 어떠신지요?"
"아, 전 아직 술을 마실 줄 몰라요."
"하하, 괜찮습니다. 국화주는 도수도 별로 안 높을뿐더러, 술이란 건 한 잔 마신다고
해서 취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술이라면 정색을 하는 주은비기에, 결국 끝까지 사문도의 청을 물리치고 다음
화두를 꺼낸다.
"하아... 사실, 제가 전국의 수많은 곳을 내버려두고 이 곳 항주로 오게 된 이유가 있
는데, 들어 보실래요?"
생긋 웃고 있는 주은비를 보고 있는 사문도의 두 눈에서 한 가닥 파문이 일어난다.
"항주에... 오신 이유가 따로 있다고요?"
"네. 들어 보세요.
사실, 제 아버님 되시는 폐하께서 무척이나 아끼셨던 여동생이란 분이 항주 출신의 한
무림인에게 시집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그 여동생과 연락이 끊긴지 10년이 넘었는데, 항주에 가서 요양도 해볼 김에, 제
고모님의 행방도 알아볼까 해서 이리로 오게 된 거예요."
"폐하께... 여동생이 계셨습니까?"
사문도는 전혀 몰랐다는 듯한 눈초리로 묻는다.
"모르셨나 보군요. 부벽(富璧)... 부벽공주(富璧公主)라고 부르셨다고 하셨는데, 정말
모르세요?"
사문도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 부벽공주란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모
친(母親)의 칭호란 사실을 말이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자신도 자세히 모르고 있던 주채연(朱綵姸)의 신분이 밝혀질 수 있는 순간, 누군가가
이 주막을 포위했다는 걸 사문도가 직감으로 느낀다.
"잠깐만요! 누군가가 여길 포위했습니다."
사문도가 몸을 일으키고 정신을 모아 포위 인원의 수를 세어본다.
'더럽게도 많군. 적어도 300 정도?'
"누가, 여기를 포위했다고요?"
"예. 하지만 여진과는 느낌이 다르니, 십중팔구는 절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상대 숫자는... 얼마나 되죠?"
"대략 300 정도입니다."
주막 한구석의 유리창이 깨지는 걸 시작으로, 연달아 유리창이 박살난다. 그리고 약 3
0명 정도의 인파가 사문도가 있는 쪽으로 전력으로 달려온다.
"공주님, 제가 살수(殺手)를 쓰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사문도가 보따리에 넣어둔 검을 뽑는다. 그리고 달려오는 인파를 얼
음장만큼이나 차가운 눈길로 노려본다.
2초도 지나지 않아, 이들이 사문도와 주은비를 둥글게 포위한다.
"뭐야, 네놈들은?"
차가운 눈길로 먼저 사문도가 묻는다.
"다른 말 말고, 곱게만 죽어다오!"
그들은 5인 1조가 되어, 한꺼번에 달려든다.
'5인 1조... 게다가, 이 검진(劍陳)이라면, 안 봐도 뻔해!'
귀문살혼진(鬼門殺魂陳). 다섯 명이 다섯 방위를 점거해 중앙의 적을 몰아 죽이는 검
진으로, 귀혼당의 독문진(獨門陳)이다.
"깨끗하게 쓸어 주마. 혈영검강(血影劍强)!!"
그저 빛이 한 번 번쩍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문도를 포위하고 있는 복면인들은, 그걸
로 끝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허물어진다.
비록 고통 없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결코 깨끗하게 당한 것은 아니었다. 가슴
팍이 예리하게 베인 채, 핏줄기를 뿜으며 무너져갔다.
"포위하라! 수적으로 우리가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1대 300. 제아무리 고독랑이라 할 지라도 홀몸으로 300이나 되는 인원을 상대할 순 없
을 거란 희망에, 그들은 불나방처럼 모여든다.
"어리석은 놈들. 네놈들 정도가 300이라면, 안 봐도 뻔하잖아!"
벌써 40여명을 쓰러트린 사문도가 코웃음을 치며 주막 지붕을 뚫어버리고 공중으로 도
약한다.
"쫓아라! 놈을 벌써 지친 게 틀림없다!"
250여명의 인파가 삽시간에 주막 밖의 벌판으로 몰린다. 그 바람에, 세밀하게 쳐져 있
던 검진이 흐트러진다.
'저놈의 목만 있으면, 일계급 특진은 따 놓은 당상이다! 놓치지 말자!'
모두들, 같은 생각으로 이렇게 사문도에게 덤비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 뿐
이었다. 처참한 죽음.
"내가 노린 게 바로 이거였다고. 깡그리 쓸어 주마!"
사문도는 귀혼당 무사들과 4장(丈) 밖 거리에서 검을 넓게 쥐고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잘 다듬어진 한 자루 검인 것 같이 예기가 솟구친다.
"파천검강(破天劍强)!!"
하늘마저 쪼개 버린다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문도 자신이 창안해 낸 최고의 검강(劍
强). 그게 또다시 이곳에서 펼쳐진다.
예전 백천기(白天氣), 마천룡(馬天龍)과의 결전에서 썼던 파천검강은 단 2갑자(甲子)
만 사용했지만, 이번 파천검강은 사용한 내공이나, 예리함의 정도나 예전과 비교할 수
도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바보놈, 이 정도는 사뿐하게 막을 수 있을..."
다섯 무사가 파천검강을 제지하려 달려든다. 허나 그게 마지막이 될 줄, 그들 중에서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이 검강에 검을 들이밀기가 무섭게, 검과 함께 허리부터 반으로
갈라진다.
"평범한 기술이 아냐... 피, 피해랏!"
하지만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검강을, 이미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들이 피할 수 있는 확률은 채 1할도 되지 않았다.
"크윽..."
절대다수(絶對多數)가, 비명은커녕 신음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저승길로 떠난다.
멀리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장백경(長白鏡)의 수하가 이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홀로 중얼거린다.
"저, 저게... 인간이... 쓸 수 있는 기술이란 말인가..."
이미 40여명이 주막 내에서 비명횡사(非命橫死)했고, 이번엔 그나마 남아 있던 250여
명의 인원도 거의 전멸되어, 지금 남아 있는 인원은 겨우 10여명 남짓이다.
"으... 으으..."
"괴, 괴물이다..."
이들이 뭐라고 말하건 상관없이, 사문도는 변함 없이 얼음장같은 눈길로 살아남은 이
들을 노려본다.
"귀혼당 무사(武士)님들께서... 이 내게 무슨 볼일이신가?"
사문도의 말에, 이들이 하나같이 벌벌 떨며 줄행랑을 친다.
"도, 도망치자!"
"튀어!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이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사문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목숨이 아까웠더라면, 애초에 날 건들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도망친다고 내가
살려줄 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그들을 향해 사문도가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그와 동시에, 이를 바라보고 있던 주은
비의 눈동자에서 사문도의 모습이 휑하니 사라진다.
"...!!"
두 눈을 비벼 다시 앞을 바라보지만, 분명 사문도는 없다. 그때, 저만치 앞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온다.
"크아아악!!"
한 명의 비명소리가 아니라, 여러 명의 비명소리다. 그 소리에, 주은비가 움찔 놀라
그리로 고개를 돌린다.
"... 윽..."
10여명의 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목이 붙어있던 자리에서는 핏줄기가 온천수처
럼 솟아오르고 있다. 차마 못 볼 장면을 보고 만 주은비가, 눈을 질끈 감는다.
사문도의 얼굴은 붉은 선혈(鮮血)로 젖어 있다. 300명 정도를 단 열 차례도 안 되는
공격으로 몰살시켰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으으... 으으..."
단 한 명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죽은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사문도가 그 차가운 눈길로
그 무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왜 내가 너만 살려뒀는지 알고 있겠지?"
사문도가 이 무사를 살려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 무사가 다른 무사들을 이끌
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장백경에게 하나쯤은 보내야 자신의 저력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모, 목숨만... 목숨만은... 헉...!"
어느새, 사문도의 너덜너덜한 검이 그 무사의 목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피가 흘러내
리는 손으로, 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사문도가 묻는다.
"내 물음에 잘만 대답하면 살려줄 의향은 있다. 어때?"
선심 쓰듯 대답하는 어투지만, 그 무사에게는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릴 리가 없다.
"마, 말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좋아. 그럼 묻겠다. 왜 장백경이 내 목숨을 노린 것이냐?"
"주, 중원무성주(中原武城主)의 명령으로..."
"독고천(獨孤天)이...?"
사문도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짐과 동시에, 검을 쥔 손이 떨린다.
'내 정체를 눈치챘을 리는 없는데... 왜 내 목숨을 노리는 거지...?'
"내 목숨을 노린 이유를, 알고 있느냐?"
"자, 장차... 사파 연합체를 만들어, 무림을 혼란시킬지도 모른다고... 당주(黨主)님
께 들었..."
"가 봐라."
"... 예?"
사문도의 말이 믿기지가 않는 듯, 그 무사가 되묻는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가보라고."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은 듯, 사문도가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한번 탁 털고 검집에
꽂으며 돌아선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그 무사의 말을 무시하며 주막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문도의 얼굴은 결코 밝지 못하
다. 아니, 밝지 못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독고천... 난 2대 천마궁주(天魔宮主)가 되어 네놈의 중원무성을... 정파를, 박살을
내 줄 테다!'
이를 뿌드득 갈며 북경(北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문도의 두 눈에, 독기(毒氣)가
잔뜩 어려있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다.
사문도는 한동안 북경을 주시하다가, 다시 주막을 향해 걷는다. 주은비가 자신을 기다
리고 있을 거라는 염려 때문이다.
사문도와 주은비는 아수라장이 된 주막을 빠져나와, 강천비와 모용화운에게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때, 사문도가 틈을 내 주은비에게 묻는다.
"다 보셨겠지요."
무슨 뜻인지 알기에, 주은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대꾸한다.
"... 부인(否認)하지 않겠어요."
전신이 피에 흠뻑 젖어, 마치 혈인(血人)같던 사문도를 바라보고 있는 주은비의 눈이
떨리고 있다. 너무 잔인한 그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공주님, 무림(武林)이란 이런 곳입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그 자에게 당하는 곳
... 그곳이 무림입니다."
"사 소협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아녜요. 다만... 너무 심하게 한 건 아닌가
싶어서 이러는 거 뿐이에요."
하지만 주은비의 뇌리에서는, 핏줄기를 뿜으며 쓰러지던 무림인들을... 그들을 아무렇
지 않게 학살(虐殺)하던 사문도의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 이럴 수밖에 없었던 절, 용서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문도를, 주은비는 끝까지 바라보지 못한다. 결국 사문
도가 한숨을 내쉬더니, 처음과 달리 약간 슬픈 눈으로 저 멀리 숙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사실... 절 살해하려 했던 무림인(武林人)의 두목이란 자... 제 부모님의 원수와 다
름없는 자입니다."
그제야 주은비의 시선이 사문도의 얼굴을 향한다.
"자세히 설명드릴 순 없습니다만... 다섯 살 때, 모친을 눈앞에서 잃을 수밖에 없었습
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부친마저도... 저들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그들에게 이토록 악랄하게 굴었는지를..."
말을 끝마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에, 주은비는 왠지 조금 미안
한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자초지종(自初至終)도 모른 채 자신은 잔혹했니 어
쨌니 하고 트집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죄, 죄송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닙니다... 비록 원수 놈의 졸개들이라곤 하지만, 인명을 이렇게나 해친 이상... 저
는 죽어도 좋은 곳에 가긴 힘들 겁니다."
사문도가 허탈한 표정으로,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발걸음이 지금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적어도 주은비에게는 그랬다.
사문도가 숙소에 도착하니, 모용화운이 짐을 다 싸놓고 사문도를 기다리고 있다.
"아, 주군 오셨군요?"
우두커니 앉아있던 모용화운이 사문도를 반긴다. 그러다 주은비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 묻는다.
"어머... 주 소저께서는 어쩐 일로?"
"아니, 모용 소저께서는 분명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아니셨던가요?"
주은비 역시 의외라는 눈이다. 그리고 주은비의 그 질문에, 모용화운 대신 사문도가
짧게 대답한다.
"지금은 저와 동업 중입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주은비의 궁금함을 애초에 날려 버리려는 듯, 사문도가 말을 끊어버린다.
'주군...'
사문도의 말에, 모용화운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리고 곧이어 사문도의
음성이 이어진다.
"인사나 해 두시오. 앞으로 북경까지 동행하게 될 분이니 말이오."
"북경... 까지요?"
비록 모용화운이 중원인(中原人)은 아니지만, 북경이 명 제국(明帝國) 수도라는 사실
은 알고 있었다. 새외(塞外)에서도 북경은 사람들의 경외 대상이었던 것이다.
"주군, 그럼... 북경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이세요?"
"수로(水路). 대운하(大運河)를 타고 갈 생각이오. 그게 가장 빠르고 편하니까."
"그렇군요."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주은비가 득달같이 사문도에게 묻는다.
"저기, 강 소협(小俠)은 어디에...?"
주은비의 의중을 알아챈 사문도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그 마소가 무슨 뜻인지 알아
챘는지, 주은비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주홍색(朱紅色)으로 물든다.
"안에 있습니다만, 공주님께서 오셨는데 안 나오는 걸 보니 자고 있겠군요."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괜찮은가요?"
"물론입니다. 따라 오십시오."
주은비가 숙소 문을 연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좀 있다가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사문도의 말에, 주은비가 신을 벗기 무섭게 안으로 달음질을 친다.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되는데... 없소?"
"물론 있죠. 주 소저가 공주님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 당금(當今) 황제인 만력제(萬曆帝) 폐하의 차녀(次女)요. 표연공주(漂燕
公主)라 불리기도 하고..."
의혹으로 가득 차 있던 모용화운의 두 눈이, 한순간에 경악으로 물든다.
"중원에서는 공주에게도 무예를 가르치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정도의 실력
이..."
"후후, 그게 표연공주님의 개성이오. 일국의 공주임에도, 무(武)를 좋아하시는 게 말
이오."
사문도 역시 신을 벗어 놓고 숙소로 들어간다. 모용화운은 아직 상황이해가 잘 안 되
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만 할 뿐이다.
사문도가 강천비의 자리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곤히 자고 있는 강천비와, 다소곳
이 앉아 그런 강천비를 바라보고 있는 주은비를 보게 된다.
"안 깨우고 뭐 하십니까?"
"자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라... 깨울 수가 없어요."
노곤히 자고 있는 강천비의 모습이, 사문도의 두 눈에 들어온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
보던 사문도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 털썩 앉아 강천비의 이마를 한 번 툭 친다.
"천비, 일어나라."
사문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천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이 번쩍 뜨
인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문도를 보고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소리친다.
"주, 주... 주군?!"
"천비, 이런 대낮에 늘어져라 잠이나 퍼 자고 있다니... 그러고도 네가 내 수하냐?"
"아, 아닙니다. 전 단지 몸이 아파서..."
"아파서가 아니라, 나른해서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고 더 횡설수설하던 강천비가, 사문도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말을 잃는다.
"말이 너무 길었다. 인사 드려라."
"... 예?"
잠이 덜 깼던 터라, 강천비의 시야에는 사문도 외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듯하다. 덕
택에 사문도 뒤에 있는 주은비를 못 본 것이다.
"... 누구시더라?"
두 눈을 비비며 눈에 힘을 주려던 찰나, 강천비의 머리에 불이 붙는다.
"... 끄악!!"
어느새 사문도의 요대(腰帶)에 매어져 있던 검(劍)이 강천비의 머리를 가격한 것이다.
그 화끈하면서도 짜릿한 통증에, 강천비가 비명을 내지른다.
"바보놈, 아직 잠이 덜 깼구만. 다시 눈을 뜨고 잘 봐라!!"
평소답지 않게 추상같은 사문도의 목소리에, 강천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주은
비를 바라본다.
강천비의 태도가 우스꽝스러웠는지, 주은비는 입을 막고 깔깔 웃고 있다.
"... 핫!! 고, 고, 공주님!!??"
인사를 할까, 절을 할까 엉거주춤하고 있는 강천비의 태도에, 사문도는 현기증을 느낀
다. 주은비는 아예 자지러질 듯 웃어댄다.
"간단하게 인사나 해라, 인사나!"
사문도의 답답한 음성에, 그제야 강천비가 정신을 수습하고 주은비에게 인사를 올린다
.
"무, 무림말학(武林末學) 강천비가 대명제국(大明帝國)의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하지만 어정쩡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인사에, 사문도가 혀를 찬다.
'
"쯧... 관둬라 관둬! 두 번만 더 했다가는, 공주님 쓰러지시겠네 이거."
사문도가 주은비 곁에 서서 강천비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주은
비에게 속삭인다.
"자초지종 설명은 저보다 공주님께서 더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전 이만 물
러나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사 소협."
사문도가 정중하게 포권하고 숙소 밖으로 잔걸음을 재촉한다. 사문도가 빠져나갔으니,
남은 사람은 강천비와 주은비, 단 둘 뿐이다.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강 소협..."
비록 짧은 한마디지만, 이 말에 강천비는 구름 위에 앉아있는 듯한 황홀함에 휩싸인다
.
"아... 저, 저도..."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강천비가 실실 웃으며 주은비를 바라본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공주님께서 내 앞에, 그것도 이렇게 즐거운 얼굴로 서 계시다
니...'
"몸은 괜찮으신 거죠?"
"예. 이젠 움직이는데도 별 지장 없고..."
주은비의 상냥한 미소에 가려져 있던 일말의 불안감이, 강천비의 말에 의해 깨끗이 제
거된다.
"공주님, 그런데 방금 전 주군께서 말씀하셨던 자초지종이란 건...?"
"아, 나가면서 설명해 드릴 게요. 괜찮죠?"
"예, 물론입니다."
주은비가 먼저 걷는다. 강천비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른다.
이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현명한 이세혁이나 사문도는 어렴풋이 짐
작하고 있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이 둘의 만남으로, 강천비의 무공수위가 모용화운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하게 될 것을
말이다. 그리고 둘의 사이가 더더욱 가까워질 것을...
주은비가 설명해 준 자초지종을 듣고, 강천비는 속으로 몇 번이나 환호성을 질렀는지
모른다.
'하핫... 여기서 북경까지라면 거리가 꽤 될 텐데, 거기까지 공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
니....!!'
강천비가 이렇게 싱글거리고 있을 때, 이세혁과 모용화운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모용
화운이 이세혁을 바라보는 눈길은, 거의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눈길을 받아치
고 있는 이세혁의 얼굴 역시 볼 만했다. 덕택에 사문도와 주은비는 이들의 신경전을
저지하느라 혼이 났다.
어쨌거나 후일 천마궁의 핵심이 될 이들과, 황실 세력의 핵심이 뭉쳤다. 여진의 야욕
을 저지하고, 무사히 북경으로 귀환토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허허... 이 정도면, 북경까지 올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거요. 사 대인(大人) 생각
은 어떻소?"
"같습니다. 북경까지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이지만, 중간중간 기항해서 물자 조달을
제대로 한다면 무리는 없을 겁니다."
이세혁이 장만해 온 소형 군선(軍船)을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입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난다.
"역시, 문제라면 여진 놈들을 얼마나 수월하게 막을 수 있느냐 정도일 테지만 말입니
다."
이세혁의 뒤에 서 있던 황보성(皇甫省)이 두 사람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그에 사문
도가 한숨을 내쉬며 대꾸한다.
"하아... 허나 대영반 나리나 공주님께서는, 저희 일행이 철통같이 방비할 테니 황보
대협(大俠)께서는 염려 놓아 두십시오."
"하하하!! 한 번 믿어 보겠습니다. 사 대인의 놀라운 무공 수위를 말입니다."
황보성이 웃어 넘기지만, 이 셋 모두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란 건 쉽사리 짐작하고 있
었다. 황궁 무사는 겨우 100명, 그에 비해 홍무극(洪武戟)이 지휘하고 있는 팔기군(八
旗軍)의 숫자는 500. 다섯 배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겁니다, 두 분...
비록 저희 실력이 모자라지만, 있는 힘껏 대명제국의 영화와 안녕(安寧)을 위해... 최
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사문도의 굳은 결의에, 이세혁은 무한한 신뢰감을 느끼며, 장난스런 얼굴로, 오른손을
사문도에게 내민다.
"사 대인 덕택에 이 손을 다쳐 검을 쥐기에 불편하니, 알아서 지켜 주오. 헛헛!!"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밤자리까지 확실히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거 참 감당 안 되는 말씀이오, 헛헛. 그 정도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소이다."
황보성과 이세혁은 대소를 터트린다. 그러다가 이세혁의 사문도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보고는, 문득 한 가지 깨닫게 된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웃음조차 마음대로 터트리지 않는단 말인가.'
쓸쓸한 눈은 걸맞지 않은 얼굴을 가졌음에도 불과하고, 사문도의 눈은 언제나 쓸쓸함
에 잠겨 있다. 간혹 웃을 때도, 눈웃음을 짓거나 입가에 걸리는 잔잔한 미소가 다다.
'하긴, 저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난다면 어느 여인이 버티겠는가.'
현재 무표정인데도 불과하고 사문도가 지나가는 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그래
서 일부러 웃음을 자제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세혁이 지니고 있는 의혹이 조금이나
마 줄어든다.
현재 사문도는 차례차례 군선에 오르고 있는 금의위(錦衣衛) 무사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세혁이 자신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 채...
소년답지 않게 긴 속눈썹과 고운 이목구비는 언제나 이세혁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쯧쯧... 여복(女服)을 입히고 화장을 시킨다면, 누가 저 소년을 대장부로 알리오.'
사문도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세혁이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찬다. 그에 황보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나리, 왜 그러십니까?"
"... 아닐세. 별일 아니니, 신경 꺼 주게."
이세혁의 싱거운 대꾸에, 황보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군선으로 발을 옮긴다.
현재 있는 금의위 무사 100인 중, 가장 무공수위가 높은 인물로써 이세혁의 측근이며
후일 금의위를 이끌 사람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이세혁의 눈이 황보성을 바라보다가, 다시 사문도에게로 옮겨간다.
'허허... 내 비록 사 대인 같은 보석(寶石)을 곁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사히 북
경까지 갈 수 있을는지...'
시린 듯한 푸른 하늘도, 이런 이세혁의 마음을 알아난 주는 듯하다. 복잡하고도 혼란
한 마음을 말이다.
어느덧 술시(戌時)가 지났다. 짐을 옮기느라 분주하던 무사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술잔을 기울이며 흥얼거리는 이, 그저 묵묵히 음식만 먹어대는 이 등, 수많은 사람들
이 이뤄내는 모습은 말로 표현키 힘들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정겹다.
"금의위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좀 뜻밖입니다, 대영반 나리."
금의위 정 중앙에서 이세혁과 담화를 나누던 사문도의 입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말이다
.
"금의위도 인간이오, 사 대인. 인간인 이상, 금의위도 떠들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후훗... 그렇군요."
이세혁과 함께 백건주를 들이키던 사문도가 옷소매로 입을 문지르곤, 금의위 무사들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파 최정예(最精銳) 부대, 흑사대(黑死隊)와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 사문도를 자극하고 있다.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구나... 이 광경을 보니.'
곽경환(郭更換), 뇌명(雷明), 태사현(太師炫), 수라쌍성(修羅雙星), 그리고 부친 틈바
구니에서 흑사대 부사들이 흥청대는 것을 보고자란 탓일까. 술에 취해선지, 금의위 무
사들 때문인지 사문도는 간만에 추억에 잠긴다. 하지만 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깐이다.
곧바로 귓전을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 탓이다.
"어머, 주군(主君). 이런 곳에서 한 잔 하고 계셨어요?"
모용화운이 술병을 쥐고 하늘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소... 화운도 여기서 한잔 할 거요?"
햇빛 탓일까? 술병을 쥐고 있는 모용화운에게서 취기가 물씬 느껴진다.
"후훗. 뭐, 그러죠. 그 전에..."
잔잔한 눈길로 사문도에게 눈웃음을 치던 모용화운이 이세혁을 바라본다.
"이 영감님과 술로 승부를 내겠어요. 그 다음에 같이 한 잔 하자고요."
"좋을 대로 하시구려."
모용화운이 술병을 한가득 가지러 간 사이, 사문도가 씁쓸한 표정으로 이세혁에게 속
삭인다.
"찍히셨군요, 대영반 나리. 조심하십시오. 화운은 비록 여인(女人)이지만, 주량은 저
도 감당해낼 수 없습니다."
"말술이구려. 헛헛, 그거 잘 된 일이로고. 무예로 눌렀듯, 술 역시 내가 자신 있어 하
는 거요, 사 대인."
이세혁은 즐겁다는 듯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트리지만, 사문도는 걱정된다는 얼굴이
다.
"북해(北海) 사람들의 주량이 얼마나 센지, 몸소 느끼게 되실 겁니다."
사문도의 말이 끝나자, 모용화운이 술병 한 상자를 들고 나타난다. 적어도 60병은 됨
직한 양에, 금의위 무사들의 입이 쩍 벌어진다.
"화운, 너무 많이 갖고 온 것 아니오?"
사문도가 걱정스레 넌지시 묻지만, 모용화운은 이 정도는 같잖다는 얼굴이다.
"아직 모르시는 건가요? 제 주량이 말술이란 거 말예요. 호홋!"
"모르는 게 아니라, 몸에 좋은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이 들어서 좋을 건 없잖소."
"흥, 두고 보세요. 저 영감님께 술로는 이기고 말 테니!"
미량의 종이로 잘 봉해진 술병 머리의 종이를 뽑고, 모용화운이 이세혁에게 술병을 내
민다.
"받으세요, 영감님. 북해에서 찌들대로 찌든 제 주량을 보여드리죠."
"허허, 기대해 보겠소이다."
이세혁이 술병을 받아 쥐기가 무섭게, 한 무사의 목소리가 갑판 우에 쩌렁쩌렁 울려
펴진다.
"대영반 나리와 모용 소저께서 술 시합을 하신댄다!"
그 말에 금의위 무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모용화운과 이세혁 주위를 둥글게 에워싼다
.
"나리, 건투를 빕니다요. 하하핫!"
"모용 소저도 힘내십시오!"
삽시간에 무사들의 편이 나눠진다. 이세혁 편과 모용화운 편으로.
이세혁 편은 거의 다가 중년인으로, 의리파다. 반대로 모용화운 편은 혈기왕성(血氣旺
盛)하고 패기가 넘치는 청년들이다.
"고마워요, 금의위 여러분들!!"
모용화운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자, 그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은 모용화운의
빼어난 용모와 당당한 태도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술고래는 말로 하지 않소, 소저. 그저 주량으로 보여줄 뿐이지."
말을 끝마친 이세혁이 부리나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간다. 모용화운 역시 질세라 술병
의 술을 입으로 들이킨다.
강천비, 주은비, 황보성 이 셋은 일찌감치 금의위 무사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천비와 주은비, 이 둘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황보성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이세혁의 부탁으로, 이 둘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와... 석양이 정말 멋집니다."
"호호, 강 소협 눈에도 그렇게 보이세요?"
"네. 바다를 끼고 있어선지, 호북성(湖北省) 쪽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군요."
비록 가까이 있지는 않지만, 황보성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 두 사람을 바라본다. 강
천비가 이리저리 몸동작을 섞어가며 하는 말에, 주은비는 간간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강천비라고 했지...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
황보성은 결코 말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귀에 들리는 강천비의 화법(
話法)은, 주은비를 웃음바다로 몰아넣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느낀 것이다.
'얼굴도 그런 대로 반반한 편이고, 항주(杭州) 일대에서도 꽤나 유명하던 장유승(長有
勝)을 꺾은 데다가 말솜씨와 배짱을 봐서, 공주마마께서 호감을 가지실 만도 하겠군.'
하지만 자신이 평가하기에, 강천비는 아직 자신보다 한 수 아래다. 도(刀)끝의 예리함
으로 보나, 도를 움직일 때의 몸놀림 등을 보나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심드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황보성의 귀에, 한 줄기 음성이 내
리꽂힌다.
"대영반 나리와 모용 소저께서 술 시합을 하신댄다!"
그 순간 황보성의 두 눈이 빛을 발한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금의위 동
료들이 모용화운과 이세혁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모용 소저랑 대영반께서...? 모용 소저께서 이길 수 있을까?'
모용화운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황보성이기에, 모용화운이 걱정되는 듯하다. 그것도
다 이세혁의 주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 정말...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은비와 동료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황보성이 머리를 감싸쥐려던 찰나,
"황보 대협(大俠)!! 같이 가 봐요, 우리."
강천비와 주은비가 소리를 들었는지, 발걸음을 금의위 정중앙으로 옮기고 있다.
"예, 공주마마!"
겉으로 내색은 않고 있지만, 지금 현재 황보성은 만세라도 지르고 싶었다.
"강 소협, 두 분 중에서 누가 이기실 것 같아요?"
"글쎄요. 대영반 나리께서 말술이 아닌 이상, 모용 누님께서 이기실 걸요?"
"그럼 비슷하겠는데요?"
강천비가 모용화운의 편을 들자, 황보성이 혀를 찬다.
'쯧, 모용 소저께서 아무리 주랴이 강하다고 한들... 대영반 나리를 당해낼까?'
모용화운이 은근슬쩍 걱정되는 듯, 황보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더 빨리 갑판
정중앙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해...!!"
벌써 두 사람의 부근엔 술병이 스무 개 가량 굴러다니고 있다. 1인당 최소 열 병은 비
운 것이다. 그것도, 술독이 세기로 유명한 백건주(白乾酒)로 말이다.
"크으... 맛 좋고!"
모용화운은 입에서 술병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들어 소리친다.
"한 병 더!"
쉬지도 않고 술을 들이키는 모용화운의 모습에, 금의위 무사들의 눈빛은 가히 경이롭
기까지 하다.
"저, 정말 대단해!"
"나리께서 깨지시는 거 아냐?"
금의위 무사들이 여기저기서 쑥덕거리자, 이세혁이 병을 탁 내려놓으며 덤덤한 눈길로
말한다.
"허허, 젊은 소저께서 주량이 상상을 초월하는군."
그 말에 모용화운이 씩 웃으며 묻는다.
"호호, 왜요? 벌써 항복인가요?"
"술병이 너무 작아 성에 차지 않아서 그렇소이다. 더 큰 병은 없소?"
넉살좋은 이세혁의 대꾸에, 금의위 무사들이 대소(大笑)를 터트린다.
"으하하핫! 그래야 대영반 나리시지, 암!!"
어느샌가 무사들 사이에 섞여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강천비가 사문도에게 속삭인다.
"정말... 두 사람 다 대단한 주량인데요, 주군."
"허나 내가 보기엔, 진정한 승부는 지금부터다. 눈을 봐라,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
고 있잖아."
사문도의 말대로다. 이세혁과 모용화운 둘 다 얼굴만 약간 붉게 물들었을 뿐, 움직임
이나 목소리 등을 봐서는 전혀 취한 티가 나지 않는다.
'대영반 나리께서도 대단한 술고래시군. 화운이 당해내기 힘들 정도라니...'
일반인이라면 백건주 정도의 술이라면 다섯 병을 마시기도 전에 취해버린다. 그런데
이 둘은 그 백건주를 마치 물 마시듯 마시고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술고래들인가?
갑판 위에서의 술잔치는 이렇게 흘러간다. 흥겹게... 그리고 쾌활하게 말이다.
사문도 일행들은 이렇게 흥청거리고 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차 올라 있는 이도 있다
.
"이... 이런 젠장...!!"
이를 뿌드득 갈며, 움켜쥐고 있는 주먹을 떨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귀객(鬼客) 장백
경이다.
'300이나 되는 인원이 펼친 우리 귀문살혼진(鬼門殺魂陳)을 단박에 격파하고, 단 1각
도 되지 않아 한 명을 빼고 전멸시키다니...!'
귀혼당에서도 나름대로 실력이 뛰어난 무사들이었지만, 사문도는 그들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 없애버렸다. 무사들을 보낸지 채 1각도 되지 않아 한 명 빼고 전멸(全滅)당하
자, 장백경은 황급히 추가병력을 철수시켰다.
황급히 독고천(獨孤天)에게 서찰을 띄우고, 행여나 사문도가 습격해올까 만반의 준비
를 해놓고 있는 장백경이다.
'낭패로다... 독고천과 우리 귀혼당은, 가히 살인적인 놈을 적으로 만들고 말았어...'
중원무림 제 1의 세력인 중원무성주 독고천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장백경은 독고천
에게 그다지 인정받고 있는 인물도 아니고, 귀혼당에 소속된 무사의 숫자도 3천이 채
안 되는지라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파를 등지고 정파에 붙었는데... 이제 와서 그깟 애송이놈에게
이 궁(宮)과 직위를 날려버릴 순 없어!'
장백경은, 자신이 천마궁의 혈겁 이후 천마궁에 들어앉은 탓에 자신이 바로 오늘 적으
로 인정한 사문도에게 5체참시(五體斬屍)를 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고
독랑(孤獨郞) 사문도가, 전대 천마궁주 사무종(謝武宗)의 외아들이란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술 마시기 대결도 어느덧 천천히 승부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둘 다 스물 세 병이나 비웠다. 가히 경이적인 기록이다. 약관(弱冠)도 채 되지 않았는
데도 이 정도를 마신 여인(女人)이나, 나이 예순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정도까지 마실
수 있는 늙은이나 대단한 사람이다.
"모용 소저, 조금만 더 힘내시오!"
"대영반(大領班) 나리, 황실의 술고래라 불리시는 이유를 보여 주십시오!"
둘 다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눈이 풀려 몽롱하다. 술병을 쥐고 있는 손도 비틀거리고
있다.
탁! 모용화운이 스물 네 번째 병을 내려놓으며 눈웃음을 친다. 술에 절은 탓에 분명하
지는 않지만, 모용화운은 분명 웃고 있다.
"한 병 더 들어갔다!"
"우오, 모용 소저 만세!!"
금의위 무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강천비는 팔이 떨어져라 박수를 쳐댄다.
"후훗, 영감님... 한 병 더 하실 건가요...?"
모용화운의 물음에, 이세혁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자신 없으시면 기권하셔야죠... 안 그런가요...?"
취중에도 이세혁의 침착한 성격은 안 변하는 듯, 이세혁이 깊은 고민에 빠진다.
'정말 난감하군. 마시자니 못 버티겠고, 기권하지니 날 믿어준 이들에게 미안하고...'
술병을 쥐고 있는 이세혁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이를 본 주은비가 정말 대단하다는
듯 살짝 웃더니, 이세혁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대영반, 기권하세요. 대영반께서는 최선을 다 하셨잖아요?
기권하셔도 아무도 원망 따위는 안 해요. 저라면 대영반의 끈질긴 집념에 박수라도 보
낼 것 같은데요?"
주은비의 조언에, 풀려있던 이세혁의 두 눈이 주은비를 향한다.
"... 공주마마께오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더니, 이세혁은 결국 기권선언을 하고 만다.
"기권하겠소, 모용 소저. 술 마시기에 대해서는, 깨끗이 졌다고 인정하겠소이다."
좀 아쉬운 듯한 목소리지만, 이세혁은 대장부(大丈夫)답게 깨끗이 물러난다.
"대, 대단한걸! 대영반 나리께서 진짜 깨지시다니...!!"
대영반 이세혁의 편을 들던 금의위 무사들이 술렁이고 있다. 그에 비해 모용화운의 지
지자들은 휘파람을 부르며 난동을 피운다.
이세혁이 비틀거리마 자신의 선실(船室)로 발걸음을 옮기자, 주은비와 홍보성이 얼른
뒤따라간다. 금의위 지휘자급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자, 사문도가 금의위 무사들의 중
앙에서 소리친다.
"자, 모두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내일 출항이니, 준비들 단단히 해 두
시고 말입니다!"
사문도의 권고에, 무사들이 한동안 술렁거리다가 서서히 흩어진다. 1각도 지나지 않아
갑판 위에는 단 세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미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두 눈에선 짙은 고독이 흐른다.
"주군, 그럼 저도 이만..."
강천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들어갈 의향을 밝히자, 사문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
며 말문을 튼다.
"... 푹 쉬어라. 화운 뒤처리는 내게 맡기고..."
"주군도 편히 쉬십시오."
강천비가 조용히 사라지자, 사문도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는 모용화운에게 다
가간다.
"대단한 주량이오, 화운."
사문도가 술통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 병 채로 마시며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
모용화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문도를 바라본다.
"후훗... 술이라면 누구에게도 안 질 자신이 있으니까... 당연하죠..."
모용화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술병을 탁 내려놓는 사문도의 모습은 실로 여인의 움
직임인 양 부드럽고 섬세하기 그지없다.
"주군은... 손이 정말 곱군요... 사내 대장부라 여기기엔, 손이 너무 고와요..."
모용화운이 사문도의 희고 섬세한 손을 보며 감탄을 터트린다.
"사내가 손이 고우면 뭘 하겠소."
"칭찬으로 들어 두세요. 여인인 제가 봐도... 정말 고운 손이니까요... 후훗..."
사문도의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 허나 모용화운은 그 미소를 보지 못한다.
"주군... 하나만 여쭤봐도 괜찮겠죠...?"
"?"
취기(醉氣)어린 모용화운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궁금함에, 사문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화경(華景)이란 사람은... 어떤 분이죠...?"
'화경'이란 이름에 사문도의 두 눈이 가늘게 떨린다.
"그 이름을 어떻게...?"
"전에... 잠꼬대하실 때, 수없이 부르시던 이름이잖아요... 벌써 잊으셨나요...?"
모용화운이 사문도를 바라보는 눈길엔, 은근히 질투의 빛이 담겨 있다. 사문도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며 침묵을 지킨다.
"사랑하는... 분이죠...?"
모용화운의 질문에,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나... 그랬군요..."
예상하기 싫었던 사문도의 태도에, 모용화운의 두 눈이 문득 슬픈 빛을 띤다.
"궁금하군요... 주군이란 분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대체 어떤 여인일지..."
모용화운의 시선을 외면한 채, 허공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심정은 괴롭
기만 하다.
'화운, 그대마저도... 나란 인물의 올가미에 빠지고 만 것이오...? 하필 왜 나 같은
작자를...'
자리에서 일어서서 시리도록 푸른 달을 바라보는 사문도의 귀에, 잔잔한 모용화운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한 번 뵙고 싶어요. 주군께서 사랑하신다는... 그 여인을..."
모용화운이 소리 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비틀거린다. 그 바람에 모용화운의
고개가 자연스레 사문도의 품에 묻힌다.
"화운...!!"
사문도가 당황하며 모용화운을 부축해 주지만, 모용화운의 고개를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주군의 품은, 정말 따뜻하군요... 영원히 있고 싶을 정도로..."
"많이 취했나 보구려. 헛소리 그만 하고, 일어..."
한 번 더 모용화운을 부축해 주려던 사문도가, 문득 모용화운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낀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 까요... 어쩌다가... 제 신세가 이렇게 된 걸까
요..."
울고 있다. 모용화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에, 사문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 그리워요...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시절들이... 흑..."
오열(嗚咽)하는 모용화운을 볼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사문도는 오른손으로 모용화운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이번만 울고... 울지 마시오. 이번 한 번만 시원하게 울고..."
모용화운의 눈물이 사문도의 옷자락에 번지고 있다. 처량한 그 모습에, 사문도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게 하소연을 하며 오열한단 말인가.
이런 여인을 울린 여진 놈들은,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이가 생
기지 않도록...!!'
동병상련(同病相憐). 문득 이 4자 성어(四字成語)가 사문도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 그런데도 모용화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조차 없는 자신을 원망해 본다.
'용서해 주시오, 화운. 내겐... 내겐 이미 마음을 둔 사람이 있소.
당신은 이렇게 울고 있는데, 위로조차 할 수 없는 날... 용서해 주시오...'
첫댓글 즐감요 ~ ~ ~ ~ ~